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펠로폰네소스 전쟁

아이루다 2017. 7. 5. 08:20

 

 

오늘 주제가 될,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설명하기에 앞서서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도대체 우리가 그리스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의 실체에 대해서이다.

 

이것을 이해해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데,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오늘 이야기 할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담긴 진짜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 역사학자들이 그리스 문명이라고 부르는 지역은 현재의 그리스가 있는 지역에서 3천년 전쯤부터 융성했던 문명을 의미한다. 그 문명이 발생했던 지역은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 반도 그리고 크레타 섬까지 포함이 된다.

 

그런데 예전의 그리스는 현재의 그리스와는 달랐다. 물론 당연히 다르다. 그런데 지금 말하는 '다르다' 는 의미는 그저 고려와 조선이 다르다는 수준이 아니다. 아예 완전히 다른 형태였다.

 

고대 그리스는 단일 국가가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당시는 아예 그리스라는 말 자체가 없었다. 그들은 그저 150개 정도의 수 많은 도시들의 연합이었고, 각 도시마다 고유한 국가 명칭이 있었다. 그리고 각 도시는 독자적인 행정 체계가 있었다. 그래서 왕이 있는 나라도 있고, 집정관이 있는 나라도 있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지방 분권 제도가 확실하게 자리 잡은 미국과 같은 형태로 보는 것이 더 맞다. 하지만 사실 이 비유도 제대로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도시 국가들 사이에는 그 어떤 공동의 연방 정부가 없었기 때문이다. , 그들은 그저 도시 국가들의 이기적 목적에 의한 아주 느슨한 연합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같은 언어를 사용했고, 특히 페르시아와 같은 외국의 적이 쳐들어왔을 때는 나름대로 단합이 잘 되었다. 나름대로의 운명 공동체였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평화의 시대였다. 페르시아라는 공동의 적이 사라진 후,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페르시아 전쟁 이전만 해도 아테네와 스파르타만 상대적으로 더 컸을 뿐, 그리스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도시 국가들은 다들 고만고만한 규모였다. 하지만 페르시아 전쟁을 승리한 후, 아테네는 뭔가 특별한 존재가 된다. 승자의 만용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진정한 강자의 출현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페르시아 전쟁의 주역이었던 아테네는 이제 더 이상 고만고만한 도시 국가가 아니었다.

 

그들은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해서 에게 해를 자신의 무대로 삼는다.

 

여기에서 한 가지 꼭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무리를 지었을 때 도덕이라는 안전장치가 어떤 식으로 동작하느냐에 대한 것이다.

 

인간의 각 개인은 기본적으로 양심이라는 존재로 인해 도덕적 삶을 살게 된다. 물론 이것은 나름대로 사회적으로 교육된 것이긴 하지만, 아무튼 사회 속에서 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양심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개인의 과도한 이기적인 행동이나 혹은 타인에게 잘못을 저지를 가능성을 많이 낮춰준다.

 

그렇다면 단체는 어떨까? 단체에도 양심이 존재할까?

 

기본적으로 존재하긴 한다. 양심의 소리는 있다. 하지만 인간이 단체를 이루게 되면 변하는 가장 중요한 점 한가지가 바로 양심이 사라진다는 점이다. 그 어떤 종류의 단체든 간에 공동으로 나타나다.

 

특히 국가는 양심이 없다. 같은 국가에 속한 내 형제, 내 부모, 내 자식을 위해서 하기 때문에, 설령 타국의 사람을 죽이더라도 그것은 양심의 가책을 받는 행위가 아닌 것이 된다. 그러니 개인적으로 살인은 못해도 전쟁이 나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국가는 비양심적 존재이다. 그래서 일단 힘을 가지면 그 힘을 결코 그냥 두지 않는다. 힘이 쎈 개인처럼 참지 않는다. 이런 특징은 현 시대에서도 정확히 동작한다. 단일 국가로는 최고의 힘을 가진 미국이 하는 짓이 그렇다. 그들은 선한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조심스럽긴 하지만 자국의 이득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존재들이다. 물론 우리나라도 그렇다. 만약 타국을 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바로 매국노로 불리게 된다.

 

힘을 얻게 된 고대의 아테네도 그랬다그래서 아테네는 다른 도시 국가를 마치 속국처럼 대하게 된다.

 

이런 변화의 최초의 시작은 바로 페르시아 전쟁을 치른 그리스 국가들이 공동의 방어를 위한 하나의 조약을 맺으면서 시작된다. 요즘으로 따지면 일종의 UN을 결성한 것이다. 그리고 그 조약에 의해 탄생한 그리스 연맹을 '델로스 동맹' 이라고 불렀다.

 

델로스는 에게 해 중앙에 있는 섬으로써, 그 섬에 동맹의 공동 군사 자금을 보관해 둠으로써 공동의 방어를 위해서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힘이 세진 아테네가 이 델로스 동맹에 속한 나라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델로스에 있던 금고마저도 아테네로 옮겨 버린다. 그리고 동맹국가에 행정관을 파견해, 거의 상대 도시 국가를 거의 속국화 시키는 행동을 한다.

 

이유는, 그래도 되기 때문이다. 문명사회 속의 개인은 그렇지 않지만, 국가간은 아직도 정글처럼 약육강식의 세계이다.

 

이런 상황에 BC 449년에 그리스는 페르시아와 정식으로 평화 조약을 맺는다그럼으로써 공동의 외적에 방어하고자 한 목적으로 결성된 델로스 동맹은 그 존재의 이유가 사라지게 된다. 공동의 적과 화해를 했으니 당연하다.

 

그렇다면 아테네는 자신의 우월적 지위를 포기할까? 당연히 아니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이 누리는 달콤한 열매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다른 도시 국가들을 짜서 조공까지 받는다.

 

, 이렇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당연히 주변 국가들의 불만이 생겨나게 된다. 자국 정치에 참견하고, 돈도 달라고 하는데 누가 그것을 반길 것인가. 그나마 자신들의 안정을 지켜줬으니 참았지만, 페르시아와 평화협정을 맺은 상태라면, 그들은 불필요한 존재일 뿐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과연 누가 가장 큰 불만을 가질까? 힘없는 나라들은 불만이 있어도 그냥 있어야 한다. 잘못했다가는 괜히 보복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나라는 바로 스파르타였다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위치하고 있는 도시국가들을 연합하여 아테네와 한판 승부를 벌이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벌어진 원인이다.

 

그런데 이 전쟁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너무나도 다른 정치 체제를 살펴봐야 이해가 될 것이다.

 

우리는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비롯한 많은 도시국가들을 통합해서 그리스라고 부르고, 그들이 만들어 낸 문명을 헬레니즘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사실상 그것은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것임을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스파르타는 오히려 반대의 모습을 지녔었다.

 

원칙적으로 스파르타는 아테네와는 전혀 다른 국가였다. 같은 언어를 쓴다는 이유 말고는, 다른 공통점이 또 있을까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차이가 났다. 요즘으로 말하면 남한과 북한 정도의 차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사실 그것보다도 더했을 것이다. 동족이라는 의식 자체도 거의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들은 그저 서로의 이득을 위한 동맹일 뿐이었다.

 

그래서 이 두 도시국가의 충돌은 단순한 전쟁이 아니었다. 그것은 체제와 체제의 대결이었고, 가치와 가치의 대결이었다.

 


아테네는 상업이 발달한 국가였다. 시민들은 진보적 의식이 강했으며, 지적이고 예술적 행위를 많이 했다. 그리고 그럴 수 있는 밑바탕에는 민주정이라는 발달된 정치 체제가 깔려 있었다.

 

스파르타는 이와는 완전히 정반대였다. 그들은 여전히 농업 중심의 사회였으며, 군국주의가 득세하고 계급이 엄격하게 지켜지는 신분사회였다. 또한 매우 보수적이고 폐쇄적이었으며, 문화적으로도 후진국이었다. 특히 전 인구의 80%가 노예였고, 전체주의가 강하게 지배하는 사회였다.

 

물론 스파르타만 노예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테네도 아마 인구의 50% 정도가 노예로 구성되어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스파르타는 상대적으로 훨씬 높아 보인다.

 

당연하지만, 당시 사회에서 노예제도는 그다지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위대한 철학자라고 알려진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도 살아 생전에 노예제를 찬양하기에 바빴다.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좀 더 깊이 다뤄보도록 하겠다.

 

이렇게 서로 너무도 다른 이 두 도시국가의 전쟁은 어쩌면 반드시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리스라는 작은 세계의 물과 기름이었던 것이다.

 

그 시작은 아테네가 했다. 페르시아 전쟁 이후에 계속 팽창 중인 아테네와 그들로 인해 불안함과 실제적인 피해까지 입고 있는 스파르타는 그것을 불만 섞인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더군다나 아테네로부터 발전된 민주정이라는 새로운 정치 체제는 스파르타의 계급사회를 뒤흔드는 위험요소일 수도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것은 마치 프랑스에서 대혁명이 일어나자 주변 국가들이 왕정이 전복되고 평민들로 구성된 시민정부가 구성되었던 프랑스로부터 느꼈던 불안함과 같은 종류였을 것이다. 사실 기득권인 정치세력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제대로 된 민주주의이다.

 

이 두 도시의 서로 다른 이해와 체제로 인해서 벌어진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크게 두 단계로 나뉜다.

 

첫 번째는 BC 460년부터 14년간 지속된 전쟁인데, 다음에 일어나는 2차에 비해서는 그다지 존재감이 없다. 그래서 어떤 역사학자들은 이것을 그냥 무시하고 BC 432년에 일어나는 두 번째 전쟁을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첫 번째 전쟁은 딱히 누군가의 승리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냥 어느 정도 치고 받고 하다가 서로 지치니 BC 445년에 평화협정을 맺는 형태로 마무리가 되었다. 두 국가는 30년간 평화협정을 맺는데 합의한다.

 

문제는 국가와 국가간의 약속은 언제든 헌신짝처럼 버려질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미 말했듯이 국가는 양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BC 431 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된다.

 

워낙 오래된, 기원전에 일어난 전쟁이라서 왜 그 전쟁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정확히 알 방법은 없다. 하지만 이 둘은 원래부터 화약고였음은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그러니 작은 불씨 하나만 있어도 금세 폭발할 지경이었다.

 

당대의 역사학자인 투키디데스에 의하면, 에피담노스 분쟁이 이 전쟁의 시발점이라고 한다. 작지만 약간 특이한 인구 구조를 가진 한 도시 국가에서 일어난 계급 갈등이 번지고 또 번져서 결국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싸움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때 일어난 전쟁은 단순한 두 국가의 싸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연맹과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연맹의 싸움이었다. 당시 그리스 지역의 세계 대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결과도 참혹했다. 30년 가까이 이어진 전쟁에서 비록 최종적으로 스파르타가 승리하긴 하지만, 그로 인한 피해는 엄청났다.

 

어쩌면 스파르타가 이긴 것이 더욱 더 그것을 부채질 했을지도 모른다. , 요즘으로 따지면 남한과 북한이 전쟁을 했을 경우를 상상해보면 되는데, 당연히 두 국가는 엄청난 타격을 입을 것이고, 여기에서 북한이 이긴다면 결국 그것은 이 나라 전체의 불행이 될 것이다.

 

스파르타는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이 극대화 된 나라였다. , 개인은 전체를 위해서 얼마든지 희생될 수 있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 것이다. 아마도 영화 '이퀄리브리엄' 에 나오는 세상이 바로 스파르타의 본질이었을 것이란 생각도 든다.

 

전체주의는 훗날 독일의 나찌즘, 북한의 공산주의, 우리나라에서조차 유신헌법이란 이름으로 적용된 적이 있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축소되고, 국가의 권력은 한없이 높아지는 형태이다.

 

스파르타는 7세부터 군사 훈련을 시작하며, 20세부터 60세까지 군대에 동원되었어야 했고, 여자는 오직 아이를 낳는 생산 도구로만 여겼으며, 건강하지 않은 아이는 그냥 죽도로 방치를 했다고 한다. 이 얼마나 비인간적인 사상인가?

 

그런데 아테네에 승리를 거둔 스파르타는 아테네에게 민주정을 버리고 자신들의 체제를 따르라고 요구한다그러니까 자신들처럼 과두정즉 소수의 귀족에 의한 정치를 하라는 요구를 한 것이다.

 

이것은 민주정을 발판으로 피어난 아테네 중심의 그리스 문명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 전쟁 이후 아테네는 급속도로 침체되며, 결국 망하고 만다. 더군다나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그 징조가 보였다. 그것은 바로 너무 오래 지속된 전쟁이다 보니 경제가 무너지고, 사회 시스템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전쟁이 오래 지속되었던 것일까?

 


그 이유에는 아무래도 양 국가의 주력 전력의 차이로 인해서 그랬을 것 같다아테네는 최강의 해군력을 가지고 있었고, 스파르타는 최강의 육군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서로의 주력을 공격해서 이기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스파르타가 아테네를 이기려면 해군력이 필요하고, 아테네가 스파르타를 이기려면 육군력이 필요한데, 서로는 그것이 없었다. 그러니 주력 세력이 서로 맴돌기만 할 뿐, 부딪히지는 못한 것이다.

 

아마도 같은 전력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면 전쟁이라도 빨리 끝났을테지만, 결국 서로 잽만 날리면서 아웃복서 형태로 싸우다가 세월만 보낸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전쟁 중에 사람들의 삶은 힘들어진다. 군인들을 먹여 살려야 하기 때문에 세금이 많이 늘어나고, 농토는 황폐해지며, 젊은이들이 징집이 되기 때문에 일할 사람도 부족해진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먹거리조차 부족해진다.

 

이런 저런 연유로 일종의 그리스 내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전쟁은 승자인 스파르타나 패자인 아테네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결국 BC 404년에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항복을 하면서 전쟁은 끝난다. 중간에 많은 일들이 있지만, 그다지 재미있지도 않고, 또 시험을 볼 것도 아니니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아무튼 전쟁 후 패자인 아테네는 완전히 몰락하고 승자인 스파르타의 잠시간 시대가 열지만, 스파르타 역시도 아테네와 같은 길을 가고 만다.

 

힘을 가진 국가가 하는 짓은 똑같기 때문이다. 그들 역시 아테네처럼 패권의 길을 가고 결국 그로 인해서 다른 도시 국가들과 수 많은 갈등을 겪다가 371년 또 다른 도시국가인 테베에 패해서 아테네의 뒤를 따른다. , 승자인 그들은 겨우 30년 남짓한 영화를 누렸을 뿐이다.

 

하지만 테베 역시도 40년 정도 패권을 가지고 있다가 북쪽의 작은 도시국가에서 출현한 한 인물로 인해서 모든 것을 헌납하게 된다. 그가 바로 알렉산더이다.

 

그래서 원래 다음 이야기는 알렉산더 대왕으로 넘어가야 하지만, 역사적 진행은 잠시만 멈추고 이제는 거의 멸망한 그리스 문명이 남긴 유산 중에서 가장 의미가 있는 한 가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그것은 바로 '철학'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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