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세상과 나

아이루다 2016. 10. 19. 09:03

 

두 사람은 직장 동료였다. 그리고 의사였다. 그 중 한 사람이 자신이 경험한 환자에 대한 논문을 썼다. 그리고 후에 다른 한 사람도 같은 환자에 대해서 논문을 썼다. 두 사람 간에 분명히 순서가 있었다. 하지만 운 없게도 나중에 쓴 논문이 어느 의학 잡지에 실렸다.

 

먼저 논문을 쓴 의사는 화를 냈다. 나중에 논문을 쓴 의사가 자신의 논문을 훔쳐간 것이나 다름 없다고 말이다. 사실 그런 면이 있었다. 자신이 조사한 자료를 보여주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은 화를 내는 의사에게 그렇게 말한다. 네 것은 네가 챙겨야 한다고 말이다. 자기 것을 자기가 챙기지 못한 것도 너의 큰 실수이고 문제라고 한다. 하지만 이 의사는 도덕적으로 그래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결국 이런 저런 일을 겪은 후, 상대를 용서하기로 마음 먹고 화해를 청한다. 우리는 친구니까 그래야 한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다른 의사는 너와 나는 친구가 아닌 동료일 뿐이라고 하면서, 자신이 한 행위가 왜 너에게 용서를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대꾸한다.

 

이 이야기는 미국 드라마 하우스에 나오는 한 에피소드이다. 거기에서 여자 의사인 카메런과 남자 의사인 포어맨 사이에 일어난 일이기도 하다.

 

아마도 우리나라의 전형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분이라면, 이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 조금 놀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라면 포어맨의 입장, 즉 거의 동료의 논문을 훔친 듯 보이는 그 행동을 비판할 가능성이 높다. 이 둘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렇게 판단할 것이다.

 

하지만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고, 자신의 삶은 자신이 책임진다는 태도가 명확한 미국에서는 다른 모양이다. 물론 미국이라고 해도 모두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이 든다. 과연 도덕적 행위 혹은 사회적으로 인정이 되는 상식이란 것이 도대체 어떻게 정의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물론 이 생각은 매우 흔한 소재이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경험하게 되는 갈등과 다툼 그리고 논쟁과 비판 등에서 언제나 이용되고 있는 도덕과 상식 등이 어떤 식으로 결정되고 있는지 잘 안다. 무엇인가를 주장할 때 스스로 절대적이라고 믿는 그것은 사실 우리를 둘러싼 수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정의하고 있는 출처가 모호한 집단적 판단의 결과일 뿐이다.

 

이것에 대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다. 물론 이것조차도 모르는 사람들도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또 다른 입장에서 우리는 이런 생각도 한다. 자신의 삶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참견 받지 말아야 하고,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자신의 삶은 오롯이 자신만이 결정하고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것이 삶을 제대로 사는 것이라고 믿고 싶어한다.

 

이 둘은 각자는 맞는 말이다. 그런데 이 둘을 합치면 충돌이 생긴다. 내가 판단하는 나와 남이 판단하는 나 사이의 충돌이다.

 

물론 이 둘이 조화롭게 어울린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다. 말하자면 똥 고집이 있는 사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자신의 행동이나 행위에 대한 판단을 온전히 스스로의 기준으로만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야 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삶의 주체가 되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며, 진정 원하는 것을 찾아서 산다는 말은 참 좋은 말이다. 그런데 거기엔 다른 사람의 참견이나 조언에 대해서 귀를 막아야 한다는 필수 조건이 붙어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참견은 거부하고 조언만 받아들이고 싶어한다.


그렇지만 이 둘의 차이는 없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오직 우리들 자신의 몫이다. 참견에 의해서 휘둘리는 것은 문제이고, 조언에 의해서 변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착각이다.

 

사람들은 원래 끝없이 다른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그것이 참견인지 조언인지 판단되는 것은 말하는 사람이 아닌 오직 듣는 사람의 몫이다. 그러니 영향을 받고 싶지 않다면, 아예 귀를 막는 것이 좋다.

 

또 하나 문제점이 있다. 비록 평생을 자신의 결정에 의해서 살아갔다고 해도 누군가의 삶을 판단해주는 기준은 결국엔 내가 아닌 남이다.

 

물론 혼자서 자신의 삶에 대한 판단을 하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판단의 객관성과 유효성에 대해서 의문을 품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혼자 살면서 혼자 판단한 자신이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 수 있겠는가? 스스로 잘났다고 평가하면 잘난 것이 될 것인가?

 

이 말은 결국 최종적으로 인간은 인간들 사이에서 평가 받아야 하는 존재이다. 그것은 결코 부정할 수 없다. 아예 평가를 받지 않겠다고 마음 먹었다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동네 앞 산만 올라갔다 와도 그것을 남들에게 얘기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에베레스트 산을 올라갔다 온 후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있겠는가?

 

이룬 업적이 크면 클수록 우리의 입은 가만히 있질 못한다. 당장 들어줄 사람이 없으면 책이라도 써야 한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이 가진 판단 기준점은 매우 사회 통념적이다. 즉, 그토록 벗어나고자 했던 뻔한 생각들과 뻔한 시선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어떻게 이것을 해결할 수 있을까?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가정이 틀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코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이다. 우리는 오직 자신의 삶만 바라보면서 살 수 없다. 우리는 끝없이 주변과 맞춰야 한다.

 

물론 너무 맞추고 살다가 보니 지쳐서 나만 보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것은 투정이다. 우리는 결코 그럴 수 없다.

 

모든 것을 버리고 숲 속에 혼자 사는 사람들이 나오는 TV 프로그램을 보라. 그들이 진정으로 자신만을 바라보면서 살고 싶었다면 그 방송에 왜 나오겠는가? 그들도 자신의 삶을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이렇게 잘 사는 사람도 있다고 인정받고 위로받고 싶은 것이다.

 

인간은 인간을 떠나서 살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다른 이들에게 끝없이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다른 사람의 의견은 내가 오늘 내리는 모든 판단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니 스스로 아무리 옳다고 믿더라도 그것은 어느 시점에 바뀔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천천히 바뀌느냐 빠르게 바뀌느냐에 만 차이가 있을 뿐이다. 천천히 바뀌는 사람을 신념이 있다고 하고, 빠르게 바뀌는 사람을 팔랑귀라고 부를 뿐이다.

 

무엇이라고 부르든 우리는 결국 모두 바뀐다. 그리고 그 바뀌는 조건에는 끝없는 환경의 영향이 있다. 어디에 사는지, 몇 살인지, 어떤 사람을 만나는지, 어느 나라에 살고 있는지, 가족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가장 친한 친구의 성격이 어떤지, 돈이 얼마나 있는지, 직장을 잘 다니고 있는지 여부에 따라서 바뀐다.

 

여기에서 스스로 자신만의 삶을 찾는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상 엄청난 거짓말이다. 물론 그럼에도 그래야 할 필요는 있다. 안 그러다간 주변에 휩쓸려서 자기를 완전히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 때문에 노력해야 한다. 세상이 너무 어지럽고 복잡하기에 정신을 잃고 살다가는 언젠가 자기를 잃을 수 있는 위험이 있으니까 말이다. 자기를 세상과 분리해서 온전히 유지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말이다.

 

세상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세상으로부터 이상한 소리를 듣고, 세상으로부터 오해를 받고 그래서 세상이 원망스럽고, 세상이 하찮고, 세상이 이해가 안 간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세상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잘못이다. 세상은 늘 그랬다.

 

끝없이 참견을 해대는 사람들은 오늘도 끝없이 그렇게 한다. 끝없이 조언을 하는 사람들도 그렇다. 아무 말 없는 사람도 있고, 쉼 없이 이야기 하는 사람도 있다. 각자 모두 세상을 구성하는 각자 중요한 요소들이다.

 

그러니 너무 세상을 배타적으로 보려고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설령 거기에서 참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았다고 해도 말이다.

 

만약 상처를 입고 세상과 자신을 단절시키게 되면, 문제가 생기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이다. 세상은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간다. 내가 숨으면 세상은 금세 나를 잊는다. 세상에게 우리는 아무런 아쉬움이 없다. 우리가 세상에 아쉬울 뿐이다.

 

세상을 용서하라는 것도 아니고, 세상을 이해하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우리와 세상과의 관계는 이렇게 맺어질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진정 나를 위해 살고 싶다면 숨지 말고 세상 속으로 나가야 한다. 단, 가능하다면 자신에게 긍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환경을 갖추기 위해서 노력할 필요가 있다.

 

괜히 힘든 환경에서 극기 훈련을 하려고 하지 말아라. 그냥 사는 것도 힘든데, 극복까지 해야 하면 너무 힘들다. 너무 더운 날에 이열치열 한다고 운동하지 말고 그냥 에어컨 바람이나 쐬는 게 제일 행복하다.

 

우리가 세상과 단절되기에는 너무 오랫동안 세상에 길들여졌다.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자신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 아무리 세상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고 느껴도 어느 정도에서 멈춰야 한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들도 자식이 너무 투정을 부리면 매를 들 수 밖에 없다. 우리의 투정은 가끔 너무 심하지 않게 이뤄져야 한다. 물론 하지 말라는 소리도 아니다. 대신 자신이 투정을 하고 있음을 스스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투정이 아니라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이라고 우기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의 만든 함정에 빠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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