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페르시아 전쟁

아이루다 2017. 7. 3. 08:39

 

 

인류 역사에는 참으로 많은 전쟁이 기록되어 있다. 전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참여했던 1, 2차 세계대전을 비롯해서,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6.25 전쟁, 우리가 가장 최근에 경험했던 걸프만 전쟁 까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전쟁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어떤 역사학자들은 인류의 역사를 '전쟁의 역사' 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그럼에도 인류는 전쟁을 피하고자 많은 노력도 했다. 하지만 어떻게든 전쟁은 나기 마련이다. 뭐, 트로이처럼 여자 때문에 나는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역사상 최초의 동양과 서양의 전쟁으로 알려진,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전쟁도 그랬다. 그들 역시도 처음부터 전쟁을 원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가능하다면 피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전쟁은 났다.

 

그 전쟁의 최초의 시발점은 페르시아의 한 왕조에게 일어난 변화이다. , 페르시아에 들어선 새로운 왕조인, 아케메네스 왕조가 거대하게 팽창하면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 그들은 제국을 건설하기 시작한다. 즉, 이웃 나라를 침략한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는 페르시아의 이웃 나라 중 하나였다.

 

<당시 페르시아의 영토 (녹색), 오른쪽 하단에 인도가 보인다>


BC 540년쯤 그리스의 한 도시 국가가 페르시아의 침략에 의해서 멸망한다. 당시 페르시아는 북쪽으로는 다뉴브강, 남으로는 이집트와 리비아, 동쪽으로는 인도까지 영토를 확장 중이었는데, 이제 자신들의 서쪽, 즉 에게 해 쪽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첫 희생양이 바로 소아시아 지방에 자리를 잡은 그리스의 도시 국가, 리디아였다.

 

페르시아는 리디아를 침공한 후, 리디아의 수도 사로디스에 자신들의 총독부를 세운다. 그리고 한참을 그렇게 지내게 된다. 하지만 조국을 빼앗긴 리디아의 시민들은 그냥 있을 수는 없다.

 

결국 BC 499년에 리디아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페르시아의 지배로부터 그리스인들이 반기를 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힘은 약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기적같은 일이 일어난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 본국에서 그들의 반란을 지원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들이 바로 아테네와 에레트리아였다. 그들은 연합군을 구성해서 리디아로 온다.

 

그리고 이 연합군은 사로디스에 있던 페르시아의 총독부를 파괴시켜버린다. 하지만 이 승리는 아주 잠깐 지속된 후, 그리스 연합군은 페르시아의 기병대에 의해 곧바로 패퇴되고 만다.

 

이후 이 사건은 페르시아를 크게 자극한다. 그로 인해서 결국 그리스와 페르시아는 본격적인 긴장감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전까지는 서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각자의 영역을 존중했던 두 나라 간의 암시적 관용은 사라지고 전쟁의 기운이 몰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먼저 손을 쓴 것은 페르시아였다. 그들은 6년이 지난 BC 493년에 리디아 반란을 진압하고 내친김에 아예 그리스 본토로 진출하기로 결정한다. 이때 이 결정을 한 페르시아의 황제가 바로 다리우스 1세였다.

 

그리스 원정을 결정하고 난 후 2년이 지난 BC 491, 다리우스 1세는 병력을 꾸려서 그리스 원정에 나선다.

 

페르시아의 최초의 공격은 에레트리아였다. 그것은 바로 예전에 아테네와 연합하여 자신들을 공격했던 도시 국가였다.

 

페르시아는 에게 해 중심부에 위치한 낙소스 섬을 점령한 후, 그리스 본토의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던 에레트리아를 공략해 겨우 7일만에 점령을 해버린다. 그리고 자신들을 공격했다는 과거의 행동에 대한 보복으로 거의 모든 주민을 노예화 시켜 버린다. 얼마나 끔찍한 학살이 자행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거기엔 관용이란 없었을 것이 확실하다.

 

<소아시아, 지금의 터키 지역을 점령한 페르시아는 본격적으로 그리스로 진출한다>


그리고 첫 전투를 승리하여 한껏 사기가 올라간 페르시아 군은 곧바로 아테네의 코앞인 아티카 해안으로 이동하는데, 거기엔 정박하기가 좋은 마라톤 해안이 있었고, 그 옆으로는 아테네와 연결된 마라톤 평원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들이 마라톤 평원만 통과하면 그리스 최고의 도시, 아테네가 수중에 들어올 참이었다.

 

페르시아는 아테네 공략을 위한 최고의 지형을 선택해서 상륙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테네는 무기력하게 당한 에레트라아와는 달랐다. 그들은 영리한 전략을 쓴다. 그것은 바로 자신들의 도시에서 기다리지 않고, 마라톤 평원에 막 도착하고 있는 페르시아 군을 먼저 공격한 것이다.

 

싸움으로 따지면 일명 '선빵' 이다. 사실 싸움에서 먼저 치는 것만큼 중요한 것도 없다. 그것도 상대의 급소를 치면 그것이 최고의 효율적인 전략이다.

 

아테네는 정확히 그것을 노린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막 도착하여 제대로 전열도 가다듬지 못한 페르시아 군의 측면을 노린다. 그리고 그 전략은 바로 페르시아의 급소가 된다.

 

아테네 군은 중무장한 보병 9천명으로 페르시아의 측면을 돌파하여 중앙까지 단숨히 돌파를 하는데, 이것은 전투의 시작이자 끝이 된다. 이 한방으로 페르시아는 패배를 하고 만다. 이때 페르시아는 6,400명의 전사자를 낸 반면, 그리스는 겨우 192명만 죽었을 뿐이다. 한 마디로 대승이었다.

 

일단 기세가 꺾인 페르시아는 바로 배를 타고 회군을 하는데, 그들은 그렇게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이들 역시도 머리를 쓴다. 그것은 바로 모든 군대가 마라톤 평원에 모여있는 아테네의 본진을 공략하는 전략이었다. 이것은 사실 매우 비겁한 전략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전쟁에 도덕이 무슨 쓸모가 있으랴. 젊은 군인들이 모두 빠져나간 아테네는 노인과 여자 그리고 아이들밖에 없는, 한 마디로 무주공산이었던 것이다.

 

아테네 군이 이것을 파악하게 되자, 그들은 매우 놀라게 된다그들은 자신의 소중한 가족들이 있는 자신들의 고향이 페르시아 군에 학살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로 인해서 심각한 심적 타격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이때 또 다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다. 그것이 바로 현재 자신들의 위치에서 42km 정도 떨어진 아테네까지 단 몇 시간 만에 주파를 해낸 것이다. 오전 10시에 출발해서 오후 늦게 도착을 했다고 하니, 단 몇 시간이라고 표현하면 좀 과하겠지만, 중무장을 한 보병의 상태로 보면, 엄청나게 빠른 이동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이후 페르시아는 아테네로 진격하기 위해서 근처의 팔레론만에 도착하지만, 이미 본진에 도착해 있는 아테네 군을 보고는 결국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떠나가서 본국으로 돌아간다.

 

1차 페르시아 전쟁은 이렇게 끝난다.

 


그리고 그리스 군의 경이로운 마라톤 평원의 이동을 기념하여 1896년 근대 올림픽이 열릴 때, 프랑사의 언어학자 미셸 브레알의 의견에 따라 42.195km를 달리는, 마라톤 평원의 이름을 딴 운동 종목이 추가되게 된다.

 

패배한 다리우스 1세는 이후 다시금 그리스 정복을 꿈꾸지만, 그는 그리스 원정이 끝나고 5년 후인 BC 486년도에 이집트 원정 중에 사망하고 만다. 이렇게 해서 페르시아의 그리스에 대한 욕망은 그대로 사라지는 듯 했다. 하지만 결국 이것은 더욱 큰 전쟁을 불러오게 된다.

 

그것은 바로 다리우스 왕을 이어서 새롭게 왕위에 오른 크레스크세스 왕으로 인해서 벌어진다.

 

왕위에 오른 크레스크세스 왕은 2년 만에 선왕이 처리하지 못한 이집트 반란을 진압하고는 4년간의 준비를 거쳐 BC 480년에 수십만 명 규모의 대규모 원정대를 꾸린다.

 

1차 침공시기가 실패한 이유로 병력 부족을 꼽았는지, 아니면 그럴만한 능력이 되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고대 전투 규모로는 정말로 큰 원정대를 꾸린 것이다.

 

이 대규모 부대는 480년 초여름 그리스의 도시 국가인 마케도니아와 테살리아를 연속으로 점령하면서 그리스에 커다란 압력을 주게 된다. 그리고 그리스 깊숙이 전진한다.

 

그리스도 당연히 그대로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페르시아가 과연 어떤 진로로 공격을 해올지 명확하게 판단할 수 없었다. 그래서 1차로 보병 만 명을 템페 계곡에 보내지만, 페르시아 군은 이곳을 우회해서 테르모필레 계곡으로 진격해 온다.

 

그리고 여기를 막는 소수 정예의 300명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가 이끄는 300명의 스파르타 군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300의 숫자로 수십 만의 병력을 3일간 막아낸다.

 

영화 '300' 이 바로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가 이끄는 300명의 전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물론 이 영화는 많은 부분이 허구에 가깝긴 하지만, 그들이 대단한 업적을 남긴 것임에는 분명하다. 훗날 그들의 영웅적 행동을 기려 기념비가 새겨지는데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졌다고 한다.


"우리는 그리스를 위하여 다 함께 싸웠고 다 함께 죽었나니, 나그네여, 스파르타에 가거든 이 말을 전할지어다."

 

<영화 300의 한 장면. 레오니다스 왕이 오늘의 전투는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고 말하는 장면>

  

3일을 버텼지만, 결국 테르모필레가 무너지자 그리스 군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뒤로 물러서게 된다. 그리고 아테네 근처의 살라미스 섬에서 전열을 가다듬는데, 그리스 본토 역시도 자신들의 도시를 비우고 피난을 간다.

 

아테네 인들은 적군이 밀려오는 상황에서도 투표를 통해 피난을 결정하는 민주적 절차를 보여주기도 한다.

 

<2차 페르시아 전쟁 중, 가장 유명한 두 번의 전투, 각각 300의 영화 소재가 되었다.>


그리고 이후 그리스는 페르시아에게 크게 한 방을 먹이는데, 그것은 바로 육상 전투가 아닌 해전이었다. 그들은 살라미스의 좁은 해협을 이용해서 페르시아 군에게 크게 승리를 거둔다. 이 이야기는 마치 임진왜란 당시에 명랑해전 당시 울돌목이란 좁은 지형을 이용해 왜군에게 대승을 거둔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를 떠오르게 한다.

 

두 이야기 모두 자국의 지형을 최대한 활용해서 압도적 전력을 이겨낼 수 있게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지형에 대한 이해가 전쟁의 승리에 얼마나 크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아무튼 이 전투의 패배로 인해서 페르시아는 사기가 급속해 떨어진다. 특히 크세르크세스 왕의 심경에 변화가 일어나 결국 퇴각을 결정한다.

 

이것이 바로 영화 '300' 의 후속작으로 나온 '제국의 부활' 편에서 다뤄지는 내용이다. 사실 이 후속작은 도대체 답이 없긴 했다. 역사적 사실을 엄청나게 왜곡한 것은 그나마 영화니까 이해할 만 한데, 재미까지 없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배우인 '에바 그린' 이 나온 영화이긴 했는데, 도대체 그녀는 왜 이런 영화를 찍었을까 하는 기억만 남아 있다.

 

아무튼 페르시아의 왕은 퇴각을 하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들의 병력 일부를 그리스 본토에 남겨두고 가는데, 결국 이들은 폴라타이아이 전투와 마켈레 전투에서 연속으로 패하면서 결국 더 이상의 전쟁을 포기하게 된다.

 

, 2차 페르시아 전쟁이 모두 끝난 것이다.

 

두 번에 걸친 동서양 최초의 전쟁은 이렇게 해서 최종적으로 그리스의 승리로 끝이 난다. 대제국이었던 페르시아는 작은 도시 국가들의 연합이었던 그리스 군에게 압도적 숫자의 병력을 가지고도 이기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페르시아의 굴욕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들은 후에 그리스에서 탄생한 한 영웅에 의해서 아예 나라 자체를 점령당하게 된다. 그가 바로 인류 최초로 대왕이라는 칭호를 받은 알렉산더이다. 아무튼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기로 하고, 전쟁 후의 그리스는 어떤 변화를 겪게 되었을까?

 

사실 이겼으니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승리가 좋게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아테네의 급속한 성장은 그리스 도시 국가 연합에 큰 암운을 드리우게 한다.

 

지금의 UN도 비슷하다. 너무 강한 나라가 있으면 아무리 국가들이 연합을 맺어도 많은 중요한 정책들은 강한 국가들의 이득적 입장에 따라서 결정되고 만다. 그리스 연합도 그랬다. 아테네라는 특별하게 강한 도시 국가가 생성된 후도시간의 관계는 수평에서 수직 구조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이것을 가장 못마땅하게 여긴 도시 국가가 바로 스파르타이다.

 

그래서 결국 두 도시 사이에 아주 긴 전쟁이 일어난다. 이 전쟁이 그 유명한 펠레폰네소스 전쟁인데, 이 전쟁은 페르시아와의 전쟁과는 전혀 그 양상이 달랐다.

 

페르시아 전쟁은 외부 적의 싸움이었지만,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같은 그리스인 사이의 싸움이었다. 그리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그리스 연합 내의 서로 다른 체제와 체제의 대결이었다.

 

다음 시간에 이 전쟁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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