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하,상,주 왕조 (반역사의 시대)

아이루다 2017. 7. 27. 08:44

 

 

요순 시대를 끝으로 중국의 전설 시대는 막을 내린다. 훗날 사람들에게 있어서 요순시대는 유토피아와 같은 시대이지만,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

 

이렇게 인간이 신령스러운 하늘과 함께하는 시대는 끝이나고 오직 인간만 남는다. 그래서 이제는 인간이 인간을 다스리는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반역사, 즉 역사의 시대이긴 하지만, 문헌 기록은 정확하지 않는 시대가 열린다.

 

그 첫 시작은 전설의 시대의 마지막을 왕인 순제가 왕위를 선양한 인물사문명으로부터 시작된다.

 

사실 이렇게 시대를 나누는 이유는, 왕위를 계승하는 방법의 차이로 인해서 그렇다. 사문명 이전의 왕위는 기본적으로 '선양' 이라는 개념으로 이뤄졌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왕위 계승 방법인왕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신하들 중에서 뛰어난 인물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방법을 취한 것이다.

 

그런데 하왕조, 즉 하나라를 연 사문명은 왕위를 자신의 자식에게 왕위를 몰려줌으로써 비로소 '왕조' 라는 개념을 처음 적용한다.

 

사문명은 후대에 '우제' 라고 불리는 인물인데, 2205년도 산서성 하연에 수도를 정하고 하왕조를 시조가 된다. 그는 선대 왕들과는 달리,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을 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왕국과 서로 긴밀히 연결이 되어 있는 주변 부락들의 추장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이었다.

 

그는 단지 왕이 주도하는 모임에 늦었다는 이유로 추장 한 명을 죽인다. 이 사건의 의미가 바로 왕과 부족의 추장이 동맹의 관계가 아닌, 주종의 관계임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우왕은 지배 구조상 땅을 구분하는 정책을 폈는데, 수도 안읍을 기준으로 250km 이내를 전복이라고 칭하고, 자신이 직접 다스리고 세금도 직접 걷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250km, 즉 중앙에서부터 500km 이내는 후복이라고 해서 추장들을 통해 대리로 다스렸다. 그리고 추장들은 매년 일정량의 세금을 바침으로써 왕과의 관계를 유지했다.

 


그 후로 250km는 수복이라고 해서 아예 군주의 범위가 아니었고, 이후 250km는 요복으로 칭했고 거기에서 사는 사람들은 중국이란 개념 자체를 모르는 사람들이 산다고 여겼다. 그리고 그 이후로부터는 황복이라고 해서 아예 낯선 민족이 지배하는 땅으로 정의했다. 그래서 사실 하왕국은 전복과 후복이 다였다.

 

우왕은 중국을 구주로 개편해서 기주, 연주, 청주, 서주, 예주, 옹주, (), (), 형주로 나눴는데, 이 지명은 지금까지도 중국에 남아 있다하지만 이런 구주에 관련된 내용은 학술적으로 많은 이견이 있는 모양이다. 실제로 구주는 한참 후인 전국시대에 나타나는 개념이라고도 한다.

 

아무튼 하왕조를 연 우왕은 BC 2198 100살의 나이로 사망한다. 사실 그 시대에 그렇게 오랜 산 것 자체도 의심스럽기도 하다.

 

우왕이 죽은 후, 아들 사계가 왕조를 계승하는데, 이때 아직까지도 '부자계승' 개념이 확실히 자리를 잡지 못해서 결국 반란이 일어나게 된다. , 우왕 이전만 해도 다들 선양을 했는데, 갑자기 왕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니 그것에 불만을 품은 세력이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사계는 이 반란을 제압함으로써 부자계승 제도를 정착시킬 수 있게 된다.

 

이후 사계는 아들 사태강에게 물려주지만, 또 다시 반란이 일어난다. 그 인물은 후예로써 그는 반란을 성공하고 사태강을 왕위에서 끌어 내린다. 하지만 그는 사태강의 동생이었던 사중강을 왕에 올림으로서 부자계승의 원칙을 훼손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것만 봐도 부자계승의 전통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음을 알 수 있다.

 

반란을 성공시킨 후예는 아주 기이한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특히 활을 아주 잘 쏴서 백발백중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아내가 바로 그 유명한 '항아' 라는 여자였는데, 그녀는 중국 역사에서 나타나는 최초의 미녀이다.

 

그녀는 훗날 나타나는 달기, 서시, 왕소군, 양귀비 등과 함께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절색의 미모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녀는 운 좋게 생로불사의 약을 먹은 후 영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는데, 그로 인해 세상의 미련을 버리고 달나라로 가버렸다고 한다.

 

이때 자신이 키우던 토끼도 데리고 갔는데, 이로 인해서 달에는 계수나무 아래에서 떡방아를 찌는 토끼에 대한 전설이 만들어 진다. 중국인들은 지금도 달에 항아와 항아의 토끼가 살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중국에서 처음으로 달에 보낸 탐사 위성의 이름을 '창어 1' 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이 창어를 우리나라 발음으로 읽으면 '항아' 가 된다. , 중국은 그녀의 이름을 따서 최초의 달 탐사 위성을 보낸 것이다.

 

후예에 의해서 왕위에 오른 사중강은 자식 사상에게 왕위를 계승한다. 그러자 후예는 아예 사상을 몰아내고 자신이 왕위에 오른다. 말 그대로 역성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후예 역시도 믿었던 부하 한착에게 살해를 당함으로써 결국 한착이 왕이 된다.

 

이 와중에 원래 왕이었던 사상은 피살을 당하는데다행히 그의 아내가 도망쳐 유복자인 사소강을 낳게 된다그리고 이 사소강이 자신의 군대를 훈련시켜 BC 2079년에 한착을 죽이고 왕위를 되찾음으로써 비로소 다시 하왕조를 복권시키게 된다.

 

이후 하왕조는 특별한 일 없이(왕위를 뺏기는 일 없이) 200년 가량 지난다. 그리고 BC 1819년에 사리계가 왕위에 오름으로써 그 대미가 장식이 된다.

 

사리계는 아주 포악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나라가 망하려니, 그런 인물이 나오는 모양이다. 그는 포락형이라는 새로운 형벌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죽였다고 한다. 포락형은 바닥에 숯불을 깔고 불을 붙인 후, 그 위로 통나무에 기름을 발라 미끈거리게 한 후, 사람들을 그 위에서 걷게 만든 형벌이었다. 사람들은 미끄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떨어져서 불타 죽는다.

 

더해서 사리계에게는 서말희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녀는 비단 찢는 소리를 좋아해서 사리계는 그녀를 기쁘게 하기 위해 매일 비단을 찢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서 백성들의 불만이 점점 고조되고, 하왕조와 주종의 관계를 맺은 부락들 중에서도 불만을 가진 세력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특히 상부락 지역의 추장인 자천의 힘이 점점 더 커지게 된다.

 

사리계는 상부락 추장인 자천의 힘이 점점 커지자 그를 경계하려고 하지만, 결국 자천은 BC 1766년 군대를 일으켜 하왕조를 멸망시키게 된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왕조를 연다. 이 왕조가 바로 상왕조, 즉 상나라이다. 자천은 상왕조의 시조가 되며 훗날 '탕제' 라고 불리게 된다.

 

하왕조는 사문명에서 사리계까지 440년간 중국을 지배했으며폭군 사리계를 마지막으로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진다.

 

하왕조에서 상왕조로 바뀌면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변화는 바로 조상을 숭배하는 문화가 널리 퍼진 것이었는데그것은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문화가 처음 시작된 때가 바로 상왕조 시대였던 것이다.

 

상왕조에는 정부조직을 좀 더 세밀화 하는데, 어사, 태재, 태사라는 직위가 생긴다. 그런데 이 중에서 이때 천문, 제사를 담당하는 태사의 자리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게 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 이것을 통해 상왕조가 제사 문화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상왕조가 조상을 섬기는 일을 중요하게 여긴 것에는 아무래도 잦은 자연재해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왜냐하면 상왕조 시절 황하강이 잦은 범람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범람은 상왕조의 수도를 옮겨야 할 정도로 강력했던 것 같다수도를 다섯 번이나 옮긴 상왕조의 수도 중에는 은읍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이 지명으로 인해서 상왕조는 '은나라' 라고 불리기도 한다.

 

중국 고대사를 주어 들으면 이런 부분이 좀 헷갈리는데, 정리하면 요순시대, 하나라, 상나라(은나라), 주나라 순으로 알고 있으면 단순하게 이해할 수 있다.

 

상왕조는 그로부터 600년 정도 중국을 지배하는데, 딱히 다룰만한 큰 일이 없다.

 

그리고 상왕조의 마지막 왕은 바로 자수신이었는데, 그는 아주 똑똑하고 힘이 쎈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런 특징으로 인해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독불장군이 되고 만다더군다나 그에게는 중국 역사상 3대 악녀 중 하나로 꼽히는 소달기, 즉 우리가 흔히 '달기' 로 알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그녀 또한 항아나 서말희와 같은 미녀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이 잔인한 부부는 어떤 사내가 맨발로 얼음 위를 걷자, 그 사람의 발을 잘라오게 해서 어떻게 얼음 위를 걸을 수 있는지 연구했으며, 여자가 임신을 하자 배를 갈아서 태아가 어떻게 생겼는지 연구를 하는 등, 인간으로써는 상상하기 힘든 악행을 저지른다. 그리고 결국 이 역시도 민심을 크게 잃는 결과를 가져온다.

 

자수신은 하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던 사리계가 했던 포락형을 재개발해서 사람을 고문하고 죽이는데 쓰는 등, 어떤 면에서 사리계의 판박이였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사리계는 그 자신이 포악한 인물이었고 옆에 있던 서말희는 그저 비단 찢는 소리나 좋아하는 철부지였던 반면, 자수신은 그 자신은 괜찮은 인물이었지만 악녀 달기를 만남으로써 완전히 망가져 버린 경우가 된다.

 

원래 자수신에게는 구후, 악후, 희창이라는 세 명의 충직한 신하가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 구후의 딸은 자수신의 후비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 후비가 고상한 척을 한다는 이유로 죽여서 아버지인 구후와 함께 죽여서 포를 떠 젖갈을 담는다. 도대체 요즘의 상식으로는 상상도 안가는 행동을 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다가 아니었다. 구호의 소식을 듣고 따지던 악후에게도 같은 일을 저지른다. 그러자 남은 한 명인 희창은 그저 한숨만 쉬고 만다. 하지만 자수신은 희창이 한숨을 쉬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하남성의 탕음에 감금시켜 버리고 만다.

 

그리고 자수신은 그를 감금한 것만으로 성이 안 풀렸는지, 희창의 아들인 희고를 죽여서 곰탕을 끓여서 희창을 속여 그것을 다 먹게 한다. 이것을 보면 자수신과 달기는 도대체 사람이 아닌 듯 하다.

 

이때 자신의 자식을 죽여서 끓인 곰탕을 먹은 희창의 마음은 어땠을까? 상상하기도 힘들다.

 

원래 희창은 주부락의 추장이었고 부락민들에게 많은 존경을 받은 인물이었다. 그래서 주 부락은 보물과 말과 미녀들을 챙겨서 자수신에게 바친 후 희창을 구해 내지만, 결국 그는 충격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그의 한서린 죽음을 본 또 다른 아들 희발이 군대를 양성하며 본격적으로 상왕조와의 전쟁을 준비한다.

 

그 소식은 분명히 자수신에게 알려지지만, 이미 거의 미친 상태여서 크게 신경을 않는다. 그리고 결국 BC 1122년도 희발이 군대를 일으켜 상왕조를 멸망시킨다.

 

그리고 상왕조를 멸망시킨 희발은 스스로 새로운 왕조를 세우고 나라의 이름을 '', 즉 주나라라고 칭하고, 이렇게 주왕조가 시작이 된다.

 

상왕조가 멸망할 당시, 악녀 달기는 스스로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녀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가 하나가 내려온다.

 

그것은 바로 강태공에 대한 이야기이다

 

달기는 그 미모가 워낙 출중해서 자신의 매력으로 충분히 살아 남을 수 있음을 자신했는데, 그런 그녀를 찾은 사람인 바로 벌써 90살이 넘은 강자아즉 강태공이란 직책 명으로 더 유명한 사람이었다달기를 잡은 강태공은 그녀의 미모에 전혀 혹하지 않고 바로 그녀의 목을 베라고 했는데, 목을 벨 망나니조차 그녀의 미모에 혹해서 손을 쓰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자 강태공이 천으로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 목을 잘랐다고 한다.

 


상왕조는 자천으로부터 시작해서 자수신까지 총 622년을 이어졌는데, 마지막이었던 자수신은 하왕조의 마지막이었던 사리계와 그 최후가 놀랍게도 유사하다.

 

아무튼 이렇게 상왕조가 끝나고 새롭게 등장한 주왕조는 이전 왕조와는 많이 달라진다. 특히 주왕조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며, 훗날 춘추전국 시대를 가져오게 될봉건제도가 시작된다.

 

봉건제도는 유럽지역에서도 나타나는데, 중국의 봉건제도와는 차이가 있다. 그 가장 큰 특징이 바로 혈연의 여부이다.

 

중국의 봉건제도는 최대한 혈연위주로 맺어졌다. , 왕의 친척이나 직계 자손들 중에서 왕위에 오르지 못한 인물들이 주로 봉국의 왕으로 봉해진 것이다.

 

이와는 달리 서양의 봉건제도는 봉국의 왕에 해당하는 영주와 최종 지배자인 국왕간의 계약 형태로 이뤄지는데, 사실상 이 둘 사이의 혈연적 관계는 전혀 없었다그들은 그저 상호 도움이 되는 계약 관계였던 것이다.

 

주왕조의 또 다른 특징은 기존의 왕조에서 사용하던 '()' 라는 호칭을 버리고 '()' 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주왕조의 왕을 천왕이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그렇게 희발은 중국 최초의 왕이 된다.

 

주왕조 시대부터 중국의 신분제도는 매우 명확하게 규정되는데, 기본적으로 왕족, 귀족, 서인(자유인), 노예로 구분되었으며, 계층간 이동은 아주 엄격히 제한이 되어서 신분질서를 안정시키게 된다.

 

주왕국의 봉건제도를 좀 더 세밀히 살펴보면, 천왕이 다스리는 지역을 '왕기' 라고 칭하고, 분봉이라는 명칭으로 나라의 땅을 작게 분할하여 봉국을 삼고 그 봉국의 왕을 국군이라고 불렀다. 봉국의 국군은 설명했듯이 주로 왕족이 맡았으며, 아주 가끔 크게 공을 세운 인물이나 혹은 지역 구조상 해당 부족의 추장을 지명하기도 했다.

 


강태공으로 유명한 강제아의 경우도 공을 세웠기에 제나라를 봉국으로 받아 제나라의 시조가 되기도 한다.

 

귀족 계급도 세분화 해서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으로 나눠서 구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봉국의 국군은 통칭해서 제후라고 불렸는데, 그것은 당시 국군의 작위가 대부분 후작이어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한다. 왕을 뜻하는 '' 와 후작의 '' 가 합쳐진 것이다.

 

여기까지 해서 주왕조의 지배 체제를 그 외형을 제법 갖추게 되는데,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왕위 계승에 대한 문제였다. 이것은 권력에 대한 것이기에 한 나라만 해도 수 많은 문제가 생길 수 있는데, 수십 개, 아니 심한 경우 백 개 이상이 되는 봉국들에서 발생될 왕위 계승에 따른 문제는 누가 봐도 눈에 선한 것이었다.

 

그래서 주왕조는 종법제도, 즉 왕위 계승에 관한 전반적인 제도를 정비한다. 그런데 그 내용이 어찌나 복잡한지, 요즘 시대에도 그것만 평생 연구해도 다 이해할 수가 없을 정도라고 한다. 아무튼 이 제도의 핵심은 적자 계승제도이란 점이다, 자식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맞으나, 반드시 본처의 태생만 왕위를 계승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주요 특징이었다.

 

종법제도에 의하면, 본처의 첫 번째 아들만 적장자라고 부르고, 그 뒤 아들들은 적차자가 되었다. 그리고 첩의 태생으로 태어난 아들들 중에서 첫 번째는 서장자, 그 뒤 아들들은 서차자로 불렸다.

 

이때 적장자는 아무리 모자란 존재라고 해도 무조건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으며, 그가 죽는 등의 문제가 생겼을 경우에도, 적차자인 동생이 아니라, 적장자의 자식, 즉 적장손에게 우선적으로 왕위를 계승할 권리가 주었다. 이것만 봐도 왕위 계승에 따른 얼마나 많은 문제가 생길 것을 염려한 것인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서양에서 경우에도 장자를 'first son' 이라고 부르면서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취급하는 모습이 자주 보이며, 왕좌의 게임과 같은 미드에서는 본처가 아닌 후첩의 몸에서 난 자식을 아예 부모의 성조차 쓰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나타난다. 주인공인 존 스노우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그는 아버지의 성인 스타크를 쓰지 못하고 서자들이 공통적으로 쓰는 스노우라는 성을 쓴다.

 

사실 서자에 대한 차별은 물론 매우 비인간적이긴 하지만, 결국 왕권을 둘러싼 수 많은 비극들을 생각하면 어떤 면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 적장자와 적차자들 간의 권력 다툼만 해도 나라 하나가 망할 지경인데, 여기에 서자들까지 끼어들게 되면, 도대체 답이 나올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리고 적장자가 아니라서 왕위에 오르지 못한 적차자들을 대종이라고 부르고, 당연히 왕위에 오르지 못하는 서자들을 소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종법 제도는 이후 아주 오랫동안 중국의 권력 세습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결국 3000년이나 지난청왕조가 망함으로써 비로소 사라진다

 

어떤 면에서 이 제도가 그렇게나 오래 지속된 것 자체가 바로 왕권을 둘러싼 피비린내 나는 싸움들이 그만큼이나 많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멀리도 아니고, 조선에서도 그런 일은 잦았다. 조선의 세 번째 왕이자 세종대왕의 아버지였던 이방원이 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고, 세종대왕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이 형의 아들인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었다.

 

이 두 사건 모두 적차자가 적장자나 적장손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경우이다. 그리고 그 중간에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꼽히는 세종대왕님이 끼어 있는 것이 이채롭기도 하다.

 

주왕조를 일으킨 희발이 사망한 후, 그 아들 희송이 뒤를 이었으나, 그의 나이가 겨우 12살이었다. 그로 인해서 숙부, 즉 희발의 동생인 희단이 섭정을 하게 되는데, 다행히 희단은 권력욕에 가득찬 인물이 아니라 유능한 인재였다.

 

희단은 앞에서 설명한 주왕조의 많은 예법과 정치제도를 만들어서 주왕조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로 평가된다. 하지만 BC 1115년에 희발의 동생, 즉 희단의 동생들 위주로 반란이 일어나는데, 그 명분이 바로 희단이 왕위를 찬탈할 것이란 것이었다.

 

이 반란은 BC 1113년에 희단의 승리로 마무리 되어서 왕권 관련한 문제가 조금 안정화 되는가 싶더니그로부터 6년 후 19살이 된 국왕 희송은 희단이 가진 섭정으로써의 모든 권력을 회수하면서 희단을 죽이려고 한다. 그래서 희단은 멀리 도망치고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주나라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로써는 그리 좋지 않은 결과로 보인다.

 

이후 주 5대 국왕에 오른 희만은 신하인 여후에게 명해서 중국 최초의 법률은 '영형' 을 만들게 되는데, 함무라비 법전이 나온 후 1,200년이 지난 후였다.

 

그리고 이 시기를 마지막으로 중국의 반역사의 시대가 끝난다. 이후 시대부터는 문자 기록이 남아 있으며 사료로써 충분히 가치가 있다. 그래서 이 시대부터를 '역사 시대' 라고 칭한다.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춘추오패시대  (0) 2017.08.06
춘추전국시대의 시작  (0) 2017.08.02
중국 문명의 시작  (0) 2017.07.18
그리스 문명 - 마지막 편  (0) 2017.07.15
대왕 알렉산더 혹은 알렉산드로스  (0) 2017.0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