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무의식적 의식

아이루다 2016. 12. 6. 10:46

 

우리는 매일 살아간다. 그리고 사는 동안에 우리에게는 기억이라는 것이 쌓인다. 그런데 이 기억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감각의 기억이고 다른 하나는 정보의 기억이다.

 

보통 감각의 기역은 무의식적으로 기록이 된다.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운다든가 아니면 농구공을 튕기는 법을 배우는 것등이 그 흔한 예가 될 것이다. 이것은 몸으로 기록되는 것이라고 설명되기도 하는데, 아무튼 기억하고 싶다고 해서 기억되는 것이 아니며, 잊고 싶다고 해서 잊혀지는 것도 아니다.

 

반면에 정보의 기억은 의식적으로 기억된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가 공부를 하고 그 내용을 기억하는 것이나 동사무소에서 주민등록등본을 띄는 일을 해내는 것과 같은 것들이 바로 그 예가 될 것이다. 이것들은 머리가 얼마나 똑똑하냐에 따라서 다르며,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잊는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의식적 존재라고 알려져 있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인간을 의식적 존재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정보의 기억력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 감각의 기억은 우리가 끼어들 부분이 별로 없다. 우리는 무의식적인 반복을 통해 기억하는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를 의식적 존재라고 말하는 것이 과연 제대로 된 판단일까? 어떤 면에서 우리는 반쪽 짜리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이것에 대해서 좀 생각해보자.

 

인간은 외부로부터 오감을 통해 정보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중에서 시각 정보가 가장 우선시 된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들과 만나서 서로 이야기를 나눌 때는 말을 통해서 한다. 즉, 시각이 아닌 청각 정보를 이용한다.

 

일반적으로 시각 정보는 우리가 오감을 통해 받아들이는 전체 정보량의 80% 정도를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니 나머지 네 가지 감각이 20%를 채운다. 그러면 우리가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 우리는 20% 중에서도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아주 적은 량의 청각 정보만을 이용하고 있는 것일까?

 

당연히 아니다. 사실 우리가 아는 것과는 달리 말 자체는 우리가 상대의 의사를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아주 큰 역할을 하지 못한다. 우리는 표정, 행동, 냄새 등을 기반으로 해서 감각적인 판단을 하고 있다. 이때 말은 그 중의 일부만을 담당한다.

 

그렇다면 오직 목소리만 들리는 통화할 때는 어떨까? 그때는 온전히 말에만 의존하고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말의 내용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투나 뉘앙스로 알려진 것들이다. 같은 말이라도 좋은 말투로 하느냐 아니면 험한 말투로 하느냐에 따라서 완전히 그 뜻이 달라진다.

 

즉, 우리는 말에서 쓰인 단어 그 자체보다도 그것이 표현될 때 동반되는 어투나 앞뒤 관계를 통해 상대의 정확한 의도를 알아채려고 하게 된다. 글로 쓰는 채팅도 비슷하다. 하지만 채팅은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는 글로만 표현하다가는 오해를 많이 사게 된다. 그래서 의사 전달에 있어서 글은 말보다 훨씬 힘들다. 물론 제대로 하면 좀 더 정확할 수는 있다.

 

감각의 기억은 오감을 통해 즉석에서 만들어진다. 그리고 정보의 기억은 말이나 글, 물론 이것도 눈과 귀를 통해 얻는 것이긴 하지만 그 정보를 얻은 후 반드시 해석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한국 사람이나 일본 사람이나 미국 사람 모두 석양을 보고는 아름답다고 느끼지만, 그것을 서로의 언어로 말하거나 쓸 때는 그것이 각자 해석이 안되기 때문에 한국 사람에게는 아름다운 표현이 일본이나 미국 사람에게는 도대체 뭔 소리인지 라는 표정을 짓게 만들 수 있다. 그럼에도 이것이 전달 가능한 것은 표정을 통해서이다. 인간은 누구나 아름답다는 말을 표정으로 대신 표현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감각의 기억과 정보의 기억과의 차이점이다. 감각적 기억은 해석될 필요가 없다. 그냥 느끼는 것이다. 누군가 우리를 비웃거나 선의를 보일 때 자연스럽게 그거을 느끼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쉽게 간다. 그런 것들은 딱히 해석할 필요가 없다. 그냥 느낀다.

 

정보의 해석은 반드시 시간이 필요하다. 짧은 시간이라고 해도 어떤 말이나 글이 머리 속에 들어가서 기존의 경험이나 정보를 통해서 재해석된 후 머리 속에서 이해가 되어야 한다. 이 시간은 아주 짧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없는 것으로 간주하긴 힘들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수많은 오해석이 이뤄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지금 바로 이 순간에 존재하는 나는 과연 어떤 존재일까? 바로 이 순간에 존재하는 나 말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관점이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고 있을 때 과연 어떤 상태의 존재인지를 정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답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우리는 늘 언제나 감각의 기억으로 시작해서 정보의 기억으로 마무리되니까 말이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은 언제나 감각의 기억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머리 속에서 그것이 해석되어서 정보의 기억으로 넘어간다.

 

하지만 흔히 우리는 정보의 기억만을 자신의 기억으로 인식한다. 밥을 먹었다면 어떤 메뉴를 먹었는지를 기억한다. 하지만 지금 이순간 우리들 자신은 맛있는 밥을 먹었을 경우 만족스러워서 기분이 좋거나 그렇지 못할 경우 괜한 짜증이 난 상태에 있다.

 

즉, 이것을 좀 더 그럴 듯 하게 정리하면, 우리는 감정을 통해서 현재를 경험하고 이성을 통해 지난 과거를 해석한다.

 

이 말이 가지는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에는 언제나 감각의 기억 상태에 있으며 그로 인해서 언제나 지금 바로 이 순간에는 온전히 무의식적이란 뜻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과거를 기준으로 의식적이 된다. 하지만 우리 머리 속은 정보의 기억이 남아 있기에 우리 스스로가 언제나 의식적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산다는 말은 기본적으로 감정의 경험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 감정 속에서 삶을 산다. 그리고 그 중에서 좋은 감정 속에서 살아가길 원한다. 그것이 바로 행복이다.

 

감정의 경험은 당연히 즉시적이다. 우리는 감정을 보류할 능력이 없다. 지금 기분이 좋은데 10분 후에 좋도록 바꿀 수가 없다는 뜻이다. 반면에 해석은 얼마든지 보류될 수 있다. 우리는 정신이 없으면 눈 앞에 일어난 사건을 한참 후에 해석하기도 한다. 무의식은 엄청나게 빠르고 의식은 상대적으로 느리다.

 

이로 인해서 우리는 사실상 무의식적인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더해서 한 가지 문제가 더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의식은 사실상 무의식적으로 일어난 감정적 변화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설명으로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는데 쓰인다는 점이다. 이것은 우리 인간은 누구나 사실상 이중적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언제나 화난 이유를, 기쁜 이유를, 조바심을 내는 이유를, 누군가를 싫어하는 이유를,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유를 대고 있지만 사실 왜 우리가 그런 감정 상태가 되었는지 제대로 설명하기란 무척 어렵다.

 

만약 이것이 쉽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 정말로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들일 것이다. 한번이라도 자신의 감정의 원인이 과연 어디에서 오는지를 생각을 해본 사람이라면 그 시작점이 터무니없는 곳임을 알게 된다.

 

사실 그런 감정들은 어린 시절의 경험, 누군가에 들은 한마디 상처, 부모로부터 무의식적으로 들어 온 가치관등으로 인해서 오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어린 시절에 채우지 못한 것을 채우기 위해서 평생 노력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잊혀진 진실을 다시 꺼내봐야 한다.

 

부모에게 인정을 받지 못한 사람은 평생 동안 타인의 인정을 원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권력자가 되고 싶어한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평생 동안 사랑과 같은 가치를 거부하면서 살아가기도 한다. 그래서 철저한 이성주의자가 된다.

 

하지만 권력자는 자신이 인류의 삶을 더 낫게 증진시키기 위해서 그 자리에 올라가겠다고 의식적으로 해석할 것이고, 이성주의자는 인간의 이성은 논리적이며 합리적이기에 그러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해석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의식적 해석들조차도 사실상 무의식적일 가능성이 높다. 즉, 우리가 무엇인가를 해석하는 행위 자체는 의식적일지 모르지만, 그 해석에 쓰이고 있는 기준 자체는 무의식적인 것이다.

 

우리가 이런 상황이라면 우리를 의식적 존재라고 말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일까에 대해서 정말로 다른 관점을 가져야 한다.

 

우리의 의식은 보통 지나간 과거를 끄집어 내어서 보는 것에만 쓰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매 순간마다 무의식적으로 살아간다.

 

사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살아가기에 생존할 수도 있다. 매 초마다 우리에게 도착되는 정보의 양은 너무 많아서 우리는 그것들을 모두 의식적으로 바라볼 수 없다. 우리는 그 중 극히 일부만을 선택적으로 해석한다. 그것을 하는 것만도 힘들어서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느 순간엔 기억을 떠올릴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의식적으로 살아간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인간의 특징이라고 믿기도 한다.

 

사실 이 착각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무의식적인 존재이든 아니든 그것이 무슨 상관이랴.

 

진짜 문제는 무의식적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스스로를 의식적 존재라고 믿음으로써 생긴다. 왜냐하면 우리는 끝없이 잘못된 해석을 하고는 그것을 스스로도 굳게 믿기 때문이다.

 

우리가 매일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무의식적인 감각적 경험을 통해 현재를 살고는 그것을 시간이 지난 후 자기 편한 대로 해석을 한다. 화가 난 일이든, 기분이 좋은 일이든 상관없다. 즉시적으로 얻는 감정이 아닌, 해석된 감정을 만든다.

 

그리고 이때 가능하다면 자신에게 유리하게 판단한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과 충돌이 안 생길래야 안 생길 수가 없다. 같은 사건을 서로가 유리하게 해석하니까 말이다.

 

인간이 인간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 가장 큰 원인 바로 이것이다. 분명히 서로 잘못된 해석을 하고 있음에도 서로가 자신이 해석할 결과를 맹신한다.
 

현재를 살고 있는 감각적 경험은 그런 것이 없다. 그냥 좋고, 싫고, 기분 나쁘고, 화가 나는 것으로 끝난다. 감정은 원래 그냥 그렇게 생겨난다. 상대의 표정에, 행동에, 말투에, 상황에 따라서 우리가 조절 가능하지도 않다. 그냥 자연스럽게 생긴다.

 

그렇게 해서 현재를 경험한 후, 나중에 과거가 되어버린 정보적 기억을 끄집어 내어서 자신이 좋은 이유, 싫은 이유, 기분이 나쁜 이유, 화가 나는 이유를 설명한다. 이것은 맞을 수도 있지만 틀릴 가능성도 매우 높다.

 

그나마 제 삼자에 대한 해석은 객관적 입장이라서 옳을 수도 있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부분은 주관적 입장이라서 틀릴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사실 이것을 안다고 해서 별로 달라질 것도 없다. 단지 우리가 이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조금 다른 시점으로 그것을 바라볼 수 있다.

 

즉, 나나 너나 모두 감각적으로 살아간 후 정보적으로 해석되고 있다는 점을 이해하게 되면, 우리가 글이나 말을 통해서 표현하는 모든 것은 사실상 과거적 기억의 재해석이 불과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우리 자신이 하는 말이나 남이 하는 말 모두 각자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더 유리하도록 설명하고 있을 뿐임을 짐작 할 수 있다.

 

인간이 그런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면, 내가 옳다, 네가 옳다를 가지고 따질 이유가 많이 줄어든다. 우리는 사실상 모두 틀리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 전체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준다. 키우는 개가 똥을 아무데나 싸는 것은 인간을 기준으로 보면 언제나 혼을 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이것은 틀렸다. 개는 그저 개의 기준으로 그것을 봐줘야 한다. 그래야 개가 아무데나 똥을 사는 것을 치우는 것에 대해서 귀찮을지언정 화를 내지는 않을 수 있다.

 

사람에 대한 이해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는 끝없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느끼는데, 여기에서 의식에 관한 인간의 본질적 특징을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무의식적인 삶에 대해서 깊은 이해를 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우리 자신의 무의식적인 삶에 대해서도 스스로 이해가 된다.

 

이것이 조금이라도 된다면 자신의 삶에 대해서 조금 다른 시점, 아니 사실은 정말로 완전히 다른 시점으로 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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