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행복한가에 대한 판단

아이루다 2016. 10. 4. 12:23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은 행복합니까?' 라는 질문을 받았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우리는 잠시 생각을 해 볼 것이다. 자신이 행복한지 아닌지를 말이다.

 

어떤 사람은 그 순간 우연히 바라던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너무 기분이 좋아서 금세 행복하다고 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방금 사랑하던 애인과 헤어져서 너무 슬퍼서 자신은 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물론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런 상태가 아닐 테니까 조금 더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대답을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대답에 확신이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은 행복한 편에 속한다고 하든가, 자신은 요즘 조금 불행하다고 느낀다고 애매하게 표현하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행복한지 여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누군가 갑자기 그런 질문을 던진다면 무엇을 근거로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아니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우리가 행복하다는 것을 '판단' 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기본적으로 행복은 어떤 상태를 의미한다. 우리는 보통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혹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애매한 상태에 있다. 그런데 이 상태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계속 바뀌어 간다. 행복은 권태로 바뀌면서 불행으로 변하고 불행은 극복이 되면서 행복으로 변한다.

 

인간의 삶은 끝없이 변하고, 그 변화 속에서 우리들의 행복과 불행의 상태 역시도 끝없이 변한다. 이것을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행복과 불행은 수 많은 시간 동안 수 많은 장소에서 교차되면서 우리들이 삶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런 사실들을 배경으로 우리가 어느 날 행복한가에 대한 질문을 받고 그것에 대해서 답을 생각할 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일단 최초의 질문 자체부터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상대의 판단을 묻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행복은 상태이지 결코 판단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자신이 행복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실제로 자신을 행복한 것이 아니라 행복하다고 라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근거는 있다. 과거 자신이 행복했던 상태에 있었던 많은 경험들 말이다.

 

그러니 과거 불행한 순간이 더 잦은 사람보다 행복한 순간이 더 잦은 사람이 기본적으로 자신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판단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이 대답의 과정을 잘 생각해보면 문제가 있다.

 

어떤 것을 판단한다는 것은 그것이 맞을 수도 있지만,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더군다나 그 판단이 어떤 객관적 증거도 없이 그저 개인적 입장에서 나온 결론이라면 틀린 가능성이 훨씬 높아진다. 하지만 누군가가 자신의 행복 여부를 판단할 때, 그것이 객관적으로 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행복 여부를 판단하는데 있어서 객관적 근거를 끌어 들이기도 한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이미 정의된 많은 조건들을 얼마나 갖췄냐를 기준으로 판단한다.

 

즉, 돈이 많거나, 넓은 집에 살거나, 가족을 이뤘거나,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올랐거나, 외모가 뛰어나거나, 다른 사람들과 많은 관계를 맺고 있거나 하는 것들이 바로 그런 근거들이 된다.

 

그래서 이런 조건을 갖춘 사람을 보면 의례히 그 사람이 행복할 것이라고 판단한다. 그리고 부러워한다. 또한 자신이 그 조건들을 갖추었기 때문에 자신은 행복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보고 부러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은 행복한 것이 분명하다고 확신도 한다.

 

행복하냐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할 때 가졌던 문제점, 즉 주관적 판단 근거가 사회적 조건들을 통해서 객관적 판단 근거를 가질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주관적으로 판단하고, 객관적 근거가 갖춰졌다면 우리는 행복하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객관적 근거는 충분한데 주관적으로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고, 주관적으로는 행복한데 도대체 객관적으로 행복해 보이지 않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돈도 많고, 사회적 지위도 높고, 가족도 이뤘고, 수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사는데도 우울하고 권태로우며 그래서 결국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반면에 누가 봐도 남루하고 못살지만 얼굴엔 언제나 행복한 미소가 가득한 사람들도 있다.

 

그로 인해서 한 가지 의문이 생겨난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자신의 행복에 대해서 판단할 때 어떤 착각을 하고 있지 않는가에 대한 것이다. 즉, 우리는 자신을 행복하다 라고 분명히 판단하고 있지만, 사실은 행복하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안고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행복한 것이 아니라, 행복을 판단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정말로 행복한 상태라면 이런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냥 행복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주관적 기억과 객관적 조건들을 합쳐서 자신의 행복 여부를 판단했다면 당연히 들 수 있는 합리적 의심이다.

 

정말로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는 행복하지 않은데 머리 속으로는 행복하다고 믿거나 사실 상 불행하지 않은데 부정적으로 불행하다고 믿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을까?

 

이것은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이미 말했듯 판단이란 것은 틀릴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일단 그것이 부정확한 자신의 과거 경험에 대한 기억들을 통했기 때문에 그럴 수 있고 더해서 사회적으로 통념화된 조건을 갖췄다고 해도 그것이 반드시 자신에게 맞는 행복 조건이란 보장도 없다.

 

실제로 잘 따져보면 돈, 집, 가족, 지위, 외모 등이 특정한 어떤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고 있다는 근거는 실제로 없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행복할 수 있다. 돈을 손에 들고 있거나, 넓은 집을 돌아다니고 있거나, 높은 지위에서 주변 사람들을 바라 볼 때나, 가족 사진을 볼 때나,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볼 때 행복한 상태에 놓일 수 있다.

 

그런데 이 행복 상태를 우리가 자주 경험하는 행복한 상태와 비교해보자. 춥고 배고팠던 날, 우연히 들어간 김치찌개 집에서 너무도 맛있는 식사를 하게 되는 경험 같은 것 말이다. 이때 두 행복의 상태는 어떨까? 아무래도 김치찌개를 먹는 순간이 더 행복한 것이 아닐까?

 

어떤 면에서 자신이 가진 사회적으로 이미 알려진 행복의 조건들을 충족시킨 것이 행복한 상태로 판단되는 것은, 사실은 거의 대부분이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근거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된다. 즉, 그것 자체가 행복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기에 행복하다고 믿는 것이다.

 

정말로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것이 바로 행복함의 길이 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낼 수 있다. 그런데 많이 듣던 이야기가 아닌가? 우리들이 매일 하고 있는 말과 행동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행복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참으로 좋아한다. 왜 그러는지는 각자 알 것이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의 부러움을 얻기 위해서이다.

 

결국 부정확한 경험의 기억을 근거로 하고, 사회적으로 이미 정의된 행복 조건들을 근거로 하여서 판단된 행복이 얼마나 믿어야 할지에 대해서 의문이 생길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결국 행복 여부를 판단 한다. 판단을 해야 다음 행동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불행하다면 불행을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행복하다면 그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미래가 결정되는 순간이다. 각자의 삶이 결정되는 순간이다. 그런데 이렇게나 중요한 결정이 내려지는 순간에 그것을 위한 근거는 사실상 신뢰할 수 없는 수준이다.

 

그러니 삶의 방향이 행복한 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엉뚱한 길로 가는 것이다. 죽어 라고 행복하기 위해서 살았는데, 돌아보니 죽어 라고 불행한 쪽으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무도 멀리 와 버리고 만 상태이다.

 

이것이 우리가 삶의 중간에 문뜩 느끼는 뒷골 서늘한 공포이다. 후회이다. 허무함이다. 답안지를 내고 난 후, 한 칸씩 밀려 쓴 것을 알게 된 순간이다.

 

그래서 우리는 잠시 깊은 생각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이 행복하다고 판단하고 있는 그 모든 것이 정말로 자신의 행복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스스로 내세울 경험적 근거도 있고 객관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근거 또한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다시 돌이켜 봐야 한다. 자신이 행복하다고 믿는 것들이 정말로 행복한 것인지를 말이다.

 

그래야 자신이 행복하다는 것을 '판단' 하고 있는지 아니면 행복한 '상태'에 있는지 알 수 있다.

 

꼭 합격하고 싶은 시험에 합격한 사람은 행복한 상태에 있다. 그러니 행복하냐는 질문에 생각을 할 필요가 없이 대답할 수 있다. 방금 애인과 헤어진 사람 역시도 생각할 필요가 없다. 자신이 불행하다는 것은 너무도 뻔한 질문이다. 그래서 그는 대답 대신 욕을 하거나 주먹을 날릴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나 우리는 자신이 행복하다는 것을 판단할 때 주관적 경험 기억보다도 객관적 사실들을 더욱 더 신뢰하는 경향이 있다. 즉, 사회적으로 행복함의 조건으로 알려진 것들을 갖출 때, 자신이 행복하다는 판단을 내리기가 더 쉽다.

 

그러니 매일 그 조건을 갖추기 위해서 노력을 하게 된다. 하지만 정말로 조건을 갖춘다고 해서 행복해질 수 있을까? 그것이 정말로 가능할까?

 

물론 그것이 착각이든 스스로 내린 잘못된 판단이든 상관없이 자신이 행복하다고 믿고 산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 행복이란 상태가 특정한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행복은 그저 각자 정의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이것에 따른 문제는 깊게 숨겨져 있다. 그것은 바로 진짜로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가능성의 박탈이다. 즉, 더 행복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행복하다고 판단함으로써 그 행복 가능성을 날려 먹는 경우가 생겨난다. 그것도 자주 말이다.

 

행복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바로 밝음이다. 그리고 여유로움이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관대함이다. 행복은 각자 느끼고 또한 성격도 제각각 이지만 정말로 행복한 사람들은 모두 이런 면을 보여준다.

 

주변을 보면 쉽게 답이 나온다. 얼굴을 찡그리고, 우울하며, 각박하고, 작은 손해도 참지 못하는 사람은 성격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조차도 아주 가끔은 밝고 여유롭고 관대하다. 바로 아주 가끔 찾아오는 행복한 순간들에 말이다.

 

그래서 좋은 일이 있거나 큰 행운이 찾아 온 사람은 마음이 넓어진다. 원래 잔칫집에서는 인심이 후하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누구에게나 가능하다. 자주 행복하다면 자주 그런 모습이 보여지고 그러면 그 사람은 그런 모습으로 정의된다. 즉, 행복한 사람이다.

 

오늘 하루 주변을 보라. 과연 그런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지하철 안에서, 버스 안에서, 자가용 차 안에서 혼자 있을 때 각자 어떤 표정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지,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 어떤 태도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지를 잘 살펴봐야 할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그저 행복한지, 부러움을 받기 위해서 행복을 자랑하고 있는지, 자신의 행복을 증명 받으려고 하고 있는지 보일 것이다.

 

그런 태도를 통해서 누가 정말로 행복한지, 불행한지 답이 나올 것이다. 그리고 생각보다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이 참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생각보다 우리들은 각자 자신이 행복하다고 믿고 산다. 즉, 적어도 자신은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만약 자신이 더 행복할 수 있는 기회를 뺏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떨까? 지금의 행복에 만족하고 그대로 있을까?

 

만약 그대로 있다면 그 사람은 정말로 행복한 사람이 맞다. 이미 충분히 만족스러운 상태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행복한 사람은 다른 행복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하지만 만약 다른 행복 가능성에 끌린다면 어떨까? 그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 아닐까?

 

우리는 자신의 행복 여부도 판단하지만 타인의 행복 여부도 판단한다. 그리고 그것을 하면서 서로가 영향을 주고, 영향을 받기도 한다. 서로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조언을 하고, 조건을 보고 행복 여부를 판별해주기도 한다.


이때 문제가 생겨난다. 특정 조건을 행복이라고 결정해버리기 때문이다. 돈이 행복이다, 출세가 행복이다 라는 식으로 정의내려 버리고 만다. 물론 돈이 많고 출세하는 것이 행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는 것은 맞다. 하지만 우리는 행복의 조건을 갖추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기 위해서 살아야 한다.

 

그럼에도 계속 조건을 갖추려고 애쓴다. 그래야 적어도 객관적인 조건이라도 갖춘 것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나서 결국 자신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판단한다.

 

하지만 이 전체적인 흐름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분명히 있다.

 

넓은 집에 산다고 해서 누구나 행복한 것이 아니다. 돈이 많다고 해서 누구나 행복한 것이 아니다. 사실 모든 것은 적당한 것이 좋다. 행복은 각자마다 다르게 정의된다. 거기엔 정해진 것이 없다.

 

노래를 부를 때, 그림을 그릴 때, 돈을 벌 때, 출세를 할 때, 대통령이 될 때, 과학자가 될 때, 결혼을 할 때, 자녀를 키울 때, 여행을 할 때, 위험한 도전을 할 때, 자연 속에서, 도심 속에서, 혼자 있을 때, 사람들과 어울릴 때, 책을 읽을 때, 만화 책을 읽을 때, 게임을 할 때, 잠을 잘 때, 먹을 때, 데이트를 할 때 각자 행복하다.

 

그러니 오늘 자신이 질문을 받고 행복하다는 판단을 했다고 해도, 그 판단에 정말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지 오랜 시간을 들여서 다시 되짚어 봐야 할 것이다.

 

생각보다 그것은 제대로 된 판단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정말로 그렇다. 우리들 대부분은 그저 다른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하는 것을 하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제대로 성찰될 때, 우리는 행복의 판단이 아닌, 행복한 상태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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