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인간의 선한 행동의 목적

아이루다 2016. 10. 24. 07:28


 

일반적으로 사람의 선한 행동은 크게 두 가지 목적을 담고 있다. 하나는 선의의 대상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을 위한 것이다.

 

예를 들어서 키우는 강아지에게 밥을 주는 것은 일단은 대상인 강아지를 위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우리가 강아지에게 밥을 주는 것에는 자신을 위한 것, 즉 그러니까 자기 만족이 숨겨져 있다.

 

길에서 거지에게 적선을 하는 것도 그렇고, 친구를 위해서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도 그렇다.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서 하는 모든 행위가 이런 식으로 동작된다.

 

하지만 우리는 흔히 자신의 선의를 대상을 위한 것으로만 생각하기 쉽다. 왜냐하면 그것이 훨씬 직접적이고 명시적인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보통 그런 선한 행동을 할 때 우리들 자신은 어떤 식으로든 물질적이거나 시간적으로 손해를 본다.

 

즉, 강아지에게 밥을 주는 행위는 그 개밥을 사야 하는 우리들의 금전적 손해를 의미한다. 거지에게 적선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친구의 결혼식을 참석하는 것은 당장 금전적 손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시간의 손해를 보는 것이다. 즉,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박탈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자신의 손해를 무릅쓰고 대상을 위해서 무엇인가 하는 것을 '선의' 라고 부르고, 그렇기에 그것이 오직 상대만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냥 강아지를 위해서 밥을 주고, 거지를 위해 적선을 하고, 친구를 위해서 결혼식에 참석한다 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매우 일반적이고 흔한 판단이다.

 

설령 이것을 좀 더 깊이 파해친 사람이라고 해도, 숨겨진 또 하나의 목적을 발견할 뿐이다. 즉, 우리가 이런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선의를 베푼다는 것만을 알아낼 수 있다. 하지만 사실 우리의 선의는 생각보다 훨씬 이상한 원리로 동작된다. 그것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한 질문에 대한 답을 알아내야 한다.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일까?

 

답은 쉽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행복이다. 인간의 모든 행동 방향은 바로 자신의 행복을 위한 방향이다. 그런데 이렇게만 쓰면 희생 같은 행위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정확히 말하면, 인간은 자신이 행복해지거나 덜 불행해지는 방향으로 살아간다 라고 말해야 한다.

 

즉, 희생과 같은 것들은 덜 불행한 삶을 위한 선택인 셈이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나서 인간의 어떤 행위 중 하나인 선의에 의한 행동, 즉 선행을 바라보도록 하자.

 

인간의 모든 행동이 그 자신의 행복을 위한 것이니 선행도 일종의 행동으로써 같은 원리에 의해서 동작되어야 한다. 그러니 선행도 당사자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선행을 통해서 어떻게 행복해질까?

 

사실 이 질문은 잘못되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행복하니까 선행을 한다.

 

우리는 강아지에게 밥을 줄 때 행복하다. 우리는 거지에게 적선을 할 때 행복하다. 우리는 친구의 결혼식을 갈 때 행복하다. 그러니까 한다.

 

물론 그저 마음의 짐이 덜었을 수도 있다. 이것은 자신의 수중에 있는 돈과 마음의 짐을 맞바꾼 것이다. 즉, 덜 불행한 것을 선택한 것이다. 돈을 잃는 불행과 마음의 짐을 가지는 불행 중에서 돈을 잃는 불행이 더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것에 대한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리고 이것을 가치관이라고 부른다. 사람마다 행복의 기준점이 다르기 때문인데, 어떤 사람은 마음의 짐과 돈 만원이 비슷한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마음의 짐이 단 돈 십 원의 가치도 없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까 길거리에 있는 거지에게 누군가는 만 원을 적선하고, 누군가는 십 원도 내 놓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인간은 단지 자신의 행복 기준점에 따라서 행동한다. 그런데 그 행동의 결과가 대상에게 어떤 도움이 되었다면, 그것을 선의에 의한 행동, 즉 선행이라고 칭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마치 원래 그 사람이 처음부터 그 대상을 위해서 그런 일을 한 것처럼 표현한다. 즉, 이타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성찰을 어느 정도 한 사람은 사람의 선한 행동에 다른 사람을 위한 목적 이외에도 자신을 위한 목적, 즉 이중적 목적이 있음을 인식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다. 좀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모든 목적은 바로 오직 자신 만족을 위한 것이란 점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자신의 행복을 위한 것이란 점이다.

 

즉,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자신이 아닌 존재를 위해서 행동하지 않는다. 설령 표면적으로 그렇게 보였다고 해도 그것은 단지 자신을 위한 행위가 우연히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끼친 것뿐이다.

 

인간은 완벽하게 이기적이다.

 

오래 전부터 인간이 이기적 존재인가 이타적 존재인가를 두고 많은 격론이 있어왔다. 그리고 지금도 사람들 사이에서는 선의에 대한 가치가 많이 존중되고 있다.

 

우리가 이미 완벽히 이기적임을 알면서도 아직도 그런 논란이 계속되고 그런 가치가 유지되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이기적인 사회보다도 이타적인 사회가, 악행이 난무하는 사회보다는 선행이 자주 일어나는 사회가 훨씬 안정적인 미래를 약속한다. 이것은 인간의 집단 지능적 판단이다.

 

만약 초등학교 교사가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이기적으로 살 것을 주문하거나, 남을 괴롭히는 나쁜 짓을 하라고 가르치게 되면, 그 교사는 학부모들의 여론에 의해서 곧 쫓겨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사회가 어떤 식으로 선함을 유지하려고 하는지를 보여주는 예가 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선함을 지킨다. 무엇을 위해서? 바로 사회의 영속성을 위해서 그렇게 한다. 그리고 사회의 영속성은 바로 인간의 영속성을 의미한다.

 

그래서 사회는 악보다는 선을 이기적이기보다는 이타적인 성향을 좋은 것으로 '판단' 한다. 그러다 보니 이런 결과가 만들어졌다.

 

어떤 사람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일을 했다. 길에서 사는 고양이에게 밥을 준 것이다. 이 사람은 그냥 자신이 행복하기에 혹은 고양이가 불쌍해서 마음의 짐을 덜기 위해서 했다.

 

그런데 그 사회가 고양이에게 잘 해주는 것을 선행으로 정의했다면, 이 사람은 선한 행동을 한 사람이 된다. 반대로 사회가 고양이가 병을 옮기고 쓰레기를 어지럽히는 나쁜 동물로 정의했다면 이 사람은 악행을 한 것이 된다.

 

즉, 동일한 목적을 가진 하나의 행동이 자신이 속한 사회의 성향에 따라서 완전히 다르게 해석된다.

 

이 예가 의미하는 것은 하나뿐이다. 선한 행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악한 행동도 없다. 그것은 그저 자신이 속한 사회의 판단 기준에 따라 결정될 뿐이다. 물론 인류 보편적 가치라는 것이 있어서 전 세계적으로 비슷한 선과 악 기준이 있긴 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완벽히 옳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조차도 시대에 따라 달라졌기 때문이다.

 

중세 유럽에서는 흑인을 동물로 취급했다. 동물 수준이 아니라, 정말로 인간이 아닌 동물로 취급했다. 우리나라 역시도 노비 제도가 있었고,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비록 정상적인 현대 사회라고 해도 사람을 죽이는 것은 인간이 아닌 악마와 같은 행위가 되지만, 전쟁터에서 상대편 군인을 죽이는 것은 영웅이 되는 행위가 된다. 즉, 같은 행위가 상황에 따라서 완전히 다르게 해석된다.

 

우리는 요즘 당연하게 여기는 인권이란 단어가 완전히 무시되던 시대도 있었고, 지금도 지구 상의 어느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적인 일이다.

 

행동의 동기는 무시되고 행동의 결과가 가져 온 최종 결과물을 가지고 행동 자체를 정의한다. 이것이 우리가 저지르는 가장 큰 혼란이자 착각이다.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인간은 두 가지 목적에서 행동을 한다고 했다. 상대를 위해서와 자신을 위해서이다. 하지만 결국 이 말을 틀렸다. 우리는 오직 자신을 위해서만 한다. 단지 그 결과가 상대를 위할 수는 있다.

 

이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자신이 누군가를 위해서 했다는 아주 오래되고 관습적인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런데 왜 이런 착각에서 벗어나야 할까?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는 누군가를 위해서 했을 때 반드시 그것에 대한 보답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물론 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과도한 기대를 하게 되면 반드시 실망하게 되고 심지어 상대를 심각한 상태에 빠뜨릴 수도 있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이 저지르는 실수가 바로 그것이다. 많은 부모들은 자신이 아이를 위해서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 세상 어떤 부모도 자식을 위해서 어떤 행동을 하는 경우가 없다. 아무리 선의가 있어도 그것은 오직 부모 그 자신을 위한 행동이다.

 

그런데 이것을 까먹는다.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자꾸 아이를 위한다는 생각으로 아이가 원하지 않는 것을 시키려고 한다. 물론 대소변을 가리게 훈련을 시키는 일은 중요하다. 하지만 아이가 미래에 어떤 일을 하고 싶어하는지를 부모가 결정해주는 것은 과도하다.

 

인간이 사회 속에서 한 명의 인간으로 살아가게끔 기초적인 소양을 갖추게 해주는 것은 부모의 역할이다. 아이는 어리고 판단력이 약하니 당연히 그래야 한다. 하지만 부모의 역할은 거기에서 멈춰야 한다. 부모가 아이의 삶을 대신 판단해주고, 대신 선택해줘서는 안 된다.

 

주변 사람들에게 선행을 한 후, 그것에 대한 암묵적 대가를 바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저 자신이 행복하기에 해놓고서 그것에 대한 대가를 기대하는 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바램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늘 그렇게 한다. 그러니 실망하고 그러니 배신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자신의 모든 행동이 오직 자신만을 위한 것인 진실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중요한 한 가지를 얻을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행복 가능성이다.

 

자식을 올바르게 키울 수 있고, 주변에 불필요한 기대를 하지 않기에 실망을 하거나 배신을 당할 일이 없다. 이것은 모두 행복한 삶을 위한 조건들이 될 수 있다.

 

물론 그 덕분에 자신이 혹시나 착한 사람일 수 있다는 환상을 깨야 했지만, 그럼으로써 좀 더 나은 삶에 대한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그러니 한번 제대로 이해해 볼만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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