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을 넘어, 나를 찾다

9. 개인과 사회 - 2부

아이루다 2017. 6. 4. 06:51


[이전 편에서 계속]


그렇다면, 과연 사회는 무엇을 만들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다양한 종류의 '좋은 가치'라는 개념이에요.

 

그 좋은 가치라는 개념은 사회에 속한 각자 개인에게 중요하고, 가능하다면 지키며 나가야 하며, 그것을 지키지 못했을 때 서로가 그런 행동들에 대해서 감시하고 비판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들이에요.

 

이 가치들은 전체적인 사회의 방향성을 맞추고, 사회에 속한 개인의 방향성과 사회 자체를 동조화 시키죠. 또한 개인간의 갈등이 생길 때마다 합의를 이룰 수 있게 해주며, 사회가 발전해나가는 방향성을 합일화 시켜주죠.


즉, 단순히 말해서 서로 생각이 다른 수 많은 사람들이 그나마 자신만의 가치, 고집, 신념, 믿음 등을 잠시 묻어두고 전체의 미래를 위해서 양보를 할 수 있는 좋은 개념들이죠.

 

그래서 사회는 이 가치들을 공유하면서 미래를 향해 좀 더 조화롭게 발전해 나갈 수 있답니다.

 

그 좋은 가치들은 바로 선함, 용기, 신념, 신뢰, 배려, 희생, 정의로움부지런함돌봄, 관용, 사랑, 가족애 등등이죠. 그리고 이런 가치들을 한 마디로 표현해서 '인류 보편적 가치' 혹은 '도덕' 이라고 하죠.

 

인간의 역사에서 도덕의 개념이 그토록 오래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에요. 그것은 반드시 초기부터 필요한 것이었어요. 도덕에 근거한 질서가 없었다면 인간 사회는 모래성처럼 부숴지고 말 것이에요.

 

그리고 이런 가치들은 우리들이 어린 시절일 때부터 끝없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접하게 돼요. 로봇이 나오는 만화 영화엔 끝없이 정의와 악이 싸우죠비겁과 용기가 싸우죠. 이기심과 이타심이 싸워요. 복수와 관용이 싸워요. 사랑과 미움이 싸워요. 배신과 신뢰가 싸워요.

 

지금 어려서 읽었던 위인전을 떠올려 보세요. 거기엔 그런 가치들이 가득해요그 책엔 성공한 사람들이 얼마나 사회적으로 원하는 좋은 가치를 지키고 살았는지 끝없이 강조해요. 워싱턴이 정직, 이순신의 용기, 에디슨의 끈기, 슈바이처의 희생, 콜럼버스의 도전 등이 바로 그런 것들이죠.

 

성인이 된 후에는 달라질까요? 결코 아니에요. 우리가 접하는 다양한 창작물들, 즉 소설, 영화, 연극, 뮤지컬, 전래 동화, 신문 속 미담에는 언제나 변하지 않는 가장 중요한 인류 보편적 가치들이 숨겨져 있어요.

 


그것이 바로 '권선징악', '희생', '용기' 등이죠.

 

개인들이 이런 좋은 가치를 추종하면 할수록 사회는 점점 더 안전해지고 발전적이 될 수 있기에, 사회는 끝없이 그것의 가치를 가르쳐요. 그리고 사회 구성원들은 그 과정을 통해서 보편적 가치에 대한 공통 분모를 갖게 되죠.

 

이것이 나중에 많은 사회적 갈등 부분에서 상호 합의를 하는데 있어서도 크게 도움이 돼요. 법원이 개인간의 갈등을 조정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정의' 와 '공정' 이거든요. 또한 좋은 가치들은 사회의 안전성을 지키는데 있어서 정말로 중요한 '개인적 양심' 이라는 안전 장치를 각 개인마다 달아 줄 수 있죠.

 

공동체의 삶에서 양심을 벗어난 행동들, 즉 개인적 이기심으로 한 행동들은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어요. 돈을 벌기 위해서 자국의 군사 정보를 적국에게 팔아 먹거나, 회사의 핵심 기술을 경쟁 회사에 넘기는 행위 등은 당연히 전체의 큰 손해를 일으키죠.

 

도덕적으로 교육된 양심은 범죄의 예방에 있어서 가장 선봉이 되고 있어요. 사실 양심만큼 강력한 범죄 예방 수단도 드물죠. 그리고 양심을 더욱 더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것을 위한 정신교육이 필요해요.

 

그러니 사회는 개인들에게 끝없이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렸다라고 가르치려고 해요. 용기는 옳고, 비겁함은 틀렸다라고 가르치고, 정직은 옳고 거짓말은 틀렸다고 가르치죠.


그런데 재미있게도 어느 정도 가르치고 나면, 사람들은 이제 그 가치를 벗어난 것을 보면 불쾌해 해요. 즉, 영화를 봤는데 악당이 주인공을 이기고 끝나면 매우 찜찜해 하는 것이죠. 너무도 당연한 권선징악이 이뤄지지 않으면 그렇게 느껴요. 그리고는 그런 영화는 보지 않게 되죠. 결국 그러다 보니 거의 모든 종류의 창작물들이 그렇게나 획일화 된 결과를 다루게 됩니다.


하지만 냉정히 말하면, 현실하고는 다르죠. 현실에서는 일반적으로 악당이 이겨요. 정정당당한 사람은 반칙을 하는 사람을 이기기가 아주 힘들거든요.

 

그렇다면 좋은 가치를 가르치는 과정을 과연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좋은 말로는 교육이지만, 사실 냉정히 말하면 세뇌에요. 우리는 세뇌라는 말을 보통 좋지 않은 의미로 받아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세뇌가 아닌 것은 아니죠.

 

그래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덕적 가치에 아주 제대로 세뇌되어 있어요. 그래서 좋은 가치에 깊게 세뇌되어 있는 사람일수록 '양심적 사람' 이라고 부를 수 있어요. 그리고 그런 사람일수록 자신이 아는 것과 자신이 보는 것이 다르면 매우 불편해 해요. 악당이 이기는 영화는 절대 안 보죠.


하지만 이것은 원래 인간 자체가 그런 것은 아니에요. 세뇌된 것 뿐이죠.

  

원래 인간의 본질은 결코 그런 도덕적인 존재가 아니에요. 사실 그러니 그렇게 교육하는 것이죠. 처음부터 도덕적인 존재라면, 뭐하러 그렇게 열심히 교육을 하겠어요. 하지만 너무 심하게 세뇌된 사람들은 스스로가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믿고 살아요.

 

흔히 사람들은 양심을 인간의 본질적 요소로 꼽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원래 인간에겐 양심 같은 것은 없어야 정상이에요.

 

이것이 도대체 무슨 말이냐고요인간은 원래 비겁해요. 인간은 원래 거짓말을 해야 편하게 살아요인간은 원래 이기적이에요. 인간은 원래 남보다는 자기를 먼저 챙겨요. 인간은 원래 부지런하기 보다 게으른 존재에요.

 

그럼에도 누군가 만약 용기있고, 정직하고, 이타적이고, 부지런하다면 그것은 바로 사회가 가르쳐준 가치에 온전히 자신의 가치를 일체화 시킨 결과에요.

 


만약 인간에게 있어서 양심과 같은 것들이 타고난 것이라고 한다면, 인간 사회에서 전혀 교육을 받지 못한 채 성인이 되어 발견된 사람들도 그랬어야 했어요. 하지만 사실 그들은 그저 동물과 다름이 없었죠.

 

좋은 가치들은 지킬수록 개인의 행복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가능성이 높을 뿐이지, 그 자체가 결코 절대적 가치일 수는 없어요.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무엇보다도 자신이 가진 욕망을 제대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해요. 뉴튼이나 아인슈타인이 해낸 일들은 그들이 사회 발전을 위해서 한 것이 아니에요. 그들은 성공하고 싶고, 유명해지고 싶고갈채를 받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그들은 운 좋게도 남들이 못해낸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었어요.

 

그들만 그런 것이 아니에요. 누구나 그래요. 당신도 나도 그래요. 그럴 수 없어서 못할 뿐이지, 능력만 타고 났다면 누구나 잘나고 싶어해요. 인정받고 싶어해요. 뛰어난 존재가 되고 싶어해요. 누구보다도 대단한 존재가 되고 싶어하죠.

 

순수한 학문적 열정이란 말도 쓰긴 하는데, 사실 그런 것은 없어요. 만약 뉴튼이나 아인슈타인이 연구한 분야를 사회에서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다면 그들이 그것을 궁금해 하고 계속 연구했을까요?

 

인간들 중 그 누구도 자연 과학적 법칙이나 이 우주의 근본 원리에 대해서 궁금해하지 않았다면, 누가 그것을 평생 동안 연구하면서 살아갈까요그럼에도 그랬다가는 굶어 죽죠.

 

누구도 음악을 듣지 않았다면 베토벤이나 모차르트는 무엇을 하고 살았을까요? 그리고 우리가 그의 이름을 기억이나 할까요?

 

그가 누구든 상관없이 모든 인간은 성공이라는 욕망을 가진 존재에요. 단지 사람들마다 성공의 기준이 다르고 목표가 달라요. 누군가는 아이를 잘 키운 엄마로, 누군가는 위대한 발명가로, 누군가는 이 세상의 모든 높은 산을 오르는 사람으로, 누군가는 많은 돈을 번 사람으로, 누군가는 멋진 소설을 쓰는 것으로 목표를 잡죠.

 

그리고 아주 특별한 사람은 자신의 삶을 가난한 이나 혹은 불우한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것으로 정해요. 혹은 신에 귀의해서 신을 위한 삶을 사는 것으로 정하죠.

 

그런데 이것들이 본질적으로 서로 다를까요? 아니에요. 그저 개인적인 기준과 목표의 차이일뿐이에요. 그리고 그것은 타고난 성향, 자란 환경접한 문화에 따라서 달라져요.

 

지금까지 사회와 그 안에 속한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을 했어요. , 이제 이 관계를 지난 시간에 이야기 했던 '자책' 이란 현상과 결부시켜 보죠.

 

엄마가 아침에 아이를 학교에 보내요. 그런데 한참 후에 학교에서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이 와요. 아이가 수업 준비물을 제대로 챙겨오지 않았다고 하면서 다음부터는 좀 더 신경써달라고 부탁해요.

 

엄마는 그 순간 마음이 철렁해요. 준비물이 없어서 수업 시간에 할 것이 없을 아이에게 미안하고, 그래서 혹시 아이가 상처를 받지 않을까 걱정해요. 그리고는 준비물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자신의 부주의함에 대해서 자책을 해요. 그리고 그것이 심해지면 자신은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써 자격이 부족할지도 모른다고 여겨요.

 

여기에서 엄마의 자책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생겨나게 될까요?

 

그것은 바로 '육아의 책임', '부지런함', '헌신', '가족애', ‘어머니의 사랑과 같은 사회적으로 교육받은 가치들로 인해서 발생해요.

 

처음부터 엄마는 왜 자신의 아이의 학교 과제물을 다 챙겨줘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사회적으로 이미 당연한 것이 되었고, 그렇기에 학교에서도 아이의 엄마에게 당당하게 요구해요. 아이의 학습 준비물을 제대로 챙겨서 보내 달라고 말이죠.

 

엄마는 아이의 학습 준비물을 제대로 챙길 의무가 있어요. 그리고 그 의무의 근거가 바로 방금 말했던 부지런함이나 헌신 그리고 모성애와 같은 가치에요. 아이를 사랑하는 엄마라면 아이에게 끝없이 관심이 있어야 하고, 그만큼의 부지런함이 있어야 해요.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아이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해요.

 

이런 것들은 엄마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할 가치이기에, 아이를 제대로 준비시키지 못하면 모두 그것은 엄마의 책임이 되는 것이죠. 그러니 엄마는 그것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에 자책을 해요.

 

같은 이유로 엄마는 아이가 말을 늦게 시작해도, 아이의 키가 작아도, 아이가 불안해도, 아이가 말을 안 들어도아이가 갑자기 욕을 해도 모두 자기 탓을 하게 돼요. 자신이 아이에게 부족한 엄마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또 자책을 해요.

 


하지만 이것은 사실 좀 무리가 있어요. 사람은 모두 다르기에 모두가 그렇게 똑같은 모성애를 가질 수가 없어요. 같은 배에서 난 자식이라도 예쁜 자식과 덜 예쁜 자식이 있을 수 있는데사회는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다' 라고 하면서 모든 자식을 다 똑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쳐요.

 

그래서 그것이 잘 안 되는 엄마는 자기도 모르게 자신이 엄마로써 자질이 없다고 자책을 하게 돼요. 남들만큼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낄 때도 그래요.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다른 부모들을 보고 괜히 마음이 불편해지고 답답함을 느껴요.

 

사실 이런 종류의 예는 너무도 많아요. 우리가 양심의 가책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순히 집에서 게으름을 피울 때도 생겨나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사회로부터 받은 교육으로 인해서 끝없이 자신을 밀어 붙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적당히 할 수도 있는데,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그것이 끝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사회는 개인에게 끝없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강요하거든요. 최선을 다한 것이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라도 해요. 그래서 적당히 하면 몸은 편한데 마음이 불편해요. 죽어라고 해야 뭔가 시원하고 채운 느낌이 나요.

 

그런데 이렇게 사는 것이 정말로 행복할까요?

 

물론 그 노력의 합당한 결과를 받을 때는 행복하죠. 하루에 16시간씩 2년을 공부한 사람이 시험에 합격하면 그런 행복을 맛볼 수 있죠. 그런데 문제는 다 합격할 수는 없죠. 사실 현실적으로 보면 어떤 힘든 노력을 한 사람들 중에서 그것을 성공한 사람의 숫자는 실패한 사람의 숫자에 비해서 늘 작아요. 사실 그러니 그것을 성공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고요. 누구나 쉬는 숨을 한번 쉬었다고 해서 그것을 성공했다고 표현하지는 않죠.

 

그렇다면 하루 16시간씩 2년을 공부한 후 실패한 다수는 그들이 보낸 그 고통의 시간에 대한 보상을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요?

 

사회는 개인을 끝없이 쓸모 있는 존재가 되라고 가르쳐요. 그리고 개인은 그 사회적 요구를 받아서 끝없이 자신이 쓸모 있는 존재임을 증명하려고 해요.

 

하지만 쓸모 있는 것과 행복한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에요. 청소를 아주 잘하는 주부는 쓸모있는 주부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청소를 할 때마다 행복할 수는 없어요.

 

이 점이 사회에 속한 사람들이 불행해지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그것이에요. 사회적으로 주입된 가치를 따라가다가 결국 자신의 행복을 망치는 경우도 많아요.

 


밤마다 치킨과 맥주를 먹으면서 영화를 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것이 건강에 좋지 않다는 사회적 가치와 충돌을 하게 돼요. 고가의 오디오 장비를 모아서 음악을 즐기는 사람은 검소한 삶이라는 사회적 가치와 충돌이 되죠. 집에서 뒹굴 거리면서 쉬는 것이 제일 좋은 사람은 부지런함이라는 사회적 가치와 싸워야 해요.

 

그렇다면 이런 사람들이 자신의 개인적 행복 욕구를 버리고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게 되면 그 만큼 행복해질까요? ,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일반적으로 그럴 수 없어요. 인간의 욕구는 좋은 가치를 통해 실현되기는 매우 힘들거든요.

 

물론 좋은 가치들은 가능하면 지키는 편이 좋아요. 그리고 운 좋게 사회에서 교육받은 좋은 가치와 자신이 행복을 느끼는 가치과 서로 잘 맞으면 가장 좋죠. 그러면 좋은 평판을 얻을 수 있어서 나름대로 도움이 돼요.

 

건강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검소하게 살며, 부지런한 사람은 주변에서 다들 좋게 평가해주니까요. 그러니 자신이 주변의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이 행복한 사람이라면 이렇게 사는 것이 좋아요.

 

이런 경우는 사회적 가치와 개인의 행복이 일치되는, 아주 운 좋은 경우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그것이 잘 맞지 않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아요. 그래서 그런 사람들 중에서 자신이 교육받은 가치와 자신이 행복을 느끼는 가치가 서로 충돌이 될 때마다 마음이 불편해져요. 더 부지런해야 할 것 같고, 더 남들에게 잘해줘야 할 것 같고, 더 다른 사람의 부탁을 들어줘야 할 것 같고, 더 신경써줘야 할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아요. 그래서 결국 불행해져요. 이게 자책이에요.

  

, 지금 자신에 대한 미움, 즉 자책으로 인해서 그다지 행복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당신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많은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자신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해주는 것을 찾는 것일까요? 맞아요. 그것도 중요하긴 해요. 하지만 그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어요.

 

그것이 바로 오랫동안 자신에게 주입된 사회적 가치의 세뇌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에요. 물론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비겁하게, 적극적으로 이기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에요. 사실 정직하고 이타적으로 사는 것은 행복에 큰 도움이 되죠. 당신이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 때까지만 해야 해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서 그런 가치를 추구하면서 사는 것은,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이 되고 말죠.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을 못하면 아쉬움이 남고 말지만,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면 '자책' 이 생겨나요. 해야 하는데 못했으니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죠.

 

사람은 대부분 게으르고 싶어해요. 게으르게 살면서 맛난 것 먹고, 잘 자면 행복해요.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 사회적으로 교육된 많은 가치들을 실현하기 위해서 부지런하게 살고먹을 것도 조절하고, 잠도 줄여야 해요.


사회적으로 칭찬받는 행동들은 주로 세상을 안전하고 조화롭게 만드는 일이에요. 그래서 남이 행복한 일이죠. 그러니 당신이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당신이 행복한 일을 하세요. 봉사가 행복한 사람도 있지만, 그 시간에 집에서 그냥 뒹굴거리는 것이 행복한 사람도 있어야 정상이에요.

 

모든 사람이 열정적으로 일할 수는 없어요. 모든 사람이 똑같이 자녀들에게 무한정 사랑을 줄 수는 없어요. 모든 사람이 현모양처가 될 수는 없어요. 모든 사람이 책임감 가득한 부양자가 될 수는 없어요. 모든 사람이 불의 앞에서 용기 있게 행동할 수는 없어요.

 

물론 하면 좋아요. 그러니 할 수 있다면 하세요. 단지 하지 못했다고 했을 때, 하지 못한 핑계를 대려 하거나, 하지 못함을 스스로 비판하지 마세요. 충분히 할 수 있는데 못했다면 반성을 해야 하지만, 할 수 없어서 못한 것들에 대해서는 너무 많은 마음을 쓰지 마세요.

 

당신은 그저 사람이에요. 처음부터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불완전한 존재에요. 부족한 것이 당연한 존재죠. 그래서 사회는 그렇게 당신을 밀어 붙이는 것이에요. 당신이 충분히 완전하다면 왜 그러겠어요.

 

오랜 시간 끝없이 당신을 괴롭혀 온 자신을 용서하고 싶다면, 가장 먼저 당신에게 사회적으로 교육된 도덕적 가치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 이 필요해요.

 

도덕은 사회의 영속성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지만,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에요. 그러니 이미 주입된 도덕적 가치를 기준으로 해서 자신을 끝없이 비판하는 일을 멈춰야 해요. 또한 다른 사람을 그렇게 비판하는 일도 가능하다면 멈추세요.

 

그리고 그것이 조금이라도 가능할 때, 당신은 변형된 모습에서 원래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얻게 될 것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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