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인간 부조리 - 1

아이루다 2016. 12. 25. 07:40

 

뭔가 이치에 잘 맞지 않는 것, 아마도 이 정도면 대충 부조리라는 단어에 대한 설명이 될 듯 싶다.

 

사실 사전적 의미를 따질 필요도 없다. 요즘 우리나라의 TV 뉴스, 신문 기사 등에서 부조리의 실체에 대해서 매일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정보들을 쏟아내고 있는 중이다. 너무 많아서 많은 사람들이 화병에 걸릴 지경이다.

 

이런 종류의 사회의 부조리는 그 사회에 속한 구성원들의 불만과 분노를 야기 시킨다. 그래서 어떤 사회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이 얼마나 자신이 속한 사회에 만족하고 있는지 여부를 따져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물론 만족도가 높다고 해서 무조건 그 사회가 부조리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멀리도 아니고 우리의 다른 한쪽인 북한 사회도 그렇고 아래에 있는 일본을 봐도 그렇다. 제 삼자의 입장에서 그들의 사회를 보면 부조리가 만연하지만 정작 그 사회 구성원들은 제법 만족하면서 살고 있는 듯 하다.

 

물론 내가 그 나라 사람이 아니니 제대로 알 수는 없다. 아무튼 사회의 부조리는 사회 구성원들의 최종 목적, 즉 행복을 방해할 여지가 많다. 그래서 우리 각자는 가능하면 부조리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 의무가 있다.

 

그런데 부조리한 것은 과연 인간의 사회뿐일까?

 

우리는 자연을 보고 부조리하다고 하지 않는다. 자연은 사실 그 단어 자체로 부조리의 반대말로 사용된다. 자연스럽다는 말이 바로 부조리하다는 말의 반대의 의미로 사용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뜻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서 인간의 사회와 자연 이 둘을 제외하면 무엇이 남을까? 사실 남는 것은 없어 보인다. 이 세상은 인간과 자연으로 구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잊힌 존재를 생각해 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 자신, 즉 인간이다.

 

이것은 인간 존재 자체의 부조리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우리들 각자에 대해서 스스로 부조리하다고 느끼고 있지는 않을까? 사실 자신이 부조리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우리들은 대부분 스스로 충분히 이치에 맞는 삶을 살고 있다고 느낀다.

 

우리는 매일의 경험 속에서 자신의 결정하고 행동하는 거의 모든 것들에 대해서 적당한 이유와 합리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자신이 그리고 인간이 부조리한 대상이라고 좀처럼 생각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과연 정말로 그럴까? 인간은 그리고 나는 부조리한 존재가 아닐까? 우리는 우리 스스로 믿는 것처럼 정말로 합리적이고 이치에 맞는 존재들일까? 이것에 대해서는 조금 더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사실 자신이 부조리한 존재라고 인정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며,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생각보다 많은 반발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부조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마도 가장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스스로 부조리하지 않다고 믿는 것은 사실 거대한 착각에 불과하다. 어떤 면에서 사회의 부조리함은 인간의 부조리함에 비해서 비교 대상이 되지도 않을 지경이다. 인간만큼 부조리한 대상도 없다. 사회적 부조리 현상은 그저 인간의 부조리에서 파생되어 나온 작은 흔적일 뿐이다.

 

우리 인간은 왜 그렇게 부조리한 존재일까?

 

아니, 우리가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기에 질문을 이렇게 바꿔야 한다.

 

인간은 왜 이렇게 부조리한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말았을까?

 

인간의 최초의 부조리함은 바로 생명체이기 때문에 발생한다. 모든 생명체는 죽는다. 그래서 모든 생명체는 살아있는 동안에 최선을 다해 죽음으로부터 도망친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결국 죽는다. 태어나서 평생 살기 위해서 노력하다가 죽는다는 과정을 생각해보면 어쩔 수 없는 부조리가 발생할 수 밖에 없다.

 

물론 모든 생은 멸을 향해 가는 우주적인 법칙을 생각하면 이것을 꼭 부조리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사는 지구도, 우리를 살게 해주는 태양도, 이 우주 자체도 결국 시간이 흐르고 나면 사라질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이 원론적인 부조리는 그냥 숨겨두자. 우주의 법칙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진짜 문제는 태어난 생명체가 죽지 않기 위해서 과도한 노력하는 과정에서 생겨난다. 특히 인간의 경우가 그렇다. 우리는 죽음을 원하지 않기에 죽지 않기 위해서 다양한 노력을 하는 과정 중에서 스스로 거대한 부조리를 만들어 내고 말았다.

 

인간이 가장 첫 번째 한 노력은 바로 신의 존재에 대한 가정이다. 우리는 신을 가정함으로써 우리의 죽음에 대한 전혀 다른 해석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비록 육체는 늙고 병들어서 죽은 후 썩지만, 뭔가 우리 안에 있는 다른 것은 우리를 영원토록 존재하게 만들어 줄 수도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유한한 육체와는 분리된 무한한 영혼과 같은 것에 대한 믿음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신은 서로 지역적으로 고유한 형태로 형성된 고대 문명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설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대부분 사후 세계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많은 종교에서 신은 인간을 창조한 존재로 정의되며 그로 인해서 우리는 신의 계획에 따라 태어나고 살다가 죽은 후 또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게 되었다. 즉, 죽음은 더 이상 끝이 아닌 것이 된 것이다. 그리고 태어나고 죽는 우연한 현상이 누군가의 계획의 일부가 됨으로써 매우 의미가 있어지게 되었다.

 

이런 생각은 요즘 시대에도 그것은 충분히 유효한데, 죽음 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말이나 죽음 후 다시 태어나 삶을 무한히 반복할 수 있다는 말로 설명되고 있으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믿고 있다.

 

이런 식으로 인간은 신의 존재를 끌어들임으로써 생명체의 한계인 생과 멸에 대한 최초의 부조리를 해결하려고 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인간이 신의 존재를 끌어들이자 이제는 훨씬 더 심각한 형태의 부조리를 만들어지고 말았다.

 

그저 살다가 죽는 존재였으면 그나마 자연적 현상으로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죽음이 신의 존재가 끼어듦으로써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한 부조리의 대상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원래 우리가 그저 태어나서 살아가 후손을 남기고 죽는 다른 모든 종류의 생명체처럼 살았다면 우리의 존재는 그저 자연스러운 생과 멸의 흐름 속에서 존재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신이 끼어들자 우리는 이제 도대체 신은 과연 어떤 존재인지를 증명해야 할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신의 계획의 일부라면 도대체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각자 다른 운명으로 삶을 살아야 하는지도 설명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우리는 신이 도대체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품어야 했다.

 

또한 신은 왜 악을 허용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답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선과 악의 개념이 생기면서 어떤 행위가 선한 것이고 어떤 행위가 악한 것인지에 대해서 끝없는 부조리를 겪어야 했다.

 

하지만 원래 자연에는 선과 악의 개념이 없다. 늑대가 토끼를 잡아 먹는 것은 그저 자연스러운 일일뿐, 늑대가 악이고 토끼가 선한 것이 아니어야 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그런 행위조차도 선과 악의 관점에서 봄으로써 본격적으로 부조리를 생산하고 있다. 우리는 내가 살기 위해서 다른 존재의 삶을 뺏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누군가 살기 위해서 나의 생명을 뺏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들 각자 모두가 그렇게 생각한다.

 

이것은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니어야 했다. 그저 생존 경쟁이고 약육강식의 원리여야 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 전혀 새로운 잣대를 들이 댄 것이다. 이것이 과연 정상적인 상황일까?

 

아니다. 모든 생명체는 그저 살고자 할 뿐이다. 만약 정말로 옳은 것이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바로 생존이다. 우리는 영원한 삶을 꿈꾸기에 영혼의 존재를 만들어 낸 후 결국 감당할 수 없는 부조리를 만들어 내고 말았다.

 

사실 그나마 이것은 별 것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신의 존재로 인해서 인간이 전혀 다른 존재로 정의된 상황이다. 이것은 단지 먹이 사슬 순위에서 높아진 것이 아니다. 인간은 아예 차원이 다른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인간은 더 이상 동물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한다.

 

이것으로 인해서 인간에 대한 무한대의 자존심이 생겨났다. 그야말로 인간 프라이드이다. 그리고 이 인간 프라이드는 지금도 이 세상을 온전히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이 지구는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고 있다. 이 지구 상의 모든 생명체는 인간을 살리기 위해서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들을 우리끼리 계약을 맺고 마음껏 이용하고 파괴한다. 그리고 이것을 그 누구도 이상한 일이라고 여기지를 않는다.

 

우리는 맨 땅에 금을 긋고는 그것이 자기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전혀 이상한 행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땅에서 금을 캐내면 그것이 자기 것이 되는 것을 전혀 이상한 것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그 근거에는 자신이 노동을 한 것과 또 다른 인간들의 인정만이 필요할 뿐이다.

 

누가 이것을 이상한 것이라고 여길 것인가?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은 지금 시대에도 명확하지 않다. 미래에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 실제로 신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없을지도 모른다. 신의 존재는 그저 불가지이다. 우리는 그것을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다. 단지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은 적어도 우리가 상상하고 있는 그런 신의 모습은 아니어야 할 것이다. 만약 정말로 신이 부조리하다면 그 존재를 신이라고 칭하기는 어렵다.


[다음 편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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