나의 이야기

사연없는 사람은 없다.

아이루다 2017. 9. 12. 08:31

 

가끔 TV를 보다가 보면, 남다른 사연을 가진 분들의 이야기가 소개되곤 한다. 그때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경험하기 힘든 과거의 기억을 가진 분들이 자신의 사연을 털어 놓고 있으며, 그것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때로는 가슴이 아프게, 때로는 대견하게, 때로는 웃음이 나게 만든다.

 

그리고 그런 사연을 듣는 시청자들은 TV 사연의 주인공을 전혀 모르고앞으로도 알고 지낼 확률이 전혀 없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원래 알고 지냈던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그런 공감을 경험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TV 속에서 소개된 어떤 사연을 듣고 소소하게 돈을 기부하기도 한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원래 우리는 누구나 다들 사연 하나쯤은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것이 비록 방송에 나올 정도로 남다른 것이 아닐 것일 뿐, 그 어떤 사연도 없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인간이라면 갓 태어난 신생아를 제외하고는 다들 있을 것이다. 아니, 사실 막 태어난 신생아조차도 말을 할 수 있는 능력만 된다면 자신이 엄마 뱃속에서 지낸 10개월 동안의 사연을 털어 놓을지도 모른다.

 

자신은 족발을 별로 안 좋아하는데, 엄마가 자꾸 아이가 먹고 싶어 한다면서 족발을 계속 먹었다는 이야기를 불만 섞인 말투로 털어 놓을 수도 있다. 자신은 엄마 뱃속에 있을 때가 좋았는데, 억지로 나오게 되었다고 신세 한탄을 할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각자 자신만의 사연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면서 누군가의 사연을 알게 된다는 말이 가진 진짜 의미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TV속에서 나온 사연을 가진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청자들의 마음에서 찾아 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타인에 대한 이해를 의미한다. , 우리는 누구나 타인의 사연을 알게 될 떄, 그 사람에 대한 좀 더 깊은 이해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사연에 관해서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누군가의 사연을 안다는 것이 꼭 그 사람의 입을 통해서 듣거나, 글을 통해서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니란 점이다.

 

아이가 아파서 아이를 안은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엄마의 표정에서, 회사에서 명퇴를 당한 후 축 처진 어깨로 집으로 향하는 아빠의 모습에서, 다정하게 손을 잡고 걸어가는 늙은 노부부의 모습에서도 듣지 않고도, 읽지 않고도 그들의 숨겨진 사연들을 읽어낼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알게 된 사연들은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를 좀 더 이해하고 배려해주며 관대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해주는 큰 힘이 되어 준다.

 

이런 사연을 볼 수 있는 능력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 이 능력이 제대로 발휘된다면, 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따뜻하고 살만한 세상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렇지 못할까?

 

그 원인에는 슬픈 진실이 하나 숨겨져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은 서로의 사연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람에 따라서 보길 원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고, 볼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들도 있다.

 

왜 그럴까? 서로가 서로의 사연을 봐준다면, 이 세상은 좀 더 나아질 수 있는데도 왜 그럴까?

 

그 이유는 바로 타인의 사연을 안다는 것은, 그래서 타인을 좀 더 이해한다는 것에는 결국 자신이 좀 더 양보를 해야 하고, 손해를 봐야 한다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 TV속 사연을 가진 사람이 나오는 프로그램을 보고 돈을 기부하는 것은, 결국 돈을 손해 본 것이니까 말이다.

 

집 수리를 하러 온 사람의 사연을 이해하면 일을 더 힘들게 시키기가 힘들고, 하자에 대해서도 막 따지기가 힘들어진다. 자신의 아이가 밖에서 다른 아이에게 맞아서 상처를 입었을 때, 엄마가 없이 자라는 그 집 아이의 사연을 이해하게 되면, 자신의 아이가 입은 상처에 대해서 제대로 따지지도 못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누군가의 사연을 알고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양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런 양보가 바로 사회를 더욱 더 따뜻하게 만들어주긴 하지만, 결국 누군가의 손해를 불러오는 것이 된다.

 

그러니 사람들은 일부로 누군가의 사연을 무시하기도 하고, 그것이 너무 오랫동안 지속되다가 보니 이제는 아예 다른 사람들의 사정을 생각하고 고려해 줄 생각조차 않게 된다. , 완전히 무관심한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사실 누군가의 사연을 읽어내는 것은 꽤나 신경을 써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 사고 능력이 필요하고 또한 시간도 필요하다. 더군다나 그렇게 해서 다른 사람들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도 나아질 것도 별로 없다. 손해만 보기 때문이다.

 

현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상대를 인간이 아닌 어떤 역할이나 기능을 가진 존재로써 대할 때 훨씬 편하다. , 상담사는 상담사로, 선생님은 선생님으로, 점원은 점원으로, 음식점에서 서빙을 보시는 분들은 서빙을 보는 분들로, 운전 기사는 운전 기사로, AS 기사는 AS 기사로 보는 것이 편하다.

 

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누군가의 아빠,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소중한 아들이나 딸이라는 이해가 일어나게 되면 따져야 할 일도 쉽게 하질 못하게 된다그러니 상대를 그저 특정 역할을 맡은 존재나 혹은 기능적 존재로 여기는 것이 훨씬 낫다.

 

즉, 상대를 인간이 아닌 로봇으로 대하는 것이 편하다는 뜻이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우리 각자가 자신이 접하게 되는 많은 사람들을 그저 어떤 역할을 하는 존재나 로봇과 같이 대할 때, 자신이 손해 볼 것은 없다. 오히려 이득이 더 크다.

 

진짜 문제는 타인이 자신을 대할 때이다. , 우리들 자신도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 타인이 된다. , 주체가 아닌 객체가 된다. 그래서 우리들 자신들도 역할을 가진 존재가 되고로봇이 된다.

 

, 분명히 사연을 가지고 있고, 감정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지만, 마치 냉장고처럼 취급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각자가 자신도 모르게 상처를 받는 결과를 초래한다. 삶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직업 활동을 하는 동안, 우리들은 모두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만다.

 


누군가의 상처 주는 말, 누군가의 뒷담화, 누군가의 짜증, 누군가의 비아냥거림 등은 모두 상처가 된다. 하지만 우리를 가장 근본적으로 상처 입히는 것은 바로 우리가 인간이 아닌 존재로써 대접받을 때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이 너무도 익숙해서 자신이 상처를 받는지조차 모른다. 그리고 원래 돈을 버는 것은 그렇게 힘든 일이며, 누구라도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원래 그랬어야 할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꼭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버스 기사를 운전만 하는 로봇으로 보거나, 콜 센터에서 직원을 전화를 받는 로봇으로 보거나, 마트에서 일하시는 분들을 돈 계산하는 로봇으로 보는 것이 반드시 그랬어야 하는 것일까?

 

사실 우연하게 알게 된 사람이 버스 기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을 수 있고, 그 사람이 모는 버스를 또 우연하게 탈 수도 있다. 이때는 그다지 친하지 않더라도 짧은 순간이나마 서로 웃으면서 인사를 나눌 수 있다.

 

자신의 딸과 아들이 어느 콜 센터에서 일할 수 있고, 그 자신도 어디에선가 손님이 되기도 하고, 손님에게 응대를 해야 하는 가게 주인이 되기도 한다.

 

, 밖에서 활동을 하는 동안 만나게 되는 수 많은 사람들은 생각보다 모두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것을 너무도 잊고 살아간다.

 

현대 기술 문명이 발달하면서 인간은 점점 더 기능화되었다. 생산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로 인해서 챨리 채플린은 인간이 공장에서 일하게 되면서 나타나는 수 많은 문제들을 희극 영화로 만들었고, 당시 많은 철학자들이 존재론적 의문을 제기했었다.

 

당시에는 인간이 로봇으로 변하는 과정이었기에 그런 반발이 나왔지만, 지금 시대엔 이미 로봇으로 태어나 자라기 때문에 누구나 이런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아마도 미래 세대는 더욱 더 그렇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점점 더 집중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행복에 집중한다는 말의 의미는,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이 줄어든다는 의미가 된다.

 

, 우리 인간은 미래로 갈수록 점점 더 다른 사람들의 사연을 알아내려고 하지 않게 될 것이란 뜻이다. 이것은 물론 개개인에게는 좀 더 이득일 것이고, 좀 더 행복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 로봇이 되었을 때, 우리는 분명히 무엇인가를 잃게 된다. 그것도 아주 중요한 것을 잃는다. 그것은 바로 존재의 이유이다.

 

,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찾기가 힘들어진다.

 

누군가로부터 이해를 받는다는 것이 가진 의미는 단지 내 사정을 이해 받아서 이득을 보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큰 불행을 당했을 때, 직장 동료들이 모아 준 돈은 그 금액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돈을 모아 준 동료들의 마음이 중요하다. 설령 그 돈이 아주 크게 필요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이것은 금전적 이득을 초월한다. 이것은 존재적 당위성을 충족시켜준다. 사람이 정말로 행복한 순간이 바로 이때이다. 바로 다른 사람들에게 살아야 할 이유를 확인 받을 때마다 아주 큰 행복을 경험한다.

 

아무리 큰 돈이라도 비굴하게 얻은 돈은 행복해질 수 없다. 작은 돈이라도 정성을 다한 돈이 훨씬 더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다.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만, 다들 비굴하게라도 돈을 벌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마치 돈만 있으면 당장 행복해질 수 있을 것처럼 군다.


하지만 존재의 이유를 알려주는 종교에 빠지면 그 동안 힘들게 벌어 놓은 돈을 다 가져다 바치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돈은 존재의 이유에 대한 답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바로 '내가 살아야 할 이유' 이다. 돈조차도 살아야 할 이유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될 뿐이다. 살아야 할 이유가 없이 사는 사람이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다. 가장 자살을 할 위험이 높은 사람이다. 가장 큰 두려움에 휩싸여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래서 인간은 누구나 타인의 관심을 원한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결국 목적은 동일하다. 오히려 제대로 따져보면, 돈을 벌려고 했던 최초의 이유가 바로 관심을 더 받기 위해서였다. 다른 사람들의 관심이 바로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요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조차도 그렇게나 집착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원한다. 아니, 관심이 없기 때문에 더욱 더 관심에 집착한다. 어쩔 수 없다관심은 관심을 줄 때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진실이다.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그토록 원하면서 정작 자신은 다른 사람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이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는 유일한 도구는 바로 '매력' 혹은 '호감' 이다. , 매력이 있는 사람들은 좀 더 호감을 얻기에 관심을 주는 것보다 더 많은 관심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매력 있는 사람이 되고자 목숨을 건다. 외모를 꾸미고, 돈을 많이 벌고, 좋은 차를 타고 다니고, 비싼 가방을 가지려고 한다. 강한 권력을 가지려고 애쓰고, 지적 역량을 높이려고 하고, 유머 있는 사람이 되려고 애쓴다.

 

그리고 이것을 조금씩 확인 받을 때마다 그토록 행복을 느낀다. 하지만 정작 어딘가에서 만나게 되는 수 많은 사람들의 사연은 결코 알려고 하지 않는다. 무관심이 자신에게 가장 유리하다는 듯 군다.

 

이런 식으로 상대를 로봇으로 대하면서 자신은 인간으로 남고 싶어한다. 이것은 불가능하다. 누군가를 로봇으로 대하면, 상대로 자신을 로봇으로 대할 수 밖에 없다.

 

성격이 수줍고 어색해서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내면엔 그 사람의 사연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결국 우리 각자가 사는 이유를 만들어 줄 것이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비어 있는 내면을 조금이라도 채워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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