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행복의 선순환과 불행의 악순환

아이루다 2017. 8. 21. 20:19

 

오래 전 들었던 이야기 하나가 있다. 그것은 바로 천사와 악마를 그리려고 했던 어떤 화가에 얽힌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믿을만한 신빙성은 거의 없다. 그냥 교훈적인 이야기인 듯 하다.

 

아무튼 이 이야기는 천사의 얼굴로 쓸 모델을 찾아 헤매던 한 화가로부터 시작한다. 화가는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운 좋게도 자신이 생각하는 천사의 이미지에 딱 맞는 사람을 찾는다. 그리고 그는 그 사람을 모델로 해서 천사의 얼굴을 완성한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가 그리려고 했던 그림은 바로 천사와 악마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악마의 얼굴로 쓸만한 모델도 찾아야 했다. 하지만 이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1년이 지나고, 결국 10년이 지났다. 그리고 그는 결국 자신이 찾던 얼굴을 가진 모델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는 그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왜냐하면 자신이 찾은 악마의 얼굴을 가진 사람은 바로 10년 전 자신이 천사 얼굴의 모델로 썼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10년 사이에 이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이 이야기는 천사와 악마가 사실 얼마나 가까울 수 있는지를 깨닫게 해주려고 만든 이야기 같다. 하지만 또한 천사가 악마의 얼굴로, 악마가 천사의 얼굴로 바뀌는데 고작 10년이면 충분하다는 것도 알려준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는 정말로 악마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 그것도 한 둘이 아니고, 꽤나 많다. 연쇄 살인범, 소아 성폭행범, 토막 살해범 등등이 있다. 물론 이렇게 대놓고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만이 악마가 아니다. 멀쩡한 얼굴에 멀쩡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도 악마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 중에서는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올라 있거나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사람들은 소시오 패스라고 부른다. 그들 중 일부는 아주 가끔 일명 '갑질' 을 너무 대놓고 하다가 언론에 노출되기도 한다정치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 재벌가 사람들 중에서 우연히 나타난다. 그들은 즉시 대중의 커다란 분노의 화살을 받지만, 냉정히 말하면 빙산의 일각이다. 그들 중에서도 멍청한 존재들일 뿐이다.

 

이와는 다르게 정말로 천사와 같은 사람들도 있다. 자신이 분명히 손해를 입는데도 불구하고 기쁜 마음으로 남을 돕는다. 꼭 종교적인 입장이 아니라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평생을 남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끝없이 기부를 하고, 끝없이 남을 돕는데 앞장선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본질은 도대체 어떤 존재인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과연 악마의 얼굴을 인간의 본질로 봐야 하는지, 아니면 천사의 얼굴을 인간의 본질로 봐야 할지 혼란스럽다그러다 보니 도대체 이렇게나 서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존재를 어떻게 하나의 '인간' 이란 종으로 묶을 수 있을 지가 의문이 들 정도이다.

 

인간과 달리 일반적으로 자연계에서 같은 종들은 대부분 비슷한 습성을 보인다. 심지어 외모도 거의 비슷하다. 기껏해야 암수의 구분이 다르고, 덩치가 조금 차이가 날 뿐, 사실상 거의 비슷하다. 그래서 많은 수가 모여 있으면 사실 각자가 잘 구분이 안 간다.

 

그런데 인간은 이상하게도 유난히 편차가 아주 크다. 일단 외모적인 부분도 크지만, 내면의 성향에서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의 차이에 비하면 외모적 차이는 정말로 조족지혈이다.

 

도대체 왜 인간은 이렇게나 심하게 편차가 나는 것일까그러다 보니 이것이 궁금했던 옛사람들은 인간의 본질이 성선설이냐 성악설이냐 가지고 서로 논쟁하기도 했다.

 

이 점은 매우 궁금하기도 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너무도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인간의 이런 특징에는 행복함 불행함에 관한 묘하고도 슬픈 비밀이 숨겨져 있다.

 

그것은 바로 행복의 선순환과 불행의 악순환의 비밀이다. 그런데 이런 선순환과 악순환 구조는 특이한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많은 다른 영역에서도 수 없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지구의 생태계는 기본적으로 태양의 빛에 의해서 돌아가는 구조이다. 태양의 빛이 지구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식물이 이 빛을 흡수하여 동물들이 먹을 수 있는 에너지로 바꿔놓는다. 그리고 많은 동물들이 풀잎이나 과일을 먹으면서 자라고, 이렇게 자란 동물을 먹는 또 다른 육식 동물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렇게나 중요한 햇빛은 지구에 있는 물과 묘한 관계가 있다. 그것은 바로 물이 얼음이 되었을 때 나타나는 증상 때문이다.

 

물이 액체 상태일 때는 투명하지만, 그것이 얼면 보통 흰색을 띈다. 눈이 되기 때문이다. 북극이나 남극이 온통 하얀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흰색은 햇빛을 반사하는데 있어서 가장 효율적이다.

 

그래서 어떤 이유로 지구의 날씨가 차가워지면, 그로 인해서 눈이 더 많이 내리고, 그 후로 내린 눈은 다시 햇빛을 많이 반사해서 지구의 온도를 더욱 더 낮춘다.

 

반대로 어떤 이유로 지구의 날씨가 더워지면, 그로 인해서 눈이 녹고, 줄어든 눈은 햇빛을 덜 반사함으로써 지구의 온도는 더욱 높아진다.

 

, 지구의 온도가 낮아지면 더욱 더 낮아지는 방향으로 가고, 지구의 온도가 높아지면 더욱 더 높아지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물론 지구는 그뿐만이 아닌, 다른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서 전체 온도가 결정이 되므로, 보통은 어느 선까지만 내려가고 올라간 후 거기에 머물지만, 어느 순간 그 임계지점을 넘어서게 되면, 그 후로는 급격한 온도 변화가 일어날 수도 있다.

 

지금 기상학계에서 지구 온난화에 대한 경고를 끝없이 보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임계지점을 지나는 순간, 지구는 펄펄 끓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만약 물이 얼었을 때, 그 색이 흰색이 아니라 검은 색이었다면, 뭔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온도 조절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추워지면 눈이 늘어나고, 그러면 햇빛을 더 많이 받아들임으로써 자연스럽게 다시 더워지는, 반대로 더워지면 눈이 줄어서 다시 햇빛을 덜 받아들여서 시원해졌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더운 것이 더 더운 것을 부르는 것과 추운 것이 더 추운 것을 부르는 것을 악순환이라고 할만하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는 선순환이 될 수도 있다. 아무튼 이것은 자연계에 나타나는 흥미로운 특징이다.

 

또한 생태계에서는 훨씬 더 확실하게 나타난다.

 

새들이 새끼를 키울 때, 가장 먼저 알을 깨고 태어난 녀석이 가장 잘 자란다. 다른 형제들보다 덩치가 먼저 커지기 때문에 어미가 물어다 주는 먹이를 계속해서 가장 먼저 받아 먹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늦게 태어난 녀석은 운이 나쁘면 경쟁에 밀려서 중간에 죽을 수도 있다.

 


동물뿐만이 아니라 식물에게서도 나타난다. 같은 씨앗으로부터 자랐다고 해도 우연히 초반에 가장 높이 자란 나무가 더 많은 햇빛을 받아 다른 나무들보다 더 크게 자랄 수 있다. 다른 나무들은 이미 자신을 가로막는 다른 나무들에 가려서 자라지 못하고 결국 고사될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자연계에는 생존을 두고 선순환과 악순환은 끝없이 이어진다.

 

사람들의 어린 시절, 즉 어린 아이들을 보면 결코 미래의 악당이 될 것 같지가 않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순진하고 착하다. 그래서 아이들을 천사들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가면서 점점 악마들이 나타난다. 도대체 그 사이에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어떤 아이들은 어린 시절에 상처를 받는다. 부모의 이혼, 강압적인 훈육, 매질, 차별, 성폭행 등등 어린아이가 감당하기 힘든 불행을 겪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어두워지게 된다. 그리고 그 어둠은 아이의 두려움을 자극하기 때문에 결국 아이에게서 각종 나쁜 감정들을 자주 드러나게 만든다.

 

아이는 결국 불안하기 때문에 질투, 열등감, 분노, 혐오 등의 감정에 노예가 되기 쉽다. 내면의 불안함으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그런 감정들에 자주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나쁜 감정들이 많이 발생하면 할수록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는 것이 어려워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 악순환이 일어난다.

 

사람들은 누구나 예측 가능한 사람을 선호한다. , 화가 낼만할 때 내고, 질투를 해도 할 만한 것을 해야 된다는 뜻이다. 너무 시도 때도 없이 나쁜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과 함께 하려면 매우 피곤하다.

 

우리가 낯선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때 피곤함을 느끼는 이유이다. 정보와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이 언제 화를 낼 지, 언제 좋아할 지 판단이 힘드니 계속 상대를 바라보면서 그것의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이것은 꽤나 머리를 써야 하는 일이기에 피곤하다.

 

물론 아닌 경우도 있다. 그런데 낯선 사람들을 불편해 하지 않는 사람은, 사실 평소에도 다른 사람의 반응은 거의 신경 쓰지 않고서 자신이 할 말만 하는 사람들이다. 혹은 상대의 감정적 변화를 읽어내는 능력이 너무 뒤떨어져서, 즉 눈치가 없어서 눈 앞에 있는 상대가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도 모른 채 그냥 하고 싶은 말이나 행동을 하는 경우이다.

 

, 어떤 식으로든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읽어내는 공감 능력이 부족할 때 낯선 사람들과 쉽게 지내게 된다결국 일종의 무관심이 가져오는 장점인 셈이다.

 

아무튼 그렇게 무관심할 수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낯선 사람들과 함께 있거나, 감정이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과 같이 있을 때는 결국 지속적인 불안감으로 인해서 피곤함을 느낀다.

 

더군다나 상대가 자주 화를 내고, 질투심을 드러내면, 그 자체도 견뎌내기 힘들다. 누가 기분이 나쁜 사람과 함께 하길 원하겠는가?

 

그래서 결국 불우한 환경에 의해서 상처를 받은 불안한 아이는 인간관계를 맺는 것에서도 남들에 비해서 훨씬 힘들게 된다. , 심한 경우 왕따가 되거나 혹은 정말로 최소한의 관계만 맺은 채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될수록 그 사람의 삶은 점점 피폐해지고 만다. 운이 좋게 크게 출세를 하거나 돈을 벌지 못하면, 평생 그렇게 살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런 불행함은, 자신이 왜 이렇게 불행하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참지 못할 불만을 만들어 내게 된다. 그래서 자신과 달리 행복한 사람들을 보면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어느 순간 폭발하게 되면, 우리가 가끔 뉴스에서 보는, 묻지마 범죄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범죄의 이유가 바로 '자신보다 행복해 보여서', '자신을 무시해서' 이다.

 

반대로 어린 시절에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는, 사람에 타고난 성향에 따라 어른이 되어 남을 돕는 일을 하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살면 마음도 편하고 행복하기도 하다. 그래서 더욱 더 남을 돕는다. 이런 식으로 점점 더 남을 위하고 돕는 일들을 하다가 보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매우 좋아지만, 사람들에게도 존경을 받을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어준다. 그러다 보니 운 없게 삶의 위기가 닥쳐와도 주변 사람들의 십시일반 도움으로 그것을 이겨내기도 한다. 그러니 얼마나 삶이 평온하겠는가?

 

이런 식으로 불행은 끝없이 불행을 불러오는 악순환을 일으키고, 행복은 끝없이 또 다른 행복을 불러오는 선순환을 일으킨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이렇게 다른 삶을 사는 두 가지 형태의 사람이 처음엔 사실 거의 별로 차이가 없었다는 점이다. 선인과 악인의 시작은 거의 같다. 단지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것들의 차이로 인해서 점점 벌어져서 나중에 도대체 같은 인간이라고 불러야 할지가 의문이 생길 지경까지 벌어지는 것이다.

 

물론 타고난 성향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래서 불우한 환경에 놓였어도 악순환이 일어나지 않고 그것을 극복하고 결국 선한 사람으로 사는 사람들도 있고, 반대로 좋은 환경에 놓였으나 결국 타고난 성향으로 인해서 스스로 악해져서 결국 악한 사람으로 사는 경우도 많다.

 

세상의 그 어떤 것이든 간에 상관없이 무조건 장점과 단점이 있기에, 자신이 경험하는 수 많은 일들을 장점으로 해석하느냐, 단점으로 해석하느냐의 차이가 바로 이런 차이를 만들어 내게 된다.

 

그래서 뭐든 가능하면 장점으로 해석하는 성격을 가진 사람은 보통은 좋은 쪽으로 가기 쉽고, 반대로 뭐든 가능하면 단점으로 해석하는 성격을 가진 사람은 나쁜 쪽으로 가기 쉽다. 이런 성향적 특징과 어린 시절의 환경이 결합되어서 선인과 악인을 만들어 내게 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타고는 성향에 비해서 살아가는 환경이 더욱 크게 작용하게 된다.

 

아마도 물이 얼었을 때 검은 색이 되는 것처럼, 사람이 불행해질 때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더 잘 맺을 수 있었다면, 이렇게 극단적인 인간의 차이는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선해도 어느 정도껏만 선하고, 악해도 어느 정도껏만 악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물은 흰색으로 얼고, 불행은 더욱 더 큰 불행을 부른다.

 

그래서 불행함으로부터 탈출을 하려면 정말로 쉽지 않다. 그것은 멈춰선 바퀴를 굴리는 수준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회전하고 있는 바퀴를 왼쪽으로 돌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스스로 하기엔 너무도 힘들다.

 

그래서 불행한 사람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일단 순환 자체를 멈추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악순환을 멈추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악순환만 멈출 수 있다면, 그때부터는 멈춘 바퀴를 굴리는 일이 된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쉽다.

 

그리고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사람들의 '위로' 이다. 위로는 실제적인 치료의 힘을 가지고 있지는 않아도, 악순환을 멈추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이다. 위로는 그저 응원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의 위로는 결코 각자 자신의 경기장에서 홀로 싸워야 하는 삶의 주인을 대신해서 싸워주지는 못한다. 그것이 바로 응원이 가진 한계이다

 


그래서 결국 위로가 가진 힘은, 불행의 악순환을 막을 수 있을 뿐, 이것을 행복의 선순환으로 전환시켜주지는 못한다.

 

물론 이것도 매우 중요하다. 일단 멈춰야, 반대로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로는 중요하다. 그럼에도 위로는 아주 큰 문제를 품고 있다. 그것은 바로 위로가 중독 효과르 품고 있다는 점이다.

 

행복하게 사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다. 사람의 힘으로 차를 밀어서 굴릴 때, 가장 많은 힘이 필요한 시점이 바로 처음 시작부분이다. 관성의 힘으로 인해서, 멈춘 것은 계속 멈춰있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로를 통해 불행의 악순환을 멈췄다면, 이제는 힘들게 능동적으로 행복 방향을 향해서 굴려야 한다. 이때 아주 많은 힘이 든다. 에너지가 필요하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몹시 힘들다.

 

그러니 사람들은 거기서 멈춰버리고 만다. 일단 힘든 것만 끝나도 살 것 같으니 멈추는 것도 인간적으로 이해는 간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간의 휴식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위로가 주는 달콤함에 빠져서 거기에서 편하게 위로만 받으려고 할 뿐,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다시 밀리고 만다. 위로의 효과는 점점 줄어들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것을 이해하고 노력하기 시작하면, 처음엔 힘들지만 점점 더 편해진다.

 

행복해질 수록 덜 화를 내고, 덜 열등감을 느끼고, 덜 짜증을 낸다. 그래서 사람들과 좀 더 잘 지낼 수 있다. 그러면 또 다시 더 행복해진다. 이렇게 제대로 굴러가기 시작하는 순간, 이제는 오히려 멈추고 불행한 방향으로 악순환 하기가 힘들어진다.

 

이것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위로를 제대로 다뤄야 한다. 위로는 좋은 것이지만, 결국 외부 자극이다. 그리고 모든 외부 자극은 적응이라는 과정을 거친다. 아무리 심한 냄새도 오래 맡으면 잘 느껴지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적응이다. 그리고 위로도 적응되어 버리고 만다. 그러면 위로는 결국 불행의 악순환을 막을 힘을 잃는다.

 

일단 그렇게 되면, 위로는 이제 더 이상 사용 가능한 수단이 아닌 셈이 되고 만다. 그래서 불행의 악순환이 멈추는 시점이 가장 중요하고 더해서 조심해야 하는 순간이 된다.

 

삶을 살아가면서 삶이 점점 더 불행해지고 있다고 느낀다면, 위로를 얻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운 좋게 그 흐름이 멈춘다면, 그때 재빨리 행복한 삶을 위한 행동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악순환을 선순환으로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불행하다면 그 어느 시점보다도 잘 판단하고, 잘 결정하고잘 행동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