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인간 부조리 - 2

아이루다 2016. 12. 25. 07:47


[전편에서 계속]

인간이 만들어낸 두 번째 방법론이 바로 사회 시스템이다. 신은 조금 개념적인 대상이라면 사회는 현재 생을 조금 더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채택된 현실적인 방법론이다.

 

물론 인간이 현대의 거대 사회를 이룩해 낸 것은 의도한 것은 아니다. 그저 조금이라도 더 안전하게 살기 위해서 노력하다가 보니 이런 사회를 만들어 낸 것이다. 자연계에서도 개미나 늑대들은 일정 수로 무리를 짓긴 하지만 인간만큼 거대 군락을 이루고 사는 생명체는 없다.

 

사회를 구성하는 것은 다양한 역할 분담을 통한 효율성 추구와 공동의 적에 대한 대처 등에 매우 효과적인 방법론이다. 우리는 경찰, 군인, 소방수 등의 직업을 만들어서 전문적으로 범죄와 화재 등을 대처할 수 있게 했고, 각자 다양한 직업을 가짐으로써 극단적인 전문화를 이뤄낼 수 있었다.

 

이것은 작고 약했던 우리 인류가 지적 능력의 힘으로 지구 상에서 최고의 포식자 자리에 올라 설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으며 그로 인해서 우리의 생존율은 극단적으로 상승되었다.

 

우리는 이제 거의 늙고 병들어 죽는다. 물론 지금도 어리고 젊은 나이에 죽는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평균 생존 나이가 80살에 가까워지고 있다. 불과 몇 천년 전 로마 시대에 인류의 평균 수명이 30살을 조금 넘었다고 하니 얼마나 평균 수명이 길어진 것인가?

 

이렇듯 사회는 현생의 삶의 지속성을 무척이나 높였지만 또 다른 형태의 부조리를 만들어 내고 말았다. 그것은 바로 다수가 모여 살기 때문에 끝없이 일어나는 갈등을 방지하고 해소하기 위한 방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바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정의된 법과 윤리 그리고 양심이다. 더해서 각자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 국가라는 구조를 만들어 내고는 그것을 지켜야 한다는 애국심이라는 이름으로 각자의 희생까지를 강제하고 있는 형편이다.

 

현대 사회는 각자에게 가르쳐진 윤리를 통해서 만들어진 양심과 그것을 지키지 못했을 때 처벌하는 사법 시스템을 구비하고 있다. 법률은 고대 초기 문명부터 존재했는데, 그것을 보면 인간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반드시 법이 필요하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양심이나 윤리만큼 부조리한 것이 없다. 우리는 모두 내부적으로 자연스럽게 발현된 욕망을 가진 채 살아간다. 하지만 우리가 사회 안에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사회적으로 허용된 행동 안에서만 살아가야 한다. 이것을 제어하는 능력을 이성이라고 하는데, 사실 이성은 인간의 본질이 아니다. 인간은 철저하게 감정적 존재이며, 이성은 단지 이 감정을 제어하는 용도로만 사용된다.

 

아주 흔한 예로 먹고 싶지만 돈이 없으니 못 먹는다. 남자들은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섹스를 하길 바라지만 그러면 사회적 처벌을 받기 때문에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

 

이런 생각과 행동의 괴리감이 바로 부조리의 원인이 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이런 이중적인 태도에 크게 자괴감을 느끼기도 한다.

 

원래 우리는 먹고 싶으면 먹고, 섹스를 하고 싶으면 해야 하는 존재였다. 자연 속이라면 그 가능성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오직 육체적 힘밖에 없었다. 지금도 자연계에서는 그런 일이 지속적으로 일어난다.

 

하지만 다수가 모여 사는 사회에서 이런 일이 반복적으로 일어나게 되면 그 사회는 스스로 자멸하고 만다. 그러니 인간 사회는 오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적절한 법을 제정하고 아예 처음부터 도덕과 윤리를 가르쳐서 개인의 양심을 훈련시키고 있다.

 

이것은 나름대로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우리는 존재 자체가 부조리해지고 말았다. 이것은 바로 도덕과 양심 그 자체가 원래 그저 사회 시스템을 유지시키는데 필요한 도구에 불과하지만 우리는 도덕과 양심을 합리화 시키기 위해서 선과 악의 개념을 넣었기에 발생한 사태이다.

 

우리는 개인의 양심을 지키라고 말하기 위해서 거기에 선과 악, 옳고 그름의 개념을 삽입할 수 밖에 없었다. 뭔가가 옳고 뭔가가 틀렸다고 말하려면 처음부터 뭔가 비교 대상이 있어야 가능하다. 우리는 원래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들에 갑자기 잣대를 들이대고는 이것은 옳고 저것은 틀렸다 라고 판단하기 시작했다.

 

결국 인간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좋은 것들은 선한 것이 되었고, 그 반대의 것들은 악한 것이 되었다. 사랑, 우정, 신뢰, 관용, 배려, 용기 등은 모두 사회를 유지시키는 것에 큰 도움을 준다. 이것들은 사회를 더욱 더 따뜻하게 하고 서로를 더 돕게 만든다. 그러니 선한 것이 되었다. 반대로 배신, 거짓말, 불신, 비겁함과 같은 것들은 악한 것이 되었다. 이것들은 사회를 혼란 시키고 우리를 뭉치지 못하게 만든다.

 

원래 이런 개념들은 그저 사회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좋거나 나쁜 것일 뿐이어야 했다. 하지만 우리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아예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구분하고 있다. 좋은 것은 선한 것으로 나쁜 것은 악한 것으로 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정하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다. 예를 들어서 인류 멸망의 결정적 순간을 막아낸 사람은 영웅이 될 수는 있지만, 인류가 생존함으로써 희생될 그 수 많은 동식물들에게까지도 그것이 통용될 수는 없다. 누군가의 이득은 반드시 누군가의 손해가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 인간에게 이득이 되는 것을 선한 것이고 옳은 것이고 손해가 되는 것은 악한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는 바로 이 개념을 기반으로 해서 동작되고 있다.

 

이 부조리는 도대체 풀어낼 방법이 없다.

 

신과 사회 구조를 만들어 낸 인간은 생존과 영생에 대한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우리는 확실한 뭔가가 더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각자가 살아가야 할 이유이며 더해서 우리를 좀 더 오래 살 수 있게 해주는 방법론에 대한 필요성이다.

 

인간은 이제 세 번째 방법론을 만들었으며 그것을 '행복' 이라는 단어로 부른다. 그리고 우리는 행복을 통해서 생존을 위해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을 갖게 된 것이다.

 

요즘에 많은 사람들은 행복하기 위해서 살아간다. 행복은 현재 인류의 궁극적인 목표인데, 그 이유가 바로 행복함을 느끼는 모든 순간이 바로 우리가 좀 더 오래 살 수 있는 가능성을 높혔을 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팠던 몸이 건강해지는 순간, 맛난 음식을 먹는 순간,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사람들과 즐거운 대화 시간, 큰 돈을 벌었거나 원하던 직장에 들어간 순간 행복하다. 이런 것들은 모두 생존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하지만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감상하면서 느끼는 행복은 생존과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것도 결국에 생존과 연결이 된다. 우리는 정서적으로 안정적일 때, 스트레스를 덜 받을 때 병에 덜 걸릴 수 있다.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행복이란 감정 자체가 바로 몸이 '잘 했다' 라고 칭찬을 해주는 순간이다.

 

왜 몸은 그렇게 칭찬을 해줄까?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 더 오래 살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무의식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이라서 우리는 그것을 마음대로 얻을 수는 없다.

 

우리가 힘들게 일을 하고 난 후 느끼는 뿌듯함도 그런 것 중에 하나이다. 우리가 행복을 느끼는 모든 순간은 바로 어떤 식으로든 생존 가능성과 연관이 되어 있다. 단지 그 연결 고리가 너무 복잡하고 희미해서 그것이 바로 이어지지 않을 뿐이다.

 

문제는 이 행복 자체가 바로 거대한 부조리란 점이다. 행복의 부조리함은 행복하지 못해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으로써 충분히 증명이 된다.

 

생존하기 위해서 필요했던 행복이 오히려 생존을 망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실 행복을 생존과 관련된 것이라고 좀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이란 것을 자신이 인간으로써 누려야 할 권리라고 인식하고 있다. 실제로 헌법에서도 이것에 대해서 정의해두고 있다. 거기엔 모든 사람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 적혀있다.

 

그런데 정말로 우리는 각자 행복해야 할 권리가 있는 것일까? 사실 이 말은 우리는 모두 생존해야 할 권리가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 말은 맞는 말 같지만 정말로 그럴까?

 

낯선 숲에서 만난 굶주린 호랑이나 늑대가 그것을 인정해줄까? 거대한 해일이나 산사태나 지진이 그것을 인정해줄까? 우리를 살게 해주는 태양이 그것을 인정해줄까?

 

도대체 우리가 살아야 할 권리가 있음은 누가 인정해줄까? 그것은 오직 말이 통하는 같은 인간뿐임을 알 수 있다. 더군다나 인간들 중에서도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들의 죽음을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부조리는 도대체 어떻게 풀어내야 할까? 아무런 권리가 없는데 스스로 권리가 있다고 믿는 부조리를 해결할 방법은 없다. 우리는 그저 그렇게 믿고 살아갈 수 있을 뿐이다. 착각이라도 말이다.

 

하지만 이 착각으로 인해서 우리는 정말로 많은 갈등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 세상의 거의 모든 갈등은 바로 행복에 대한 갈등이다. 아내가 바람을 피우는 것도, 남편이 술주정뱅이가 되는 것도, 자식이 엇나가는 것도, 서로 다투는 것도, 서로 죽이는 것도 다 마찬가지다.

 

그 어떤 종류의 갈등도 각자의 행복에 대한 욕망이 기본으로 깔려 있다. 그럼으로 인해서 행복할 수도 있지만, 행복하지 못해서 서로를 죽이거나 스스로 죽는 일도 수 없이 많이 발생하고 있다.

 

살고 싶어서 죽는 것, 이것이 행복의 가장 근본적인 부조리 현상이다.

 

신의 존재, 사회 시스템, 행복은 모두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깊게 연관되어서 우리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고 각각이 가진 부조리는 각자 대로 그리고 이것이 복합적으로 얽힌 상황은 또 그것대로 거대한 부조리를 만들어 내고 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선의와 상식으로 돌아가길 바라지만 아직까지는 세상은 그렇게 흘러가지는 않는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정직함의 가치를 인정하지만 실제로 모든 사람이 거짓말을 안 하게 되는 순간이 오면 우리는 금세 망해버리고 말 것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거짓말이야말로 우리 인간 사회를 유지시켜주는 정말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는 정직함의 가치를 믿지만 정직함과 거짓말을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면 거짓말을 선택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우리는 매일 만나는 사람들에 대해서 본심은 숨겨둔 채, 가능하다면 상대가 좋아할만한 말만 골라서 표현하려고 노력한다. 사실상 거짓말이다. 이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런 노력이 없이 생각한 그대로가 다 표현된다면 매일 살인 사건만 해도 수십 만 건이 벌어질 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것과 실제의 세상이 다르다는 점을 까맣게 잊은 채 살아간다. 우리는 호랑이가 말을 하고, 개나 고양이의 표정에서 그들이 인간과 같은 감정을 느낀다고 여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진짜로 선할 수 있다고 믿기도 하고, 자신의 어떤 행동에는 어떤 종류의 이기심도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본질적으로 생존하기 위해 사는 존재이다. 하지만 이것을 부정함으로써 우리는 스스로에 대한 착각뿐만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 자체도 도저히 고칠 수 없을 지경으로 부조리해지고 말았다.

 

우리는 인간의 생명이 소중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살인자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비난을 퍼붓지만, 정작 전쟁터에서 적군을 많이 살해한 군인은 영웅이라고 칭송을 한다.

 

도대체 이 부조리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것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바로 우리 인간은 완벽한 이기적 존재라는 것뿐이다. 이것 말고는 그 어떤 것도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근거도 명확하다. 모든 생명체는 이기적이기에 생존하기 때문이다. 호랑이가 토끼를 안쓰럽게 여기면 호랑이는 굶어 죽고 만다.

 

생존하기 위해서 살지만 뭔가 다른 목적이 있다고 믿거나 이기적이지만 이기적이지 않다고 착각하는 존재 그리고 결국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스스로 의미가 있다고 믿는 것, 이것이 인간 부조리의 완성 판이다.

 

우리는 매일 닭을 먹으면서 닭의 명복을 빌어줄 수는 없다. 양계장에 가서 닭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동정심을 느껴 평생 닭을 안 먹을 수는 있지만, 그렇게 따지면 모든 것을 먹을 수 없게 된다. 그러면 죽는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것을 스스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어떤 경험, 어떤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진 자신의 판단 기준에 대해서 좀처럼 의심하지를 못한다. 사실 그렇게 살다가는 제대로 살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능하다면 세상을 단순하게 바라보길 바란다. 그래야 덜 스트레스 받고, 더 행복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스스로의 부조리를 바라볼 수 있는 기회 자체를 모두 날려 먹고 말았다.

 

결국 인간은 스스로의 부조리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가장 부조리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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