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춘추전국시대의 시작

아이루다 2017. 8. 2. 07:01

 

 

BC 842년 주나라에 귀족들의 난이 발생한다. 그 이유는, 주왕조의 10 희호가 국자 제정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귀족들의 주요 수입원이었던 것들을 정부 주도 산업으로 바꿨기 때문이었다. 쉽게 설명하면, 민간 기업을 강제로 국영화 시킨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귀족들이 불만을 갖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돈줄을 뺏으면 불만이 생기기 마련이다.

 

결국 희호는 도망치고 주나라는 잠시 귀족인 소공과 주공의 주도로 섭정에 들어가는데, 이것이 일종의 공화정치 형태를 띈다. 이 시기가 아마도 중국 역사상 최초의 공화정 체제였을 것이다.

 

귀족 중심의 정치는 이후 14년 정도 지속되는데, BC 828년이나 되어서야 희호의 아들 희정이 다시 왕권을 찾음으로써 주나라의 군주정치가 회복되게 된다.

 

희정은 왕권을 수복한 후, 아들 희궁열에게 왕위를 물려주는데, 이때 주나라에 아주 큰 사건이 두 개 터진다. 하나는 기산이 무너지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경수, 위수, 낙수라는 이름을 가진 세 강이 마른 일이었다.

 

물론 이것들은 자연재해이다. 하지만 기산은 원래 주왕조가 창업을 한 땅이었고, 물이 마른다는 것은 당연히 심한 가뭄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 민심이 동요하지 않을 리가 없다.

 

당시 포향이란 이름을 가진 신하는 희궁열에게 산이 무너지고, 강이 마르는 것은 재앙의 징조라고 하면서 여자와 술을 멀리하라고 간언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희궁열은 포향을 감옥에 가둬버리고 만다.

 

그러자 포향의 아들인 포흥덕이 자신의 아비를 구하려 했지만 잘 되지 않자포사라는 절세 가인을 이용해서 여인계를 쓰기로 한다. 그래서 포사와 몇몇 여자들을 훈련시켜 궁에 들여 보낸다.

 

작전은 성공했다. 포사는 과거 하나라의 항아, 상나라의 달기 급의 미모를 가진 여인이었는데, 단지 악독하지는 않아서 덜 유명한 것일뿐, 아주 아름다운 여인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희궁열이 그 미모에 넘어가지 않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포사에게는 단 한가지 문제점이 하나 있었다. 아니, 사실 포사의 문제가 아니라 희궁열의 문제라고 보는 것이 더 맞겠다.

 

그것은 바로 포사는 절대로 웃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포사가 웃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자신을 왕에게 보낸 것에 대한 불만 때문에 그랬다고 하는데,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런데 원래 본능적으로 남자는 여자를 웃겨야 한다. 이것은 유전적으로 새겨진 본능이다. 그런데 왕이 자신의 아름다운 아내를 웃기지 못하니 희궁열이 엄청나게 애가 탔다.

 

그러자 희궁열의 신하 한 명이 봉화를 피우면 포사가 웃을지도 모른다고 조언을 한다. 그러자 왕은 봉화를 피운다.

 

주나라는 처음부터 봉건제도를 채택한 나라이다. 그러니 나라의 수도인 호평에서 봉화가 올라가면, 주변 모든 봉국에서는 자국의 병사를 최대한 빨리 파병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이것은 주나라와 봉국 사이에 맺어진 절대적 계약이다.

 

그래서 주나라의 봉화에 불이 붙자, 주변 봉국 병사들이 밤이고 낮이고 달려서 주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온다. 그런데 그것이 단지 한 여인을 웃기기 위해서 한 짓이었다면, 힘들게 달려온 병사들의 마음이 어땠을까?

 

그럼에도 포사는 그렇게 엄청나게 허탈해 하는 병사들의 모습이 나름 웃겼나 보다. 그래서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그녀가 웃음을 터뜨리자, 원래도 아름답던 그녀가 엄청나게 예뻤나 보다. 사실 그렇긴 하다. 보통 사람도 웃으면 최소 두 배는 더 예뻐진다. 그러자 희궁열은 이후로도 몇 차례 그 짓을 반복한다.


 

<포사, 출처 http://blog.daum.net/jms021261/12748494>


희궁열은 포사를 왕비 자리에 올리면서 기존의 왕비를 폐하고 그녀의 아들이자 적장자이기도 한 희이구까지 죽이려고 한다. 그러자 봉국 중 하나인 신국에서 크게 반발을 한다. 그것은 바로 종법제도로 엄격하게 정해 놓은, 그 누구보다도 중요한 적장자를 죽이려고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희궁열은 군대를 모아서 신국을 공격하려고 한다하지만 신국도 그냥 당할 수는 없었다. 일단 어찌되었건 간에, 명분은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그래서 신국은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서 아예 다른 민족인 만족으로 구성된 견웅부락과 동맹을 맺게 되고, 이 견웅부락이 희궁열을 급습한다.

 

생각지도 못한 기습을 받게 된 희궁열은 깜짝 놀라서 봉화를 피우지만, 이미 몇 차례 속았던 봉국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병사를 보내지 않는다. 희궁열은 진정한 양치기 소년이 되고 만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담했다.

 

견웅부락 군대에 의해서 수도인 호경이 함락되고, 왕인 희궁열은 피살을 당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간접적 원인이었던 포사는 행방불명이 된다.

 

아무튼 이 일 이후로 신국은 적장자인 희이구를 왕위에 옹립한다. 그리고 새롭게 왕이 된 희이구는 어쩔 수 없이 견웅부락의 침공으로 인해 폐허가 된 호경을 버리고 낙양으로 도읍을 옮긴다. 이후 낙양은 중국의 9개 왕조에 걸쳐서 수도가 되기도 한다.

 

지명 위치상 낙양이 호경보다 오른쪽에 있다는 이유로 이때를 동주라고 부르고, 이전 시대를 서주라고 부르기도 한다. , 동주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은 단순히 왕위 다툼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 사건은 봉국에 대한 중앙 정부, 즉 주나라의 영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것도 당연한데, 희이구가 왕권을 얻을 때 그 자체가 이미 신국이라는 봉국의 지원으로 오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체면을 구길 데로 구긴 것이다. 그러니 왕권이 약해질 수 밖에 없고, 봉국의 입김이 세질 수 밖에 없었다.

 

이때 한 사건이 일어난다. 사실 흔한 사건일 수도 있는 사건이다.

 

정국의 국군이었던 희굴돌이 주변의 다른 봉국인 호국을 침략해서 합병시켜버린 사건이 일어난다. 만약 일반적인 경우라면, 정국은 중앙 정부의 허락이 없이 군대를 움직였기 때문에 당연히 제제를 받았어야 옳다. 그런데 이미 힘이 빠질 때로 빠진 중앙 정부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하기 싫은 것이 아니라, 자기 코가 석자라서 그럴 처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것은 작은 사건이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주나라의 존재는 더 이상 봉국에게 주인의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된다. , 이후 주나라의 주도권은 급속도로 약화되고 봉국들의 약진이 시작되어 결국 주나라로부터 거의 독립을 하게 되는, '춘추전국시대' 가 열리게 된다.

 

춘추전국시대는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를 합친 말로써, 일단 춘추시대로 시작이 된다그리고 춘추시대는 BC 722년에서 BC481년 사이 240년 정도의 기간을 뜻한다. 그 후 이어지는 전국시대는 BC 480년부터 진시왕에 의해서 최초의 통일 왕국이 형성되는, BC221년까지 약 260년 정도 지속이 된다. (* 이 기간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이견이 있다)

 

춘추시대에 접어들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 발생한다.

 

그것은 바로 BC 719년 또 다른 봉국 중 하나인 위국에서 왕위를 찬탈하는 정변이 일어난 것이다. 정국 내에서 왕의 동생인 위주구가 왕인 위안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다.

 

그러자 신하인 석작이 이에 불만을 품고 암계를 꾸미는데, 그것은 바로 비록 위주구가 왕위에 올랐으나 형식적이더라도 주나라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설득한 것이었다. 그리고 왕위 찬탈 문제는 민감한 사항이니 가능하면 주왕조와 친분이 두터운 사람을 통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조언한다. 그리고 그것을 도와줄 사람이 바로 이웃나라인 진국의 국군 규포라고 설명한다.

 

그러자 그 말을 믿은 위주우는 진국으로 향한다. 하지만 석작은 규포와 이미 밀약을 맺은 상태였기에, 규포는 위주구가 진국에 도착하자 죽여버리고 만다.

 

사건은 나름 복잡하지만, 결국 한 봉국의 국군이 또 따른 봉국의 국군을 그냥 죽여버린 셈이다. 하지만 이 사건 역시도 주나라로부터 아무런 제제를 받지 않는다. 그러자 봉국들은 이제 주나라가 완전히 주도권을 잃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아니, 사실은 좋아했을 것이다.

 

이후부터 주나라의 봉국들에서는 수 많은 정변들이 발생한다. 그리고 사실 춘추시대의 많은 사건들은 거의 모두 왕위를 둘러싼 수 많은 음모와 암계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봉국끼리의 전쟁도 끝없이 일어난다.

 

주나라의 봉국 수는 많았고 이미 왕권 계승에 대한 적법성은 이미 통제력을 상실하여 그 여파가 독버섯처럼 퍼져 나가 중국 역사를 온통 피로 물들게 한다.

 

BC 712년에는 노국에서 왕위 찬탈이 일어나고, BC 710년에는 송국에서 정변이 일어난다. 이런 사건들은 끝없이 반복된다.

 

이런 와중에 봉국 중 하나인 정국의 기세가 날로 커지며 정국의 왕인 희오생은 3년만다 중앙 정부에 와서 얼굴을 비쳐야 하는 봉국 국군의 의무마저 거부한다.

 

그러자 주나라의 왕 희림이 다른 봉국들과 연합군을 구성해서 정국을 공격하는데, 결국 정국이 이기고 만다. , 중앙 정부의 연합군이 일개 봉국의 군대에게 패한 것이다.

 

이것은 망해가는 주나라에게 쐐기를 박는 사건이 된다.

 

이후 정국의 국군인 희오생은 주나라을 압박해 자신을 강제로 사면하게 만들고, 주왕조는 이제부터는 중앙 정부가 아닌, 그저 힘없는 봉국 중 하나 수준으로 격하되어 멸망할 때까지 끝없이 쇠약해져만 간다.

 

그리고 당시 남쪽 지역에서 봉국이 아닌 별도의 고유한 민족으로 초부락을 구성하고 살던 사람들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주왕국과는 별도로 새로운 왕조를 세운다. 그 나라의 이름이 바로 '초왕국' 이며, 이로 인해서 중국은 주와 초, 두 개의 왕조가 양립하는 형태가 된다나중에는 오와 월이 세워지면서 네 개의 왕국으로 나눠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새롭게 세워진 나라들은 주나라가 쓰던 문자, 즉 한문을 받아들임으로써 결국 오랜 시간에 걸쳐 중국 문명에 자연스럽게 흡수가 된다. 이것은 문자가 가진 진정한 힘일지도 모른다.

 

BC 7세기에 들어서자 봉국간의 경쟁은 훨씬 더 치열해진다. 갈등을 조정해 줄 주나라의 존재가 유명무실하게 되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봉국들 간에 전쟁도 쉼 없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니 두 봉국 간에 전쟁을 한 후, 진쪽이 이긴 쪽 성 아래에 와서 항복 문서를 접수하는, 이른바 '성하지맹' 이란 관습이 생긴것도 이무렵이다.

 

결국 최대 170개에 달했던 봉국은 끝없는 이합집산을 통해 결국 11개의 봉국과 1개의 왕국으로 정리가 된다.

 


(), 제국, (), 정국, 송국, 노국, 위국, () , 채국, 조국, 허국, 초왕국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 말로 진국이 너무 많아서 한문으로 따로 표시를 했다. 더군다나 진국은 이후 자주 등장하기에, 한문을 잘 살펴야 오해를 안 할 수 있다.

 

각 봉국이 성장하면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 하나는 바로 왕을 죽이거나 축출하는 '축군살군' 인데, 40차례가 넘게 일어날 정도로 일반적인 일이기도 했다.

 

이런 사태를 보면주나라 초반부에 왕위 계승에 대한 아주 복잡한 종법제도를 만든 이유가 확실해진다. 왕위 승계 제도가 제대로 동작하지 못하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지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시대가 바로 '춘추시대' 이다.

 

각 봉국들은 내부적으로 권력 투쟁을 하고, 외부적으로는 다른 봉국들과 전쟁을 하게 된다. 이렇게 됨으로써 점점 더 강한 봉국이 나타나고, 망하거나 쇠약해져 가는 봉국도 생겨난다.

 

그리고 강한 봉국들 중에서 특히나 강해서 다른 많은 봉국들을 무력으로 제압할 수 있는 일명 '패주' 의 존재가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된다.

 

, 패주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사실상 패주는 주왕조와 그리 다른 개념은 아니었다. 봉국 간에 갈등이 생기면 중재를 하거나 혹은 한쪽을 응징해서 질서를 잡아주는 역할을 했으니 말이다. 단지 주왕조는 그것을 자신들이 정한 예법에 의해서 시행했다면, 패주는 강력한 군사력으로 그것을 했다는 사실만 다를 뿐이다.

 

그리고 패주는 봉국들의 흥망성쇠에 따라서 계속 바뀌었는데, 춘추 시대에는 총 5개의 패주가 순차적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그 시기를 일컬어 춘추오패시대라고도 한다.

 

순서적으로 보면, 제국, ()()초왕국, 오왕국 순이다. 한문을 잘 봐야 한다.

 

첫 번째 패주가 되는 제국은 강소백이란 인물로 인해서 가능했다그리고 강소백이 왕위에 오른 일에는 흥미로운 고사성어 하나가 얽혀져 있다.

 

그것은 바로 제국의 국군이었으며강소백의 형이었던 강제아라는 인물로 인해 시작된다.

 

제나라의 국군 강제아는 아주 어리석은데다가 고집불통이었는데, 그는 자신의 친 누이동생인 문강과 몸을 섞는 사이였다. 그리고 문강은 노국의 국군 희윤에게 시집을 가는데, 훗날 이 부부가 함께 제국을 방문한다. 문강의 입장에서 보면 친정을, 노국의 국군의 입장에서 보면 처가에 온 것이다.

 

그런데 문강이 제국에 오자 강제아와 문강이 서로 옛정을 잊지 못하고 남편 몰래 만나서 몸을 섞는다. 그러자 그 사실을 알게 된 노국의 희윤은 크게 노하여 바로 귀국해버리고 만다. 하기야 누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것도 오누이가 그런 짓을 하는데 말이다.

 

이 대목에서 왕좌의 게임에서 나오는 아이를 셋이나 낳은 오누이 부부가 떠오른다.

 

그리고 강제아는 자신이 저지른 일을 잘 알기에 희윤을 죽일 생각을 하고 팽생이란 자를 시켜서 그것을 시행을 한다. 결국 희윤은 강제아의 음모에 죽고, 어처구니 없는 사건으로 인해 국군을 잃게 된 노국은 분노하지만, 힘이 약해서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 사건은 이후 엉뚱한 방향으로 튄다. 그것은 바로 강제아의 어처구니 없는 행실로 인해 위기의식을 느낀 제국의 공자들, 즉 그러니까 제국의 왕족들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주변 국가로 도망을 치게 되는 것이다.

 

강제아의 동생 강규는 노국으로 도망을 치고, 또 다른 동생 강소백은 포숙아라는 인물을 데리고 거국으로 도망을 친다.

 

이후 8년이 지나 제국에 쿠데타가 일어난다. 대장 연칭이 이끄는 군인들이 강제아를 죽이고 강제아의 사촌동생인 강무지를 국군으로 옹립하지만, 또 다른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연칭과 강무지 모두 죽임을 당한다.

 

이로써 제국은 국군이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들은 강규와 강소백은 각자가 서둘러서 제국으로 귀국을 한다. 왕위 계승권을 가진 그들 중에서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왕이 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때 강규의 밑에 있던 관중이란 인물이 머리를 굴린다. 수레를 타고 가는 강규의 이동 속도로는 도저히 강소백을 따라 잡을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말을 타고 먼저 달려가 자신들보다 앞선 강소백 무리를 따라 잡는다. 그리고 강소백을 발견하자마자 망설임 없이 화살을 날린다. , 강소백만 죽이면 강규가 왕위에 오를 수 있으니 그리 한 것이다.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들자 강소백은 비명을 지르면서 수레에서 떨어지는데, 관중은 그가 죽는 모습을 보고는 좋아하면서 강규에게 돌아간다. 이제는 제국에 들어가면 끝인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런데 강소백은 운이 좋았다. 그리고 머리도 좋았다그는 화살에 맞긴 했지만, 운 좋게도 장식물에 맞아서 전혀 상처를 입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활을 쏜 관중을 속이기 위해서 죽은 척을 한다그렇게 관중을 속이고는 여유롭게 제국으로 들어가서 왕위에 오른다.

 

결국 강규는 늦게 도착해서 왕위를 놓치고, 노국 군대까지 동원해서 한판 승부를 벌이지만, 패한 후 현실을 인정한다.

 

그러자 강소백은 노국의 국군에게 강규는 죽이고 자신을 활로 쏜 관중은 압송을 하라고 요구한다. 그래서 결국 강규는 죽임을 당하고 관중은 수레를 타고 제국으로 압송이 된다.

 

그런데 놀랍게도 강소백은 그런 관중을 제국의 재상으로 삼는다. 자신에게는 포숙아라는 이미 걸출한 인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관중을 재상으로 삼은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바로 포숙아가 관중을 재상으로 추천한 것이다포숙아로부터 제안을 받은 강소백은 관중과 삼일 밤낮을 대화한 후, 그를 이제서야 안 것을 한탄하면서 재상으로 삼게 된다.

 

이렇게 하나가 된 강소백과 관중은 이후 40년간 제나라의 전성시대를 이끌어 낸다.

 

사실 포숙아와 관중은 같은 고향에서 자란 친구인데, 그로 인해서 이미 서로를 잘 알고 있었기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관중과 포숙의 이런 우정은 훗날 '관포지교' 라는 한자 성어로 잘 알려졌으며, 서로의 진면목을 제대로 알아봐주는 우정의 상징이 된다.

 

<관포지교의 주인공, 출처 http://friendlyshandong.co.kr>


관중은 훗날 '나를 낳아 준 것은 부모님이지만, 나를 알아준 것은 포숙이었다' 라는 말은 남김으로써 자신을 죽음의 위기에서 구해주고재상으로 추천해준 친구 포숙을 높게 평가하였다.

 

이렇게 관중과 포숙을 거느린 강소백은 춘추 시대의 최초 패자가 되지만, 그는 아후 이어지는 다른 패자들과는 달리 칭찬을 받는 패자였다. 이 말은 그가 나름대로 공정하게 패자의 권력을 사용했다는 뜻이 된다.

 

특히 그는 다 망해가는 주왕조에 대한 충성심을 보임으로써 힘뿐만이 아니라 형식적으로도 명백하게 봉국을 제어한다. 사실 이런 명분이 힘보다 더 중요한 때가 많다.

 

하지만 제국 강소백의 패권은 관중이 사망하면서 끝이 난다.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의 철학, 제자백가  (0) 2017.08.14
춘추오패시대  (0) 2017.08.06
하,상,주 왕조 (반역사의 시대)  (0) 2017.07.27
중국 문명의 시작  (0) 2017.07.18
그리스 문명 - 마지막 편  (0) 2017.0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