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우리는 모두 어리석다

아이루다 2016. 9. 7. 10:07

 

일반적으로 어리석다는 말의 의미는 어떤 것에 손해를 본다는 뜻이다. 즉, 어리석은 사람일수록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것보다 손해를 보는 행동을 더 자주 한다. 혹은 이득과 손해를 헷갈리면서 실제로는 손해를 봐 놓고는 이득을 본 것이라고 믿기도 한다.

 

그런데 모든 인간은 어리석다. 이것은 어떤 상징적 표현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정말로 어리석다.

 

이것은 어리석은 사람들도 있고 똑똑한 사람들도 있다는 의미도 아니다. 우리는 단 한 명도 빼놓지 않고 어리석다.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 모두가 어리석다. 천재로 분류될 수 있는, 아이큐가 200이 넘어도 마찬가지다.

 

이 지구 상에서 가장 지적인 존재로 알려진 우리 인간이 어리석은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우리 인간은 오직 행복을 추구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왜 어리석은 것이냐고 묻는다면, 그 질문을 하는 것 자체 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어리석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임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어떤 문제를 풀어야 하는데, 그 문제 자체를 모를 때와 같다. 일단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풀 텐데 말이다. 우리는 문제가 있다는 것 자체도 모른다.

 

우리가 왜 어리석은지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리석지 않은, 즉 어떤 것을 똑똑하다고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한다.

 

뜬금없이 이런 표현을 떠올려보자. 똑똑함 감정과 어리석은 감정, 이 두 표현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감정이 어리석다는 표현은 가끔 듣는데, 감정이 똑똑하다는 표현은 거의 하질 않는다.

 

사실 정확히 하면 이 두 표현은 모두 잘못되었다. 감정은 원래 똑똑하거나 어리석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감정은 그저 느껴지는 것이다. 인간 사회에서 똑똑함과 어리석음의 개념은 감정이 아닌 이성적 사고에서 나타난다.

 

우리가 잘못된 판단을 하거나,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있거나, 무엇인가를 잘못 이해하고 있을 때 어리석다고 말한다. 우리가 제대로 된 판단을 하거나, 제대로 된 정보를 가지고 있거나, 무엇인가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 때 똑똑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것은 감정의 영역이 아니다. 온전히 이성적 영역이다. 우리는 감정의 능력으로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감정의 능력으로 무엇인가를 배우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감정의 능력으로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지식과 이성의 힘으로 해낸다.

 

미술가는 감정을 통해 영감을 떠올릴 수 있지만, 그것을 그려낼 때는 이성으로 배운 기술이 필요하다. 연필로 스케치를 하고 붓을 들어서 그림을 그리는 것은 감정의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이성적으로 배운 능력이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다.

 

일반적으로 감정은 행동의 원인이 되지만, 감정은 행동의 주체는 아니다. 우리는 감정으로 욕구를 느끼고 이성적 능력으로 그것을 충족한다.

 

그러니 그 결과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 이성적 능력으로 인해 달라진다. 똑같이 장미를 그리고 싶다는 감정을 느꼈다고 해서 전문적 화가와 일반인은 전혀 다른 두 개의 그림을 그린다. 똑같이 상대성 이론에 대해서 이해하고 싶다는 욕구를 느껴도 학자와 일반인 사이에서 그것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은 다르다.

 

즉, 우리가 누군가 똑똑하다는 판단을 했다면, 그것은 감정을 통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오직 이성적 능력을 통해서만 판단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리석은 감정이란 표현은 가끔 듣는다. 왜 그럴까?

 

우리는 어떨 경우엔 전혀 이성적으로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살다 보면 감정이 행동의 원인이 되면서 감정이 행동의 주체가 되는 일이 일어난다.

 

사랑하는 사람과 있고 싶어서 허락되지 않는 외박을 하거나, 너무 화가 나서 남을 패는 행위 등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이성적으로만 행동할 수는 없다. 우리는 가끔 감정적으로 행동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어떤 결과이냐에 따라 용기나 만용인가 혹은 필요한 행위였나 아니면 치명적 실수였나 가 결정된다.

 

실제로 감정적으로 행동하다가 보면 어리석은 결과가 나오기 쉽다. 화를 참지 못하고 남을 폭언이나 폭행하는 행위를 하고 나면 당연히 후회가 밀려오게 된다. 즉, 감정에 휘둘려서 어리석은 행동을 한 것이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에 빠져서 그 사람이 사기꾼임을 암시하는 많은 증거들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애써 부정하면서 결혼까지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후, 상대의 끝없는 거짓말에 지쳐서 결국엔 사랑하던 감정도 사라진 채, 자신의 과거의 어리석음에 대해 한탄을 하게 된다.

 

우리가 가능하다면 이성적으로 살려고 하는 이유가 바로 감정의 이런 치명적인 면 때문이다. 감정적으로 행동하면서 살다가는 어떤 실수를 하게 될지도 모르고, 어떤 손해를 입게 될지도 모른다. 감정은 우리를 살게도 해주지만 우리를 죽게도 한다.

 

이렇듯 감정은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다. 물론 패턴은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패턴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감정은 우리가 매일 접하는 수 많은 사건들에 의해서 끝없이 요동친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우리는 하루 동안에도 수 많은 감정의 굴곡을 겪는다. 화가 나고, 기분이 좋고, 상쾌하고, 우울하고, 걱정되고, 신난다.

 

감정이 변하는 이유들도 참 다양하다. 습도가 낮고 바람이 상쾌해서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고, 힘들게 산에 오른 정상에서 기분이 좋아지기도 한다. 그냥 길을 걷다가 쥐 시체를 봐서 기분이 상하기도 하고, 우산 없이 나갔다가 비를 쫄딱 맞고는 우울해지기도 한다.

 

이렇듯 감정은 외부의 변화에 의해서 혹은 그것을 판단하는 자신에 의해서 끝없이 변화된다. 그러니 감정의 목적은 반드시 자신의 이득으로 연결되지는 못한다. 사실 우리는 감정으로 인해 손해를 볼 일이 많다. 그래서 일을 할 때는 최대한 이성적으로 하려고 노력한다. 삶 자체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한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자신이 이성적으로 살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이성으로 감정을 제대로 제어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감정은 결코 제어되지 않는다. 이성이 감정을 조절할 수 있다는 말은 처음부터 착각이다. 우리는 이성적 능력을 통해 감정이 겉으로 드러나는 일만 겨우 막을 수 있다.

 

우리는 화가 날 때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우리는 기분이 좋을 때조차도 얼굴을 슬프게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정말로 화가 없어지거나 기분이 슬퍼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조절이 아니라 연극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거나 질투하는 경우, 그것이 자신에게 결코 도움이 될 지 않음을 알면서도 그것을 그만둘 수 없다. 하고 싶지 않아도 하게 되는 것, 감정이 가진 가장 큰 문제점이다.

 

누군가를 좋아하지 않고 싶어도 안되고, 그것을 하면 손해를 본다는 것을 명확히 알면서도 하고 싶어하고, 상대가 분명히 자신의 이득을 얻으려고 거짓말을 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모르는 척 한다.

 

사실 이것은 이성적으로 보면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매일 이런 짓을 한다. 그리고도 행복하게 한다.

 

이 배경엔 끝없는 자기 합리화가 숨겨져 있다. 자신이 그런 감정에 의해서 어리석은 짓을 한 것에는 이성적으로 설명할만한 합리적 근거가 있다고 스스로 믿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안다. 아무리 합리화를 해도 마음 깊은 곳엔 언제나 찜찜함이 있음을 말이다.

 

이것이 바로 감정의 특성이다.

 

감정의 이런 특징이 우리가 어리석은 것과 무슨 상관인가 싶겠다. 하지만 상관이 있다 못해서 아예 일치가 될 지경이다.

 

인간은 모두 행복을 추구한다. 그런데 행복은 감정으로만 발생한다. 이성적으로 행복할 수는 없다. 행복 그 자체가 바로 감정이다. 그런데 감정의 특징이 바로 종잡을 수 없는 어리석음이다. 물론 감정은 좋은 결과를 불러 오기도 한다. 하지만 좋지 않은 결과를 불러올 가능성이 더 높다.

 

우리가 돈을 벌기 위해서 그렇게 이성적으로 행동하려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감정은 손해를 불러 오기 때문이다. 즉, 어리석음이 손해를 보는 것에 대한 평가이므로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어리석다. 그런데 우리는 행복해야 하기 때문에 결국 감정적일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여행 중 기분이 좋기 위해서는 바가지 요금인 줄 알면서도 지불해야 한다. 이성적으로 그것을 따지는 순간 여행의 행복은 사라지고 만다. 돈은 절약했을지 모르지만, 여행 내내 불편하게 된다.

 

인간은 행복하게 사는 것이 최고의 목적이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행복을 뛰어 넘는 가치는 존재할 수 없다. 만약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착각을 하거나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요한 행복은 감정을 통해 느낀다. 즉, 인간의 본질은 이성이 아닌, 감정이다.

 

과거로부터 이성은 다양한 평가를 받아왔다. 어떤 철학자는 이성이야 말로 인간의 본질이라고 주장했고, 어떤 철학자는 이성은 감정의 노예라고 평가했다. 근래에 들어서는 이성과 감정은 마치 기찻길의 선로처럼 동등한 입장이라고 여겨지고 있다고 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이성은 분명히 중요한 요소이다. 우리는 이성이 있기에 놀고 싶은 감정을 참고 학교에 가서 배울 수 있다. 학문을 익히고, 기술을 익히고, 법을 지키는 법을 익히고,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하는 법을 익힌다. 이것들은 인간 사회에 속해서 살아가기 위해서 아주 필요한 능력들이다.

 

하지만 우리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행복을 느끼는 능력은 아니다. 행복은 오직 감정적으로만 느낄 수 있다. 만족감, 배신감, 충족감, 존재감, 자존감, 행복감, 좌절감 등등, 이런 말 끝에 '감' 자가 공통적으로 붙은 이유이기도 하다.

 

감정은 똑똑하다, 어리석다 의 판단 대상이 아니지만, 결국에 그 행동의 결과로 인해서 어리석다는 판단을 받을 수 있다. 설령 판단할 수는 없더라도 결론은 그렇게 날 수 있다.

 

그러니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행복해야 하기 때문에 결국엔 감정적으로 행동할 수 밖에 없으며, 그로 인해서 행복할 수는 있지만, 어리석어질 수 밖에 없다.

 

그러니 모든 인간이 어리석다는 말은 당연하다. 이것은 우리가 감정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는 한, 영원히 풀 수 없는 숙제이다.

 

아주 뛰어나다고 알려진 천재들도 이것을 피해나갈 수 없다. 물론 그들이 평생은 온전히 이성적으로만 살아갈 수 있다면 어리석지 않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경우 행복을 포기해야 한다. 사랑도 못하고, 결혼도 못하고, 사람들과 사귀지도 못한다. 관계 자체를 포기해야 한다.

 

영국 드리마 셜록에서 나오는 캐릭터의 성격이 바로 그런 모습이다. 하지만 그 조차도 아주 가끔 감정을 표현한다. 지루함도 일종의 감정이니까 말이다.

 

똑똑함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도구이지만, 그것 자체로 행복할 수는 없다. 똑똑한 능력이 돈을 더 잘 벌 수 있게 해주고, 그 돈을 써서 행복으로 바꿔야만 비로소 행복해진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분명히 실수가 일어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과정에서 어리석은 짓을 한다. 똑똑하다고 해서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랑하는 애인이 바람을 피우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것에 대처하는 태도는 똑똑함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심지어 그 똑똑함을 근거로 한 자존심이 크게 상처 받아서 더욱 더 심한 실수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것은 성격이나 성향에 관련된 문제일 뿐이다.

 

똑똑하다고 해서 감정을 더 잘 느꺼거나 하는 것도 아니다. 사실 행복하게 사는 것은 똑똑함과는 별로 관련 없는 내용이다. 그래서 지능 지수와 감성 지수라고 해서 IQ과 EQ로 따로 구분되기도 한다. 행복하게 살려면 지능 지수보다는 감성 지수가 높아야 한다.

 

어떤 면에서 똑똑함은 행복을 위한 큰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특히나 잘못된 믿음이나 신념을 갖게 되면 대책이 없다. 도대체 설득이 되질 않는다. 많은 것을 알기에 자신을 공격하는 모든 종류의 논리를 다 반박할 수 있다. 그러니 자신에게 문제가 있을 수 있음을 결코 인정할 수 없다.

 

영화 '굿 윌 헌팅' 에서 나온 천재 '윌' 이 그랬다. 머리가 좋기에 자신의 삐뚤어진 성격을 고치려는 사람들을 가지고 놀았다. 그러다가 진짜로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나서 변화된다. 이때 그를 변화 시킨 것은 이성적 지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을 이해해주고 공감해주는 바로 '감정' 의 힘이었다.

 

만약 인간이 온전히 이성적으로 행복할 있다면, 살기가 꽤나 쉬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이성은 적어도 우리 마음대로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쉽지 않다.

 

그래서 삶에 대해서 그렇게나 많은 답이 존재하는 것이다. 사실 인생의 답은 인간의 숫자만큼이다. 즉, 각자마다 고유한 답이 있다. 그것이 만약 이성적이라면 그리 많은 답이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실은 어리석다는 것을 왜 알아야 할까? 사실 몰라도 상관없고, 알아봐야 기분만 나쁠 수 있다. 그럼에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도 역시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스스로 어리석다는 것을 자각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리석다는 사실을 스스로 모를 만큼 어리석기 때문에 그것을 반드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자신에 대한 끝없는 기대치를 갖게 된다. 자신은 어리석지 않기 때문에 실수도 하지 않을 것이며, 실패도 하지 않을 것이며, 언제나 최고의 결과만을 받게 될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로또를 사면서 그 로또에 당첨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근거는 매주 당첨자가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거에 일어난 일들에 대한 후회로 인해서 밤잠을 설치기도 한다. 왜 그럴까? 그 근거에는 자신은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만큼 똑똑하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그래서 과거로 돌아가면 그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싶어한다. 물론 지금 상태로 돌아가면 하지 않을 것이다. 경험을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경험이 없는 과거로 돌아가면 결국 똑같이 어리석은 짓을 할 것이다.

 

똑같이 나쁜 남자와 결혼을 할 것이고, 똑같이 상대를 믿고 돈을 빌려 줄 것이다. 똑같이 로또를 살 것이며, 똑같이 결국 망할 회사에서 사장의 말만 믿고 1년 동안 월급도 받지 못하고 일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자각이 없기 때문에 발생한다. 우리가 과거에 그런 짓을 한 것은 실제로 우리가 어리석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인간은 원래 행복을 추구하고, 행복을 추구하다 보면 감정에 의해서 행동하고, 그래서 결국 어리석은 짓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한 것이다.

 

우리는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걱정을 하면서 밤잠을 설치기도 한다. 왜 그럴까? 그 근거 역시도 자신의 미래에 일어날 일들은 자신의 예상대로 제대로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지금 정신 차리고 제대로 하면 그 일이 반드시 이뤄질 수 있다고 믿고 싶어한다.

 

물론 노력하면 가능성은 높아진다. 하지만 미래의 일이 제대로 될 수 있느냐 없느냐에 있어서 개인적 노력이 미치는 범위는 매우 적다. 실제로 운이 훨씬 더 많이 작용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믿는다. 자신의 똑똑함과 노력과 열정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이 역시도 자신의 어리석음을 자각하지 못해서 일어난다. 후회를 하는 것이나 걱정을 하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자신의 어리석음을 스스로 이해하고 있지 못해서 그렇다. 물론 인간인 이상 후회나 걱정을 안 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해도 정도껏 해야 한다. 그것으로 인해서 불행해질 만큼 해서는 안 된다.

 

행복하기 위해서 한 일이 불행해지면 안 된다. 이성적인 관점에서 이것은 정말로 어리석은 짓이다. 행복하기 위해서 한 일이 실패했더라도 그것은 그저 행복을 얻지 못한 것으로 마무리 되어야 한다. 그것으로 인해서 본격적으로 불행해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어리석음을 자각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중요한 시험에 떨어진 것은 그 자체로 힘든 일이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실망하고 좌절해서 자살을 하게 되면 삶이 끝난다. 즉, 확대된 감정은 자살이라는 최악의 사건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우리는 자신이 100M를 10초에 달리지 못하는 것을 후회하거나 걱정하지 않는다. 원래 하지 못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하는 사람은 있지만, 우리는 못하는 일이다.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예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리석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처음부터 어리석게 태어났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은 어리석지 않다고 믿고 싶어한다. 근거는 옆에 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보다 자신이 더 똑똑해 보이니 그렇다고 믿는다. 개를 보고, 고양이를 보고, 토끼를 보고 그것의 확신을 갖는다.

 

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기엔 너무도 부족하다. 우리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전체 인류가 가진 지식을 모두 모아도 그 무식함은 끝이 없다. 우리가 아는 것은 모르는 것에 비해서 너무도 적다. 이 우주는 우리가 감당하기에 너무 광대하다.

 

그렇게 알지 못하기에 결국 어리석은 짓을 할 수 밖에 없다. 미래는 모두 그저 확률이다. 우리는 확률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해서 노력할 뿐,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내일 갑자기 길을 걷다가 차에 치여 죽을 수도 있다.

 

행복하고자 하지만, 그 행복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좋은 결과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행복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불행해진다. 자신이 행복할 만큼 능력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믿지 않았다면 행복하지 않고 끝이겠지만, 불행해지고 만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자각하고, 우리 모두가 어리석다는 것을 이해하고 나면, 세상을 살기가 조금 나아질 것이다. 그리고 그럴 수 있을 때 좀 더 감정적으로 행동할 수도 있다.


그것이 바로 용기일 것이고 도전일 것이다. 우리는 결코 이성적 판단으로는 용기를 낼 수 없다. 적의 숫자가 백만 명이고 우리편 숫자가 만 명일 때 어떻게 이성적으로 용기를 내겠는가?


그것이 바로 짝을 찾기 위한 용기이며, 자신의 미래를 위한 도전이 될 것이다. 이것이 어떤 면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의 의미가 아닐까? 거침없는 용기, 무모한 도전 말이다. 그것이 인간 최고의 어리석음에 대한 상징이라고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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