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사고 한계

아이루다 2017. 1. 2. 07:59

 

요즘 가끔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묘한 느낌을 받는 경우가 가끔 있다. 그것도 그 대화가 평범한 일상의 대화가 아닌, 우리가 별로 그것에 대해 말할 필요도, 기회도 없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 혹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 등일 할 때이다.

 

사실 나는 개인적으로 그 동안 이런 종류의 대화에 꽤나 목말라 했고, 혹시라도 그럴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물 만난 고기처럼 떠들어대곤 했었다. 그런 성향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아무튼 그럴만한 기회도 별로 없긴 했지만 우연히 만나게 된 자리에서 예전과는 다른 뭔가 좀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분명히 내가 흥미로울 만한 주제에 대해서 재미있게 얘기하고 있는 중이지만, 대화 도중에 종종 내가 상대의 말에 대해서 미묘하게 겉도는 느낌 혹은 결이 딱 맞물리지 않고 서로 미세하게 어긋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이것은 그다지 좋은 느낌은 아니다. 왜냐하면 결국 이런 느낌으로 인해 나는 대화 중에 자주 몰입이 깨지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 이것은 자기 인식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과거와는 뭔가 다르다.

 

그리고 왜 내가 이런 느낌을 받는지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을 해봤다. 도대체 나는 왜 사람들과의 대화 중에서 온전히 몰입하지 못하고 이런 어긋나는 느낌을 받게 될까?

 

잠시 생각을 해보다 보니 답은 단순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다른 사람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서 그들과 나는 거의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긴 하지만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달랐다. 그것은 바로 그런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인 시선의 중심이었다.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은 모두 '나'를 중심으로 이야기 하고 있었다. 즉,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 자신의 감정, 자신의 변화 등을 이해하고자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성향이나 특징 그리고 숨겨진 본질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나'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제대로 이야기 하는 사람도 무척 드물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적어도 나에겐 말이다.

 

그런데 정작 나는 '나'가 아닌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즉, 사실 내 이야기 속에서는 '나'는 그저 인간의 한 예로써 등장할 뿐이다. 즉, 나는 나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그저 객관화 된 대상일 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 '나'는 주관적 대상이다. 이 점이 차이인 것이다.

 

'나'를 이야기 하기 위해서 인간의 보편적 특징을 말하는 것과 '인간'을 설명하기 위해서 나의 일반적 특징을 끼워 넣는 것은 거의 비슷한 대화 내용을 보여주긴 한다. 하지만 이것은 마치 심리학과 철학의 차이처럼 다르다. 인간의 심리를 이해하는 학문과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이해하려는 학문의 차이처럼 말이다.

 

사실 나 역시도 과거엔 '나'에 대한 관심, 나를 변화시키고 한 욕구 등에 의해서 사람에 대해서, 인류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었다. 물론 지금도 같은 목적이긴 하다. 단지 현재는 관심의 대상에 '나'는 거의 빠져있다. 물론 나는 나를 기준으로 해서 세상을 경험하기 때문에, 경험하고 생각하는 주체로써 나를 필요로 하긴 한다.

 

하지만 이것은 거기까지이다. 그리고 그러다 보니 나는 사람들과 대화 속에서 약간의 답답함을 느끼는 것 같다. 그렇지만 이것이 큰 문제는 아니다. 그저 나의 작은 욕심이다. 미묘한 틀어짐이 있다고 해도 대화를 나누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사실 정작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이 문제가 훨씬 심각하다.

 

그것은 바로 어떤 종류의 것이든 간에 상대가 이미 가지고 있는 어떤 신념이다. 표현은 신념이라고 했지만 여기엔 종교적 믿음, 정치적 신념, 무엇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를 기반으로 한 신뢰 등이 모두 포함된다.

 

기독교나 불교를 믿거나, 좌파나 우파의 신념을 가졌거나, 인간의 가치성이나 사랑과 우정과 같은 가치들에 대한 무한대의 신뢰 등이 바로 그런 것들의 예가 될 것이다.

 

이것은 신념의 내용 문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어떤 믿음이나 신념이나 신뢰를 가지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아니다. 단지 정말로 큰 문제는 그런 신념으로 인해 각자가 가지게 되때 어쩔 수 없이 따라 붙는 절대적 수준의 사고 한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는 어떤 종교를 믿거나 어떤 정치적 신념을 갖게 됨으로써 자신의 사고 범위를 급속도로 좁히는 일을 서슴지 않고 하고 있다. 그리고는 자신은 그 안에서 확신을 느끼고 강해진다고 느낀다.

 

사실 확신을 통한 흔들리지 않는 강력한 힘이 가진 장점은 확실히 존재한다. 무엇인가를 의심 없이 믿을 수 있을 때 우리는 훨씬 더 용기 있고 적극적인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외부에 쌓은 강력한 성벽과 같다. 어떤 외적이 쳐들어 와도 전혀 아무런 문제없이 막아 낼 수 있다. 그것은 우리를 지켜주는 강력한 보호자가 된다.

 

하지만 외부에 만들어 놓은 튼튼한 성벽은 외부의 존재들이 내부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기도 하지만, 결국 나 자신도 외부로 나가지 못하도록 막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어떤 이유라고 해도 사상이나 종교 등에 의해서 사고의 한계가 생긴다면, 결코 그것이 좋은 일이라고 말하기가 힘들다. 설령 그런 신뢰가 당장 편안하고 흔들리지 않고 긍정적이고 용기를 낼 수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는 수 많은 이론이 있다. 이론이라는 말은 아직은 확실하게 결정되지 않는 어떤 것을 말하는데, 사실 거의 확실한 것도 많다.

 

수 많은 이론들은 그것을 둘러싼 사람들의 갈등을 불러오는 장본인이 된다. 정치 사회적 이론, 경제적 이론, 도덕론, 자연 과학적 이론, 종교적 이론 등등 수 많은 종류의 이론들로 인해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 이론을 근간으로 해서 수 많은 파벌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이토록 많은 파벌이 존재한다. 그것은 종교 분야, 정치 분야, 철학 분야, 예술 분야, 과학 분야 할 것 없이 마찬가지다.

 

물론 지금까지 언급한 종류의 이론은 주로 점잖게 다툼을 하긴 한다. 서로 주먹을 주고 받지는 않고 서로 책이나 논문들을 펴내면서 자신이 옳은 주장을 하고 있다고 설득한다.

 

이것은 나름대로 좋은 효과를 내기도 한다. 서로 경쟁하고, 서로를 설득하려 들면서 좀 더 깊은 진실에 대한 탐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효과도 만만치 않다.

 

결국 자신이 믿는 어떤 것의 한계 속에 완전히 갇혀서는 그것과 대립되는 모든 것을 부정하는 꼴이 되고 마는 것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불교를 바라보는 시선이고, 공산주의를 믿는 사람들이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기독교를 바라보는 것이고, 자본주의를 믿는 사람들이 공산주의를 바라보는 태도이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경험하고 신뢰했던 것이 생기면, 왜 자신이 그것을 접하게 되었고, 왜 자신이 그것을 믿고 있는지에 대한 거의 아무런 성찰이 없이 평생 그것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는 살아간다.

 

하지만 우리는 사실 우연히 교회 옆에 집에서 살았거나, 고등학교 시절 가장 친한 친구가 절에 다녀서 우연히 따라 갔거나, 부모님이 이미 어떤 종교를 믿고 있어서 그 종교를 믿은 것 뿐이다.

 

우리는 우연히 공산주의 나라에서 태어났거나 혹은 우연히 자본주의 나라에서 태어난 것 뿐이다. 하지만 이미 무엇인가를 믿기 시작한 우리들은 자신이 믿는 것에 대해서 결코 의심없이 평생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단 한번도 자기 자신에게 그런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나는 왜 내가 지금 절대적으로 신뢰하게 된 것들을 믿게 되었을까?

 

사실 수십 년을 믿어온 대상을 의심하면서 바라보는 것은 대단히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믿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욱 더 힘들다. 왜냐하면 그 믿음 덕분에 자신이 견뎌내 수 많은 고통의 순간들이 있었고, 더해서 자신이 많은 순간에 의미를 부여했던 믿음에 대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을 의심하면서 바라볼 수 있을까? 그것은 즉시 자기 부정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평생 자기 증명을 위해 살아가는데, 스스로 자기 부정을 해야 할 상황에 놓이면 얼마나 고통스러운 과정일지 상상하기도 힘들 지경이다. 결국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설령 누군가 자신이 믿는 대상에 대해서 합리적으로 부정을 해주더라도 결국 고개를 돌려서 그것을 바라보려고 하지 않게 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종교적 믿음이나 정치적 신념이 모두 틀렸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끝없는 지켜봄이 필요하다. 즉, 성찰이 필요하다.

 

정확히 말해서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자신의 필요성에 의해서 그것을 믿고 있는 것이다. 더해서 이미 말했듯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엄청난 우연성이 존재하고 있음을 스스로 자각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시간이 갈수록 필연성 혹은 운명을 믿고 싶어한다. 왜냐하면 그럴수록 자신이 가진 어떤 믿음이나 신념이 더욱 더 당위성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당위성을 갖게 된 대상은 훨씬 더 깊게 신뢰할 수 있는 대상이 될 수 있다.

 

그것에 대한 유혹은 한계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누구나 어떤 의미가 있는 존재이고 싶으니까 말이다.

 

그나마 삶을 편안하고 의미 있으며 용기 있게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념이 필요하긴 하다. 그래서 신념 그 자체를 갖는 것은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단지 자신이 신념을 가져야 할 이유, 우리 인간이 신념을 갖는 원인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신념의 종류에 대해서 더 이상 자세하게 따질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서로 절대로 양립할 수 없다고 알려진 종교 조차도 극단적 수준으로 상승하게 되면 모두 하나의 가르침을 말하고 있다는 식으로 표현되긴 한다. 이 원리를 만류귀종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우리는 자신이 믿는 그 어떤 종류의 신념에 대해서 끝없는 성찰을 해야 한다. 그래야 신념의 큰 단점인 다른 가치에 대한 무조건적인 배척에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다.

 

모든 것은 홀로 옳은 것은 아니다. 각자마다 다른 옳음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은 가능성의 문제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길이 다르다고 해서 내가 가는 길만이 옳은 것은 아니다. 어떤 곳에 가는 길은 무한대로 펼쳐져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안에 있는 사실상 무의미한 자세한 내용들에 의해서 막혀 있다. 논리에 막히고, 증거에 막힌다.

 

물론 논리적 사고에 익숙해진 우리가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는 논리적 사고 방식 자체에도 의심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과연 이 세상이 참과 거짓, 선과 악, 밝음과 어둠, 앞과 뒤, 위와 아래로 단순하게 나눌 수 있는 그런 것일까에 대해서 다시 한번 의심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늘은 위에 있고 땅은 아래에 있지만, 우리를 기준으로 보면 지금 서 있는 장소의 지구 반대편에서는 하늘이 땅보다 더 낮게 있다.

 

이런 식으로 낮다는 뜻 조차도 상대적일 뿐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경험적으로 의심 없이 믿고 있는 사실 그저 상대적인 의미를 가질 뿐이데, 어떻게 거기에서 한쪽의 입장에서만 바라 본 절대적 신뢰를 가질 수 있을까?

 

사실 신념은 가치화 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신념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우리는 일단 신념을 갖게 되면 그것을 자신과 일체화 시킨다. 즉, 신념을 자기 자신이라고 여긴다.

 

그러니 그 신념이 부정되면 자신이 부정되기 때문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저 어떤 신념을 믿긴 하지만 자신이 아닌 객관적 진리로써 인식할 수 있다면, 그 신념이 부정되는 상황에서 전혀 마음의 흔들림이 없을 수 있다.

 

물론 이것은 거의 불가능한 말이다. 우리가 어떻게 자신이 절대적으로 믿는 신념을 자신과 일체화 시키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대안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은 결코 하나의 관점에서 결코 설명할 수 없다는 단순한 사실 하나를 이해하면 된다.

 

위는 또 다른 위의 아래가 되고, 아이는 또 다른 아이의 부모가 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무한대로 연결된 상대적 의미만을 가질 뿐이다. 이것을 이해하게 되면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절대적 관점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스스로 거대한 모순을 만들어 내고 있음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객관화 된 관점, 상대적인 이해, 이 두 가지만 지켜낼 수 있다면, 앞으로 살아갈 날들은 이 세상에 대한 이해를 점점 넓힐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주관적 시점, 절대화 된 이해 속에서 계속 살아가게 된다면 우리는 단단해질 수는 있지만 결국 스스로의 벽에 갇힌 채 죽는 순간까지 자신도 모르는 모순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사고 한계를 스스로 만들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그 어떤 확신도 가져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확신이 있다면, 그것은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인간과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 2  (0) 2017.01.07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 1  (0) 2017.01.07
도대체 감정은 왜 생겨날까?  (0) 2016.12.31
인간 부조리 - 2  (0) 2016.12.25
인간 부조리 - 1  (0) 2016.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