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민주주의의 태동

아이루다 2017. 7. 1. 08:03

 

 

지난 시간에서 다뤘던, 트로이를 멸망시킨 주체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자리를 잡았던 미케네 문명 소속의 도시 국가들의 연합이었다. 하지만 10년간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그들에게 다가올 운명은 가혹했다. 그들 역시도 트로이와 같은 멸망의 길을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트로이 전쟁이 끝난 후, 100년도 지나지 않아서 그랬다전쟁의 승자들은 BC 1100년도 경, 같은 그리스인인 도리아인들에게 침략을 받고는 결국 멸망하고 만다.

 

이들을 멸망시킨 도리아인들은 마케네 문명을 이뤘던 아카이아인들에 비해서 훨씬 원시적인 부족이었다그럼에도 그들은 단 한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철제무기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원래 초기 그리스인들이 계승한 크레타 왕국은 청동기 기반의 문명이었다따라서 그리스인들 역시도 청동기 무기를 사용하고 있었다하지만 도리아인들은 철제 무기로 무장한 채 그들을 공격을 해 왔다.

 

청동기와 철제 무기, 별 차이 아닌 것 같지만, 전장에서는 싸울 때는 한쪽이 다른 한쪽의 검을 잘라버릴 수도 있는 차이를 만들어 낸다. 흠집이 나지 않는 무기와 부딪힐 때마다 날이 무뎌지는 무기의 싸움이었던 것이다.

 

이후 미케아 문명을 이뤘던 이들은 완전히 소멸하고, 그로 인해서 그들이 계승했던 크레타 문명 또한 영원히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이후 이 지역에 새롭게 나타난 문명은 이제는 온전히 그리스의 것이 된다.

 

하지만 그러기엔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미케아 문명을 말살한 도리아인들이 전혀 문명적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철제 무기를 사용했을 뿐, 초기에 그리스로 이동한 인도유럽어족의 유목민에서 별로 변한 것이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런 연유로 그리스는 이후 약 300년간의 암흑 시대를 보내게 된다. 이 시대가 암흑시대인 이유는, 그 어떤 종류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단지 고고학적으로 발굴이 안된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남길만한 것이 없어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결과론적으로 그렇다.

 

그래서 BC 1100년 경 미케아 문명이 멸망한 후 300년이나 지난 BC 800년 경쯤 되어서야,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 문명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그리스인에 의한, 진짜 그리스 문명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 시기는 도시 국가의 발달이 큰 특징인데, 미케네 문명 몰락 당시에도 살아남은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발전이 눈에 띈다. 이 두 도시 국가는 다른 그리스 도시 국가들에 비해서 월등히 컸고 그래서 더 많은 발전과 더 강한 군사력을 가지게 된다.

 

그리스인들이 이런 발전을 할 수 있는 원동력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농사 기술의 발달이고다른 하나는 선진 문명과의 조우이다.

 


농사는 특히 쟁기날이라는 농사 도구가 생기면서 당시로써는 혁명적인 생산량 증대를 할 수 있게 된다. 쟁기는 우리나라 예전 시골에서 소에 묶어서 땅을 뒤집는데 쓰던 도구인데, 농사를 지을 때 땅을 뒤집어 줘서 농토를 비옥하게 만들고 또한 잡초를 땅 속에 묻을 수 있는 효과가 있어서 도움이 크게 된다.

 

일단 농산물이 풍족해지자 당연히 인구가 급증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인구가 급증하자 새로운 문제가 생긴다. 그것은 바로 땅이 부족해지는 현상이다. 땅은 유한한데, 인구가 자꾸 늘어나니, 갈등이 심해진다. 그러니 결국 싸움이 난다.

 

싸움은 처음엔 작은 규모였을 것이다. 하지만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서 점점 더 큰 규모의 싸움이 벌어지고, 결국 그로 인해서 나중엔 군사적인 목적을 가진 도시 공동체들이 출연하게 된다. 이들이 바로 나중에 만들어지게 되는 많은 도시 국가들의 원형이다.

 

두 번째 원동력이었던 선진 문명과의 조우는 주로 무역을 통해서 이뤄진다. 당시 무역은 주로 상인의 대명사로 불렸던 페키니아 사람들이 담당했는데, 이들은 곡식이나 향료와 같은 것만 전달해준 것이 아니라 오리엔트 지역에 융성해 있던 문명의 발명품들을 함께 소개시켜 줬다.

 


그리고 이때 오리엔트 문명에서 받은 것들 중 최고의 발명품은 바로 문자였다. 오늘 날 알파벳이라고 불리는 문자가 이때 처음으로 유럽 지역에 소개가 된 것이다이 문자는 이후 수 많은 변형을 거쳐서 지금 유럽 지역에서 사용되고 있는 다수의 언어들의 표기를 담당하고 있다.

 

무역 거래는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생산력을 증진 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서 상품 경쟁도 크게 발달하게 된다.

 

이런 농업 기술의 발달과 상업 거래를 통한 선진 오리엔트 문명과의 교류가 가져 온 효과는 대단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리스 문명' 이 태동된 것이다.

 

이때 다양한 도시 국가들이 형성되지만그 중에서 아테네와 스파르타 정도만 기억해도 별 문제는 없을 듯 하다.

 

이 두 도시 국가들은 전성기 시절에 인구가 약 40만을 넘겼다고 하는데, 현대적 시선으로 보면 잘 감이 오질 않긴 한다. 아무튼 당시 기준으로는 많았던 듯 하다.

 

도시 국가 발달은 문학과 예술의 융성으로 이어졌으며 철학과 과학의 발달로도 이어졌다. ,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그리스 문명의 중요 요소들, 문학, 예술, 철학, 과학이 모두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비로소 문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기본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이에 따라 각 도시 국가들은 지배 체제에서도 큰 변화를 겪었는데, 초창기 왕이 다스리는 왕정에서, 귀족이 다스리던 과두정으로, 그리고 과두정에서 쿠테타를 일으킨 세력들이 지배를 하는 참정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참정은 도시 국가들의 상황에 따라서 민주정이나 혹은 금권정치로 이어졌다.

 

민주정은 시민의 투표에 의한 정권이고 금권정치는 재산을 가진 정도에 따라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정도가 제한되는 형태였는데, 과거 귀족에 의한 과두정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왜냐하면 재산은 상인들도 많이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으로 따지면 재벌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으로 보면 된다.

 

그런데 왜 정치 구조가 이렇게 급하게 변하게 되었을까? 원래 이런 것들은 잘 변하지 않아야 정상이다. 누가 이미 가진 권력을 스스로 내놓겠는가? 그래서 이런 식으로 정치 권력이 변했다면, 그럴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왕이 스스로 권력을 내놓았을 리가 없고, 귀족이 스스로 권력을 포기했을 리가 없다. 그러니 여기엔 반드시 이유가 있다.

 

대부분의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최초엔 왕이 다스리는 왕정체제였다. 그런데 이것이 점점 귀족정으로 바뀐다. 왜냐하면 귀족들의 힘이 점점 강해졌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소유한 땅이 점점 더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귀족들의 땅이 늘어났을까?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땅은 오히려 점점 더 부족하게 되었는데 말이다그 이유에는 인구 증가의 역설이 있다.

 

인구가 늘어나니 한 사람당 소유 가능한 땅이 점점 줄어들게 된다. 아버지가 10의 땅을 가지고 있는데 자식을 4명 낳고 죽으면, 자식들은 2.5씩의 정도의 땅을 소유할 수 있다. 아버지에 비해서 1/4 수준의 경제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또한 그 다음 자식들은 더 줄어들게 된다. 이런 식으로 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땅이 세대를 거쳐 내려갈수록 줄어드니, 후손들은 점점 더 먹고 살기가 힘들다.

 

, 빈농이라고 불리는 못사는 농민이 점점 늘어나면서 결국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 그럼 이들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일단 당장 먹어야 하니, 가진 땅을 파는 수 밖에 없다. 그럼 누가 그 땅을 샀을까? 똑같은 처지의 빈농들이 그 땅을 살 수 있을 리가 없다. 당연히 돈이 많은 귀족들이 그 땅을 사게 된다. 그리고 빈농은 땅을 헌납한 채, 이젠 자영농이 아닌 소작농을 하게 된다. 땅이 없으니 남의 땅에 농사를 짓고 세금을 바치는 것이다.

 

소작농들은 매년 수확된 농작물의 5/6을 귀족에게 세금으로 내고 나머지 1/6만 가지고 살아야 했다. 그리고 그것마저도 잘 안되면 팔 것이 없으니 자신의 몸을 팔아서 스스로 노예가 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해상 무역이 발달하면서 싼 가격의 외국산 농산물이 수입된 것도 농민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사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에서도 싼 중국산 농산물이 수입되면서 기존에 농사를 짓던 분들이 수지타산이 맞질 않아서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치명적인 사건 하나가 더 일어난다. 그것은 바로 BC 7세기 무렵 화폐시스템이 도입된 것이다.

 

왜 화폐가 되입된 것이 치명적인 문제로 작용할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이란 존재가 기회가 주어진다면 얼마나 탐욕스러워질 수 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오늘 날에도 그리 다르지 않다.

 


원래 화폐가 없던 시절에는 모든 것이 물물교환으로 이뤄졌다그러니 재산을 축척하는 방법도 결국 생산물을 쌓아놓는 방법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방식은 문제가 여러 가지 있었다. 일단 첫 번째는 보관을 하려면 장소가 필요하다는 문제였다. 많을수록 보관에 대한 비용이 증가했다. 더해서 모든 농업 생산물은 시간이 지나면 썩거나 맛이 떨어지는 단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보관을 하면 할수록 손해를 입게 된다는 점이다특히 두 번째 문제는 많은 농업 생산물을 저장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없게 만드는 치명적 문제였다.

 

그러다 보니 초기에 귀족들은 농산물들을 그냥 썩히기 보다는 기근에 시달리는 농민들에게 나눠줘서 인덕이라도 얻으려고 했다. 어차피 버릴 것이라면 그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

 

그런데 화폐가 도입되자, 상황은 급변한다. 귀족들은 더 이상 창고도 필요가 없어졌고, 더해서 돈은 보관을 오래해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이런 돈의 특징은 모든 것을 바꿔버리고 만다.

 

여기에 인간의 탐욕이 더해지니, 귀족들은 이제는 굶고 있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곡식을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돈을 빌려주고 더해서 빌려준 돈에 이자까지 더해서 더 많은 돈을 벌려고 하게 된다. 그리고 돈을 제대로 갚지 못하는 자는 노예로 삼아 버리게 된다.

 

돈의 이런 점은 현대 경제 체제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는 특징이다.

 

아무튼 이렇게 더 많은 재산을 갖게 된 귀족들은 점점 힘이 강해지자 독점적으로 정치 권력을 잡고 있던 왕정을 폐기시키고, 이제는 자신들이 모여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귀족정을 수립하게 된다하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귀족들에게 땅을 뺏기고 굶주리거나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수의 불만 세력이 등장함을 의미한다.

 

사람에게 있어서 먹고 사는 것은 가장 큰 문제이다. 잠이야 어디에서든 잘 수 있지만, 먹을 것을 먹지 못하면 죽는다. 그래서 먹고 사는 것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면 반드시 그로 인한 불만이 생겨나고 더해서 갈등도 일어난다그러다가 결국 싸움이 나고 결국 전쟁까지 이어진다.

 

귀족정을 수립한 귀족들이 마주해야 하는 현실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들은 신나게 돈을 모으지만, 너무도 많은 사람들의 것을 착취했다. 그래서 다수의 사람들의 불만은 점점 더 고조되게 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어떤 것도 해결될 수가 없다. 불만이 많은 사람들이 늘어난다고 해서 어느날 갑자기 귀족들이 자신이 소유한 돈을 내놓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빈농들의 반란으로 이어지지는 못한다. 원래 그런 사람들이 뭉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의 불만을 등에 업고는 새로운 정치 세력이 등장하게 된다.

 

그들이 바로 귀족정을 쿠테타로 전복시킨 참주정이었다. 하지만 참주정의 시대는 짧게 끝났다. 왜냐하면 그들의 배후엔 다수의 빈농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쿠테타 세력에 힘을 실어 준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정치 세력을 전복시킨 경험이 있었기에, 참주정에 의해서 지배된 나라 역시도 변화를 할 수 있도록 압박을 행사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민주주의의 태동이다.

 

그래서 이런 경험은 참으로 중요하다. 영원할 것 같은 권력을 무너뜨린 기억은 아무리 강해 보이는 정권이라고 해도 다 함께 같이 하면 무너뜨릴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하니까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4.19와 같은 시민 혁명이나 최근의 대통령 탄핵이 역사적으로 중요하게 다뤄져야 하는 이유이다. 이런 경험의 기억들은 기득권이 패권을 휘두르는데 있어서 언제나 강한 억제제로 작용한다.

 

고대 그리스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 빈농으로 구성된 평민들의 경제력과 정치의식이 발달함에 따라서 참주정은 자연스럽게 민주정으로 변화하게 된다이때 예전에는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던 병역에 관한 것도 같이 분담하게 되면서, 중소농민층은 이젠 어엿한 한 명의 시민으로써 성장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이 정치에 참여하면서 민주정의 근간이 되어 준다.

 

역사적으로는 이 사이에 많은 인물들이 나타난다.

 

귀족정으로부터 최초의 개혁을 단행한 솔론, 그를 이은 최초의 참주 페이시트라토스, 그의 아들인 히피아스, 그리고 새로운 참주인 클레이스테네스로 이어진다.

 

이 네 명 중 폭정을 일삼은 히피아스를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은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꽃 피우는데 크게 기여를 한다. 그래서 아테네는 의회, 즉 지금으로 따지면 국회의원이 생겨나고, 시민들에게는 선거권이 부여된다.

 

이후 아테네는 펠리클레스라는 인물이 나타나면서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완성이 되는데, 그가 재판을 제도화 함으로써 아네테는 현대 민주주의의 근간인 입법, 사법, 행정의 구조를 갖게 된다.

 

그리고 이 사이에도 또 전쟁이 일어난다. 그런데 이때 전쟁은 트로이 때와는 전혀 다르다. 기본적으로 트로이 전쟁은 같은 그리스 인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었지만, 새롭게 일어나는 전쟁은 아예 다른 국가와의 전쟁이었고, 또한 그렇기에 심하게 한쪽으로 기울어진 전쟁이기도 했다.

 

이제 막 민주주의를 완성하고 있는 그리스가 상대해야 할 나라는 바로 동양의 거대한 제국 '페르시아' 였다. 페르시아는 도시 국가들의 연맹으로 이뤄진 그리스가 감당하기엔 너무도 거대한 적이기도 했다.

 

이 전쟁은 이후 아주 오랜 전통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서양과 동양의 충돌이고,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충돌이 되기도 한다.

 

다음 시간에는 그리스와 페르시아 간의 한 판 승부를 바라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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