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중국의 철학, 제자백가

아이루다 2017. 8. 14. 08:07


BC 5세기가 들어서 중국은 문화적인 황금기를 맞는다. 물론 시기적으로는 춘추전국시대라는 복잡하고 불안한 정치적 혼란기를 통과하고 있었지만, 오히려 문명의 발달은 크게 가속화된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 문명이 걸었던 길과도 비슷하다. 전쟁과 내분을 거치면서 그리스 정신 문명이 꽃피웠듯이 중국의 문명도 그랬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문명이 전쟁이 있었기에 문명이 발전한 것은 아니다. 전쟁은 급격한 문명의 발달로 인한 부작용이었다

 

두 문명 모두 같은 원인으로 급격한 발달을 이루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생산성 증가에 따른 신흥 계급의 출현이었다. 단지 차이라면, 그리스 문명은 외부 동양 문명과의 접촉이 큰 역할을 했다면, 중국 문명은 고립된 상태에서 스스로 피어났다는 점이 다르다.

 

춘추전국시대는 청동기를 거쳐 철기 시대로 접어든 시기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철기로 만들어진 쟁기가 발명됨으로써 농사의 생산성이 비약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특히 노예 대신 소나 말에 쟁기를 달아서 땅을 고르는 기술이 퍼짐에 따라, 노예의 효용성이 급격히 하락하게 되면서 노예제도가 서서히 몰락을 하게 된다. 이런 변화를 보면,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힘은 그것을 뛰어넘는 대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안만 있다면, 사람들은 정말로 빠르게 변한다. 세탁기가 발명되어서 나왔는데, 누가 계속 직접 빨래를 할 것인가?

 


아무튼 철쟁기의 역할로 생산성이 향상되자, 그로 인해서 돈을 많이 번 부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하고, 그전까지만 해도 토지를 독점했던 왕족과 귀족들은 자신이 소유한 땅을 새롭게 등장한 부자들에게 팔게 된다.

 

이런 변화들로 인해서 상업이 활성화 되고, 이것은 도시의 상업계급과 새롭게 토지를 소유한 지주계급의 탄생을 촉진한다. 그리고 이렇게 새롭게 나타난 신흥 계급은 당연히 더 많은 권력을 원하게 된다. , 기존의 세습 귀족과 계급 투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은 그리스 문명과 판박이이다.

 

하지만 이미 한 물 간 귀족은 신흥 세력의 도전을 쉽게 막을 수 없다. 그래서 결국 BC 3세기 무렵엔 신흥 세력이 완전히 승기를 굳히고 그로 인해서 소수의 왕족과 귀족만 소유했던 책과 지식에 대한 통제권이 사라진다.

 

그전까지만 해도 노예나 평민에게는 아예 책을 읽는 것조차 그리고 무엇인가 지식을 쌓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었는데, 이 오래된 관습이 깨진 것이다.

 

지식은 날개를 달고 퍼지게 되고, 책은 그것을 돕게 된다. 이후로 타고난 자질로 새롭게 지식을 습득한 평민들이 귀족의 지위까지 오르게 되는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그들은 정부의 관리가 되어서 돈을 모아 지위와 돈과 명예를 모두 차지할 수도 있게 되었다.

 

설명은 간단했지만, 이것은 단순한 변화가 아니었다. 이것은 아예 사회 구조의 패러다임이 변화된 것이다. 이제는 한 개인의 성공은 타고난 신분에 의한 것이 아니라자신이 타고난 능력과 습득한 지식과 사상에 의해서 결정되는 시대로 변화 되었다. 이런 변화가 바로 중국의 고대 사상과 철학을 발전시킨 원동력이 된다.

 

그리고 그 유명한 4대 학파가 등장하게 된다. 그들이 바로 유가, 도가, 묵가, 법가이다.

 

이 중에서 유가가 워낙 번성했기 때문에, 우리는 흔히 중국의 사상을 유가, 즉 유학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초반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제대로 살펴보면 오히려 나머지 사상이 유가에 비해 훨씬 더 뛰어난 면도 있었다. 단지 그 시대의 요구에 가장 걸맞은 것이 그저 유가의 사상이었을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유가는 끝없이 지배자의 입장을 위한 조언을 했기 때문이다. 효나 충이 바로 그것인데, 이런 개념은 기득권의 지위를 유지시키는데 있어서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어서, 한 나라를 유지하는 것에 있어서 아주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조선시대가 그랬다.

 

아무튼 지금부터 4대 학파를 차례로 알아보도록 하자.

 

1. 유가

 

유가는 BC 551년에 노국에서 태어난 공구에 의해서 창조되었다. 공구는 훗날 높임말인 '' 가 붙어서 공자가 된다. , 그가 바로 공자님이다.

 

공구는 사생아로 태어났다. 그래서 그를 평생 동안 따라다닌 내면의 욕구는 아마 사생아가 아닌, 정상적인 존재로써 인정을 받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그래서 남들보다 훨씬 더 많이 배우고, 많이 생각한 끝에 유가라는 거대한 사상의 흐름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평생 '()' 의 가치를 추구했기에 매우 인자로운 인물로 알려졌지만, 사실 공구는 잔인한 면도 있었다.

 

공자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공자, 출처 https://namu.wiki/w/%EA%B3%B5%EC%9E%90>


그는 주로 노국 소속으로 살았는데, 노국의 벼슬길에 올라 국군과 함께 다른 봉국인 제국을 방문했을 때, 환영의 의미로 제국에서 준비한 궁중가무가 예법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무용수들의 손발을 모두 잘라버리는 잔인한 판단을 하기도 한 인물이었다.

 

그는 또한 노국의 대리재상 지위에 있을 때, 당시 명망이 높았던 소정묘를 여러가지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처형을 하기도 했다. 물론 소정묘에 대한 역사적 판단은 여러 가지가 있고, 또 공자의 제자들은 아예 공자의 과거 행동을 합리화하고자 소정묘가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려고 노력하기도 했다고 한다.

 

아무튼 공자는 노국의 정권 다툼에서 밀려나 위국, 제국, 진국, 체국 등을 떠돌면서 자신이 주장하는 주례를 기반으로 한 통치가 가능한지 시험하고자 했지만, 결국 모두 실패하고는 13년만에 노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조국인 노국에서 말년까지 제자를 기르고 책을 편찬하면서 보내게 된다. 이때 공자가 편찬한 책이 그 유명한 오경이다. 원래 오경은 공자가 쓴 책이 아니라, 이미 과거로부터 내려오던 책을 공자가 다시 재편한 것이다.

 

오경은 역경, 춘추, 시경, 서경, 예경으로 구성되는데, 유학자들에게는 기독교의 바이블이나 이슬람교의 코란이나 불교의 금강경과 같이 절대적인 경전인 셈이다.

 

이 오경은 유가가 득세하면서 이후 2,000년 이상의 기간 동안 중국의 사상계를 지배했으며우리나라 역시도 그 영향하에서 조선 왕조 오백 년을 보내게 된다.

 

역경은 일종의 철학서이며, 일종의 점을 보는 책이라고 한다. 특히 같은 문장이 상황에 따라서 아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해 매우 신비해 보이는 구석이 있어서 더욱 더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것 같다. 이 책은 주왕조를 연 희발의 아버지, 희창이 썼다는 설이 있다.

 

춘추는 춘추시대의 역사서이지만, 공자는 이 책을 역사 기록의 의미보다는 자신의 사상을 홍보하는 목적으로 썼다고 한다. 그래서 춘추는 역사적 사실도 기록하지만 주로 그 사실들을 공자가 가지고 있는 사상에 근거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일종의 편협 된 시각의 역사서로 보면 될 것 같다.

 

특히 공자는 옛 것을 숭상하고 새로운 문물을 배격하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초나라와 같이 다른 민족이 세운 왕국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중화 사상에 크게 물들어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초나라의 왕을 끝까지 왕이라고 부르지 않고, 자작이라는 귀족 중에서도 가장 말단 귀족으로 불렀다고 한다.

 

시경은 BC 12세기쯤 출현한 중국 최초의 시가 모음집인데, 그 내용은 아주 다양하여 전쟁, 평호, 농토, 정부, 연애, , 짐승, , 나무 등등 아주 다양한 시선으로 세상을 시로 표현한 것인데, 저자 또한 귀족부터 평민까지 아주 다양했다고 한다.

 

그런데 공자가 이 시경을 편집하면서 자신의 구미에 맞는 시 300편 만을 추림으로써 중국 문학사에 있어서 매우 중대한 손실을 입히게 된다.

 

서경은 정치 문헌 모음집으로 하, , 주 나라의 포고문, 선언문 등이 포괄적으로 엮여있다고 한다.

 

예경은 BC 12세기 주왕조 초기의 예법을 정리한 책이다.

 

공자 이후에 유가가 중국 사상계의 주류를 이루게 되면서이후 학자들은 이 오경을 해석하고 주석을 다는 것이 끝일 정도로 편협 된 사상 흐름을 보이게 된다.

 

이것은 마치 그리스 문명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서양 철학의 주류가 된 것과 비슷한 경우이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 문명과 중국 문명은 모두 별도로 발전했지만, 그 과정을 보면 상당한 유사점 있음을 알 수 있다.

 

공자는 BC 481년 기린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상서로운 동물이 발견되었으니 자신의 시대가 갔음을 한탄하면서 붓을 꺾었고 그 후로부터 2년 후인 BC 479년에 죽는다.

 

공자는 소크라테스처럼 살아 생전에 자신이 직접 저술한 책은 하나도 없었으며, 제자들이 그의 평소 언행을 모아 '논어' 라는 책을 펴냈는데, 이 논어 역시 오경과 더불어서 유학에서 매우 중요한 책이 된다.

 

공자는 여러 가지 단점이 있는 인물이긴 했지만, 경험이 풍부하고 지혜로운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제자들이 너무도 과도하게 그를 추종함으로써 불필요한 숭배를 받아 적이 생기도 했다.

 

공자는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인성의 부족함을 탓하기 보다는 이해하고 동정함으로써 그가 살아 생전에 주장했던 '어질 인()' 의 가치를 실현한 인물이기도 했다. 특히 그는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은 남에게 시키지 말라는 '()' 를 강조함으로써 인간의 고귀한 정신의 기반을 닦았다고도 볼 수 있다.

 

공자의 철학은 한 마디로 '' 으로 함축 가능하며, '', '', '' 등은 모두 인을 완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강조되었다. 그는 비록 정치적으로는 실패했지만, 그 교육정신은 귀중하고 성공적이라고 판단 할 수 있다.

 

2. 도가

 

도가는 이이, 훗날 노자라고 알려진 인물에 의해서 창시되었다. 이이는 초국의 고현 사람으로써 태어난 연도나 죽은 연도가 모두 불투명하다.

 

그는 주나라 수도 낙양에서 도서관 관리를 맡은 적이 있었는데, 하루는 공자가 그곳에 찾아와 과거의 예법에 대해서 물어봤다고 한다. 그러자 노자가 하는 말이,

 

"당신이 묻고 있는 그런 사람들은 이미 죽어서 썩었다. 그러니 억지로 알려고 하지 말아라. 그 내면에 있는 교만을 버리고 욕망을 줄어야 할 것이다"

 

라고 했다고 한다.


 

<소를 탄 노자와 예에 대해서 묻는 공자, 출처 http://m.blog.daum.net/windada11/8757842

 

이 말을 들은 공자는 정확히 자신의 약점을 찔렀다고 느꼈고, 훗날 자신이 만난 노자를 용과 같은 인물이었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이 일화가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과거 두 거인의 만남이 흥미로운 면도 있다.

 

노자가 세상의 이치를 모두 깨닫고 주나라를 떠나 진국의 산관을 지날 때, 그를 알아본 사령관 윤희가 그가 떠남을 알고 마지막 가르침을 남겨달라고 하자, 그 자리에서 즉시 한 권의 책을 써서 주니, 이 책이 바로 그 유명한 '도덕경' 이다. 다른 말로 그냥 '노자' 라고도 한다.

 

이 책은 겨우 5,000 자에 불구한 짧은 경전이지만 이후 오랜 시간 동안 도()의 사상, 즉 세상을 바라보는 진정한 이치를 담고 있는 책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지극히 약한 것이 가장 강한 것이다.

후퇴가 전진이다.

술잔이 차면 넘친다.

달이 차면 기운다.

순리를 따라라. 억지로 하지 말아라.

 

등의 개념이 채워져 있다. 하지만 이런 도덕경의 내용은 마치 모두 체념을 하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에, 그 사상이 품은 대단한 통찰력에도 불구하고 후대에 그리 꽃을 피우지 못하게 된다. 그럼에도 중국에서는 토종 종교화 되어 도교라는 종교가 그 명맥을 이어온다.

 

이렇게 탄생한 도교는 훗날 인도에서 전해온 불교에 영향을 미쳐 결국 선불교라는 새로운 형태의 불교가 만들어지는데 매우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되고, 이 선불교는 선종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면 요즘 시대의 대부분의 불교가 선종을 따르고 있다. 우리나라의 가장 큰 불교 종파인 조계종도 선종을 따르고 있다.

 

3. 묵가

 

묵가는 묵자라는 인물이 창시한 것으로 어떤 면에서 가장 철학적 사상을 담고 있다. 묵자는 노국 사람으로써 공자와 동향이기도 하다.

 

묵자는 평생 박애와 평화를 추구하면서 사치, 낭비, 침략을 반대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는 많은 제자들을 거느렸고 엄격하고 치밀하게 조직을 관리했다고 전해진다.

 

묵자는 딱히 학파를 만들기보다는 실천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삼았는데, 그것을 위해 묵당이란 단체를 세우고 자신이 믿는 옮음을 실천하는 것에 최선을 다하게 된다. 이런 묵자의 제자들의 태도는 공자의 제자들이 공자를 찬양하고 신격화 하는 데만 모든 노력을 다 쏟는 것과는 차별적으로 뛰어나 보이기도 한다.

 

묵자에 대해 가장 많이 알려진 일화는, 초왕국이 송국을 공격하려고 하자, 그것을 막기 위해서 홀로 초왕국의 진영에 찾아가 최고 사령관이었던 공수반을 상대로 전쟁 시뮬레이션을 해서 9번의 공격을 9번의 수비를 해냄으로써 자신이 송국에 합류하면 초왕국의 공격을 모두 막아낼 수 있음을 증명해 낸 일이다.

 

그러자 공수반은 자신에게 비장한 마지막 한 수가 있으나 말해줄 수 없다고 하고, 묵자는 자신도 그 계책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나 막는 방법을 말할 수 없다고 대꾸한다.

 

그러자 옆에서 그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초왕국의 왕이 도대체 둘이 무슨 말을 하냐고 묻자, 묵자가 설명하길, 공수반은 자신의 모든 전략을 깨는 사람인나를 없앰으로써 해결을 하려고 했고나는 이미 이 모든 방어 전략을 제자들에게 알려주고 송국에 보냈으므로 나를 죽여봐야 소용이 없음을 방어책으로 내 놓은 것이라고 대답한다.

 

이 말을 들은 초왕국의 왕은 그제서야 자신들이 승리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군세를 뒤로 돌리게 되며, 이로 인해서 송국의 초왕국과의 전쟁을 피할 수 있게 된다. 아무튼 머리가 비상하게 좋은 인물이었음은 확실하다.

 

묵자는 사람들에게 매우 묵직한 질문들을 던졌는데,

 

길에서 사람이 죽이면 죄인이 되고,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면 영웅이 되는 것인가?

남의 오리를 훔치면 도적이 되고, 남의 땅을 뺏으면 명장이 되는 것인가?

왜 백성들을 굶주리면서도 귀족들을 위해 세금을 내야 하나?

왜 정권은 대대손손 물려받는가?

왜 자식은 일도 안 하면서 3년 상을 지내는가?

 

사실 이런 묵자의 질문은 유가의 치명적 단점을 정확히 찌르고 있다. 그리고 유가는 피지배자보다는 지배자를 위한 철학이었고, 묵가는 지배자가 아닌 피지배자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가는 이미 지배구조가 정해졌으니, 그것을 어떻게 잘 유지하느냐가 주요 관심사였고, 묵가는 왜 그런 지배구조가 되어야 하는가를 묻는 철학이었다. 물론 지배계급은 당연히 유가를 지지하겠지만, 철학적 깊이나 그것이 가진 의미는 묵가가 훨씬 높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결국 지배자의 입맛에 맞는 유가가 살아남고, 묵가는 거의 잊혀진 채, 최근에 와서야 묵자의 사상을 재평가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묵자의 제자들 역시도 그의 사후에 스승의 언행을 모아 '묵자' 라는 책을 남기는데, 개인적으로 기회가 되면 꼭 한 번 읽어보고 싶다.

 

4. 법가

 

법가는 이괴라는 인물이 창시한 것으로, 딱히 사상이라기 보다는 법에 의한 통치를 주장한 것으로 보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이괴는 개혁적인 정치를 주장했으며, 각 나라의 법전을 종합하여 법경이라는 일종의 헌법과 같은 책을 만든다. 이 법경은 거의 형사법이며, 법치사상을 공유하고 있다.

 

4대 사상 말고도 수 많은 사상과 철학들이 봇물 터지듯 나왔는데, 그것들을 묶어서 제자백가라고 불렀다.

 

그 중에서 귀곡자가 창시한 종횡가는 권력을 쟁취하는 방법론을 주장함으로써 큰 인기를 얻었는데, 소진이란 인물에 이르러 크게 번성하게 되고, 법가는 공손앙이란 인물로 크게 번창하며, 유가는 맹가, 즉 맹자라는 걸출한 인물이 나타남으로써 학문적으로도 매우 확대되게 된다.

 

소진, 공손앙, 맹자가 활약한 시기를 사상의 황금 시대 중에서도 황금시대라고 부른다. 개인적으로 장자는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긴 하다.

 

중국의 사상은 우리나라에도 크게 영향을 미쳐서, 결국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알게 모르게 작용하고 있다. , 우리가 따로 유교를 공부하지 않아도 지금도 유교적 사고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매우 자연스럽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 어떤 것도 그냥 사라지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생각이 완전히 바뀌려면, 쟁기의 발명과 같은 것이 있어야 한다. 사람은 그때 변한다.

 

아마도 최근에 사람들을 가장 많이 바꿔 놓은 것은 스마트폰이 아닌가 싶다. 스마트폰은 사람들이 꼭 만나야 했던 사람들을 꼭 만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바꿨다. 이것은 어느새 그렇게 변했기에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미래의 어느 시점엔, 스마트폰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관계를 맺는 것에 매우 다른 관점을 가지게 되었다는 평가가 나올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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