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관계로부터 받는 상처 극복하기

아이루다 2016. 8. 19. 08:50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게 되어 있다. 이것은 선택 사항이 될 수 없다. 인간이 다른 사람과 그 어떤 관계도 맺지 못한 채 살아가게 되면, 그 존재를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을 지경이 되고 만다.

 

사람에게 있어서 관계는 정말로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인간의 삶은 관계에서 시작해서 관계에서 끝난다. 그만큼이나 관계는 중요하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관계가 어느 순간엔 우리들에게 칼날처럼 다가온다. 그래서 우리는 관계로부터 상처를 입고 두려움까지도 느낀다.

 

사실 사람들이 하는 대부분의 고민이 바로 이 관계 맺기에 대한 것들로 채워져 있다. 부부간의 관계,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 시댁이나 처가와의 관계, 친구와의 관계, 상사나 동료와의 관계, 옆집과의 관계, 친인척과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형태의 갈등이 바로 고민의 주제가 된다.

 

이런 고민을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잘하고 싶은데, 잘되지 않거나 심지어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에 그렇다.

 

많은 사람들은 비록 관계 속에서 상처를 받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 선에서 잘 살아간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도저히 감당하지 못하다가 결국 관계를 맺는 것을 그만 두기도 한다.

 

결국 상처를 견뎌내지 못해서 그렇다. 그런데 우리는 관계 속에서 왜 상처를 받게 될까?

 

그 답은 알면 허무할 만큼 단순하다. 기본적으로 이득을 얻지 못해서 그렇다. 그리고 또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인간의 순수성에 대해서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이득 부분만 보자. 이득을 얻지 못해서 그렇다는 설명을 하면, 자신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이득을 추구하는 성격이 아니라고 반박하려고 할 것이다. 그럼 말을 바꾸자. 손해를 못 참아서 그렇다. 부정하고 싶을지 모르겠지만, 이득을 얻지 못하는 것과 손해를 보는 것은 사실 같은 말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만의 이득과 손해에 대한 한계점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는 다른 사람들보다 하나라도 더 얻어야 만족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다른 사람보다 하나 정도는 손해 봐도 되는 사람들이 있다. 둘은 달라 보이지만, 사실 그 한계가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이 둘 모두 남을 위해서 자신의 하나뿐인 심장을 내어 줄 수는 없다. 이것이 명백한 한계이다.

 

어떤 사람들은 참 착하다. 그래서 남을 위해서 자주 손해를 본다. 그러면 주위에서 자신을 좋아해준다. 누가 싫어하겠는가? 누군가의 손해는 누군가의 이득이다. 또한 누군가의 이득은 누군가의 손해이다.

 

그러니 언제나 이득을 추구하는 우리는 상대적으로 손해를 잘 감수하는 사람을 선호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착한 사람' 이라고 칭한다. 반면에 자신의 이득만 추구하는 사람은 싫어한다. 그런 사람은 '나쁜 사람' 이라고 칭한다. 그들은 나한테 손해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나의 이득과 손해에 따른 주관적 분류이다.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이란 것은 오직 그것으로만 분류될 뿐이다. 그래서 사람마다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이 다르게 평가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여기에서 분명히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이득과 손해의 개념이다. 착한 사람은 분명히 손해를 보는 것을 잘 허용한다. 하지만 사실 이들 역시도 이득을 추구한다. 단지 다른 종류의 이득을 추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물질적 이득만을 이득으로 정의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 존재이다. 그래서 정신적 이득도 물질적 이득 못지않게 중요하다. 즉, 아무리 맛있는 밥상 앞에 있어도 마음이 편하지 않으면 먹다가 체하게 된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물질적 가치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정신적 가치도 필요하다. 그러니 정신적 이득은 물질적 이득과 다를 것이 없다. 어떤 이득이든 결국 행복을 위해서 추구하고 있다는 점만 이해한다면 이해하기 그리 어려운 개념이 아니다.

 

착한 사람들은 주로 정신적 이득을 추구하는 편이다. 물질적 이득을 조금 포기하면 정신적 이득을 얻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왜냐하면 보통 사람들은 정신적 이득보다는 물질적 이득을 통해서 더 행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식의 교환은 아주 쉽게 일어난다. 그래서 선물을 주면 거의 대부분 고맙다는 말을 듣는다.

 

여기까지 정리하면, 착한 사람은 정신적 이득을 얻는 것을 통해서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정신적 이득이란 것은 사실 정확히 보장된 것이 아니다. 즉, 사람들이 반드시 그것을 내 놓는 것이 아니란 뜻이다. 그래서 결국 상처를 받게 된다.

 

물질적 교환은 명백하다. 줬는데 안주면 그 관계를 끊어 버리면 된다. 하지만 물질과 정신의 교환은 명백할 수 없다. 입으로는 고맙다고 하는데, 정말로 고마운지 알 방법이 없다. 말로 때우는 것은 참 쉽기 때문이다.

 

즉, 정신적 이득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결국엔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인다. 그러다가 결국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원하는 이득을 얻지 못한다고 느껴서 상처를 받는 것이다. 단지 그것이 물질적 이득이 아니기에 스스로는 자신은 관계에서 이득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는 착각을 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 착각으로 인해서 자신은 순수한 관계를 추구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상대가 돈을 써서 나를 즐겁게 한 것이 아니니,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순수한 관계라고 믿는 것이다.

 

이 착각이 상처를 입히는 두 번째 원인이 된다.

 

우리는 사람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당연히 관계에 대한 환상도 가지고 있다. 소위 말해서 '진실한 사람' 이나 '진실한 관계' 에 대한 환상이다. 이것은 진실한 사랑에 대한 환상으로도 이어진다.

 

하지만 그 어떤 인간 관계에서도 우리가 믿고 싶어하는 진실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 보이긴 하지만, 그렇게 보일 뿐이다.

 

이것은 어린 시절에 읽었던 만화 동화책 속의 동물들과 같다. 그 그림 속에서 동물들은 참 행복해 보이고 착하다. 사자든 곰이든 기린이든 악어든 다 그렇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동물들을 만나면 우리는 두려움과 공포를 느낄 수 밖에 없다.

 

이것은 또한 해변에 세워진 멋진 식당에서 와인 한잔과 스테이크를 먹는 것과 같다. 아주 예쁜 드레스를 입고 잘 차려 입은 남자 친구와 함께 하면서 넓은 창으로 지는 해를 바라보는 그 환상적인 낭만 말이다.

 

그 장면만 봤을 때는 인생은 참으로 아름답고 행복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느낄 수 있는 것에는 몇 가지 중요한 망각이 숨겨져 있다.

 

일단 그 마시고 있는 와인엔 포도 값이 폭락해서 자살한 어느 농부의 삶이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먹고 있는 스테이크엔 도살장에서 죽임을 당한 이름 모를 소의 고통이 들어 있다. 멋지게 차려 입은 드레스 속에는 그것을 만들기 위해서 밤낮으로 미싱을 돌리던 어떤 견습 직원의 피눈물이 들어 있을 수도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 장소에서 그들에게 서빙을 보고, 음식을 요리하는 사람들의 힘든 노력도 존재한다. 물론 우리는 돈을 지불했기에 그에 정당한 권리가 있다고 믿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 돈이 정말로 정당하게 지불되었는지는 알 방법이 없다. 그리고 알아봐야 기분만 상할 뿐이다. 그러니 낭만을 위해서는 망각하는 것이 최고이다.

 

인간이 그렇다. 우리는 언뜻 보기엔 참 대단해 보이고 뭔가 있어 보이지만, 사실 우리는 그저 매일 끝없이 이득을 추구하면서 매일 늙어가다가 결국 죽는 존재일 뿐이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매일 상기하면서 삶의 가치를 무시할 필요는 없다. 단지 우리가 살아가면서 맺게 되는 수 많은 관계 속에서 그것을 완전히 망각해서는 안 된다.

 

즉, 인간이란 존재가 그렇기에, 우리가 맺는 모든 관계 역시도 그렇다. 그러니 인간에게 있어서 순수한 관계는 존재할 수 없다. 모든 관계는 이득을 기반으로 한다.

 

그나마 가장 순수한 관계로 알려진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여기에서 물질적 이득은 주로 부모에서 자식으로 이어지기에 마치 부모가 자식을 위해 마냥 희생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여기에도 결국 부모의 정신적 만족이 숨겨져 있다. 이 역시도 잘못 해석되어서 마치 부모가 자식에게 있어서 착한 사람인 듯 느껴지는 것이다.

 

이 정신적 만족에 대한 그릇된 해석이 순수하거나 진실하거나 하는 등의 착각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기반으로 했을 때, 우리가 관계 속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이 어떤 것일까?

 

그것은 바로 상대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를 잘 결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럴려면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가를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정말로 중요하다. 그럼에도 늘 잊는다.

 

사실 이것을 잘하는 사람들이 관계 속에서 덜 상처입고 더 많은 이득을 취한다. 그리고 이것을 못하는 사람들이 열심히 노력했지만 결국 더 상처입고 더 많은 손해를 본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자신의 생일날 가방을 가지고 싶다고 했을 때, 그 사람을 위해서 가방을 고르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이때 우리가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그 사람이 과연 어떤 목적으로 가방을 원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명품 가방을 사줘야 하고, 수납 공간이 많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그런 기능성 가방을 선물해야 한다.

 

그런데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때 자신의 기준에서 마음에 드는 가방을 선물해준다. 왜냐하면 자신이 가방을 선물해주려는 의도는 순수하고 진실되기 때문에 그 어떤 가방을 줘도 괜찮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것도 순수한 의도이기에 비싼 가격조차도 감당한다. 하지만 상대는 받을 때 고맙다는 말과 미소를 짓지만, 실제로는 사용하지 않는다. 불필요한 선의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우연히 그 사람이 사는 집에 놀러 갔다가 자신이 사준 가방이 한쪽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는 모습을 보면 결국 속으로 실망감을 느끼게 된다. 더군다나 자신이 그런 선물을 사줬으니 자신의 생일에도 상대가 비슷한 수준의 선물을 사주길 바란다. 아니 자신은 순수한 의도이니 그것의 반 정도의 가격만 되어도 감사하게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받은 선물에 만족하지 못한 상대는 선물을 해줄 생각이 별로 안 생긴다.

 

그러면 선물을 줬던 사람은 크게 상처를 입게 된다. 하지만 이 경우 과연 누가 잘못한 것일까?

 

만약 관계라는 것이 이득을 주고 받는 것임을 명확히 이해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런 사람이라면 상대의 의향을 정확히 알아내고 몇 가지 디자인 중에서 고르도록 했을 것이다. 또한 자신이 받고 싶은 선물도 꼭 집어서 말할 것이다.

 

물론 관계의 순수한 의도를 믿는 사람은 이것이 불편할 것이다. 그것은 너무 대 놓고 이득을 주고 받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것도 마냥 무시할 수는 없다.

 

우리가 가끔 어느 날 해가 지는 멋진 식당에서 식사를 할 때는 망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때조차도 스테이크에 숨겨진 도살장의 소를 떠올려서는 그것을 전혀 즐길 수가 없다.

 

그렇다면 자신이 상대가 말하기 전에 상대가 마음에 들어 할 선물을 고를 능력이 되는지 반드시 성찰해봐야 한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그럴 능력이 없다. 이것은 사실 꽤나 고차원적인 판단 능력이다.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그 사람이 무엇을 원할지 알아낼 수 있다면, 마케팅 같은 분야에서 일하기에 환상적인 능력이다. 이런 종류의 사람은 어떤 사업을 해도 성공한다.

 

인간의 본능에 대한 이해, 성격적 이해, 그 사람의 상황 등등 딱히 말해주지 않아도 언뜻 듣는 주변 이야기들을 통해 그것을 유추해내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우리가 실패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잘 몰라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상대에게 해주기 때문이다. 맛 집이라고 데려갔는데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점인 것이다. 상대가 그것을 싫어할 수도 있는데 그것을 아예 고려조차 안 한다. 이것이 순수한 죄이다. 선의의 목적이지만, 결국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돈도 자신이 낼 것이고, 맛있는 것을 상대에게 먹여 주고픈 자신의 순수함에 스스로 만족하기 때문에 그런 것을 중요하게 고려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냥 자기가 맛난 것을 먹고 싶어서 상대의 취향을 고려치 않는 이기적인 사람과 결국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사실 상대 입장에서는 무엇이 다를까?

 

바다가 아름다워 보인다고 해서 그 안으로 계속 들어가면 결국 빠져 죽는다. 바다의 아름다움은 멀리서 볼 때, 어둠이 밀려오지 않았을 때, 거기에 물에 빠져 죽은 시체가 떠다니지 않을 때, 누군가 자신을 물에 빠뜨려 죽이려고 하지 않을 때까지만 유지가 된다.

 

인간이 그렇고 삶이 그렇다. 그러니 당연히 관계도 그렇다. 우리는 순수하고 진실한 관계를 위해서 노력할 필요는 있지만, 그것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언뜻 보기에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처럼 진실해 보이는 관계들은 마치 그 어떤 이득도 관여되지 않는 듯 착각을 일으킨다. 하지만 그 관계에서도 분명히 이득을 주고 받는 행위는 일어난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이득을 주고 받음으로써 행복이 발생한다. 

  

어떤 관계가 어떤 이득의 주고 받음이 없으면 반드시 단절될 수 밖에 없다. 불행하지도 않겠지만 행복하지도 않을테니 그 사람들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소중한 시간을 쓸 필요가 없다. 관계는 반듯이 이득의 주고 받음을 전제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정신적 만족을 얻는 것을 그 어떤 이득도 추구하지 않는 온전히 순수하고 진실된 의도로 착각한다. 그리고 이 착각으로 인해서 상대로부터 상처를 입게 된다.

 

이것에 대한 자신의 선입견을 깰 수 있다면 관계로부터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 순수한 관계만을 찾아 다니다가 끝없이 상처입고는 숨지 말고, 관계의 순수함은 그저 방향성만을 가진 것이라고 믿고는 그것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살아가는 편이 낫다.

 

그러니 오늘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었다면 그것에 대해서 좀 더 깊은 대화가 필요해 보인다. 상처를 입었다고 해서 상대를 마음대로 판단하지 말고 자신이 그들에게 어떤 실수를 저질렀는지를 알아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얻어진 상대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좀 더 나은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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