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도대체 감정은 왜 생겨날까?

아이루다 2016. 12. 31. 08:08


 

사람들은 모두 감정의 존재이다. 혹은 다른 표현으로 감정적 존재라도 할 수 있다.

 

우리는 보통 자신에 대한 평가 중에서 감정적이란 표현에 대해 어느 정도 거부감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 각자가 감정적 존재가 아닌 것은 아니다.

 

물론 우리는 아주 가끔 감정 자체가 아예 없어 보이는 사람을 목격하는 일이 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냉혈한, 사이코 패스와 같은 말로 표현하지만, 사실 그들이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것을 잘 숨기거나 혹은 단지 다른 사람의 감정에 그저 무관심한 것 뿐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감정은 어떤 경우에나 무조건 존재한다. 감정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은 단지 자신의 처지에 따라 상황에 따라 일반 사람이라면 느낄 가능성이 높은 감정 자체가 아예 발생되지 않거나 혹은 감정이 발생되더라도 그것을 숨기는 능력이 탁월하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능력이 바로 이성이다.

 

흔히 감정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많이 설명되고 있는 이성은, 쉽게 말해서 우리가 감정적으로 반응을 하는 것에 대한 손익 계산을 하고는 감정을 제어하거나 숨기는 능력을 뜻한다. 그래서 이성은 발생한 감정이 자신에게 이득이 된다고 판단하면 더욱 증폭시키고, 손해가 된다고 판단되면 최대한 숨기려고 애쓴다.

 

이때 우리는 흔히 자신의 얼굴 표정, 전체적인 태도, 어투, 사용하는 단어 등등을 제어하는데, 사실 한계는 명확하다. 가장 큰 정보를 제공하는 얼굴 표정 자체는 어떤 식으로 숨기더라도 신체의 다른 부위에서 은연 중에 그것이 드러난다. 그래서 눈알이 불안하게 흔들리거나, 손을 떨거나, 자신만의 특별한 버릇이 나타나거나,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거나 하는 등의 반응 등이 나타난다.

 

그러다 보니 아주 특별한 훈련을 받거나 혹은 이성적 제어력이 엄청나게 강한 사람이 아니고는 어떤 식으로든 내부적 감정이 외부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아무튼 결론적으로 외부로 드러나는 감정을 잘 숨기는 사람일수록 인간 사회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더 높다.

 

우리가 그렇게 숨기고자 하긴 하지만 감정은 인간의 시작이자 끝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하다.

 

우리는 매일 매 순간 오직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끝없이 어떤 감정을 느낀다. 감정은 고통, 두려움, 분노, 즐거움, 신남, 우울함, 심심함, 흥미로움, 무기력함 등등 참으로 많은 종류가 있다. 방금 언급한 것들은 감정의 대표적인 것들에 불과하다. 이것들 말고도 감정은 정말로 세분화 되어서 갈라진다.

 

우리는 각자의 삶 속에서 이렇게나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그것을 표현하거나 숨기면서 살아간다. 즉, 우리는 매일 매 순간 자신의 감정을 다루면서 삶이란 과정을 연속적으로 실행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감정이 우리 인간에게 필수적이고 중요하다는 생각에는 금세 동의할 수 있는데 감정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를 따져보려고 하면 약간의 혼란스러움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왜 감정은 이렇게나 중요한 것일까?

 

인간에게 있어서 감정이 중요한 가장 첫 번째 이유는 바로 감정이 모든 생각과 행동의 시작점이 되기 때문이다. 즉, 감정은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일의 최초 출발점이 된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또한 감정은 모든 생각과 행동의 목적이자 결론이 된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느끼면서 다음을 계획한다. 배고픔의 고통이 느껴지면 밥을 먹어야 할 방법을 찾는다. 심심하면 무엇을 하고 놀 것을 생각한다. 화가 나면 화를 풀 방법을 찾고, 공포를 느끼면 공포심을 줄일 방법을 찾는다. 우리가 뭔가를 계획하거나 생각하지 않을 때는 바로 이미 충분히 만족해서 행복할 때이다.

 

우리는 어떤 감정을 느끼면서 계획하고 행동했던 것들을 마무리한다. 우리는 밥을 먹고 고통을 해소한 후 만족감을 느낀다. 우리는 재미난 놀 것을 찾아서 놀면서 기분이 좋아진다. 우리는 화를 풀고는 다시 평소의 감정 상태가 된다. 우리는 당장의 안전한 집에 도착한 후 안도감을 느끼고 편해진다.

 

물론 이것은 좋은 결론이 난 경우이긴 하다. 만약 운이 없다면 배가 고파 먹을 것을 찾았으나 결국 헛힘만 빼고 더 배고플 수도 있고, 돈을 들여서 재미난 것을 했지만 더 지루해질 수도 있고, 화가 나서 풀고자 했으나 더욱 증폭되어서 폭발할 수도 있고, 안전한 곳을 찾으려고 했지만 더 공포스러운 상황에 놓일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죽지 않는 한 다시 계획하고 행동을 하게 된다. 물론 한계를 넘어서면 포기를 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우리는 나쁜 감정이 발생한 후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서 노력하여서 가능하면 좋은 감정 상태로 그것을 끝낸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인생이라고 부르는 과정의 요약 본이다.

 

물론 그 안에 수 많은 디테일이 있다. 각자마다 다른 감정을 느끼고 각자마다 모두 다른 생각화 해결책을 찾는다. 또한 각자마다 만족하는 수준이 다르고, 각자마다 그것에 대한 평가나 만족도 다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근본적으로 불행과 행복으로 이어지는 이 흐름에서 전혀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는 나쁜 감정을 느끼는 상태를 불행하다고 표현하고, 좋은 감정을 느끼는 상태를 행복이라고 표현한다. 행복은 인간의 모든 것이니 행복이나 불행을 발생시키는 근원적 원인인 감정의 발생과 소멸 그 자체가 인간의 모든 것이라고 표현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이렇게나 중요한 감정은 도대체 왜 발생하고 해소되길 반복하는 것일까? 인간에게는 도대체 왜 감정이란 절차가 생긴 것일까?

 

지금 알고 싶은 정확한 질문은 바로 '인간은 왜 감정이 생겨나는가?' 에 대한 것이다. 감정의 역할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데, 감정 자체가 왜 발생하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잘 이해가 가질 않는다. 우리는 그냥 늘 행복한 감정만을 느끼면 안 되는 것일까? 왜 이렇게 매일 행복한 감정을 느끼려고 그렇게나 힘든 노력들을 하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

 

그런데 그 이유는 참으로 단순하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생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이 감정을 느끼는 유일한 이유는 오직 생존에 대한 필요성 때문이다.

 

감정이라는 것은 우리의 숨겨진 무의식이 의식에게 보내는 생존 신호이다. 우리의 무의식은 감정을 통해 우리의 의식을 조절하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는 어떤 이유들로 인해서 무의식으로부터 발생된 어떤 감정을 전달 받은 후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의식적으로 생각하고 노력하며 달성을 한다.

 

예를 들어서 우리는 배가 고플 때, 배가 고프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느끼지는 않는다. 그저 갑자기 배가 고프다. 사실 배가 고프다는 것은 일종의 고통이기도 하다. 아무튼 어떤 식으로든 배가 고프면 우리는 그것을 의식적으로 감지한다.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먹을지를 생각해서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실행한다.

 

그러면 배가 부르고 만족스러움을 느끼게 되면서 배고픔에 대한 인식은 사라진다. 그리고 그 자리엔 또 다른 감정이 들어선다. 그것은 춥다는 것일 수도 있고, 심심하다는 것일 수도 있고, 졸리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무의식은 왜 그런 감정들을 생성해서 우리의 의식에 전달해주는 것일까?

 

그 이유가 바로 이미 설명했던 생존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배고픔을 느끼는 것도, 공포를 느끼는 것도, 졸림을 느끼는 것도, 이성을 보고 흥분감을 느끼는 것도,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안락함을 느끼는 것도 모두 같은 이유이다.

 

그러니 우리가 나쁜 감정을 느끼는 경우는 바로 우리가 죽음에 조금이라도 다가섰다는 뜻이고, 우리가 좋은 감정을 느꼈다는 것은 죽음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멀어졌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전혀 의식적으로 느끼질 못한다. 이 영역은 오직 무의식이 관장하고 있다. 사실 그래야만 하기도 한다.

 

만약 우리가 의식적으로 감정을 조절할 수 있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이 말은 꽤나 좋은 의미 같지만, 사실 정말로 무서운 말이다.

 

이것은 마치 마약을 한 상태와 같다. 우리는 기분 좋게 굶어 죽을 수도 있다.

 

무의식이 지속적으로 나쁜 감정을 생성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지속적으로 위험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일 식사를 해야만 생존한다. 식사 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서라면 매일 뭔가를 해야 한다. 그러니 무의식은 언제나 다음에 어떤 행동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것을 보통 고통을 통해서 지시한다. 큰 고통을 느껴야 다른 작은 고통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배가 너무 고픈 날 집안에 먹을 것이 하나도 없을 경우, 그 추운 밖에 나갈 결심을 하려면 추운 밖에 나가는 고통보다 배가 고픈 고통이 더욱 더 커야 한다.

 

또한 무의식은 단순히 고통만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다. 무의식은 채찍과 당근을 모두 사용한다. 그래서 무의식은 쾌락을 약속하여 우리의 의식이 움직이도록 하기도 한다. 무의식은 고통을 극복하는 노력을 해서 성공하면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고, 약속한 쾌락을 얻기 위한 노력을 하면 그에 합당한 기분 좋은 즐거움을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우리는 이 두 가지의 경우, 즉 첫 번째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움직이는 경우보다는 쾌락을 얻기 위해서 움직이는 경우를 훨씬 더 선호한다.


첫 번째는 해야 하는 일을 하는 삶, 불행함을 벗어나기 위해서 사는 삶이라고 하고 두 번째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삶,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 삶이라고 말한다. 이 둘 중에서 후자가 훨씬 더 나은 삶이라고 평가된다.

 

또한 과거에서 현대로 올수록 우리는 점점 고통을 피할 목적보다는 쾌감을 얻을 목적으로 생각하고 행동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로 인해서 우리는 이제 커다란 착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감정의 발생과 그것으로부터 얻는 행복을 생존 그 자체와 분리시키고는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쾌감을 얻기 위해서 행동하고 있다고 믿게 된 것이다.

 

즉, 우리는 현재 살기 위해서 먹는 것이 아니라, 먹기 위해서 살고 있다고 믿고 있다.

 

이 착각으로 인해서 우리는 점점 감정이 생존을 위한 신호임을 잊어 먹고 있으며, 행복이 생존과 완벽히 일치된 개념임을 부정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생존을 넘어선 그 어떤 존재가 되었다고 믿는다.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존재들이 아니라,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 존재들이 된 것이다. 그러니 행복하지 않으면 스스로 생존을 포기하기 까지 한다.

 

하지만 며칠만 굶으면 우리는 금세 수백 만년 전의 우리 조상들의 모습으로 되돌아 간다. 공포 앞에서 서면 자신도 모르게 바지에 오줌과 똥을 싼다.

 

하지만 우리는 그저 오랫동안 안전한 문명 안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이렇게 여유로운 것뿐이다. 지금이라도 인류 문명이 무너지고 나면 우리는 한 달도 안되어서 금세 원시인들의 불안한 삶을 답습하게 된다.

 

더군다나 이 문제는 이후 더 큰 문제를 발생시킨다. 이런 형태의 착각은 이후 행복에 대한 착각을 불러오고 더해서 우리 인간의 삶 자체에 대한 커다란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결국 우리 인간은 다른 지구 상의 생명체와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며, 그래서 독창적이고 차원이 다른 의미와 가치를 지닌 존재로 정의된다. 우리는 이제 그저 생존하기 위해서 매일 노력하는 존재가 아닌, 생존을 넘어선 어떤 가치를 가진 존재이다.

 

이것은 인류 문명에서 숱하게 발생했던 사건들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정말로 그럴 수 있는 존재라고 믿고 있다.

 

이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이 거대한 착각은 우리를 스스로 제대로 파악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즉,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진한 색안경을 끼고 우리 자신을 바라보고 평가하고 있다.

 

그래서 자신에게 일어난 많은 문제들을 거의 대부분 오판한 채 평생을 살다가 죽는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은 생존과 같은 저급한 본능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뭔가 차원이 다른 어떤 것이라고 믿는다.

 

이 세상 모든 사물과 생명체에 자신의 감정을 투사하여 그것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행위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하늘이 맑은 것이 행복하고, 바다가 푸른 것이 행복하다. 귀여운 강아지를 보면 행복하고, 자신을 닮은 아이를 보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 모두가 그저 타고난 대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지만, 우리는 그것들에 자신의 감정을 주입하여 전혀 다른 존재로 재해석해내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 다량의 행복을 만들어 낸다.

 

사실 삶이 행복을 위한 끝없는 여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기에 이것은 어떤 면에서 너무도 당연한 행위들이다. 단지 그것이 자신의 온전히 착각임을 평생 동안 인지하지 못하고 사는 것 자체는 조금 슬픈 일이다.

 

사실 모른다고 해도 문제도 없고, 안다고 해도 해결책도 없다. 단지 무지로부터 오는 착각이 만들어 낸 거품 속에서 사는 것보다는 적어도 자기 인식을 통해 불필요한 오해와 터무니 없는 욕망에서 벗어나서 살아가는 삶이 결론적으로 행복한 삶을 위해서 좀 더 유리하다는 점만은 깊이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

 

산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정말로 그저 마음 먹기에 달린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감정이 생존에 대한 무의식의 신호라면, 우리는 이것을 의식적으로 판단해서 거부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는 얼마나 의식적일 수 있느냐에 따라서 자신의 감정에 좀 덜 종속적일 수도 있는 가능성이 있다.


우리의 무의식은 아주 오래된 진화의 산물이다. 그래서 세상이 이렇게 변했는데도 터무니 없는 감정들을 지속적으로 생성해내고 있다. 그리고는 스스로를 매우 괴롭힌다.


우리는 대부분 굶어 죽는 삶을 살지는 않는다. 우리는 대부분 잠잘 곳이 없거나 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대부분 생존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것들은 충족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의 무의식은 끝없이 동굴 속에서 불안한 삶을 살던 우리의 오래된 조상들의 삶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가 매일 느끼는 대부분의 나쁜 감정들은 바로 이런 원리로 생성되고 있다. 즉, 거의 대부분 무시해도 되는 것들이다. 그러니 우리가 하는 걱정의 대부분은 진짜로 쓸데없는 것이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감정의 생성 원리를 이해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이 왜 무엇인가를 느끼는지에 대한 바라봄이 있을 수 있다면 우리는 나쁜 감정의 함정에 빠질 가능성이 현저하게 낮아지게 된다. 그러면서 우리는 인간이 쌓은 높은 지식을 통해 삶을 조금 다른 각도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로움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물론 그것을 하기 위해서 최초의 인정이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바로 자신이 느끼는 모든 것은 그저 생존에 대한 욕구일뿐이라는 것 말이다. 거기엔 어떤 의미도 가치도 없음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 말이다.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사실 무의식적으로 발생하는 감정에 대해서 또 다른 무의식적 반응만을 하고 살아갈 뿐이다. 즉, 우리들은 사실상 의식이 없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생겨난 어떤 선입견과 사회 통념 속에 갇힌 채, 무의식에서 전달되어 오는 수 많은 감정을 전혀 살펴보려는 노력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그것을 처치하는데 급급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삶이라고 부른다.


이 과정을 정말로 삶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평생 동안의 무의식적 존재로써 그저 살아 있는 삶 말이다. 우리들에게 자기 성찰의 시간이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이다. 우리는 좀 더 자신에 대해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설령 힘들고 고된 일이라고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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