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찌그러진 사람들

아이루다 2016. 9. 19. 09:14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아를 가지고 있다. 자아는 우리 인간이 자신을 '명백히 존재하는 의미 혹은 가치' 라고 느끼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자아는 매우 다양한 모습을 지녔고, 아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원래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같은 성질의 자아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타고난 성격과 자라온 환경 등등에 의해서 도저히 같은 성질을 가졌다고 상상하기가 힘들 정도로 차이가 크게 나타난다.

 

선천적으로 자아가 강한 사람이 있고 희미한 사람도 있다. 더해서 타고난 자아가 자라나면서 어떤 환경에서 어떤 조건하에 어떤 대우를 받았느냐에 따라서 또 한번 심하게 변한다. 즉, 다양해진다.

 

자아가 많은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자아는 기본적으로 단 하나의 원리로 동작된다. 그것은 바로 '자기 만족' 이다.

 

이렇게나 단순한 자아가 그렇게나 다양한 모습을 지니는 이유는 바로 '자기 만족' 이란 말 자체가 사람마다 모두 다르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거기엔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 기준이 있다. 즉, 가치 기준에 따라서 자신이 만족시켜야 할 대상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는 돈이나 성공이 최고라고 여기고 그것을 향해 달려가며, 누군가는 사랑과 행복이 최고라고 여기면서 그것을 위해 살아간다.

 

우리 인간은 이런 삶들을 뭔가 서로 완전히 다른 것으로 느끼고 설명하는 것에 익숙하지만, 근본적인 입장에서 보면 사실 이 둘 모두 자신의 자아를 만족시키는 과정의 다른 모습일 뿐이다. 누군가는 돈과 성공을, 누군가는 사랑과 행복을 가치 있어 하는 것이다.

 

또한 사람간에 차이가 생겨나는 또 다른 부수적인 원인은 바로 '만족' 의 크기이다. 즉, 사람마다 만족의 개념이 다르다. 그래서 똑같이 돈의 가치를 느끼더라도 누군가는 100억이 있어도 부족하고 느끼고, 누군가는 1억만 있어도 충분하다고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자아는 기본적으로 만족의 크기가 작고 그것을 채울 수 있는 능력이 있을 경우 쉽게 가득 채워질 수 있다. 그리고 최대한 많이 채워진 사람들의 삶이 상대적으로 행복하고 만족스럽다.

 

물론 만족의 크기가 아주 크지만, 타고난 능력도 월등하여 그것을 충분히 채울 수 있는 사람들도 있다. 많지는 않지만 존재하긴 하며, 이들의 삶은 그 누구보다도 풍요롭다. 경제적으로도 아주 큰 성공을 거뒀으며, 사회적으로도 꽤나 유명 인사가 될 정도로 성공한 사람들이 된다.

 

이것은 작은 욕망을 쉽게 채우거나, 큰 욕망을 열심히 노력해서 채우거나 하는 것과 같다. 즉, 자신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다양한 형태의 욕망을 얼마나 채웠느냐에 따라서 자아의 만족 상태가 달라진다.

 

우리는 흔히 욕망을 채우는 것을 통해 행복해진다. 그런데 이 행복은 크게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우리는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렇다고 구분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하나는 그 행위 자체로 얻는 행복이며, 다른 하나는 그것을 해낼 수 있었던 자신에 대한 만족감으로 인해 얻어낼 수 있는 행복이다.

 

쉽게 말해서 밥을 먹고 난 후 얻는 행복은 기본적으로 배가 부른 행복이지만 더해서 뭔가 맛있고 비싼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면, 그것에 대한 만족감의 행복이 추가적으로 더해지는 것이다.

 

원래 이 추가적 행복은 분명히 부수적인 것이지만, 요즘은 이 행복이 기본적 행복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 즉, 우리는 이제는 행위 자체로 인해 얻는 행복보다 그것을 통해 얻는 만족의 행복에 훨씬 더 집착하고 있는 중이다.

 

어떤 제품을 샀다면, 그것을 얼마나 제대로 잘 쓰느냐에 따라 행복을 느끼기 보다는, 그것을 얼마나 비싸며, 좋은 브랜드이며, 운 좋게 싸게 잘 샀느냐를 통해 더 큰 행복을 느낀다.

 

문제는 이 행복은 혼자서는 느낄 수 없다는 점이다. 즉, 타인의 반응이 반드시 필요하다. 비싼 것을 인정해주고, 브랜드를 알아봐 주며, 운 좋게 싸게 산 것을 부러워해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즉, 우리가 매일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다양한 SNS 활동을 통해서 끝없이 자신의 일상을 말하는 이유가 바로 '만족' 의 행복을 얻기 위한 노력인 셈이다.

 

여행을 했다면, 그 여행 자체로도 행복했지만, 자신이 어떤 장소에 갔었고 무엇을 느꼈는지 글과 사진을 공유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공감이 많을수록 더욱 만족도는 높아져서 결국 더 행복해진다.

 

이것의 배경엔 모두 '자아' 가 존재하고 있다. 즉, 자아는 밥을 밥으로, 여행을 여행으로 머물게 하지 않는다. 자아는 그것들을 해내는 과정과 결과를 타인의 의견을 참고해 판단하여 결국 만족감을 생성해낸다. 그리고 이 만족감이 클수록 자아가 채워지는 것이다.

 

만약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삶에서 이 흐름이 원활하다면, 아마도 이 세상 사람들 모두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사실 생각보다 이 흐름은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제대로 동작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낀다. 즉, 밥을 먹고 배는 부르지만, 불만족스럽다.

 

어느 정도 잘나긴 했지만, 만족의 크기가 큰 사람들 중에서 그것을 제대로 채울 능력이 되지 못하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열등감 덩어리가 된다. 그래서 갑질이 시작된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 대한 무시가 시작된다. 그래서 잘난 척을 하고 터무니 없는 선민 의식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래서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 그래서 끝없이 다른 사람을 험담하고 질투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불행을 좋아한다.

 

이런 모습들이 자아가 제대로 채워지지 못한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하게 되는 사람들의 다양한 찌질함이 바로 자아가 제대로 만족되지 못해서 나타나는 열등감의 표출이다. 이것은 단지 잘 숨겨졌을 뿐,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만큼 자아를 제대로 만족시키기가 힘들다는 뜻도 된다.

 

그래서 꽤나 잘나고 똑똑해 보이는 사람들도 대부분 내부적으로는 숨겨진 열등감이 있다. 단지 어느 정도 잘나서 그것을 표현 하는데 있어서 매우 그럴 듯 하다. 어떤 식으로든 대의와 명분을 끌어들여서 자신의 질투심과 찌질함을 합리화 시킬 수 있다.

 

누군가 대단한 성공을 거뒀다면, 그 성공으로 인해서 발생되는 단점, 즉 문제점을 지적해서 그 성공의 가치를 끌어 내리는 것이다.

 

더해서 자아는 사실 심하게 욕심쟁이이기 때문에 문제가 더욱 커진다. 자아는 모든 것을 다 잘하고 싶어한다. 자아는 어느 곳에 가서도 주눅이 들지 않고 싶어한다. 자아는 언제나 1등을 원한다. 1등이 되어야 만족감이 최대치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사람이 모든 분야에서 1등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나마 우리가 덜 열등감을 느끼는 이유는, 우리는 모두 각자 가치가 있다고 느끼는 것에 대해서 어느 정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즉, 자아는 가치 있다고 느끼는 것에 대해서만 1등을 하고 싶어한다. 나머지 것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그래서 사실 자신이 어떤 것을 잘한다고 해도 스스로 가치가 없다고 느끼면 전혀 자아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보통 사람들은 보통 수준의 만족 크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실제로 만족시킬 수 있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더 큰 만족 크기를 가지고 산다. 왜냐하면 이 만족 크기가 크면 클수록 자아는 더 잘났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자아는 잘나고 싶어하기 때문에 목표는 최대한 높이 잡고 싶어한다.

 

그리고 사람에 따라서는 자신의 만족 크기를 어느 정도 채우기도 하고, 영 채우지 못할 경우도 있다.

 

그나마 어느 정도라도 채운 사람들은 열등감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어느 정도 만족하면서 살아간다. 말 그대로 적당히 사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의 필수적인 과정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자기 합리화' 이다. 즉, 자신이 채우지 못한 나머지 부분을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할 수 있는 착각이다.

 

그래야 자신이 결코 채우지 못할 나머지 부분에 의해서 덜 불행할 수 있다. 자신의 부족함이나 자신의 문제점 등을 어떤 식으로든 핑계를 대고 외부적 원인으로 돌림으로써 그것을 '처리' 해내는 것이다. 그리서 각종 '탓' 이 생긴다. 부모 탓, 사회 탓, 배우자 탓, 조상 탓 까지도 존재한다. 자신의 문제를 외부적 문제로 돌릴 때, 자아를 채울 수 없는 진짜 문제의 원인이었던 부족하고 능력이 없는 자신은 편해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진실은 숨길 수 없다. 아무리 합리화를 해도 그 자신은 진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누군가 그것의 진짜 이유를 지적하면 참지 못한다. 그래도 사람들은 진실을 들으면 화를 낸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 상대를 위해서 자주 거짓을 말해야 한다. 그것을 '위로' 라고 한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살기가 너무 힘들다. 이런 식으로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자기 합리화를 통해 세상을 살아간다.


그래서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란 말이 진리처럼 적용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합리화에 능숙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합리화에 능숙한 사람들은 사실 너무도 능숙해서 자신이 만들어 낸 착각을 스스로도 너무도 깊게 믿는다. 그래서 어떨 때는 당황스럽기까지도 한데, 아무튼 그래도 그 덕에 자신은 행복하게 살 수 있으니 그대로 두는 것이 낫다.

 

이런 사람들의 판단은 기본적으로 주관적이다. 즉, 어떤 것을 판단하는데 있어서 객관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주관적으로 접근한다. 사실 자기 합리화라는 말 자체의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합리적이란 말은 객관적이지만, 합리화는 주관적이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주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최대한 진실에 다가가길 원하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판단할 때 좀처럼 주관적으로 임의로 판단하지 못한다. 그래서 최대한 객관적으로 판단하길 원한다. 덕분에 자기 합리화는 어느 정도 막아내지만, 결국 자아를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불행해지고 만다.

 

자기에게 엄격한 사람들이 불행한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적당히 넘어가야 행복한데, 너무 고지식하다.

 

물론 능력이 되면서 이럴 경우, 삶이 꽤나 진실되고 나름대로 성공할 수도 있다. 자기 합리화를 최대한 하지 않기에 자신에게 엄격하게 되며, 그로 인해서 훨씬 더 많은 노력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능력만 타고나면 성공한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 더군다나 이런 사람들의 삶은 타인에게 모범이 되기 때문에 존경을 받고 명예를 얻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것도 자아를 만족시키는 아주 중요한 수단이다.

 

문제는 나름 엄격한데, 타고난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엄격함으로 인해서 점점 더 찌그러져 간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해 그럴 수 있는데, 일단 가장 우선적으로는 성향 자체가 엄격하게 타고난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타인의 너무도 심한 자기 합리화로 인해 실제적으로 피해를 봐서 그럴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어렸을 때부터 충분히 사랑을 받지 못해서 삶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너무 현실적이거나 비관적이어서 그럴 수 있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행복할 때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해석한다. 즉, 합리화를 잘한다. 반대로 불행할 때는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해석한다. 즉, 합리화를 못한다.

 

그런데 엄격하거나 냉소적인 사람들은 좋은 말로 현실적이고 객관적이긴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자아가 제대로 채워지지 못하고 오히려 많은 상처를 받게 된다.

 

그래서 찌그러지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제대로 채워지지 못한 자아를 가진 채, 자기 합리화를 통해 끝없이 채워지지 못한 부분을 망각하려고 애쓴다. 이것은 좋은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덕분에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을 잘못되었다고 판단해서 더 이상 합리화를 하지 않게 되면, 단지 하지 않게 되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자아의 채워지지 않는 영역은 이제 본격적으로 불행함을 양산한다. 그래서 결국 불행해지고 만다.

 

이것은 마치 계속 새고 있는 풍선에 바람을 넣는 것과 같다. 우리는 자기 합리화를 통해 풍선에 끝없이 바람을 불어 넣는다. 이것은 풍선을 더 크게 만들어 주지는 못해도 풍선이 그 크기를 유지할 수 있게는 해 줄 수 있다. 하지만 바람을 넣는 행위를 하지 않게 되면, 즉 합리화를 멈추면 그 후로 풍선은 천천히 쭈그러든다.

 

그리고 어느 정도 되면, 쭈그러드는 것이 멈추게 되는데, 이때는 안정기가 되긴 한다. 하지만 이미 삶 자체가 찌그러졌기 때문에, 모든 일에 수동적으로 변하게 된다. 그리고 피해의식과 불만과 열등감도 분명히 존재한다. 불완전한 안정기인 셈이다.

 

찌그러진 삶을 사는 사람들은 우울해 보이긴 하지만, 사실 나쁜 사람들은 아니다. 실제로는 좋은 사람들이다. 자신을 과대하게 포장하지 않으며, 나름대로 진실되게 살려고 한다. 합리화를 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하는 일이 그대로 평가 받기 원한다. 욕심도 많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못되게 굴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들은 수동적이며, 부정적이다. 다른 말로 하면 너무 젖어버린 장작과 같다. 이들에게 있어서 불에 활활 타는 모습을 상상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삶에서 경험하는 거의 모든 것들에 있어서 반응이 거의 없다. 감정적으로도 매우 경직되어 있어서 좋거나 싫거나를 좀처럼 표현하지 않는다. 그래서 존재감도 무척 떨어진다. 그로 인해서 자존감도 낮다.

 

좋은 사람이지만, 어둡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다.

 

이들은 어떻게 해야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다른 사람에 의해서 가능하다. 그것은 진실한 누군가에 의해서 충분히 사랑을 받으면 해결이 된다. 즉, 누군가 젖은 장작을 말려주면 된다. 누군가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받고, 충분히 인정을 받고, 깊은 공감을 받을 수 있다면 아무리 심한 상처를 가졌더라도 결국 치유가 된다. 그래서 원래 가진 진정한 매력이 드러나게 된다.

 

다른 하나는 스스로 해결 가능하다. 그것은 바로 자신에게 좀 관대해지는 것이다. 원래 그 모든 문제는 과도한 엄격함에 의해서 발생한 문제였다. 하지만 여기엔 문제가 있다. 그것은 자아가 자신의 엄격함으로 이미 하나의 가치로 만들었고, 그 엄격함이 바로 자신이나 타인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 버렸다는 점이다.

 

덕분에 엄격한 것을 자아의 목표로 삼아 버리고 말았다. 그러니 계속 더 엄격해지려고 할 뿐, 결코 관대해질 수 없다. 이것은 악순환의 시작이다.

 

덕분에 이들이 관대해지는 것이 좀처럼 쉽지 않다. 엄격함을 버리고 관대해져야 자아가 펴질 수 있는데, 그것을 버리면 당장 자아가 심각한 상처를 받는다. 그러니 그것을 시작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자신이 문제가 있음을 받아 들어야 해결이 가능한데, 너무도 오랜 시간 동안 진지함이나 엄격함을 기준으로 자아를 만족시키는데 노력해 왔던 것이다.

 

사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이 바로 첫 번째 해결책이다. 즉, 누군가에게 충분히 사랑을 받으면 행복해질 수 있고, 그 행복이 바로 엄격함을 줄이고 관대해질 수 있는 힘이 되어 준다.

 

그것이 자기 용서를 할 수 있는 시작점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혼자서는 절대로 불가능 한 것일까? 아니다. 혼자서도 할 수 있다. 그 방법이 바로 끝없는 자기 성찰이다. 오랜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자신이 가치 있다고 느끼는 것 그것 역시도 자아의 또 다른 모습임을 성찰해 낼 수 있다면, 그래서 인정할 수 있다면, 그것을 버릴 수 있다.

 

또한 이 모든 것이 밥을 밥으로 여기지 못하는 자아의 눈속임임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밥을 먹는 진짜 이유는, 배가 고파서이다. 비싼 밥을 먹었다는 만족감을 얻기 위해서 아니다. 이것이 자아가 가진 명백한 문제점이다.

 

즉, 자아가 가진 본질적 문제점을 이해하고, 자신이 느끼는 가치 역시도 그것의 일부임을 자각할 수 있을 때,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럴 수 있을 때 자신에게 관대해질 수 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서 타인에게도 관대해질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의 끝없는 자기 합리화에 대한 비판을 멈출 수 있다. 그래서 그저 웃어줄 수도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무엇인가를 싫어한다면, 우리도 역시 그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들은 자신 역시도 끝없는 합리화의 욕구를 가지고 있음을 알기에 그것을 더 싫어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모습은 사실 자신의 솔직한 모습인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억제하려고만 하지 말고, 인정하고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해야 한다.

 

어려운 일이지만, 찌그러진 것을 스스로 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혹은 운 좋게 정말로 자신을 사랑해 줄 수 있는 소중한 인연을 만나든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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