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착한 사람들이 착한 이유

아이루다 2016. 8. 2. 11:22


 

이 세상에는 착하다고 평가 받는 사람들이 있다. 많지는 않지만,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주변에 그런 사람 하나 정도는 있을 것이다. 착한 사람들은 보통 손해를 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착한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을 좋아한다.

 

착한 사람의 손해는 결국 주변의 누군가에게 이득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물론 주변 사람들은 자신은 그저 착한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저 자신보다 조금이라도 덜 욕심이 있는 사람을 좋아할 뿐이다. 즉, 현실적으로 말하면,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에서 손해보다는 이득을 얻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확히 말하면, 착한 사람이 손해를 잘 감수하는 것이 아니라, 손해를 잘 감수하는 사람을 착한 사람이라고 정의한다고 보는 것이 더 맞다.

 

아무튼 이런 이유로 착한 사람들은 비록 좀 손해는 보지만 관계에 있어서 만큼은 부자가 될 수 있다. 즉, 많은 사람들을 알고, 많은 사람들과 허물없이 잘 지내기도 한다. 그래서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이득을 보는 경우도 제법 된다.

 

그런데 왜 착한 사람들은 착할까? 착한 것은 분명히 손해를 가져 올 가능성이 높은데도 왜 그럴까? 착함은 어떤 면에서는 우리의 본능, 즉 이득을 추구하는 유전적 본능을 거스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니 착한 사람이 어떤 유전적 결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사람이 착한 것에는 분명히 납득할만한 합리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착한 사람들이 착할 수 있는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착해도 살 수 있으니까 착한 것이다. 만약 이 세상이 좀 더 살기 힘든 환경이었다면, 착한 사람들이 주로 죽을 것이다. 착하다는 것은 관계에서는 도움이 되지만, 그렇다고 생존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착하게 살아도 의도치 않은 이득을 얻는 경우가 있어서, 사실 본인은 자신이 손해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즉, 착하게 사는 것이 남들에게 호감도 주고 더해서 드러나지 않는 이득도 챙길 수 있으니까 착하게 살 수 있는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고 해도 끝없이 손해를 입고, 무시를 당하고, 불공정한 상황에 놓이게 되면 화를 내게 된다. 그리고 화를 자주 낼 수록 우리는 그 사람이 착하지 않다고 여기게 된다. 그러니 사실 보통 사람들은 이 현상이 좀 많이 진행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살다가 보니 착하게만 살 수는 없었던 것이다. 착하게 살려고 하니 다들 이용해 먹고, 뒤통수 치고, 빨대를 꽂아서 빨아 먹는 존재들이 달라붙기 때문에 견딜 수가 없어서 결국 덜 착해진 것이다.

 

이러다가 아예 나쁜 사람이 되는 경우도 흔하다. 세상이 좀 험하기 때문에 그렇다. 인간이 대단한 문명을 이루긴 했지만, 이 세상은 사실 아직도 약육강식의 시대이다. 서로 점잖게 행동할 뿐,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는 남의 목숨쯤은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도 꽤나 많다. 아니 그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큰 손해를 막거나 큰 이득을 위해서라면 타인의 고통쯤은 눈을 감을 수 있는 사람들도 다수다.

 

그럼에도 착한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이렇게 험한 세상임에도 말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착한 사람들이 착함을 유지할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바로 욕망 대비 능력이 높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바라는 것을 그리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그리 사나워질 필요가 없다. 남을 이용하거나, 남에게 나쁜 짓을 하거나, 남을 질투하거나 할 필요가 없다.

 

자신의 타고난 능력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행복하다. 그러니 착하게 살 수 밖에 없다.

 

사실 착하다는 말은 그 사람이 행복하게 산다는 것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우리는 행복해질수록 착해진다. 부잣집에서 태어나서 별 어려움 없이 자란 아이들은 보통 순하다. 가난한 집에서 힘들게 자란 아이들이 억세다.

 

그리고 우리는 흔히 억센 사람보다는 순한 사람이 더 착하다고 여긴다.

 

착한 사람의 착함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위의 조건이 만족된 후에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타인에 대한 심한 수준의 무관심이다. 하지만 이것은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이라서 일반 사람들은 착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 아무런 관심이 없을 줄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말을 하면 들어 주고, 부탁을 하면 잘 들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행위들이 관심의 증거가 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것을 관심의 증거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예를 들어서 어떤 착한 사람이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이 사람이 주로 보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남들이 잘 살고 있는 모습일까, 아니면 남들이 힘들어 하는 모습일까.

 

당연히 남들이 힘들어 하는 모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욕망의 노예라서 자신에게 만족하기 보다는 끝없이 욕망하고 그리고 불만족스러워 한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마찬가지다.

 

이런 사람들 중에서 그나마 충분히 가진 사람은 넘길 수 있지만, 정말로 적게 가져서 힘들고 불행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착한 사람들 중에서 이런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자신의 것을 다 털어서라도 그들을 도와주려고 할 것이다. 착하고 남들의 불행에 관심이 있다면 당연한 결과이다. 혹은 가진 것이 없다면, 그들을 위해 봉사 활동이라도 하려고 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양심의 소리에 따르려고 할 것이다.

 

그러다가 보면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 수 있다. 왜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은 이렇게 밖에 살 수 없나 라는 생각이다. 이것은 곧 사회 부조리에 대한 문제, 부의 분배에 대한 의문, 사회적 정의와 불평등함에 대한 분노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니 어떤 식으로든 그 자리에 그렇게 머물러 있을 수가 없다.

 

물론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불행을 그냥 넘길 수 없는 사람은 그저 자신의 행복만을 바라보고 살기엔 너무 힘들다. 양심의 소리가 계속 들려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변하게 된다.

 

그런 변화를 겪고 나면, 원래 착했던 사람은 계속 착한 사람으로 머물지 못한다. 그래서 그 사람은 변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사람을 더 이상 착한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게 될 것이다. 그래서 착한 사람은 사라진다. 내면은 착하겠지만, 외적으로는 어떤 강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 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이런 자연스러운 변화를 겪지 않고 최종적으로 착한 사람으로 머물러 있을 수 있는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답은 하나뿐이다. 다른 사람의 불행에 거의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이것을 잘못 이해하면, 이 사람이 아주 나쁜 사람 같지만, 사실 이것은 일종의 무지함으로 보는 것이 옳다. 이것은 아이의 착함과 같다. 아는 것이 없고, 관심도 없으며, 알고 싶어하지도 않기 때문에 그렇다.

 

사실 냉정히 말하면, 사람들이 자신의 속한 사회의 온갖 문제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바로 그 자신이 그 문제로 인해서 피해를 입거나 혹은 이득을 얻을 기회를 놓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정신 차리고 이 사회의 문제를 바라보고 있지 않으면, 결국 손해를 입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두 눈을 부릅뜨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이 결코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매일 뉴스를 보거나 신문을 읽다가 보면 기분이 나아지는 경우는 별로 없다. 분노 지수가 올라가며 세상이 한심해지고 결국 불행을 경험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그럼에도 손해를 입지 않으려면 그것을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 착한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자신에게 충분히 만족하며 더해서 손해를 입는 것도 그다지 개의치 않기 때문에 불필요하게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러니 기분 나빠질 이유도 없다. 그래서 자신의 행복이 유지가 된다. 결국 착한 사람들은 자신의 행복에만 관심을 갖고 살 수 있게 된다.

 

원래 자신의 행복에만 관심이 있을수록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 수 밖에 없다. 또한 오늘 자신이 어떻게 무엇을 해야 행복할지를 고민할 때, 그것이 사회적으로 미치는 파장까지 연장해서 생각하게 되면 그것을 제대로 즐기기도 힘들다.

 

오늘 편의점에 들러서 시원한 음료수를 살 때, 거기에서 일하고 있는 젊은이의 고달픈 삶을 생각하다가 보면, 시원한 음료수의 맛을 제대로 즐길 수 없다는 뜻이다. 놀이 공원에 가서 거기에서 그 더운 날 커다란 인형 탈 속에 있는 알바의 모습을 떠올리면, 놀이 공원이 재미있을 수가 없다.

 

이렇듯 모르면 모를수록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물론 반드시 이렇게 모르고도 충분히 만족할 만큼 욕망을 충족시킬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다.

 

이렇게 욕망 대비 능력이 되고, 남에게 사실상 거의 관심이 없다면 착하게 살 수 있는 조건이 완성이 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착한 사람들이 남의 이야기를 잘 듣지 않는 것도 아니다. 사실 잘 들어준다.

 

원래 사람들이 말을 하는 이유 자체가 더 행복하고 싶거나, 불행을 벗어나기 위해서이다. 그러니 이미 충분히 행복한 착한 사람들은 대화의 필요성을 거의 못 느낀다. 그러니 주로 듣는 쪽이 된다. 하지만 기억에 남지는 않는다. 듣는 순간엔 집중하지만, 듣고 난 후에는 금세 잊혀진다. 그럼에도 문제가 되지 않는 이유는, 말하는 사람들도 그다지 그것이 기억되길 바라지는 않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는 스스로 속을 푸는 목적이다. 그러니 누군가 자신의 말을 들어주면서 공감만 표시해줘도 그 대화는 충분히 만족스럽다. 사람들은 해결책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갈등 상황에서 자기가 옳음을 증명 받고자 할 뿐이다. 그래야 손해를 보지 않는다고 믿을 수 있다. 우리는 손해 입는 것을 너무 싫어해서, 실제로 손해를 보더라도 심리적으로라도 손해를 입지 않았다고 여기고 싶어한다. 그래서 옳고 싶어한다.

 

그러다 보니 말하는 이의 목적과 들어주는 이의 태도의 조합이 잘 맞는다. 물론 문제는 있다. 사람들이 하는 모든 이야기가 이렇게 사라지길 바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착한 사람들의 숨겨진 단점이 나타난다. 물론 꼭 단점이라고 할 수만도 없다.

 

사람들은 가볍고 즐거운 관계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사실 좀 더 깊은 관계를 원하기도 한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말하기 힘든, 자신의 치부나 혹은 너무 심각한 불행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한 필요성을 의미한다.

 

즉, 자신의 약점을 그대로 드러내도 괜찮은 사람을 원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마치 착한 사람들이 그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이란 착각을 한다.

 

착한 사람은 잘 들어주고, 질투도 하지 않으며, 늘 같은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에게 마음 속 깊이 담아 둔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착한 사람들은 어떤 대화 내용인지 상관없이 동일한 입장을 취한다. 딱히 할 얘기가 없으니 그저 잘 들어줄 뿐이다.

 

그래서 마음 속 깊은 이야기를 했던 사람들은 결국 상처를 받게 된다. 꺼내기 힘든 이야기를 했는데, 착한 친구가 그것을 전혀 특별하게 취급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으로 인해서 착한 사람들은 많은 관계를 맺지만, 어느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을 수는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문제라는 뜻은 아니다.

 

추가적으로 착함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아주 희귀한 유전병 중 하나인 '윌리엄스 증후군'에 대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이 병은 7번 염색체 누락으로 나타난다고 알려져 있으며, 만 명당 한 명 꼴, 즉 우리나라에서라면 5천 명 정도 이 병에 걸려있다고 예측해 볼 수 있는 병이다. 이 병에 걸리면 외모적으로는 아주 큰 문제는 없으나, 평균 아이큐가 50 정도로 약간의 정신 지체 증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이 증후군은 가장 큰 특징은 외부의 위험함에 대한 그 어떤 경계가 없는 것으로, 좋게 말하면 모든 것을 사랑하는 증상이 나타난다. 낯선 사람을 봐도, 한 눈에 보기에도 위험해 보이는 존재를 봐도, 자신을 해칠 수 있는 벌레나 야수를 봐도 늘 같은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 이 병의 특징이다.

 

이런 병에 걸린 사람은 당연히 착해 보인다. 경계심이 없고 타인에게 관심이 많으며, 손해를 보는 것도 전혀 개의치 않으니 당연하다.

 

사실 이 증후군은 극단적인 착함을 의미한다. 생명체로써 자신의 생명조차도 손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착한 사람들도 사실 어떤 병에 걸렸을 수도 있지 않을까? 적어도 인간에 대한 극단적인 무관심을 가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이것을 일종의 착한 싸이코패스 증후군이라고 설명하고 싶기도 하다. 공감 능력 부재로 인해서 자신의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 말이다.

 

물론 싸이코패스는 주로 나쁜 사람들로 취급된다. 하지만 어떤 싸이코패스가 어느 정도 능력을 타고 태어난 후 잘 교육받았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

 

공감 능력은 거의 없어서 타인에게 무관심하긴 하지만, 그 덕분에 사람들 사이에서는 착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사실은 연극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본인은 자신이 보통 사람들 놀이를 하고 있다는 생각은 상상하지도 못할 것이다.

 

단 한 번도 공감을 경험해 본적이 없기에, 자신이 공감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조차도 자각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감정이란 것은 외부에서 주입해서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스스로를 진단 해 볼 수 있는 특징으로는, 각종 문화 상품들, 즉 책, 영화, 연극, 드라마 등을 볼 때 재미보다는 공감과 감동을 목적으로 하는 것들에 거의 관심도 없고, 무엇인가를 보다가 눈물을 흘려 본 적도 없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뿐이다.

 

그들에게는 그런 감동적이거나 슬픈 이야기들 조차도 그저 스쳐 지나가는 무관심한 이야기 중 하나일 뿐이니 말이다.

 

우리는 대부분 착한 사람을 선호한다. 착한 사람들은 자신의 손해를 잘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득을 얻을 가능성이 높은 상대를 좋아한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자신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공감해줄 사람을 원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둘이 모두 가능한 사람은 참 드물다. 착하면서 공감도 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로 드물다. 사람들은 착하기만 하거나 공감을 잘하기만 하거나, 둘 중 하나만 잘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들이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사람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게 될지는 각자의 선택일 것이다. 단지 여기에서 자신은 과연 어떤 사람이 필요한지에 대해서 좀 더 깊은 고민을 해봐야 할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인간 관계는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사실 삶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우리가 얻는 수 많은 행복이 바로 인간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시간이 날 때마다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고 고민해보는 것은 결코 손해 보는 것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