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을 넘어, 나를 찾다

7. 나를 미워하는 나

아이루다 2017. 6. 2. 06:46

 

 

지난 글에서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의 원인을 자신이 아닌 외부에서 찾는 '자기 합리화' 에 대한 이야기를 했어요. 그리고 이번 글에서는 그 반대인, 그 원인을 안에서 찾는 '자책' 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지난 글에서 자세히 살펴봤듯이, 자기 합리화는 분명히 원천적 문제점을 가지고 있지만 행복한 삶을 위해서 나름대로 필요한 면도 있어요.

 

자기 합리화를 너무 심하게 하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고립이 되고 흔히 말하는 진상이 될 가능성은 높지만, 적어도 당사자의 마음은 편할 수 있거든요. 모든 문제의 원인을 밖으로 돌리니 그럴 수 있죠. 그래서 관계가 틀어지고 갈등이 해결되지는 않지만, 본인이 사는 것 그 자체에는 큰 문제는 없어요.

 

반면에 또 다른 해결책인 자책은 훨씬 무서운 부작용을 가지고 있어요. 자신에게 있어난 문제나 실수 등을 너무 과도하게 자책을 하기 시작하면 삶은 깊은 수렁에 빠져들게 돼요. 그래서 우울해지죠. 이렇게 우울해진 삶은 미래에 대한 모든 기대치를 무너뜨려 버리고, 이것이 극단적으로 흐르면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까지 이어질 수도 있어요.

 

인간이 자살을 하는 대부분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에요. '미래에 어떠한 희망도 없는 것'. 인간은 현실이 아무리 힘들어도 미래에 나아질 수 있다면 버틸 수 있어요. 하지만 반대라면 버텨내지 못해요.

 

이런 인간의 특징으로 인해서 문제 해결책의 두 가지 방법 중에서 진짜로 큰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자책' 이에요극단적 자기 합리화가 만들어 내는, 일명 '진상'  결코 자살을 하지 않지만자책으로 인해 심각한 자기비하에 빠진 사람은 자신을 스스로 가두고 미워하다가 결국 삶을 포기하거나 술이나 마약등에 빠져서 삶을 망쳐버리고 말죠.

 

그래서 자책은 자기 합리화보다 좀 더 주의 깊고 제대로 다뤄져야 합니다.

 

인생의 앞에 놓인 다양한 문제들,  의도치 않은 실수나 실패를 한 어떤 노력 등은 모두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어요. 그것이 무엇이든지 모든 문제의 가장 근본적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면 당사자의 삶은 우울해지고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쉽게 말해서 많이 불행한 것이죠. 자신의 문제로 인해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종류의 문제들이 생겨났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자기를 용서하기가 무척 힘들어요.

 

결국 고뇌에 빠지게 되고, 삶이 온통 검은 색으로 칠해지고, 이렇게 사는 자신이 비참하기 그지없죠.

 


그런데 정말로 아이러니한 점은, 이런 상태에 놓인 사람들은 자신이 그런 상태임을 모른다는 점이에요. 그냥 원래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고 믿어요. 현재의 어둡고, 비관적이고, 냉소적이고, 사람들에게 자꾸 상처를 주는 말을 하는 자신이 원래 자신이라고 믿어요. 오히려 그런 자신을 좋아하기까지 해요. 자신은 바른 소리를 잘하고, 남들과 달리 자신은 삶의 진실을 보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죠.

 

그 이유는 바로 과거에 일어났던 많은 문제들을 잘못 다뤄오면서, 스스로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어떤 다른 존재로 완전히 변형이 되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그 변형 후의 자신을 원래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믿고 오히려 그것을 벗어날 기회가 왔을 때 조차도 그것을 비웃으면서 거부해요.

 

그러니 현재 자신의 모습이 절대로 변형되고 뒤틀린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라고 믿고그 자체에 문제가 있고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거의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이죠. 사실 그것을 어떻게 스스로 판단하겠어요. 그 모습이 자신의 본 모습이라고 믿고 사는 것이죠.

 

그래서 그것을 스스로 판단하기 위해서는 이런 식으로 변형된 사람들이 보여주는 공통적인 특정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차분히 살펴봐야 해요.

 

자기 합리화를 극단적으로 하는 사람은 쉽게 드러나요. 말 그대로 진상의 모습을 보이거든요. 어떤 경우든 다른 누군가를 탓하는 핑계만 가득하죠.

 

반면에 자책에 의해서 변형된 사람들은 찾아내기가 쉽지 않아요. 아주 교묘하게 뒤틀려있거든요. 그래서 지금부터 그것을 스스로 판단하는 방법을 알려드릴게요.

 

자기를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나타내는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바로 타인에 대한 칼날 같은 비판 의식이에요. , 끝없이 남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에 많은 시간을 써요. 뒷담화도 좋아하죠. 그런데 사실 그런 사람들의 말은 듣다가 보면 나름대로 일리가 있어요. 세상 사람들은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짓을 많이 하거든요.

 

그러다 보니 이들이 정말로 합리적인 비판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뒤틀린 시각으로 비난을 하는 것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아요.

  

개를 키우다가 버리는 사람들을 보고 비판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정작 자신은 동물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아요, 개의 삶에 관심이 있어서 비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비판을 하고 싶은데 개를 이용하는 것이죠.

 


이 경우, 자신이 비판하는 거의 대부분의 것이 사실상 그렇다는 것을 본인이 어떻게 인식하겠어요그래서 결국 본인만 잘난 사람이 되죠. 본인만 흠이 없는 사람이 돼요. 그리고 누군가 그러면 '너는 어떻게 할건데?' 라고 물으면, '그래서 나는 개를 안 키워' 하고 대답하죠. 본인은 책임질 짓은 안 한다고요.

 

하지만 정말로 버려진 개의 문제를 심각하게 느끼는 사람이라면 일단 유기견이라도 데려다가 키워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많이 데려다가 키우려고 하겠죠.

 

우리 사회에 이런 사람들은 무척 많아요. 그리고 이들의 비판을 위해서 자신은 사실상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에 대해서 다양한 비판을 해요. 그런 비판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아요. 하지만 그 자신 또한 남의 비판을 받을 만한 짓을 할 수 밖에 없죠.

 

그리고 나서 누군가 그것을 지적하면,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하는 태도로 일관해요하지만 결국 결론은 하나에요. 남을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은 결국 자신을 용서하고 있지 못하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뿐이에요. 자신에게 관대해질수록 남에게 관대해져요.

 

두 번째 특징은 우울함에 익숙해져 있거나 어떤 문제만 생기면 무조건 먼저 자기 탓을 한다는 것이에요. 그것은 어려서부터 모든 일에 자기 탓을 하는 것이 너무 익숙해져서 그래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자기 탓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정확히 말하면, 인정이 아니라 포기를 하는 것이죠.

 

인정과 포기의 차이는 이후에 일어날 일로 인해서 구분돼요. 인정은 일단 인정을 했기에 책임이나 반복 재발을 위한 노력을 하게 만들죠. 자신의 책임이라고 인정한 것이니 당연해요. 하지만 반면에 포기는 말 그대로 포기에요. '그래, 내가 잘못했어' 라고 하지만, 정작 아무 것도 하지 않아요. 그냥 '나는 원래 그래' 라고 하고 말죠.

 

이런 두 가지 특징은 사람의 성격에 따라서 서로 다르게 나타나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의 성격을 가진 사람은 첫 번째 유형으로, 소극적이고 수동적 성향을 가진 사람은 후자로 나타나요.

 

그리고 이 두 유형의 공통점은 바로 마음 속 깊이 숨겨진 분노에요. 한쪽은 끝없이 드러나고, 다른 한쪽은 숨겨져 있어서 잘 보이지 않을뿐이죠전자는 겉으로 풀어내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더 힘들고, 후자는 스스로 삭히기 때문에 본인이 힘들어져요. 그래서 이 둘 중에 자기 자신에게는 후자가 더 위험해요. 계속 쌓이거든요.

 

이것의 극단적인 예가 바로 남을 향해 무차별하게 총을 쏘는 사람들과 자신을 향해 총구를 당기는 사람이에요. , 가끔 들리는 묻지마 살인과 자살이죠.

 

이들은 공통적으로 시도 때도 없이 심각하거나, 항상 우울하거나, 너무 진지하거나, 불필요하게 생각이 많거나, 끝없이 비판적이거나, 모든 것에 냉정하거나, 늘 부정적이거나, 남에게 냉소적인 사람이에요.

 

그래서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사려고 하면 가장 먼저 왜 그것을 하냐고 묻죠. 그것을 해보고 싶다고 안 해요. 잘하기 위해서 준비하기 보다는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는데 더 많은 시간을 써요.

 

그리고는 나름대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이유를 대려고 애써요. 하지만 이것은 전부 무의미하죠. 그들이 알아야 할 것은 단 하나뿐이에요.

 

그것은 바로 '당신은 지금 행복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라는 진실이죠. 만약 현재 당신이 그렇게 살고 있다면, 그 이유는 그저 당신이 불행하기 때문이에요. 그런 생각이나 행동들은 결코 당신의 성격도, 당신의 가치도, 당신의 정체성도 아니에요. 그것은 그저 불행하기 때문에 그럴 뿐이에요.

 


언제라도 당신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 당신은 금세 재미있고, 활기차며, 장난스럽고, 생각보다는 행동을 하고, 긍정적이고, 따뜻한 사람이 될 것이에요.

 

어떤 사람이 정말로 행복하다면 그런 사람이 될 수 밖에 없어요그리고 당신이 그런 사람이 되지 못했다면, 즉 행복해지지 못했다면 그 이유는 바로 자신에 대한 불필요한 자책으로 인해 그럴 수 있어요.

 

당신은 잘 모를지도 모르지만, 사실 당신은 지금까지 살면서 정말로 별별 것으로 다 자기 탓을 해왔어요.

 

당신을 포함한 거의 모든 사람들은 학생시절 동안 많은 열등감에 노출돼요. 질투심도 많이 느끼죠. 학교에 가면 정말로 자주 비교당하고 상처를 입거든요. 사실 학교만큼 무서운 곳도 없을 정도에요. 학창 시절에 아이들은 전혀 제어되지 않아요. 서로가 상처 주는 말들을 너무도 쉽게 하죠. 사실 잔인할 정도에요.

 

그러다 보니 아이들은 자신의 얼굴이 못생겼거나 예쁘지 않아도 자기 탓을 해요. 집이 가난해도 자기 탓을 해요. 부모 중 한 명이 없어도 자기 탓을 해요. 부모의 직업이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해도 자기 탓을 해요. 공부를 못해도 자기 탓을 해요. 운동을 잘 못해도 자기 탓을 해요. 친구들이 많이 없어도 자기 탓을 해요. 그림을 못 그리거나 노래를 못해도 자기 탓을 해요.

 

자신이 남보다 못난 점이 있으면 무조건 자기 탓을 해요.

 

하지만 정확한 사실은 바로 이것이에요이렇게 타고난 것들은 결코 당신이나 나의 잘못이 아니에요. 우리는 누구도 부모를 선택할 수 없었어요. 그저 태어난 것이죠. 그런데 태어나보니 부모가 머리가 좋고, 부모가 돈이 많고, 부모가 잘 살고 있고, 부모가 다양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요. 혹은 반대에요.

 

그래서 그것을 유전적으로 물려받고, 환경적으로 물려받아요.

 

그럼에도 학생시절에 아이들은 자신이 타고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해요. 자책을 하고 우울함을 느끼죠. 심각해지면 자신은 왜 태어났는지 모르겠다고 느끼기도 하죠.

 

다행스럽게도 나이를 어느 정도 먹으면 이런 것들은 어느 정도 정리가 돼요. 하지만 이것은 인정하고 받아들인 것이 아니에요. 어쩔 수 없으니 포기한 것이죠. 그래서 그런 자신에 대한 불만이 마음 속 깊은 곳에 가득해요.

 

이때 공격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고, 수동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분노를 마음 속 안에 담아 두죠. 그리고는 마치 그것이 모두 해결된 듯 생각하고 행동해요. 스스로 그것을 정말로 믿어요. 자신은 어린 시절에 가졌던 한 때의 자책이 모두 없어진 듯 행동해요.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사람들은 이미 그때 그 일로 인해서 자신의 삶이 거의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변형되어버렸어요. 자신을 자책하는 만큼 말이죠. 자책이 클수록 더욱 더 변형이 크게 되었겠죠.

 

그나마 이것이 끝이면 좋지만, 이젠 좀 더 어려운 숙제가 나타나요. 그것은 바로 타고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이뤄야 할 것들이 눈앞에 나타나기 때문이에요. 타고나지 못한 것은 그나마 어쩔 수 없이 포기라도 할 수 있지만,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얻지 못하는 것은 본격적으로 파괴적인 역할을 해요.

 

우리는 누구나 열심히 살아야 하기 때문이에요. 공부를 제대로 못했거나, 취직 준비를 제대로 못했거나, 회사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게 도면 포기할 수 없는 자책이 밀려와요.

 

자신이 선택 가능하다고 믿어지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그래요.

 


결혼을 하지 못했거나, 했더라도 화목한 가정을 유지하지 못했거나, 아이를 낳지 못했거나, 아이를 낳아도 아이에게 제대로 해주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 때 그래요.

 

할 수 없어서 못하는 것들은 힘들긴 해도 포기할 수 있지만,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지 못한 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부주의함, 게으름 등의 증거가 되거든요. 그래서 결코 포기가 안돼요. 이때 포기를 하면 삶이 포기되어 버리고 말거든요. 노숙자가 되어서 떠돌거나 죽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려면 버텨야 해요. 이 악물고 버텨야 하죠.

 

이때 일어나는 현상이 바로 부정적 태도에요. 비판적이고, 냉소적이죠. 무슨 일에 대해서도 안 좋은 점만 이야기하려고 하죠.

 

뭔가를 하려고 할 때 나쁜 결과가 먼저 떠올라요. 그래서 피하려고 하죠. 그러다 보니 그것을 해야 하는 이유들 중에서 좋은 점 보다는 나쁜 점이 많아야 해요. 그래야 자신이 그것을 하지 않는 행동이 정당해지거든요. 이것이 쌓이고 쌓이면 결국 수 많은 비판적 생각을 가진 꼰대같은 사람이 되고 말죠.

 

대부분의 어른들이 나이를 먹을수록 꼰대가 되는 이유가 그것이에요.

 

그리고 이런 종류의 사람들 중에서, 좀 더 공격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아주 자주 해요. 자신이 상처를 받으면서 살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상처를 받는 것을 그 사람 스스로 감당해야 할 일이라고 믿어요. 자신이 그랬듯이 그들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죠.

 

그러니 얼마나 꼰대처럼 굴겠어요. 필요하지도 않은 조언을 한답시고 끝없이 부정적 얘기만 늘어 놓아요. 칭찬이나 격려를 할 생각을 하나도 안하고, 자신의 부정적 사고 방식으로 인해서 하지 못했던 일을 누군가 하려고 하면 괜히 끼어 들어서 방해만 하려고 해요.

 

그럴수록 자신이 하지 못한 것이 정당해지거든요.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온갖 좋은 가치들은 다 가져다 써요. 방해만 할 수 있다면 뭐든 가져다 쓰죠. 사회 정의, 용기, 배려, 검소함 등등 뭐든 쓰죠.

 

하지만 사실 그 사람은 그런 가치에 아무런 관심도 없고 그것을 가치로 느끼지도 않아요. 그저 자신을 변호하는 것에 그런 좋은 가치들을 용이하게 쓰는 것뿐이죠.

 

요즘 애들은 인내심이 부족하다, 요즘 애들은 너무 현실에 안주한다. 요즘 애들은 사회에 너무 관심이 없다 등등 말을 하죠. 하지만 정작 본인이 젊었을 때는 어땠을까요?

 

만약에 정말로 그런 가치들에 진정한 가치를 느꼈다면 그 사람의 삶은 이미 그것을 개선하기 위해서 헌신하고 있을 것이에요. 사람들이 개를 버리는 문제에 대해서 관심이 있었다면, 소극적으로는 개를 데려다 키우거나, 아니면 적극적으로 관련된 법안을 만들려고 노력을 하겠죠.

 

정말로 그런 가치들이 중요하다고 여겼다면, 이미 스스로 정의로운 사람이 되었으고, 용기 있는 삶을 살고 있으며, 자신은 검소하면서도 남에게는 너그러운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에요.

 

어떤 사람이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어떤 가치를 남에게 지키도록 강요한다면, 그것은 그저 그 사람이 자신이 주장하는 가치에 대해서 사실상 아무런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증명할 뿐이에요.

 

이것은 숨겨진 진실이죠. 물론 본인은 절대로 그것을 인정하지 않죠. 그리고는 자신이 그런 행동을 하지 못하는 이유만 한 가득 내밀어요.

 

그러면서 결국 평생을 불행함 속에서 살죠. 그리고 정작 자신이 불행한 줄도 몰라요. 원래 다 그런 것이라고 믿어요. 세상 사람들 중에서 진짜로 행복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요. 다들 착각하거나 혹은 연극을 한다고 믿어요.

 

그리고 어디에선가 주어들은 말을 제대로 이해도 하지 못하고 삶은 고뇌라고 설명해요. 사는 것은 원래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운 과정이라고 주장해요. 설득을 위해서 관심도 없는 부처님의 말씀이나 노자의 사상을 끌어 들여요. 삶은 원래 고뇌라고요. 하지만 정작 본인은 부처님이나 노자의 말씀을 단 한 번도 제대로 바라 본 적이 없어요. 그러니 그렇게 살죠.

 

소극적인 사람들은 다행히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아요. 하지만 그들도 역시 끝없는 자책으로 인해서 계속 파괴되어 가요. 아이를 키울 때도 사실 어쩔 수 없는 것임에도 아이에게 어떤 문제가 생기면 모두 그것을 자기 탓을 해요.

 

아이가 자신의 말을 잘 안 들어도 그것을 자기 탓으로 돌려요.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문제가 다 자신에게 원인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끝없이 주눅들고 우울해지며 소극적인 사람이 되고 말죠.

 

삶이 우울하고 왜 사는지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없어요. 그러면 서점에 가서 책을 보죠. 어떤 인기 강사의 강연을 들으면서 가끔 위로를 받아요. 하지만 그때뿐이에요.

 

사실 위로나 공감이라는 것은 바로 일종의 타의적 자기 합리화에요. , 외부에서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을 대신해서 합리화를 해줘요. 그러면 잠시 마음이 편해지죠.

 

하지만 남이 해준 합리화가 얼마나 그 효과가 지속되겠어요. 또 다시 새로운 문제들이 일어날 텐데요. 그때마다 책을 보려고 하고, 남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겠지만, 쉽지 않죠.

 

친구들을 만나 자기 신세 한탄하는 것도 한계가 있죠. 사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만나서 어떤 대화를 할 때 이뤄지는 것이 바로 자기 합리화 작용이에요. 나 혼자 합리화하면 좀 불안한데, 친구가 맞장구를 쳐주면 꽤나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물론 그때 절대로 어떤 문제를 객관적으로 이야기 하면 안돼요. 아니 정확히 말하면, 못해요.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의 이야기를 할 때는 어떤 식으로든 자기한테 유리하게 이야기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결국엔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있죠.

 

"그건 그 사람이 잘못했네. 아니, 무슨 그런 사람이 있어?" 

 

그래서 위로는 어느 정도 필요도 있고 효과도 있긴 해요. 하지만 명백한 한계는 있죠. 아무리 사람들이 그것을 동의해줘도 본인은 진실을 알고 있거든요. 자신이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은 사실이 있으며, 말을 할 때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말했다는 것을요.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그것이 진실이 아님을 알고 있어요.

 

결국 그래서 그것은 해결되었다기 보다 숨겨지고 말아요. 그리고 없어지지 않고 차곡차곡 쌓이죠. 위로가 가진 숨겨진 문제점이 바로 그것이에요.

 

이것을 해결하려면 자신이 자신을 합리화해야 해요. 아니 합리화가 아니라, 용서해야 해요. 자기를 떳떳하고 잘못하지 않은 존재라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 낸 문제나 실수를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해요.

 

하지만 무척 힘들죠. 자기 합리화는 쉽지만, 자기 용서는 참 어려워요.

 

그런데 당신이나 나는 왜 이렇게 자신을 용서 하기가 그렇게 힘들까요다른 어떤 사람들은 확실하게 자기 잘못임에도 그냥 남의 탓으로 하고 마는데, 어떤 사람들은 왜 자기의 잘못도 아니고, 사실 어쩔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모두 자기 탓으로 돌리게 될까요?

 

이제부터 그것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보도록 하죠. 그리고 우리는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아주 오랫동안 얽메고 있는 질긴 밧줄을 하나 발견할 수 있을 것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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