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관성적인 삶

아이루다 2016. 11. 16. 16:38

 

관성, 뉴턴의 운동 법칙 중 제 1번 법칙에 언급되는 단어이다. 단순히 설명하면, 정지되어 있는 물체는 그대로 있으려고 하고, 이동하는 물체는 계속 이동하려고 하는 성질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관성은 물체의 운동에만 적용되는 단어는 아니다. 우리는 다양한 삶 속에서 각자마다의 관성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은 집에 있는 사람은 계속 집에 있으려고 하고, 밖에 나돌아 다니는 사람은 계속 나돌아 다니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버릇이나 혹은 습관 등으로 표현하고 있는,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유사한 상황이나 자극에 대해서 늘 비슷한 유형의 생각이나 거의 동일한 행동을 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즉, 우리는 살아가면서 언제나 관성적으로 생각하고, 관성적으로 행동하며, 결국 최종적으로 관성적인 반응을 보인다.

 

관성처럼 적용되는 버릇이나 습관과 같은 것들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어야 하는 수 많은 불확실성에서 우리를 지켜준다. 그것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나타나지만 가끔은 의식적으로도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의식적이라고 해도 사실은 거의 무의식에 대한 인식 수준에 불과하다.

 

삶의 관성은 좁은 길을 걸을 때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을 보고는 오른쪽 통행을 하게 만들어서 두 사람이 서로 부딪히지 않고 스쳐 지나갈 수 있게 해준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관성의 힘은 우리가 각자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것을 정의하고 더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에 대한 사용 매뉴얼을 제공하는 것으로도 큰 역할을 한다.

 

즉, 관성적 반응의 총합이 바로 우리를 정의하는 것이 된다.

 

우리는 관성적으로 늘 한결같은 반응을 보임으로써 자신이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를 스스로 정의하고 더해서 주변 사람들이 자신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알려준다. 이 역시도 많은 불확실성을 없애는 목적으로 아주 중요하다.

 

만약 어떤 사람이 매일 같은 사건에 대해서 매번 다른 반응을 보이게 되면, 우리는 그 사람을 종잡을 수 없다고 평가한다. 그 사람은 마치 매일 처음 보는 사람으로 느껴지기에 늘 낯설지도 모른다. 낯설다는 말은 불편하다는 말의 또 다른 표현 중 하나이다.

 

우리는 관성적인 삶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지만, 사실 관성적인 삶은 꽤나 좋은 편이다. 덕분에 우리가 매일 그다지 많은 생각을 하고 살지 않아도 사는데 큰 지장이 없다. 그리고 우리의 뇌는 다른 더 중요한 일들에 집중할 수 있다. 우리는 잘 느끼지 못하지만, 우리의 뇌는 분명히 한정적 자원이기 때문에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이렇게나 좋은 장점에는 반드시 단점인 문제가 있다.

 

어떤 물체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누군가 방해하지 않는 이상 계속 움직이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이미 움직이기 시작해서 움직이는 물체는 움직인다는 것이 바로 정체성이 된다. 그런데 만약 어떤 이유로 인해서 움직이지 못할 상황이 벌어졌다고 해보자. 그러면 어떻게 하려고 하겠는가? 당연히 움직이려고 한다.

 

평생 피아노를 치던 사람이 팔을 다치면 그는 그 무엇보다도 피아노를 예전처럼 다시 치길 바란다. 앞이 잘 보이던 사람이 눈이 안보이게 되면 그 무엇보다도 보는 것이 중요한 일이 된다.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만약 관성적인 삶을 살 때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그것은 그대로 살면 된다. 문제는 관성적인 삶을 살 때 그것이 문제가 생겨서 다른 것들과 지속적으로 충돌이 발생한다면 관성으로 인해 커다란 스트레스에 노출되게 된다.

 

이것은 비단 신체적인 것만이 아니다. 생각하고 판단하는 근거가 되는 가치관이나 신념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과거엔 그 생각과 신념이 옳았으나 세월이 바뀌고 시대가 바뀌어서 자신의 관성이 더 이상 현 시대와 잘 맞지 않게 되면 자신의 생각이나 신념을 고쳐야 하는데, 거꾸로 세상을 고치려고 한다. 이것이 관성이 가진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이다.

 

세상이 정지에서 움직임으로 바뀌었는데 원래 정지된 채로 움직이려고 하지 않거나, 세상이 움직이다가 정지되었는데 계속 움직이려고 하게 되면 당연한 결과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우리는 분명히 관성적인 삶을 사는 것으로 큰 이득을 얻고 있다. 그러니 관성적인 삶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 관성이 세상과 잘 맞지 않으면 거기에서 상처를 받거나 혹은 불 이득을 얻을 수 밖에 없다.

 

그러니 뭔가 괜찮은 해결책이 필요하다.

 

사실 모든 종류의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책은 비슷하다. 그것은 바로 그 문제의 해결 방안을 시작점을 살펴 봄으로써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즉, 가만히 있다면 왜 가만히 있게 되었는지, 움직이고 있다면 왜 움직이게 되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관성적인 삶이 가진 문제를 해결할 때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는 왜 그런 관성을 가지게 되었을까?

 

우리가 매일 하고 있는 어떤 생각, 행동, 반응들의 처음 시작점은 과연 어디였을까? 사실 이것을 생각해보는 것은 매우 어렵긴 하다. 왜냐하면 너무도 오랫동안 해왔고 그래서 너무도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손해를 보면 참지 못할까?

우리는 왜 낯선 사람을 보면 경계를 할까?

우리는 왜 큰 개를 보거나 뱀을 보면 두려워할까?

우리는 왜 자신을 무시하는 말을 들으면 화가 날까?

우리는 왜 남 앞에서 뭔가가 아닌 척 혹은 뭔가 있는 척을 할까?

우리는 왜 주변 사람에게 행운이 오면 그것을 질투하게 될까?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하게 되는 그 모든 것은 스스로 인식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이미 일어나버리고 만다. 즉, 이런 종류의 반응은 관성 그 자체이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은 반응을 보인다면 이것은 문제가 아니다. 빛이 없으면 누구나 다 못 보기 때문에, '왜 빛이 없으면 보질 못할까' 같은 문제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살다가 보면 나와 다른 사람들이 있다. 손해를 봐도 참는 사람이 있고, 낯선 사람을 보고도 쉽게 친해지는 사람들이 있다. 큰 개를 봐도 쓰다듬어 줄 수 있고, 뱀을 보면 재미있어 하는 사람들도 있다.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에게조차 화를 내지 않는 사람도 있고 늘 겸손하고 진실해 보이는 사람들도 있고, 다른 사람의 행운을 진심으로 축하해 줄 수 있는 사람도 있다.

 

이 차이가 문제이다. 왜 누군가는 저렇고, 왜 누군가는 이럴까?

 

도대체 나와 다른 그들은 어떤 관성을 가졌기에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아니, 이 사실은 어떤 면에서 우리가 매일 반응하고 있는 관성적인 모습인 생각보다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명해주고 있다. 즉, 우리들이 매일 관성처럼 하고 있는 생각, 행동, 반응 등이 어두우면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은 완전히 인간 본질적인 것은 아니란 뜻이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작은 희망이다.

 

즉, 우리는 어떤 관성적 생각이나 행동의 시작이 과연 어디에서부터 생겨났기에 그럴까를 생각해봄으로써 가끔 그것으로부터 탈출이 가능할 수 있다.

 

심한 배고품을 경험한 사람은 틈만 나면 먹을 것을 쟁여 놓으려고 할 것이다. 누군가에게 심한 배신을 당한 사람은 모든 사람을 결코 믿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어릴 적에 죽음을 넘나드는 병에 걸렸던 사람은 평생에 걸쳐 건강 염려 증에 사로 잡혀서 살게 될지도 모른다.

 

어떤 이유로 돈의 중요성을 너무도 극심하게 느낀 사람은 주변에 조금이라도 돈을 많이 번 사람을 보면 질투가 나서 참지 못할 수도 있다.

 

어린 시절에 달리기에서 진 후 심한 차별을 느낀 사람은 그 경험으로 인해 평생 동안 승부욕에 불타서 살아갈 수도 있다.

 

어렸을 때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한 사람은 평생 동안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을 인생 최고의 목표로 살아갈 수도 있다.

 

사실 우리가 겪는 대다수의 관성적 반응들은 이런 식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니 우리가 보이는 관성적인 반응들은 결국 스스로 과거의 기억과 경험에서 빠져 나오는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성인이 되었기에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이제는 그렇게 궁상맞게 살지 않아도 되고, 이제는 다른 사람의 승리를 진심으로 축하해줄 수 있으며, 이제는 남이 가진 것과 자신이 가진 것을 그리 비교하지 않아도 된다.

 

이제는 주변에 인정받으려고 살기 보다는 자신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으며, 이기는 것이 이 세상에 가장 중요한 목표가 아님을 각성해 낼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대부분의 것들은 그 시작이 단순하고 어리석다. 우리는 이제 충분히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다.

 

남을 좀 더 믿어도 되고, 조금 손해를 봐도 큰 문제가 없다. 사실 그러면 좀 더 행복하게 살 수도 있다. 그러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관성을 가졌다. 그리고 이 관성이 단지 자신의 삶을 조금 단순화 시켜주고, 불필요한 신경을 쓰지 않는데 사용되고 있다면 그냥 유지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 관성으로 인해 불편함을 느끼고 스트레스를 경험하며 결국 불행하다면 이것은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할 문제가 된다.

 

그리고 많은 생각을 통해 그것들의 시작점을 잘 살펴보면, 대부분 그 시작이 별로 쓸 데가 없는 아주 오래된 기억과 경험이란 것을 인식 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관성적인 삶이 가진 함정에 빠져 나올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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