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위로 중독증

아이루다 2016. 10. 22. 07:32

 

사람이 살다가 보면 힘든 날이 있다. 아무리 잘났든, 아무리 돈이 많든, 아무리 유명하든, 아무리 대단한 일을 했든 마찬가지다. 힘든 날이 없는 사람은 존재할 수 없다. 혹시나 운 좋게도 평생을 힘들지 않게 살아도 죽을 때는 힘들다.

 

그래서 우리는 위로가 필요하다. 위로는 힘들 때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이다. 보통 위로는 타인에게서 받는다. 혹은 우리가 누군가에게 하는 것이다.
 

위로의 좋은 점은 자신이 당한 여러 가지 억울한 일, 기분 나쁜 일, 판단하기 애매하지만 속상한 일 등등을 털어 놓고 그것에 대해서 제 삼자에게 객관적으로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것이 객관적이라고 여기는 것은 착각이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문제점을 털어 놓을 때는 두 가지 오류가 발생한다. 하나는 우리는 결코 사실 그대로 털어 놓지 않는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듣는 사람들 대부분 우리의 입장으로 기울어진, 사실상 편파적이란 점이다.

 

그런데 이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판단을 해달라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판단을 앞 세웠지만, 사실은 위로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판단이란 형식을 제외 시킬 수는 없다. 그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성을 설득시킬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알았기 때문에 어린 시절처럼 무엇인가를 보고 놀라서 울면, 엄마가 그것을 두고 '땟찌'를 해줌으로써 울음을 멈출 수가 없다. 우리는 합리적으로 판단을 해서 위로를 받아야 그것이 통한다.

 

물론 제대로 된 합리도 아니고, 제대로 된 이성도 아니지만 말이다.

 

아무튼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그저 위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남들에게 위로를 받게 되면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대부분 중독이 된다.

 

즉, 위로 중독 현상이 일어난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 줄 때가 가끔 있다. 그런데 들을 때마다 고민의 내용이 달라진 것이 별로 없다. 매번 반복적인 고민이 나온다. 물론 그 고민을 하게 된 시작점은 다르다. 오늘은 화가 나서, 오늘은 기분이 나빠서, 오늘은 서러워서, 오늘은 외로워서 그런다.

 

그렇지만 이야기를 들으면 늘 같은 맥락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당연하다. 그 사람에게 어떤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 문제점으로 인해서 여러 가지 사건이 자꾸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니 해결책은 바로 그 문제점을 어떤 식으로든 봉합해 놔야 한다.

 

사람에게 자꾸 상처를 입는 사람이 지속적으로 사람들과 관계를 유지하려고 한다. 이럴 경우, 이 사람은 끝없이 관계에 대해서 고민을 하게 된다. 당연하다. 관계를 맺을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자존감이 부족한 사람이, 너무 쉽게 질투를 느끼는 사람이, 너무 욕심이 많이 사람이, 딱히 사람을 끄는 매력도 없는 사람이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하면 힘들다.

 

관계를 잘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당히 손해도 볼 줄 알고, 스스로 자신감도 있어야 하며, 사람들을 끄는 매력도 필요하다.

 

그런데 이것을 하지도 못하고, 갖지도 못한 사람이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면 여기에서 문제점이 생겨난다. 이런 경우엔, 어떤 식으로든 혼자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설령 불행하더라도 말이다.

 

그럼에도 끝없이 상처를 입고 와서는 끝없이 위로를 기대한다. 하지만 사람들의 위로도 한계가 있다. 처음엔 잘 들어주고 위로도 잘 해준다. 그런데 매번 같은 일로 상처를 반복해서 받고 와서 그것을 이야기 하면 사람들은 점점 귀찮아 하게 된다. 그러면 위로가 아닌 또 다른 상처의 원인이 되고 만다.

 

그럴 때 한가지 묘수가 있다. 그것은 바로 듣는 것이다. 혹은 보는 것이다. 즉, 위로를 주는 책을 읽고, 강연을 보는 것이다. 거기엔 꾸짖는 것도 있고 달래주는 것도 있다. 말 그대로 어르고 달래는 것이다.

 

이것은 또 다른 위로를 준다. 그래서 이것을 공식적으로 힐링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조금 더 발전한 사람들은 이젠 자전적 위로를 한다. 글을 좀 쓸 줄 아는 사람들은 각종 게시판에 위로가 아닌 듯 위로를 바라는 글들을 적는다. 자신의 하루를 담담하게 기록한다. 어떤 것을 느꼈고, 어떤 감정 상태인지를 축약된 언어로 기록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것을 위로한다. 사실 댓글의 위로는 상대적으로 편하다. 왜냐하면 그리 긴 글도 아니고, 반응에 대한 선택도 어느 정도 자유롭기 때문이다.

 

사람을 직접 만나서 듣고 위로를 해 줄 때는 오래 들어야 하고, 오래 위로를 해야 한다. 하지만 온라인 상에서의 위로는 언제라도 쉽게 볼 수 있고 그것에 대한 반응도 1분도 채 들지 않는다.

 

이 편리함으로 인해서 온라인 위로는 매일 매 순간 반복된다. 크지는 않지만, 매일 조금씩 이뤄진다. 좋은 말로 그렇고, 정확히 말하면 중독이 되어 버린다.

 

사람을 직접 만나서 받는 위로는 중독이 되어도 한계가 있다. 들어주는 사람들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을 위해서는 가끔 들어주기도 해야 한다. 별로 관심도 없는 얘기를 들으면서 맞장구도 쳐줘야 한다.

 

하지만 책을 사거나 강연을 듣는 위로는 돈만 있으면 된다. 그리고 그런 위로를 받게 되면 그 책을 쓴 사람이나 강연을 한 사람과 자신을 동급에 놀 수 있는 에고 충족도 경험한다. 즉, 나는 누구의 책을 읽은 사람이고, 나는 누구의 강연을 들은 사람이 된다.

 

이래서 멈출 수가 없다. 아니 멈출 수는 있다. 그런 위로가 사실상 어떤 문제 해결도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날 멈춘다.

 

글을 써서 얻는 위로는 세 가지 중에서 가장 오래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이미 에고 충족에 크게 도움이 되고 있고, 잘 쓸수록 점점 더 많은 관심을 받을 수 있으며, 그 글 자체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위로가 되기 때문에 긍정적 영향도 있다.

 

즉, 자기 위로의 글을 썼는데 다른 사람들도 위로가 된다. 이것을 수필이라고도 한다.

 

이미 말했듯이 우리는 우리가 힘든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큰 도움을 주는 좋은 일이다. 우리는 위로를 받고 위로를 하면서 서로 의지한다. 이것은 정말로 중요하다. 견디기 힘든 일을 당했을 때, 다른 사람들의 위로는 정말로 중요하다. 혼자서는 견뎌내지 못할 일을 다른 사람들의 위로의 힘으로 견뎌낼 수 있다. 그렇게 그 순간만 넘기면 된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또 다른 기회가 있다.

 

그런데 이렇게나 좋은 위로가 중독이 되면 문제가 생긴다.

 

몸에 쇼크가 올 정도로 아픈 사람에게는 마약을 투여한다. 마약은 그럴 때 가장 좋은 의약품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약이 몸을 치료하는 효과는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고통을 감소시켜준다는 면에서 좋다. 그런데 크게 아프지도 않은데 자꾸 마약을 투여하면 그것을 중독이라고 부른다.

 

위로는 이런 마약과 같다. 위로 역시도 크게 힘들 때는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렇게 크게 힘들지도 않은데 자꾸 그것에 기대게 되면,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사라진다. 팔이 부러졌으면 기브스를 하고 한 달 고생을 해야 한다. 그런데 마약을 먹고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으로 버티면 결국 문제가 커진다.

 

위로는 정신적 상처를 위한 마약이다. 큰 상처에는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작은 상처들까지도 모두 위로를 통해 해결하려고 하면 결국 그 자신은 아무것도 변할 수 없다.

 

위로 중독증이 더 나은 삶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을 망친다.

 

어떤 면에서 글을 쓰는 사람이 가장 조심해야 할 일이다.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자기 위로 행위이다. 특히나 감성적인 글을 자주 쓰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끝없이 자기 위로를 하게 된다. 더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서 반응을 보여주면 자신도 모르게 점점 중독이 되어간다.

 

그리고 거기에서 벗어나오기가 힘들다.

 

너무 자주 책을 사거나, 너무 자주 감정적 흔들림을 느끼고 그것을 글로 표현하려고 한다면 스스로 위로 중독증이 아닌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