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불행의 냄새

아이루다 2016. 9. 23. 08:11

 

누군가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겼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그를 혹은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그것을 걱정하면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나눈다. 하지만 소문은 빠르게 퍼진다.

 

이 때 누군가는 추측을 하고, 누군가는 추리를 하고, 누군가는 판단을 하고, 누군가는 정의를 한다.

 

이렇게 되면 소문에는 원래 진실에 추측, 추리, 판단, 정의가 더해져서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구별할 방법이 없게 변한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그런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이 그 불행한 일에 관심을 갖는 진짜 이유는 사실상 그 불행한 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에게 어떤 불행이 생기면, 그 불행은 냄새를 풍기기 시작한다. 사실 불행의 냄새는 그리 좋지 않지만, 사람들은 그것에 끌린다. 그것은 마치 자신이 싼 똥과 같다. 똥이 냄새 나고 더럽다는 것을 알지만, 사람들은 똥을 싼 후 그것을 꼭 확인하려고 한다.

 

물론 이것은 자신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려는 무의식적인 행동이긴 하다. 그리고 불행의 냄새가 퍼지는 이유 역시도 비슷하다. 우리가 타인의 불행한 일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바로 자신의 행복을 확인하고 싶어서 그렇다.

 

우리는 타인의 불행을 통해서 자신의 행복을 확인한다. 자신에게는 그런 불행이 일어나지 않았음을 감사한다. 병에 걸린 사람을 보면 건강함을 감사하고, 망한 사람을 보면 망하지 않은 자신을 감사하게 여긴다. 그리고 미래에 자신에게도 그런 일이 닥칠 수 있다는 가정을 하면서 걱정한다. 그래서 대비도 한다.

 

아픈 사람을 만나고 오면 그날 밤 자기 전에 운동을 한다. 망한 사람을 만나고 오면 그날 밤 자신이 모은 돈을 계산 하고 앞으로 얼마나 더 직장을 다닐 수 있는지 생각해 본다.

 

하지만 우리가 불행의 냄새를 맡고, 그것에 끌릴 때 우리의 머리 속에는 이것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다.

 

우리는 불행한 사람을 걱정하고 위로 해준다고 믿는다. 물론 실제로 위로도 해준다. 미래의 자신을 위해서 말이다. 자신에게 불행한 일이 생겼을 때를 위해서 저축을 한다. 그때 위로를 기대하면서 그런 행동을 한다.

 

기본적으로 불행은 기분이 나쁜 일이다. 우리가 사람의 시체를 보는 것을 혐오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이다. 우리가 피를 보거나 남의 심한 상처를 보려고 하지 않는 것도 그렇다. 우리가 다른 누군가의 불행을 볼 때, 우리는 자신이 그런 불행에 노출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른 사람의 불행에 관심이 많다. 불행은 피할 수 없는 냄새를 풍긴다.

 

우리는 그 냄새를 통해서 현재의 자신이 누리는 행복을 확인 받고, 미래에 자신에게 닥칠 불행에 대비한다. 이것은 좋은 일이다. 특히 현재의 상대적 행복감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음에도 얻는 행복이다. 그러니 그 누가 불행의 냄새로부터 자유로울까?

 

물론 그 냄새를 맡고는 같이 슬퍼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강한 운명으로 엮여 있는 사람들이다. 남편의 불행을 슬퍼하는 아내, 부모나 자식의 불행을 슬퍼하는 자식과 부모가 그렇다. 형제도 그럴 수 있다. 정말로 친한 친구도 그럴 수 있다.

 

그리고 더해서 공감 능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상대에게 일어난 일을 자신에게 일어난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상대의 불행을 자기 일처럼 슬퍼해 줄 수 있다.

 

이것은 좀 달라 보인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 역시도 같은 원리임을 이해할 수 있다.

 

가족끼리 불행을 공유하는 것은, 상대의 불행이 자신의 불행으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뿐이다. 즉, 원래는 상대의 불행을 통해서 자신의 행복을 확인 받아야 하는데, 그것이 안된 경우인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는 자신이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일어난 불행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우리가 타인의 불행을 통해 행복을 확인 받으려면, 사전 정보가 필요하다. 그 사람에 대한 감정이 필요하다. 즉, 공감을 할 수 있다면 같이 슬퍼하고, 평소에 그리 좋게 보지 않았다면 속으로 좋아하면서 상대적 행복감을 느낀다.

 

공감 능력이 유난히 발달한 사람의 경우에도, 자신이 그 사람이 되었다는 가정이 너무 강하게 들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즉, 미래에 자신에게 닥칠 수 있는 불행이 너무 현실적으로 다가오기에 그런 강한 공감이 드는 것이다. 그야말로 타고난 역지사지 능력자들인 셈이다.

 

우리 인간은 이런 존재이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이 든다. 우리가 이런 존재이니,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다른 사람의 불행의 냄새를 안타까운 척 하면서 사실은 좋아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자신에게도 그 일이 생길까 봐 걱정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일까?

 

어쩔 수 없긴 하겠지만, 그래도 이것이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미래의 문제를 미리 걱정하는 것은 그나마 의미가 있지만,지금 현재의 행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불행을 끝없이 이야기 하면서 사는 모습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러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현재의 자신이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불행하기에 다른 사람의 불행의 냄새에 끌린다.

 

사실 진짜 행복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불행함에 관심을 갖지 않으려고 한다. 미안하기도 하고, 사실 행복이 일종의 착각 상태이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가 정말 행복할 때는 현실이 없어진다. 그것은 마치 핑크 빛의 동화 속 세상과 같다. 거기엔 인간이 가진 어두운 면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자신이 행복하면 다른 모든 사람들도 행복했으면 한다. 아니, 행복할 것이라고 믿는다. 사실 그래야 좋다. 그래야 자신의 행복을 마음껏 표출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행복한 아이들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이 행복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랬으면 한다.

 

불행한 사람들 틈에서 살면, 행복하다는 것도 숨겨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시기와 질투를 받을 수 있다. 그래서 행복해도 그저 그런 듯 해야 한다. 우리는 행복하면 자랑하고 싶어서 안달인데, 이런 환경은 좋지 않다.

 

우리가 타인의 불행함을 통해 행복을 확인 받으려고 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우리가 지금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명확하게 증명해준다.

 

그래서 그것을 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런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현재 자신이 행복하지 않음을 인식하고 인정하고 결국엔 받아들일 수는 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 적어도 행복 하려고 노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종의 시작점이 된다. 물론 행복하지 않는 사람들이 행복하고 싶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보고서에 따르면, 행복은 타고나는 것이라고 할 정도로 선천적 개인 성향이라고 한다.

 

좀 극단적으로 표현해서, 행복 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키가 크려고 노력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한다. 그만큼 행복 하려고 노력하는 행위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여기에서 한 가지 빼먹은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방향성이다. 행복 하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가진 불필요한 요소들, 주로 사회적으로 주입 받은 당연하게 누려야 하는 것들에 대한 성찰은 할 수 있다.

 

즉, 자신이 품은 여러 가지 욕망에 대해서 구분과 판단을 할 수 있다. 그것이 정말로 자신이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 해야 한다고 말해서 갖게 된 것인지를 잘 생각해봐야 한다.

 

부풀려진 욕망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일등 공신이다. 현재의 자신에 대한 만족을 막고, 무엇인가 더 비싸고 많은 것을 원하게 만드는 주요 원인이다.

 

김밥 한 줄에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꼭 스테이크를 먹어야 직성이 풀이게 만든다. 작은 집에서도 충분히 만족하면서 살 수 있는 사람을 꼭 큰 집에서 살아야 하게 만든다.

 

타고난 행복 회로는 어쩔 수 없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태어난 후 자신이 살아온 환경과 경험의 총합을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누려야 하고 가지고 있는 권리에 대해서 재평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이것은 미래의 삶이 나아갈 방향성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매우 큰 역할을 한다.

 

이것은 큰 행복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행복의 빈도수를 늘릴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많은 행복 학자들은 행복은 크기가 아니고 빈도수라고 한다. 즉, 아주 큰 행복이 한 번 찾아오는 것이 행복한 삶의 열쇠가 아니고, 작은 소소한 행복이라도 자주 경험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한다.

 

그 이유는 바로 적응이라고 한다. 즉, 어떤 행복이라도 곧 적응되고 없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이 어떤 종류의 행복이든 간에 결국 권태와 지겨움을 경험할 수 밖에 없다. 처음에 아무리 가슴이 뛰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사랑이 식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인간의 행복은 기본적으로 단계가 있다. 가장 밑단에 생존과 생식이 있다. 그 위로 식욕, 성욕, 수면욕, 탐구심, 호기심 등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위로 평가와 만족이 존재한다.

 

이 중에서 행복은 밑단으로 갈수록 강해진다. 우리는 죽다가 살았을 때 가장 행복하다. 그리고 먹고, 섹스하고, 자고, 여행하고, 새로운 것을 경험할 때 행복하다. 이것은 생존이나 생식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먹고, 자는 행위가 그렇고, 섹스가 그렇다.

 

여행이나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것도 미래의 생존을 위한 대비책이다. 인간은 천성이 탐험가이다. 이제는 정착을 한지가 꽤 되었지만, 아직도 우리의 본능은 끝없이 떠돌면서 새로운 생존 가능성을 찾길 바란다. 시간이 될 때마다 돌아다니다가 어딘가 커다란 과일 나무를 찾거나, 넓고 안락한 굴을 찾길 바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 이 단계를 위해서 모든 종류의 행동을 한 후, 자신을 평가함으로써 만족감을 얻는 것을 통해 행복해 한다.

 

어떤 경우에 세 번째 단계의 행복이 두 번째 단계를 뛰어 넘을 만큼 강렬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경우는 드물다. 자신의 미래가 뭔가 대단한 장미 빛으로 되었을 때나 가능하다. 대학 입시 합격, 취직 성공, 경기에서 우승, 마음에 드는 배우자와의 결혼 등등이 그것인데, 인생에 있어서 그것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는 그다지 많지 않다. 더군다나 이런 행복은 반드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적응된다.

 

아무리 마음에 드는 학교에 입학했더라도 그 행복은 1개월도 채 가지 않는다. 회사도 마찬가지다. 경기에서 우승한 기억은 얼마 후 바로 추억이 되어 버리고 만다. 결혼은 3개월간 유지된다고 한다.

 

삼 단계 행복은 횟수도 적고, 해도 그다지 오래가지도 않는다. 우리들이 경험하는 대부분의 평가와 만족은 그저 그런 수준이다. 오늘 칭찬을 듣거나 오늘 비난을 받고 행복하거나 불행해 한다. 하지만 금세 사라진다.

 

첫 번째 단계인 생존과 생식은 행복의 본질이다. 그리고 그 위로 두 번째 단계인 본능과 기타 욕구들은 우리의 본질인 생존과 생식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고 난 후 받는 보상이다. 이 보상 체계가 인간 행복의 가장 기본적인 동작 원리인 셈이다.

 

인간은 자신이 더 오래 살 수 있는 가능성 있는 일을 했거나, 자신의 몸이 후대를 남길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일을 했을 때 보상을 준다. 그래서 먹으면 행복하고, 사랑에 빠지면 행복하다.

 

그런데 세 번째 단계의 행복인, 판단과 만족은 앞이 두 개처럼 그렇게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임의대로 된다. 이것은 우리의 본능 위에 존재하는 이성과 지식의 힘으로 이뤄진다. 우리의 본능은 오늘 공부를 열심히 했을 때 그것이 행복을 위한 중요한 행동임을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공부하는 내내 지겹고 놀고 싶어진다.

 

그것을 이겨내고 하루 종일 공부를 열심히 하면, 이성적으로 판단과 만족이 생겨난다. 물론 이 역시도 스스로 내린 결정은 아니지만, 본질적 영역은 아니다. 더군다나 하루 종일 공부를 함으로써 생겨난 스트레스는 전체적인 행복감을 낮게 만든다.

 

즉, 공부하는 것이 즐거운 사람이 아닌 경우엔, 공부만 계속하고 살면 결국 불행해지고 만다. 그럼에도 우리가 참고 공부를 하는 것은, 그것이 언젠가는 끝날 것이며 미래의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불행의 냄새는 당장은 끌린다. 이것은 불쾌한 냄새가 아닌, 마치 향기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이것은 마약과 같다. 당장 비교 행복을 얻어낼 수 있지만, 결코 우리 자신이 바뀐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의 행복을 발견하게 되면, 금세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우리가 현재 불행의 냄새에 끌리는 것을 인식하고, 자신이 불행하다는 것을 성찰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세 번째 영역인, 판단과 만족의 행복을 조금이라도 다룰 수 있다.

 

물론 한계는 명확하다. 인간의 행복은 주로 두 번째 단계를 통해서 많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 번째 단계인 식욕, 성욕, 수면욕, 탐구심, 호기심 등은 사람마다 선천적으로 타고 난다. 그러니 가지고 싶다고 해서 가질 수 없다.

 

아마도 이것들 중에서 가장 쉽고 좋은 것은 바로 식욕일 것이다. 식욕이 강한 사람은 밥 먹을 돈만 있다면 매일 하루 세 번 행복의 순간을 경험한다.

 

식욕은 식탐과 다르다. 이것은 구분되어야 한다. 식욕은 맛있는 먹을 것을 먹고 배를 채우고 싶은 욕구이다. 배도 채우고 기분이 좋아진다. 하지만 식탐은 경쟁의 산물이다. 많이 먹어야 행복하다. 그것은 그 위에 존재하는 평가와 만족의 영역이다. 남보다 하나라도 더 먹었다는 판단이 만족을 가져온다.

 

우리는 많이 먹거나 비싼 것을 먹고 난 후, 그것을 판단하고 만족하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이것은 과식과 소화불량으로 인해 기분도 나쁘고 건강도 상하며, 비싼 것을 먹어서 돈을 많이 쓰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불필요한 욕망의 예가 된다. 그래서 먹을 것을 맛있게 배를 채우는 것으로 마무리 해야 한다. 그래야 두 번째 단계의 행복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

 

이런 예는 무수히 많다. 하지만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면 그저 많이 먹거나 비싼 것을 먹거나 희귀한 것을 먹어서 행복하다고 믿는다. 이것은 행복일 수도 있지만, 부작용이 심하다.

 

특히 돈의 중요성이 너무 높아져서, 돈이 행복을 위한 최고의 수단이 되어 버리는 결과가 만들어 진다. 물론 돈은 필요하다. 맛있고 배부르게 먹으려면 필요하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우리는 사회 속에서 살아오면서 너무도 많은 것들은 권리로 인식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자신의 삶을 판단하고 만족하게 만드는 것을 통해 행복할 수 있는 경험을 무척 줄이고 만다.

 

당연한 것은 행복할 수 없다. 감사할 수 있어야 행복할 수 있다. 권리라고 느끼는 것은 누리면 행복하지도 않을뿐더러, 누리지 못하면 불행해지고 만다.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에게 그 어떤 권리도 없음을 인정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 더 행복할 수 있는 잦은 기회를 맞을 수 있다.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감사할 줄 알면 된다. 그 대상이 꼭 신이 아니어도 좋다. 그냥 자신의 삶에 감사할 수 있다면, 삶의 수 많은 판단 기회 속에서 만족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불행의 냄새로부터 조금 자유로워 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행복을 타고나지 못한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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