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그저 행복하고자 할 뿐이다.

아이루다 2016. 10. 17. 07:33


인간에 대한 모든 종류의 질문의 해답을 하나로 정리하면 그 답은 '행복' 이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살고, 행복하고자 살며, 행복하기 위해서 산다. 왜 사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의 답은 모두 행복하기 싶어서 살고, 행복 하려고 살고, 행복을 위해서 산다고 답을 낼 수 있다.

 

일반적 수준에서 삶에 대한 정답은 너무도 단순하고 명료하다. 삶은 그저 행복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의 몸부림이다. 아니 이것을 부정적으로 묘사할 필요는 없다. 행복한 삶이 가진 아름다움은 그 어떤 것에도 비할 바가 없다. 우리가 느끼는 모든 종류의 긍정적 묘사들은 모두 행복과 관련되어 있다.

 

오늘도 돈을 벌기 위해서 장사를 하는 사람도,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는 사람도, 어딘가 멀리 여행을 떠나는 사람도, 아무 할 일이 없어서 집에서 뒹굴 거리는 사람도,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는 사람도, 배가 고파서 밥을 먹는 사람도 모두 다 행복하기 위해서 그러고 있다.

 

이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기에 다들 안다. 너무도 잘 알려진 진실이라서 도대체 모르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행복에 관해서 우리가 모르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은 행복하기 위해서 산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은 행복하기 위해서 산다는 것을 잘 모른다. 직접 매일 경험하고 있는 자신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경험하지 못하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모른다.

 

그러니 저 사람은 왜 저럴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것의 답이 어려울까? 아니다. 쉽다. 이미 충분히 이 해답에 대한 정보를 들어왔다. 모든 사람이 그러는 이유는, 행복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가끔 그 질문을 꺼낸다.

 

왜 저렇게 살까? 왜 돈만 추구할까? 왜 남에게 피해를 입힐까? 왜 남에게 상처를 입힐까? 왜 저런 쓸데없이 비싼 장비를 살까? 왜 저렇게 사치를 할까? 왜 매일 잔소리를 할까? 왜 그렇게 싫어하는 행동을 반복할까? 왜 방을 치우지 않을까? 왜 저렇게 지저분할까 라고 묻는다.

 

정말로 그들이 왜 그런지 알고 싶은가? 행복하니까 그런 것이다.

 

오늘 나를 버리고 떠난 사람은 그 사람의 행복을 찾은 것이다. 오늘 나를 사기친 사람도 그 사람의 행복을 위한 것이다. 오늘 나에게 폭력을 행사한 사람도 역시나 그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한 것일 뿐이다.

 

우리는 가끔 행복과 관련 없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즉, 불행을 유발하는 행동을 한다. 그런데 그것을 '실수' 라고 부른다. 즉, 의도치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도 실수를 하길 원하지 않는다. 불행을 유발하는 것을

누가 원하겠는가?

 

그러니 다른 사람의 어떤 행위로 인해서 내가 불행해졌다면, 그것은 모두 실수가 되어야 한다. 사실 그 사람 입장에서는 행복한 결과가 나와서 결코 실수가 아닌데, 자신은 불행해졌으니 실수가 되어야 옳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믿고 싶어한다.

 

누군가 나를 배신하고 다른 남자나 여자에게 떠나면, 그것을 명백한 실수라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잘못 판단해서 그런 행동을 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니 반드시 언젠가는 후회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미래엔 분명히 그런 행동으로 인해서 벌을 받을 것이라고 믿고 싶어한다.

 

더해서 그의 어리석은 실수로 인해서 자신이 상처 입는 것이 너무도 화가 난다. 그래서 상대에게 복수를 하고 싶고, 상대를 저주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아니다. 그 사람이 비록 결론적으로는 실수를 했을지는 모르지만, 그 사람은 그저 지금 자신이 생각하는 최고로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물론 결론은 비참할 수 있다. 누군가를 배신하고 떠난 사람은 배신을 당해도 싸다. 하지만 세상은 늘 그런 것은 아니다.

 

배신을 하고 떠난 사람이 벌을 받는 것은 드라마에서나, 소설에서나, 영화에서나 나오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전혀 다르게 진행된다. 물론 벌을 받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벌이 아니다. 그저 그 사람이 운이 나빴던 것뿐이다.

 

우리 인간은 수 많은 복잡한 관계 속에서 끝없이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우리는 왜 서로에게 상처를 줄까? 이 답도 단순하다.

 

우리는 각자 서로 자신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기에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내가 행복한 길이 남이 행복한 길이었으면 좋았겠지만, 그 길이 늘 함께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심지어 남에게는 불행할 경우도 많다.

 

내가 이득을 많이 봤다는 말은 누군가는 손해를 봤다는 뜻이 된다. 내가 누군가를 만나면 그 사람을 짝사랑하고 있던 누군가는 큰 상처를 받을 수 있다. 내가 대학교에 입학하면 누군가는 탈락한다. 내가 진급을 하면 누군가는 진급에 누락된다.

 

이 세상에서 모두가 동시에 행복할 수 있는 길은 없다. 설령 우리 인간 모두가 행복하더라도 우리 인간을 위해서 끝없이 죽음을 당해야 하는 수 많은 동물들과 식물들은 불행할 수 밖에 없다.

 

운이 좋다면 내가 행복한 것이 남도 행복한 경우가 있다. 가족이 그렇다. 가족이 좋은 것이 그것이다. 내가 좋은 것이 남도 좋은 거의 유일한 경우이다.

 

우리는 심지어 남이 좋은 것이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다고 해도 그것을 잘 참지 못한다. 자신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의 행운을 보고는 질투를 한다. 조금이라도 잘 아는 사람에게는 더욱 더 심하다.

 

그 사람의 행복으로 인해서 자신의 행복이 전혀 변하지 않았음에도 그렇게 한다. 그냥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다는 이유로 인해서 그렇다. 그러니 우리가 다른 사람의 행복 추구로 인해서 불행해졌을 때를 참기란 너무도 힘들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들 자신이 행복은 추구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남들은 그래서는 안될 것 같다. 왜냐하면 남들의 행복 추구로 인해서 자신이 피해를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이 행복을 추구했기에 손해를 봤던 수 많은 과거 속의 사람들에 대해서 전혀 기억을 못한다. 그들이 말을 하지 않았기에 모른다. 그들이 따지지 않았기에 모른다. 그런 행동을 한 것은 바로 우리의 권리라고 생각했기에 아무런 의심이 없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자신의 행복 추구는 당연한 것이 되고, 남의 행복 추구는 당연하지 않는 것이 된다.

 

나는 필연적 이유로 어쩔 수 없이 남을 배신할 수 밖에 없고, 남은 나를 결코 배신하는 것은 결코 용납이 안 된다. 그래서 내가 하면 로맨스가 되고, 남이 하면 불륜이 된다.

 

그런데 많이 이상하지 않는가? 왜 우리는 극단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면서 남은 그것을 해서는 안 된다고 믿을까?

 

나에게 상처를 입히든, 나를 배신하든, 나에게 거짓말을 하든 상관없이 그들 모두 그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한 것이다. 물론 이것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옳고 그름으로 보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모두 그저 행복을 추구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

 

그런데 이 단순한 것을 잊어 먹는다. 그래서 자신에게 상처를 준 이들이나, 자신을 배신한 이들이나,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 사람들을 참아내지 못한다.

 

이 말을 알기는 안다.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도 소용없다.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내가 남을 배신할 때, 실망시킬 때는 반드시 합당한 이유가 있다. 또한 그 판단의 주체가 나이기에 그 이유를 누구보다도 잘 안다. 이 세상에서 나를 제일 잘 이해하는 사람은 바로 나이다. 설령 그 이유가 명확하지 않아서 조금 괴롭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다 알아서 합리화가 된다.

 

그것은 따로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된다. 그래서 어떤 치명적인 잘못도 수십 년이 지나면 그때 그럴 수 밖에 없게 된다. 그 잘못을 통해 얻은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그렇다.

 

친구를 배신하고 난 후 얻은 돈으로 장사를 하고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길렀다면, 친구를 배신하지 않았다면 그 모든 소중한 것이 없게 되어 버린다. 만약 그것을 후회 할 때라면 배신을 하고도 망했을 때뿐이다. 친구도 잃고 돈도 잃었기에 그렇다.

 

그러니 자신에 대해서만큼은 잘못은 했지만 이해는 간다. 우리가 저지른 모든 잘못은 시간이 지나면 잊힌다.

 

그런데 남은 다르다. 남이 나를 배신할 때, 실망시킬 때 하는 이야기는 모두 변명에 불과하다. 아무리 이해해 주려고 해도 인간이면 그러면 안 된다. 나는 남의 마음을 알 수 없다. 설령 그 친구가 아무리 진실되게 이야기 해도 그 속을 완전히 믿을 수 없다.

 

이것은 결코 안 된다. 그래서 친구가 저지른 실수나 잘못은 결코 잊혀지지 않는다. 그것이 자신에게 치명적이면 치명적일수록 더욱 더 용서가 안 된다. 그 친구가 나에게 잘못을 한 후에 잘되면 잘될수록 더욱 더 화병이 난다. 친구가 용서가 될 때는, 그 친구가 망했을 때이다. 아니, 용서가 아니다. 속으로 시원하기만 하다.

 

나는 결코 남이 아니고, 남은 결코 내가 아니다. 하지만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이 하나 있다.

 

당신이나 나나 우리 모두는 그저 행복하고자 했던 사람들일 뿐이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관대해지라는 말도 아니고, 남의 실수를 흔쾌히 받아들이라는 말도 아니다. 그저 우리는 모두 행복하자 할 따름인, 그런 존재들이란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아주 작은 이해가 우리를 덜 화나게 하고, 덜 상처받게 하고, 덜 비참하게 만들 수 있다. 우리가 이해하면 할수록 더욱 그럴 수 있게 된다.

 

이것은 그 누구도 아닌, 우리들 자신을 위해서 그래야 한다. 남에게 나쁜 감정을 느끼면 느낄수록 우리는 점점 불행해질 뿐이다. 이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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