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두려움의 분노

아이루다 2016. 9. 12. 07:39

 

사람은 화를 내는 존재이다. 그리고 인간이 화를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마땅한 이득을 얻지 못했을 때, 불합리함을 느끼면서 화가 난다. 또한 무시를 당했을 때도, 기분이 몹시 상하면서 화가 난다. 그리고 마지막 이유가 바로 오늘의 주제가 될, 두려움을 느꼈을 때이다.

 

인간이 이득을 얻지 못해서 화가 나는 것은 정말로 자연스럽다. 우리는 끝없이 이득을 추구하는 존재이기에 손해는 기분 나쁜 일이고 그러니 당연히 화가 난다. 남의 손해를 봐도 그럴 때가 있다. 공공의 손해나 혹은 약자의 손해를 보면 정의감에 불타서 기분이 나빠진다. 당연하고 마땅한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것을 보면, 자신이나 혹은 타인의 처지에 대해서 모두 화가 난다. 물론 타인의 처지는 감정 이입일 뿐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했을 때 느끼는 분노는 이득의 경우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자연스럽지는 못하다. 이것은 에고, 즉 자신의 자아와 관련된 감정인데, 우리가 인간이기에 느끼는 감정이다.

 

개는 먹을 것을 뺏기면 으르렁댄다. 즉, 이득을 뺏기거나 얻지 못하면 화를 내는 것이다. 하지만 개는 사람에게나 다른 개에게 무시를 당한다고 해서 화를 내지는 않는다. 개에게는 자존심이 없기 때문에 무시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무시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상대의 문제라기 보다는 당사자의 문제이다. 즉, 같은 말을 듣거나 같은 행동을 당해도 누군가는 심하게 화를 내는 반면, 누군가는 웃고 만다. 즉, 자신의 처지와 환경 그리고 어떤 성격인지에 따라서 그 반응이 서로 다르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뺨을 맞거나 대 놓고 욕을 먹는 것을 무척 싫어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런 행위조차도 웃으면서 넘길 수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긴 한다.

 

그리고 분노에 대한 세 번째 이유, 즉 두려움으로 야기된 분노는 이 둘 사이를 오간다. 즉, 본질적인 원인으로 시작되지만, 그것이 인간이기에 분노로 변한다.

 

원래 두려움은 그냥 두려움으로 끝났어야 한다. 이것이 자연적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두려움을 느끼면 그때마다 에고가 상처를 받는다.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다.

 

인간은 많은 종류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모든 감정 중에서 가장 근원적 감정을 꼽으라면, 이것이 바로 그것이 두려움이다.

 

간단히 설명해서, 즐거움은 두려움의 부재 상태이고, 행복은 두려움으로부터 최대한 멀어진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왜 두려움이 모든 감정의 근원인지를 이해하려면, 우리 인간 이외의 모든 생명체가 도대체 어떤 감정을 느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된다. 하등 동물로 갈수록 감정 자체가 없어지긴 하는데, 공통적으로 남아 있는 한 가지 감정이 바로 두려움이다.

 

거의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이 두려움을 느낀다. 곤충에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두려움을 느낀 존재들은 각자 나름대로 행동을 한다. 어떤 벌레들은 몸을 둥글게 말기도 하고, 어떤 벌레들은 죽은 척하기도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동물들은 도망친다. 인간도 원래는 도망을 치는 존재였다. 하지만 우리는 뭔가 달라졌다.

 

인간이 뭔가 달라진 원인은 바로 우리가 만들어 낸 안전한 문명이란 울타리이다. 그래서 원래는 두려움을 느끼고 끝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추가적으로 다른 감정들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앞에 덩치가 큰 사람이 손에 커다란 야구 방망이를 든 채, 그것을 휘두르는 사람이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 자체에 어떤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그것은 폭력에 대한 두려움일 수도 있고, 상대가 실수를 해서 방망이로 자신을 칠 수 있다는 가정해서 두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경우에 도망치지 않는다. 개는 도망칠지 모르지만, 인간은 앞에서 방망이를 휘두르는 덩치 큰 사람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그 사람은 그저 야구를 하러 가는 사람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그래서 속으로 두려움을 느끼더라도 도망치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 사람이 우리를 야구 방망이로 내려 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문명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기에 그렇다.

 

물론 만에 하나 그 사람이 그 방망이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큰 부상을 입거나 혹은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역시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특히나 대로변에서 그랬다면 목격자들도 많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이 확실하다. 아무리 힘 쎈 사람도 경찰을 이길 수는 없다.

 

그러니 우리는 눈 앞에 있는 사람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우리들에게 야구 방망이를 휘두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이해하는 것과 두려움은 별개로 동작된다. 즉, 아무리 상황을 이해해도 두렵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니 얼굴이 굳고 몸이 위축된다. 그리고 그 모습은 표정이나 태도를 통해 은연 중에 드러난다. 우리는 감정을 숨긴다고 숨기지만, 두려움을 느끼는 순간 그것은 결코 숨겨지지 않는다. 말투도 어눌해지고 행동도 이상해진다.

 

이것은 우리 뇌의 작용이기도 한데, 우리는 원초적인 감정을 느낄수록 점점 뇌의 본능적 영역으로 피가 몰린다. 즉,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뇌 영역들은 거의 중지되고, 인간의 생존을 관장하는 뇌의 영역으로 피가 몰려서 말도 횡설수설할 수도 있고 그 행동도 이상해지는 것이다.

 

우리가 두려움을 느끼는 순간, 몸은 그 두려움에 대해서 최대한 반응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여기까지는 그리 이상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존재로써는 당연한 것이다.

 

진짜 문제는 이후 생겨난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느낀 두려움에 대한 부끄러움이다. 특히나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두려움을 느꼈다면, 이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된다. 그래서 두려움의 다른 이유, 무시를 당한 경우와 비슷해진다.

 

상대는 그저 위압적인 덩치로 야구 방망이를 휘두르면서 지나갔음에도 우리는 무시를 당한 상태와 비슷해지는 것이다. 사실 상대는 우리를 비웃을 생각을 전혀 한 것도 아니고, 그저 자신이 평소 즐기는 야구 방망이를 쥐고는 운동을 하러 건 것에 불과할지도 모르는데,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두려움을 느끼고, 자신이 두려움을 느꼈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나마 이것이 부끄러움으로 끝나면 다행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으로 인해서 화가 난다. 자신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두려움을 느끼고, 그것으로 인해서 부끄러움을 느꼈다는 것 자체로 인해서 분노가 치민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결코 자연스러운 감정이 아니다. 이것은 머리 속에서 일어난 이차적 감정이다. 즉, 일종의 확대 해석인 셈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왜 이런 분노를 느껴야 하는지,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왜 이런 두려움을 느껴야 하는지에 대한 불합리성을 성토하게 된다.

 

인권을 가진 한 명의 인간으로 자라서, 분명히 법이 지배하는 문명 사회에 살고 있는데, 아무런 잘못한 것도 없이 단지 자신보다 덩치가 더 크고 위압적인 사람이란 이유로 두려움을 느껴야 한다는 것은 분명히 어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여기까지는 겉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자신의 두려움이 그다지 근거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가 야구 방망이를 들고 다니는 것이라면 조금 문제가 다르다. 왜 사람들을 겁나게 야구 방망이를 들고 다니는지 따지고 싶어 지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 방망이를 휘두르면서 다녔다면, 이것은 아예 다른 문제가 된다.

 

이것은 예비 폭력 행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이 두려움을 느꼈다고 생각한다. 즉, 자신의 두려움에 어떤 마땅한 근거가 있다고 믿고 싶어한다. 길 거리에서 흔하지 않게 야구 방망이를 휘두르고 다니는 것은 일종의 불법 행위라고 생각되기까지 한다.

 

하지만 야구 방망이를 든 사람을 어린 아이로 바꿔보자. 야구를 하고 싶은 아이가 자기 키만한 야구 방망이를 들고 가고 있다면, 그것은 귀여울 수도 있다. 아이가 서투르게 그것을 휘두르고 있다면, 조심하라고 한 마디 해줄 수 있다.

 

그리고 끝이다. 그런데 덩치 크고 인상이 사나운 사람이 똑같은 짓을 했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행위가 된다.

 

물론 이런 감정 변화가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니다. 우리가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힘센 사람이 휘두르는 방망이는 사람을 죽일 수 있다. 그러니 정말로 조심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아이와는 다르다.

 

그래서 두려움이 생기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고 정상적이다. 문제는 이것이 부끄럼으로 바뀌고 그리고 분노로 바뀌고 나서, 이후 무한 확장되는 부분에서 발생된다.

 

우리는 두려움을 없애고 싶기에 덩치가 큰 사람은 야구 방망이를 들고 거리를 걷지 못하도록 하는 법안을 만들어야 한다고 느끼게 된다. 그리고 어디부터가 덩치가 큰 범위인지를 가지고 싸우게 된다.

 

남자들은 잘 못 느끼지만, 여자들은 밤 거리를 걸을 때 언제나 두려움을 느낀다. 그리고 그 사실에 대해서 화가 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남자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생각하는 경향도 있다. 그런데 이럴 때 다수의 선량한 남자들은 억울해서 화가 난다.

 

그러다 보니 서로의 입장을 두고 갈등이 일어난다. 그리고 두려움을 느낀 쪽은 두려움을 제공한 대상에 대해서 아주 깊은 분노와 적개심을 가질 수도 있다. 심한 경우, 처단해야 할 상대라고 느끼기도 한다. 이 세상에서 필요 없는, 그래서 다 없어져야 할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극단적인 상황이 벌어지게 되면 갈등은 극에 달한다. 두려움에서 시작된 감정이, 자신이 두려움을 느낀 원인을 없애 버리는 것이 정당하고 옳은 것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것까지 확대된다.

 

설령 이렇게 극단적이지는 않아도, 아주 뿌리깊은 증오와 적개심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결코 다가갈 수 없는, 그래서 절대로 풀어지지 않는 갈등을 만들어 내게 된다. 그리고 그럴수록 서로의 관계는 심각하게 일그러진다.

 

이 모든 것의 원인은 생명체로써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데, 그 두려움을 느끼는 것으로 인해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는 것, 이것이 문제의 시작점이다.

 

인간이 이상 우리는 누군가에게 지고 싶지 않다. 우리의 승리에 대한 욕구는 본능적이다. 이기는 자가 생존 가능성이 높기에 당연하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 인간 사회에서는 이제는 거의 퇴출된 육체적 우월성에 의해서 그런 것이라면 훨씬 패배를 받아들이기 정말로 힘들다. 아니 이 부분에서는 아예 경쟁이 없다고 믿고 싶어한다.

 

즉, 우리 사회는 너무도 문명화 되어서 육체적으로 강하고 약하고 하는 것은 아예 무시되어야 할 것이라고 믿고 싶어한다. 그런데도 강한 육체를 가진 사람을 보면 두려움을 느낀다. 이 두 가지 상반된 생각과 현상이 결국 충돌을 일으킨다. 그래서 두려움은 분노로 바뀐다.

 

현재 인간의 문명 사회는 육체적 능력보다는 지적 능력에 의해서 우월함이 결정되는 사회이다.

 

그렇다면 지적 능력에 의한 우월성은 당연한 것일까?

 

즉, 육체적으로 우월성을 가진 것은 비 합리적인 것이고, 지적 능력으로 우월성을 가지는 것은 인간다운 것일까? 이것에 대한 명확한 답을 내긴 힘들다. 하지만 적어도 이 둘이 그렇게 서로 다른 취급을 받는 것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우리가 지적 능력을 더 우선시 하는 이유는, 요즘 시대에는 지적으로 뛰어날 수록 더욱 더 쉽게 돈을 버는 것 이외에 더 다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과거엔 힘이 중요했고 지금은 머리가 중요한 것 차이일 뿐이다. 사실 이것은 문명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단지 육체적 대결은 피가 튀고 뼈가 부러지는 상처를 입힐 수 있으며 심지어 목숨까지 끊을 수 있기에 이것을 법적으로 막는 것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육체적 폭행과 언어의 폭행이 사실은 크게 다르지 않음을 말이다.

 

우리는 지적으로 부족할 때도 엄청난 열등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자살할 수도 있다. 그리고 자살은 안 하더라도 평생 손해를 입고 고생하면서 불행하게 산다.

 

말로 했거나 직접 손으로 때리지 않았으니, 이것은 폭력이 아닌 것인가? 자신이 머리가 좋아서 다른 사람들의 이득을 뺏고, 훨씬 더 많은 돈을 벌고, 훨씬 더 행복하게 사는 건은 그렇게나 당연한 권리인 것인가?

 

그렇게 따지면 과거 힘센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차지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었어야 옳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원시 사회라고 비웃는다. 문명 사회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인간의 능력은 무조건 차등이 존재한다. 그래서 이 세상이 이렇게나 다양하고 조화롭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같은 능력을 가졌다면 과연 누가 정치를 하고 과연 누가 청소를 할까? 서로 다른 능력과 서로 다른 처지에 있기에 그 모든 것이 각자 위치에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갖지 못한 능력으로 인해서 두려움을 느낀 것에 대해서 왜 그렇게 심하게 분노를 하게 될까? 자신이 가진 것들은 당연한 것이고,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은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되고 말까?

 

뭐, 여기까지는 어쩔 수 없다고 치자. 우리가 두려움을 느끼고, 수치심을 느끼고, 화가 나는 것 자체는 이제 너무 일반적이기 때문에 감당할 수 밖에 없을 수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려 보자. 우리가 높은 곳에 올라가서 두려움을 느끼거나 물을 두려워 하거나 뱀을 무서워 할때 그것들로 인해 화가 나지는 않고 그것을 비판하지도 않는다. 사실 해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고 효과도 없다. 물을 보고 화를 내고, 높은 곳을 비판하고, 뱀을 설득해봐야 해결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가 어떤 두려움을 느꼈을 때, 그것으로 인해 수치심을 느끼고 분노로 변해가는 것은 오직 인간만이 그 대상이 된다. 인가은 화를 내고 비판하면 바뀔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덩치 큰 사람의 덩치가 줄고, 밤에 사람들이 걸어다니지 않을 수는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쁜 놈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만 수치심을 느끼고 분노하며 비판하는 이유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 의해서만 오직 자존심의 상처를 받기 때문이다. 물이나 높은 곳 그리고 뱀은 자존심과 관련이 없다. 물론 인간 이외의 대상에 대해서도 수치심을 느낄 때가 있는데, 그 역시도 옆에 있는 다른 인간들이 겁쟁이라고 놀려서 그렇다.

 

그래서 이것은 희망이 있다. 즉, 두려움은 어쩔 수 없지만, 그 후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감정들을 다뤄 볼 수 있다.

 

우리가 이것을 다뤄야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두려움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수치심과 분노는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나름대로 해결하려고 아무리 논리적 당위성을 가져봐야 그저 자기 합리화나 자기 위안이 될 뿐이다. 그래서 기분이 나쁜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아무리 화를 내고 비판을 해도 그 두려움의 대상은 결코 사라지지 않음을 상기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두려움에 대해서 좀 더 깊은 성찰을 해야 한다. 특히 두려움으로부터 야기된 많은 복합적 감정들이 결코 자연스럽지도 않고, 정당하지도 않음을 스스로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높은 곳이나 깊은 물을 비판한다고 해서 그것은 없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덩치 크 사람을 비판하거나 밤 거리에서 뒤에 걸어오는 사람을 비판한다고 해서 있다고 해서 그것이 없어지지 않는다.

 

두려움은 비판한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는다. 두려움은 그것을 증오한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는다. 두려움은 부정하거나 법적으로 처벌을 할 수 있다고 해도 없어지지 않는다. 두려움은 오직 당사자만이 해결 가능하다.

 

두려움을 느끼고 그것으로부터 파생되는 다양한 감정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 이다.

 

첫 번째 방법은 물이 두려우면 물 근처를 가지 않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자신이 물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인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즉, 우리가 어떤 대상을 대처하는 노력을 하기 위해서는 그 자체를 우선 인정해야 한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에 대한 대처를 하는 노력을 할 필요가 없다. 적국이 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그에 합당한 군사적 대처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상대를 무시하면 준비를 하긴 힘들다.

 

덩치가 큰 사람에게 위압감에 의한 두려움을 느끼고 화가 나지만, 언제라도 발사 할 수 있는 총을 가진 사람이 머리를 겨누고 있을 때 우리는 오직 두려움만을 느낀다. 물론 자신도 모르게 오줌을 싸서 부끄러움을 느낄 수도 있지만, 당장이라도 방아쇠를 당길 듯한 상황에 그럴 감정적 여력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이미 앞에 몇 사람이 죽었다면 더욱 더 심할 것이다.

 

이 상황은 우리가 두려움의 확대가 가진 문제점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단서가 된다.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는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분노한다. 우리는 상대가 정말로 우리를 죽이려고 할 때는 그저 두려움에 벌벌 떨 뿐이다.

 

그래서 어떤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원래 겁쟁이이다. 우리는 겁이 많았기에 살아 남았다.

 

그리고 우리는 실제로 약한 존재이다. 우리는 물에 빠져서 죽고,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죽는다. 우리는 자신보다 더 힘센 사람과 싸우면 죽을 정도로 맞을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이 두려움을 가지고 있음을 받아들이면 그 두려움을 느끼는 자신에 대해서 좀 더 관대해질 수 있다. 그리고 이 관대함이 두려움을 느끼는 자신에 대한 불필요한 비판을 막는 열쇠가 될 수 있다.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니, 두려움이 들 때마다 그것을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부끄러움이나 화를 느끼고 더해서 그것을 사회 문제로 확대하는 것을 막는 것이다. 아무리 해봐야 두려움의 대상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결국 헛수고가 될 뿐이다.

 

두 번째 방법은 물이 두렵다면 수영을 배우는 것이다.

 

물론 이 방법 역시도 앞의 방법과 같이 두려움을 느끼는 것 자체를 인정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육체적 두려움을 느꼈다면 운동을 해서 더 강한 몸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꽤나 힘들고 비용도 많이 들며, 시간도 써야 한다. 그 과정 또한 고통스럽다.

 

그러니 우리들 대부분은 그냥 첫 번째 방법, 즉 두려움을 인정하고 최대한 피하는 방법을 써야 한다. 혹은 과감하게 그 두려움의 실체를 향해 가보는 것도 괜찮다. 그저 경험이 없어서 두려운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이 느낀 분노가 두려움으로부터 출발했다는 것 자체를 인식하거나 인정하기 힘들다. 이미 그 분노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합리화가 끝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분노의 원인은 언제나 자신이 아닌, 남이다.


이것이 우리가 두려움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멀어질 수 있는 기회를 날리는 가장 큰 이유이다. 자신의 분노가 두려움이며, 이것은 어쩔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될 때, 두려움으로부터 조금이라도 자유로워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자신의 분노를, 증오를, 경멸을 합리화 하는데만 노력하고 있다.


문제의 원인을 인정 못하는 한, 그 문제는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과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행의 냄새  (0) 2016.09.23
찌그러진 사람들  (0) 2016.09.19
우리는 모두 어리석다  (0) 2016.09.07
돈에 관한 해묵은 논쟁  (0) 2016.09.05
자아의 완성  (0) 2016.0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