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남과 나, 그 좁힐 수 없는 간극

아이루다 2016. 11. 1. 07:38

 

사람들은 자신의 문제점에 대해서 알거나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판단할 때 최대한 '객관적' 시점에서 그것을 보려고 한다.

 

우리가 자신에 대한 객관적 시점을 가지려고 하는 이유는 객관적 시선으로 볼 수 있어야 상황 파악 및 가장 적절한 문제 해결에 대한 가능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은 사실 꽤나 어렵다. 그럼에도 노력을 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우리는 미래에 어떠한 곤란한 지경에 빠질지 가늠할 수가 없다. 이것은 불확실성이고, 불확실성은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려고 부단히 '노력' 해야 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데, 만약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 하지 않으면 쉽게 자기 합리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제대로 된 문제의 원인 파악도 안되고 그로 인해서 그 문제가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서 오판을 하게 된다.

 

이것은 나중에 큰 재앙이 될 여지가 있다.

 

예를 들어서 자신이 사는 집 근처에 땅이 무너질 위험이 있을 경우, 그것을 자기 집이 아닌 다른 사람의 집처럼 여길 수 있어야 공사를 하든 이사를 하든 해야 한다고 판단할 수 있는데, 그것을 자신이 직접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돈도 아깝고 번거롭고 귀찮아서 결국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결론을 내게 된다.

 

하지만 재수가 없으면 어느 여름에 비가 많이 올 테고, 결국 그 집은 산사태가 나서 매몰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최대한 객관적으로 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할 때, 자신에게 닥칠 위험이 최소화 될 수 있다.

 

이 객관적 시점은 실제적인 일을 분석하는데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감정이나 현재의 상태를 판단하는 것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사실 실제적인 일에서 객관적이기보다 자신의 감정이나 상태에서 객관적이기가 훨씬 더 힘들다.

 

그것은 실제적인 일들은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남들도 같이 볼 수 있기에 조언을 얻기가 쉬운 반면, 우리 자신의 내무에서 일어나는 감정적 반응들은 오직 우리 자신만이 알고 있기에 그것에 대한 조언을 얻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왜 화가 났는지, 왜 지금 기분이 나쁜지를 판단할 때 결국 엉뚱한 것에서 그 원인을 찾는 경우가 흔하다.

 

사실 이것은 별 문제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잘못된 판단을 자주하게 되면, 자신이 왜 자꾸 그렇게 화가 나는지, 자신이 왜 그렇게 자꾸 기분이 상하는지를 잘 몰라서 결국엔 불행한 사람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더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짜증을 내거나 해서 결국 인간관계를 맺는 것에서도 어려움에 처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 최대한 객관적인 판단을 하기 위해 자신의 사연을 적어서 다른 사람에게 판단을 부탁하기도 한다. 익명성에 기대어서 객관적 판단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이런 저런 절차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냉정히 말하면, 우리 인간이 자신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우리가 결코 할 수 없는 일 중 하나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명확하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기엔 기본적으로 너무도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 정말로 시시콜콜한 정보까지 다 알고 있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에 어떤 이유로 화가 난 이유가 어린 시절에 엄마에게 혼났던 기억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을 정도이다. 우리는 자신이 기억하는 기억을 기반으로 해서 우리 자신을 바라본다. 그러니 하나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해서 평생의 기억이 사용된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우리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겠는가? 객관적이라는 말은 불필요한 정보가 제외되어야 한다. 우리가 어린 시절에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경험을 했었는지, 주변 환경이 어떤지, 왜 성격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는지 등을 다 고려하게 되면,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가 있다. 물론 방금 말한 것과 연결이 된다. 그것은 바로 자신에 대해서 너무도 많은 정보를 알고 있기에 발생되는 '감정' 이다.

 

우리는 가끔 TV에서 어떤 사람들의 사연을 접하는 경우가 있다. 아주 흉측한 외모를 가진 사람이나 노숙자이거나 상관없이 모르고 봤을 땐 혐오스러울 수 있고 한심스러울 수도 있으나, 그 사람이 왜 그런 삶을 살 수 밖에 없는지 알게 되면 공감이 생겨나고 연민이 느껴지게 된다.

 

그래서 그 사람의 외모가 덜 흉물스럽게 느껴지고 노숙자의 삶을 비난하기 보다는 이해를 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정보가 추가되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있어서 이미 충분하고도 넘치는 정보를 가지고 있다. 더군다나 기분을 풀기 위해서는 없는 정보도 만들어 내고, 기존에 명확한 사실도 교묘하게 왜곡을 해서 합리화까지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우리는 정보가 많아지면 공감 능력이 발휘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과도 공감을 한다. 즉, 자기가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이해해 주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자신의 여러 가지 문제점에 대해서 스스로 판단할 때는 감정을 기반으로 하게 된다. 즉, 감정을 기반으로 해서 느껴지는 진실성 여부를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설령 그 결과가 잘못되었더라도 그것이 진심이었다고 느끼게 되면 많은 정상 참작이 된다.

 

반면에 우리가 타인의 여러 가지 문제점을 판단해줄 때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타인에 대해서 그리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 이성을 기반으로 하여 합리적으로 판단을 한다. 여기엔 타인의 진심이나 기타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정보들은 제외된다.

 

이것으로 인해 남에게 들이댄 잣대와 자신에게 적용하는 잣대의 차이가 만들어진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자기 자신을 객관화 시켜서 볼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객관적 시선은 이성을 기반으로 한 합리성을 뜻하는데, 우리가 우리를 판단할 때는 이미 처음부터 '자기 공감' 이 일어난다.

 

그러니 이것은 안될 일이다. 우리는 우리를 너무도 잘 이해해준다. 사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제일 잘 이해해주지 않으면 자기 비하나 자기 혐오가 일어나게 되어서 살기가 너무 힘들다. 이것은 불행함이다. 자신을 제대로 객관적으로 본 사람의 최후이다.

 

사실 이것은 어느 정도 당연한 결과인데, 우리는 우리 마음 속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자신의 '이기적' 심성을 세상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만약 자신이 이기적인 사람을 싫어한다면 당연히 자신도 싫어지게 된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이기적 성향을 극단적으로 혐오하면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이것이다. 이런 종류의 불일치는 사람을 미치도록 괴롭게 만든다.

 

이런 일도 있다가 보니 우리는 인간이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고 믿게 된다. 그리고는 그런 착각으로 인해서 자기 확신까지 가지게 된다.

 

하지만 산사태로 무너질 집의 예에서 보듯이 우리는 주변인 입장일 때와 당사자일 때 판단 자체가 다르게 내려진다. 즉, 남의 일이면 자로 재듯이 어떤 감정적인 것도 배제를 하고 판단을 하지만, 자기 일일 때는 그것으로 인해 연쇄적으로 벌어지는 일들, 즉 이사를 하거나 공사를 해야 하는 번거로움과 돈이 드는 상황을 어떤 식으로든 크게 고려할 수 밖에 없다.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너무도 많은 상황 고려를 하고 더해서 과도한 자기 공감을 통해 팔이 안으로 굽는 현상을 만들어 내고, 남의 일에 대해서는 일체의 감정적 판단이나 그 사람의 감정적 상태를 배제하고는 완전히 사실 위주로만 비 현실적인 판단을 하는 것이다.

 

자신이 그곳에 살고 있다면 여러 가지 부담스러운 일 때문에 그냥 살기로 결정할 것이면서 남에 일이라고 하면 평생을 거기에서 살아온 80세 노인에게는 그 집이 위험하니 그 집을 떠나야 한다고 조언을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자기에게는 자기 공감을 통해서 끝없이 배려하면서 남의 일에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란 이유로 그냥 내뱉는 것이다.

 

그러니 취직을 못하는 사람에게 영어 공부 더 열심히 하고, 스펙을 올려서 취직하라고 하거나 눈을 낮춰서 일단 취직을 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을 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단, 자기가 당사자가 아닐 때만 말이다.

 

이렇게 해서 자신이나 타인의 문제를 판단하는 양쪽 모두 문제가 발생한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물론 해결할 방법이 없긴 하다. 그래도 노력할 수는 있다.

 

일단 타인의 문제에 대해서는 최대한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그것을 바라보려고 해야 한다. 비록 우리가 부족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자신이 그 입장에 되면 어떻게 느낄지 정도는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을 최대한 배려해주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공감이고 인간다운 행동이다.

 

반대로 자신에 대해서는 최대한 불필요한 정보는 제외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봐주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다. 우리는 자신에 대한 판단을 할 때 최대한 근 시일 내의 정보만을 참고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언제나 자기 자신을 제 삼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이 두 가지가 이루어 질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조금 객관적인 시선을 가지고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자신에 대해서 그런 판단이 잘 되지 않을 경우엔 글을 써보는 것도 괜찮다. 자기 위로의 글이 아니라, 자신을 두고 그저 사실만을 나열하고 판단하는 글을 쓰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답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최대한 정답에 가까울 가능성이 높다.

 

자기 공감은 편한 것이지만, 잘못 쓰면 무서운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은 중요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게 될 수 있다.

 

우리가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판단해야 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행복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행복은 감정이다. 즉, 이성과 합리의 목적은 오직 감정이다. 그런데 잘못하면 이성의 함정에 빠져서 불행함으로 끌려 들어가게 된다. 이것은 자주 일어난다.

 

조심하고 또 조심해서 노력해야만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이 둘을 놓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가장 덜 듣게 되는 것이 바로 타인의 조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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