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대왕 알렉산더 혹은 알렉산드로스

아이루다 2017. 7. 9. 10:53

 

 

알렉산드로스는 우리는 흔히 알렉산더로 알고 있는 인물이다. 그런데 원래는 알렉산드로스라고 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렇게 하긴 해야 하는데, 알렉산더가 너무 입에 붙어 있다. 그래서 그냥 알렉산더로 하려고 한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라고 해야 함은 잊지 말아야겠다.

 

BC 356년에 그리스의 도시 국가 중 하나인 마케도니아의 왕 필립포스 2세는 한 명의 남자 아이를 얻는다. 그리고 그로부터 20년 후, BC 336년에 그 남자 아이는 마케도니아의 왕위에 오른다. 하지만 그 과정이 그리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왕위 경쟁에서 밀려 자칫하면 왕이 될 수 없었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만약 정말로 그랬다면, 세계 역사는 정말로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아무튼 역사에서는 과거에 대한 가정은 무의미하다는 명언을 떠올리며, 절묘한 시기에 선왕 필립포스가 죽고 그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사실만을 보자.

 

그가 바로 그 유명한 알렉산더이다.

 

힘들게 왕위에 오른 그가 처음 한 일은 다름 아닌, 그와 왕위 계승 경쟁을 벌였던 다른 왕자들에 대한 숙청이었다. 한 마디로 피의 숙청이었고, 왕자들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엄마인 선왕의 왕비들도 모두 함께 참살되었다. 더해서 다른 왕자를 지지했던 귀족들 역시도 피의 보복을 피해가지 못했다.

 

그가 왕위에 오른 후 두 번째로 한 일은 그리스 전역에서 발생한 반란, 특히 아테네와 테베의 연합군을 박살 낸 것이었다. 그는 당시 가장 강한 도시 국가 중 하나였던 테베의 방어벽을 뚫고 들어가 도시 자체를 완전히 무자비하게 짓밟아버렸고, 그 소식을 들은 아테네는 겁을 잔뜩 먹고 알아서 성문을 열었다고 한다덕분에 아테네는 알렉산더의 무자비한 보복을 피할 수 있었다.

 

이후 그리스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한 명에 의해서 거의 통일된 국가처럼 된다.

 

그렇게 그리스를 정리한 그가 시선을 돌린 곳은 바로 페르시아였다. 과거 200년 전쯤에 자신의 땅을 침범했던, 그 페르시아 말이다. 사실 그들은 패하고 돌아갔는데도 말이다.

 

그는 왕위에 오른 후 2년 후인 BC 334년도에 헬레스폰토스 해협, 즉 지금의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넌다. 이것은 이후 10년 정도 기간 동안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진군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는 알렉산더 정복 전쟁의 알리는 첫걸음이 된다.

 

그는 그리스보다 영토가 50배 넓고, 인구수가 20배 더 많은 페르시아를 향해 진군을 시작한 것이다. 당시 페르시아는 다리우스 3세가 지배하고 있는 중이었다.

 

알렉산더는 3만 명의 보병과 5천기의 기병, 3 5 명의 병사를 이끌고 거침없이 동쪽으로 이동을 한다.

 


알렉산더의 군대와 페르시아의 첫 번째 전투는 그라니쿠스에서 이뤄진다. 그라니쿠스는 예전에 일리온, 즉 트로이 근처에 흐르던 강인데, 수심이 나름대로 깊어서 알렉산더의 군대가 그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강폭이 좁고 깊이가 얕은 상류로 멀리 돌아 넘어야 했다. 그리고 페르시아 군도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예상을 했다.

 

그런데 알렉산더는 이점을 거꾸로 이용한다. , 강을 그냥 넘어 버린 것이다. 특히 말을 탄 기병으로 강을 재빠르게 건넌 후, 그대로 페르시아 군대의 본진으로 돌진해 버린 것이다.

 

당시 알렉산더 군대의 기병은 1 8백명의 마케도니아 최정예가 소속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활을 주무기로 한 페르시아의 기병과는 달리 중무장을 한 채 적진에 돌진해서 싸우는 일종의 돌격부대였다. 이런 그들이 번쩍이는 방패를 들고 페르시아의 기병대로 돌진해 갈 때, 페르시아의 기병들은 무엇을 느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공포였을 것이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전쟁은 결코 숫자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사기이다. 그리고 알렉산더의 기병은 사기가 한없이 높았고, 페르시아 군대는 겁을 먹어서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페르시아 군은 나름대로 준비를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물불을 가리지 않고 돌진해 오는 알렉산더의 군대에 밀려 도망치기 시작한다. 전쟁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그렇게 끝났다.

 

이 운 좋은 첫 승리는 알렉산더의 앞길에 아주 큰 의미가 된다. 그것은 바로 소아시아, 즉 지금의 터키 지방에 있는 많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알아서 항복을 하는 것이었다. 알렉산더는 이렇게 많은 도시 국가들을 복속시키면서 서부 해안 지대를 따라 남하를 하는데, 그것은 바로 페르시아의 해군을 고사시키기 위해서였다.

 

해군을 갖지 못한 알렉산더는 해군이 머물 항구를 함락함으로써 페르시아 해군을 제압하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작전은 또 다른 운이 따르면서 성공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이 기간에 그 유명한 고르디우스 매듭을 풀어서 고대로부터 내려온 신탁의 주인공이 자신임을 증명했다고 전해진다. 원래 고르디우스 매듭은 아주 복잡하게 얽혀 있는 매듭인데, 이것을 다 푸는 자는 아시아의 왕이 된다는 전설이 있는 매듭이었다. 아무래도 많이 풀기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알렉산더는 그 매듭을 칼로 잘라서 풀어 버린다. , 딱히 조건은 없었으니 풀긴 푼 것이다. 이것은 마치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콜롬부스가 달걀의 밑부분을 깨서 달걀을 세우는 이야기와 비슷하기도 하다.

 

알렉산더가 각 도시들을 점령하면서 보여준 태도는 명확했다. 반항하면 씨도 말리지 않고 다 초토화 시키고, 알아서 항복하며 털끝 하나도 건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이런 태도는 그가 별다른 전투도 없이 많은 도시들을 점령할 수 있는 힘이 되어 주었다. 생각해 보면 참 똑똑한 행동이다.

 

이렇게 1년이 지나간다.

 

그리고 BC 333년 알렉산더와 이번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쟁터에 나온 페르시아의 황제인 다리우스 3세가 두 번째 전면전을 펼친다. 그곳이 바로 이소스 평원이다.

 


당시 페르시아의 군대는 약 11, 알렉산더의 군대는 4만 정도 되었다고 하니, 그리 만만한 전투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페르시아 군에는 다리우스 황제가 직접 참가했으니, 사기가 꽤나 높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이 전투는 그라니코스와 다르게 전개되어야 옳았다.

 

문제는 이소스 평원이 그다지 넓지 못해서 11만이라는 병력을 효율적으로 펼치기가 쉽지 않았고, 두 번째 문제는 알렉산더는 전쟁 전술에 있어서 천재적 재능을 타고 났다는 점이었다. 혹은 그의 주변에 그런 인물이 있었거나 말이다.

 

알렉산더는 다리우스 3세가 직접 전장에 나온 것을 알고는, 자신의 정예 중무장 기병을 끌고 무조건 왕을 향해 돌진해 버렸다. 어떻게 되었을까?

 

페르시아의 병력이 11만인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왕이 죽으면 끝나버리는 것이다. 특히나 전제 군주제를 택한 페르시아에서 왕의 의미는 엄청났다. 그는 신에 가까운 존재였다. 그런 그가 죽을 위기에 처하자 그는 전투고 뭐고 상관없이 그냥 도망치고 만다.

 

이것으로 전투는 끝난 것이다. 자신들의 최고 사령관이 도망친 것을 본 페르시아 군은 더 이상 싸울 사기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페르시아는 이 전투에서 대패를 하게 된다. 특히 다리우스 황제는 도망치느라 자신의 어머니, 아내, 공주를 모두 알렉산더의 포로로 남겨 두는 실수를 한다.

 

개인적인 의견으로 도대체 전쟁터에 식구들을 왜 데리고 왔는지 이해가 잘 안 간다아마도 자신이 이길 것을 확신하고는 자랑하려고 데리고 온 것 같기도 하다. 아니면 당시 전쟁은 원래 그렇게 식구를 데리고 다니는 것이 풍습이었거나 말이다.

 

이후 도망친 다리우스는 알렉산더에게 사절단을 보내 엄청난 돈과 자신의 공주를 아내로 주겠다는 약속까지 하면서 그를 회유한다.

 

그래서 두 번째 페르시아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알렉산더는 두 가지 선택의 길이 있었다. 하나는 바로 다리우스 황제의 제안을 받아들이고는 계속 서쪽으로 나가서 페르시아 본진으로 가는 방향이 있었고, 다른 하나는 더 남쪽으로 내려가 이집트로 가는 것이었다.

 


일반적이라면 당연히 페르시아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정상이겠지만, 그는 알렉산더였다. 그래서 그는 이집트로 남하하기로 결정한다. , 멈추지 않고 계속 정복 전쟁을 하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집트로 가는 길에 가자와 티레와 같은 페르시아 군대가 주둔한 이집트 도시들과 전투를 벌이는데, 당시 엄청난 공성전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전투들에서 그는 천재적인 군사 전술을 짜내어 결국 결사 항전하는 두 도시를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그의 성공이 이집트 전역에 퍼지자, 나머지 모든 도시는 알아서 성문을 열고 알렉산더를 맞이하게 된다. 특히 페르시아에 지배를 당했던 이집트 인들은 그를 맞이하는 수준이 아니라,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더군다나 신에 대한 경의심이 깊었던 알렉산더는 이집트의 신들에게 경의를 표함으로써 단번에 이집트인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그는 이집트 인들로부터 '해방자' 라는 칭호와 이집트의 신 아문의 아들이라는 신탁도 받게 된다. , 그는 이집트 입장에서 보면 신의 아들이 된 것이다. 이것은 오직 그들의 왕이었던 파라오들만 받을 수 있는 명예로운 칭호였다.

 

그런데 알렉산더는 이집트에 도착해서 아주 특이한 일을 하나 한다. 그것은 바로 이집트의 조용한 어촌에 커다란 도시를 건설할 것을 명령한 것이다. 그 도시가 바로 지금도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이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알렉산드리아 본점이라고 해야 할까? 왜냐하면 알렉산더는 자신이 정복한 땅이 늘어날 때마다 또 다시 그런 이름을 가진 도시를 건설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본점은 중요하게 봐야 한다. 지금도 이집트의 발전된 항구 도시 중 하나인 알렉산드리아는 비록 많은 고대 유적은 파괴되어서 과거의 모습이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당시 인구수가 50만에 이르렀다는 말이 있을 만큼 엄청나게 큰 도시로 성장했었다. 그래서 이 도시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유명한 전설이 함께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다. 당시의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다 모아놨다는 그 도서관은 정말로 유명했으며, 그 도서관에는 별도의 연구기관도 딸려 있어서그곳을 통해 고대의 많은 인재들도 배출되었다고 한다. 또한 그 도시는 아주 큰 등대를 하나 가지고 있었는데그 등대의 이름이 바로 유명한 '파로스 등대' 이다.

 

<파로스 등대 상상도. 출처 (https://www.ellibrepensador.com/2017/01/15/alejandria-largo-poema/)>

 

이 등대는 높이만 130M에 달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기원전 건물로 치자면 참으로 높은 건물임에 틀림이 없다. 그럼에도 완전히 파괴되어서 존재했다는 사실만 전설처럼 내려왔는데, 1994년도에 이 도시의 바닷속을 탐험하여 많은 잔해를 발견함으로써 등대가 실존했음이 제대로 증명되었다.

 

알렉산더에게 있어서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는 단지 하나의 도시의 의미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그가 꿈꾸던 문명의 전파였다.

 

알렉산더가 처음 정복 전쟁을 나설 때 어떤 마음이었을지는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이 도시는 짓는 시점에 있어서 그의 마음엔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은 확실하다.

 

그는 단지 정복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정복이 주된 목적이긴 했지만, 그 안에는 그가 꿈꾸는 이상이 숨겨져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에 의한 전 세계 문명의 통합이었다. 단 하나의 인류, 아마도 그것이 그가 죽을 때까지 마지막으로 꿈꾸었던 이상이었을 것이다.

 

알렉산더가 그런 생각을 가진 것에는 그가 원래 비 그리스인, 즉 바르바로스라고 불렸던 존재였기 때문이다. 원래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이 가진 문명의 힘에 심취되어서 이 세상을 그리스인과 비 그리스인으로 구분했고, 비 그리스인을 바르바로스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리스의 변방인 마케도니아 출생의 알렉산더는 엄밀히 말하면 비 그리스인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평생 동안 자신을 진짜 그리스인이라고 여겼는데, 그 안에는 그리스인이 되는 것은 출생이나 태생이 아니라, 그리스 문명 안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을 모두 그리스 문명화 시키게 되면,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그리스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물론 그 생각이 끝까지 동일하게 유지되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가 정복 전쟁을 진행해나갈수록 그는 점점 더 놀라운 세상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경험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그리고 성장시킨다.

 

BC 331년 알렉산더는 이집트를 떠나 다시 페르시아 정벌에 나선다. 그리고 영원한 숙적이었던 두 사람은 다시 만난다. 그곳이 바로 가우가멜라 평원이었다. 훗날 가우가멜라 전투라고 알려진 이 전투에서 알렉산더와 다리우스의 두 번째 전면전을 펼친다.

 


병력 규모는 이소스 평원과 비슷했던 모양이었다. 양측 군대는 조금 더 늘었지만, 그것이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었다.

 

전투의 결론은 당연히 알렉산더의 승리로 끝났다. 일명 왕만 노리면 된다 라는 알렉산더 방식의 전술이 통했던 모양이었다. 물론 이 전투에서 페르시아 군도 예전과는 달리 아주 잘 싸운 모양이었다. 그래서 알렉산더의 군대도 꽤나 타격을 입었다고 한다.

 

하지만 진 것은 진 것이다. 특히 다리우스 왕은 패배해서 도망치다가 나중에 태수 중 한 명이었던 베수스에게 배신을 당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 이로써 사실상 양국간의 전쟁은 완전히 끝이 난다.

 

그리고 알렉산더는 다리우스가 죽기 전에 자신에게 왕위를 계승했다는 헛소문을 퍼뜨리게 해서 스스로 정식으로 페르시아의 왕위에 오른다. 그리고 그는 다리우스 황제의 죽음에 관련된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다리우스의 장례식을 황제의 장례식으로 화려하게 치러주면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게 된다.

 

그것이 바로 페르시아의 수도였던 바빌론에서 BC 330년에 일어난 일이다.

 

페르시아를 점령한 알렉산더는 멈추지 않는다. 그는 계속 동쪽으로 이동하여 인도에까지 다다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알렉산더의 내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아마도 페르시아의 문화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을 것 같다.

 

그가 처음에 그리스를 출발 할 때는 분명히 그리스 문명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했었다. 하지만 그가 전쟁을 치르면서 동양 문명을 접했을 때는, 그가 알고 있는 그리스 문명에 비해서 그들의 문명이 결코 뒤떨어지지 않음을 점점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알렉산더는 조금씩 동양의 문명에 빠져들게 된다. 그래서 동양의 옷을 입고, 동양의 풍습을 즐기며, 동양의 먹을 것을 먹기 시작한다.

 

물론 그의 부하들은 그런 그의 변화가 몹시 못마땅했을 것이다. 그들은 알렉산더가 가진 이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저 정복하고, 빼앗고, 명예를 얻는 것이 훨씬 중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진짜로 이상한 사람은 바로 알렉산더였다.

 

누가 문명을 전파하기 위해서, 문명을 통합하기 위해서 정복을 한다는 말인가?

 

아무튼 그는 BC 327년 인도의 인더스 강 상류 지점에 도착하여 도시 카불을 세운다. 그리고 현지에 있던 인도인들과 전투를 하고 승리를 한 후 그곳마저도 점령한다.

 

그리고 마침내 정복 전쟁을 마감하게 된다. 이때가 BC 327년이다. 그는 8년 반 동안 18,000Km의 거리를 주파하여 대 제국을 건설했으며, 그의 마지막 기착지였던 인도의 펀자브 지방에 기념비를 세우고 '알렉산드로스 여기에서 멈추었다' 라고 새겼다고 한다. 하지만 이 기념비는 유실되어서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아무튼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난다. 그 후 여러 가지 사건이 있지만, 아무튼 알렉산더는 다시 페르시아의 수도 바빌론으로 돌아와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죽는다. 그때가 BC 323 6 13, 그의 나이 33세였다.

 


그는 살아 생전에 그리스에 의한 지배가 아닌 그리스 문명과의 통합을 꿈꾸었고, 그래서 이민족의 문화, , 풍습을 과감히 수용했으며, 결국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그리스인이 되길 바랬다.

 

그리고 그의 이런 이상은 결국 '헬레니즘' 이라는 서양과 동양의 문명이 융합된 독특한 문명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된다. 그는 자신의 정복지에 대략 18개 정도의 알렉산드리아 세워서 헬레니즘을 발전시키고 주변에 전파하는 역할을 맡겼으며, 그의 사후에도 그 도시들은 여러 가지 의미로 큰 역할을 하면서 세계의 문명화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된다.

 

그가 나중에 나타날 징기스칸이나 혹은 나폴레옹과 같은 또 다른 정복자와는 차원이 다른 존재인 이유가 바로 이점이며, '그리스인 이야기'라는 책을 쓴 앙드레 보나르에 의해서 '인본주의에 사로잡힌 야수' 라는 칭호를 받은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알렉산더는 죽기 전 제대로 후계자를 정해주지 않아서 결국 그의 왕국은 그가 죽은 후 4개의 나라로 분열이 된다한 위대한 인물의 삶은 이렇게 마무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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