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대부분의 비판은 질투심에서 시작된다

아이루다 2016. 8. 7. 07:01

 

최근에 본 중국 드라마가 한 편 있다. 제목은 '랑야방' 이라고 한다. 수만 명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위해서 죽음에서 되돌아 온 한 남자의 복수극이다.

 

이 드라마는 복수를 주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일단 꽤나 무거운 느낌을 주지만, 보다가 보면 그다지 무겁지는 않다. 사실 흥미로운 요소도 많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드라마는 참 재미있다. 적어도 명품 드라마라고 부를 만 하다.

 

이 드라마는 참 많은 사람들이 나온다. 그 중에서 개인적으로 남자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두 명이 나오는데, 한 명은 복수를 진행하는 매장소라는 남자이고, 다른 한 명은 현 황제에 이어 다음 황제가 될 가능성이 있는 정왕, 소경염이다.

 

이 드라마가 어느 정도 진행된 후, 정왕은 과거에 일어났던 적염군 사건이 조작된 것임을 알아내고는, 그것이 현 황제의 역린 임을 알면서도 반드시 사실을 밝히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그리고 그의 책사였던 매장소는 황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황제를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고 정왕을 설득한다.

 

하지만 정왕은 고집스럽게 그렇게 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나 소경염은 그런 사람 아니오' 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말을 들은 매장소는 결국 그를 돕겠다고 한다. 그리고 둘은 서로 크게 맞절을 한다.

 

혹시 이 드라마를 보지 않은 분이 있다면, 한 번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우리나라 드라마와는 다른 어떤 매력이 있다.

 

우리는 살아가다가 보면, 어쩔 수 없이 세상의 흐름대로 맡겨야 할 때가 있다. 정왕은 황제와 맞섰다가는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황제와 맞서기로 마음 먹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것이 옳은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랬다.

 

하지만 세상을 좀 살아 본 분은 이런 결정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안다. 흐름을 거스르는 것은 단지 그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럴 때 추가로 힘든 것은 바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다. 그것이 얼마나 옳고 그르냐에 상관없이, 그 파장이 얼마나 클지에 따라서 사람들은 말리거나, 피하거나, 비난을 한다. 말 그대로 왕따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어떤 면에서는 이런 편견과 싸우는 것이 훨씬 더 힘들다. 불의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비겁함과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젊은 시절엔 버틸 수 있다. 가진 것도 없고, 그곳에서 뼈를 묻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책임져야 할 것도 적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직 이상과 정의로움으로만 무장해도 된다. 그래서 실패하더라도 젊다는 것은 또 다른 기회를 의미한다.

 

그렇지만 나이를 웬만큼 먹고 나면 그것이 쉽지 않다. 살아가다가 보면, 그것이 분명히 틀린 일임을 알고도 눈을 감아야 하는 일이 많다. 비겁하지만 그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자신이 그것을 직접 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를 합리화 한다. 그것이 아무리 잘못된 일이라고 해도 결국엔 남의 일인 것이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정왕의 결심은 대단한 것이다. 자신의 삶 자체를 걸고 자신이 소중하다고 여긴 사람들을 위해서 나서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가 포기하는 것은 바로 한 나라의 황제 자리이다. 그리고 포기 수준이 아니라, 잘못하면 목숨까지 잃을 수 있는 결정이었다.

 

물론 나이를 어느 정도 먹고도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서 끝없이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있다. 그들은 이 사회가 이렇게 흘러가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것에 대한 한 가지 예를 보자.

 

한 감독이 있었다. 이 감독은 영화계의 비주류로 나름대로 예술성 있는 작품들을 만들어 왔으나, 언제나 관객의 외면을 받았다. 관객은 언젠가는 자신을 알아 줄 것이라고 믿었기에 그것은 참을 수 있었다.

 

그가 정작 참을 수 없는 것 하나는 바로 대형 배급사의 횡포였다. 다수의 극장을 가지고 있는 대형 배급사는 소위 말해서 흥행 가능성이 있는 영화만을 잔뜩 상영했다. 그래서 정말로 거지같은 영화라고 해도 잘 알려진 배우, 유명한 감독의 연출만 있다면 엄청난 수의 스크린을 장악했다.

 

그러다 보니, 자신처럼 적은 예산으로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은 상영을 할 영화관을 찾는 것조차 너무 힘들었다. 그나마 상영을 해야 사람들이 보는데, 아예 상영할 장소가 적으니 그의 영화를 접할 수 있는 관객의 수는 급격히 줄었다. 더군다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현상은 점점 더 심해졌다.

 

그래서 그는 틈만 나면 이 문제점에 대해서 비판하는 글을 썼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그것에 동의를 해 줬다. 감독이 지적한 문제는 실제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 감독에게 대형 제작사에서 연락이 왔다. 어떤 작품의 감독을 맡아 달라고 했다. 그리고 배급도 다 책임지겠다고 했다. 감독은 고심 끝에 몇 가지 까다로운 조건을 걸고는 수락을 했다. 배우 섭외, 영화 촬영 방식, 편집 등등에 대해서 감독의 독립적 권한을 인정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제작사는 그것을 모두 받아들이고는 빨리 촬영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영화가 만들어 졌다.

 

이 작품은 잘 만들어지기도 하고 내용도 좋았으며 대형 제작사의 마케팅 능력으로 개봉 전부터 크게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결국 크게 성공한 영화가 되었다.

 

그런데 중간에 문제가 하나가 생겼다. 이 영화가 잘될 듯싶으니, 배급사들이 자신의 영화관에 이 영화를 정말로 엄청나게 상영했던 것이다. 덕분에 결국 그는 천만 관객이 넘는 감독이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이 감독의 평소 가치관과 충돌이 나는 것이었다. 그는 한 영화의 스크린 독점이 갖는 폐해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때 감독은 배급은 자신이 관여할 사항이 아니라면서 한 발 물러 섰다. 사실 실제로도 그랬다. 그가 요청한 것은 영화를 어떻게 찍는 것에 대한 것 뿐이었다. 영하 배급은 제작사가 알아서 할 일이니 뭐라고 관여할 수도 없었다.

 

이 감독은 이 영화의 성공을 계기로 이후 많은 영화들에서 성공을 거뒀다. 그리고 그에게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리고 그 중 하나는 이제는 더 이상 대형 배급사의 스크린 독점이 가진 문제에 대해서 비판하는 글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가상의 이야기이다. 뭐, 실제로 일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감독이 유명해지기 전 그가 비판한 대형 배급사의 스크린 독점에 관한 횡포 문제는, 유명해진 후 왜 사라져버린 것일까? 답은 단순하다. 그는 정왕과 같은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나는 정왕 소경염처럼 손해를 무릅쓰고 옳다고 믿는 것을 주장하는 바보는 아니오' 라고 대답을 해야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그런 주장을 한 것일까?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그냥 한 것일까? 아니다 사실 그가 그런 주장을 할 때는, 스스로도 철석같이 그것을 믿고 있었다. 한 점의 의심도 없이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몰랐던 것이 하나 있었다. 마음 속 깊이 숨겨져서 발견되지 않는 한 가지 중요한 심리이다.

 

그것은 바로 질투심이다. 기존의 성공한 감독에 대한 질투심 말이다. 웃기지만 이것이 바로 모든 것의 출발점이었다.

 

그는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질투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표현을 했을까? 그것을 질투로 표현하면 스스로 너무 비참하고 찌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질투심을 다른 것을 감쌀 필요가 있다. 그럴 듯 하고, 더해서 사람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어떤 것 말이다.

 

운 좋게도 그는 제법 글을 잘 쓰는 사람이었고, 무엇을 말해야 사람들이 자기에게 동조를 해줄 것인가를 잘 알고 있을 만큼 똑똑했다. 그리고 글을 쓰면서 자신의 질투심을 스크린 독점 문제로 변형시켰다. 여기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그 자신도 자신이 쓴 글을 믿었다는 점이다.

 

그러니 그는 성공 후 바뀐 것이다. 아니 바뀐 것이 아니다. 원래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단지 질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을 얻었기 때문에, 더 이상 질투를 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러니 당연히 그것을 비판할 필요도 없다.

 

이제는 그가 다른 감독의 질투를 감춘 비판 앞에 서야 할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경험했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 그들이 자신을 사실은 자신을 질투하고 있음을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는다. 만약 자신이 그런 일을 겪었다면 정말로 심하게 화가 났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찔리면 크게 화를 낸다. 그러니 그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이 감독이 비록 질투심에서 시작했더라도, 그가 한 비판은 나름대로 타당한 것이었다. 영화계에서 스트린 독점 문제는 결코 그냥 지켜보기만 해서는 안 되는 문제이긴 하다.

 

우리는 다섯 개의 감각 기관을 통해서 외부를 감각한다. 그리고 감각된 대상들은 머리 속에서 기존의 정보들을 배경으로 해서 해석된다. 그리고 그 순간 감정이 생성된다. 이렇게 생성된 감정 중에서는 좋은 것도 많지만, 기분을 나쁘게 하는 감정도 많다.

 

이 과정이 우리가 매일 살면서 경험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기분이 좋을 때는 그렇지 않지만, 기분이 나쁠 경우, 우리는 자신이 왜 기분이 나쁜지를 해석하려고 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감정에 대해서 적정 타당한 이유를 찾으려고 애쓴다.

 

우리가 자신의 감정에 대한 적절한 이유를 찾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것은 바로 그렇게 교육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분명히 감정의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감정을 드러내는 일에 대해서 꽤나 조심스러워야 한다고 교육 받는다. 이것은 누가 알려주는 교육은 아니다. 살아오면서 자신의 감정을 마구 드러냈다가 겪은 곤란한 경험들의 총합으로 인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 사실이다.

 

특히 좋지 않은 감정에 대해서는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어떤 좋지 않은 감정을 느낄 때마다 혹은 그것을 타인에게 표출할 때마다, 그것이 충분히 적절한 것임을 주장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남을 설득하려면 논리적이어야 한다. 자신의 감정을 설명하는 것으로는 상대를 이해시키기가 힘들다. 사실 이해라는 과정이 그렇다. 이해는 감정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성의 영역이다. 더군다나 우리가 남을 설득하기 위해서 쓰는 도구는 바로 말과 글이다.

 

말과 글은 원래부터 감정의 도구가 아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이성적 도구이다. 그러니 우리가 남을 설득하려면 결국 완전히 이성적으로만 가능하다. 문제는 우리가 설명하려고 하는 대상이 바로 '감정'이라는 점이다.

 

어떤 것이 감정이냐 이성이냐를 구분하는 것은 쉽다. 컴퓨터 안에 넣을 수 있느냐 없느냐를 보면 된다. 말과 글은 모두 넣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까지는 사랑한다는 느낌은 컴퓨터 안에 넣을 수 없다.

 

아무튼 감정이 외부로 설명되려면 이성적 도구를 쓸 수 밖에 없다. 그러니 문제가 생긴다. 이 둘은 완전히 서로 다른 것이다.

 

원래 감정은 결코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그 말이 전달되는 통로로써 언어의 역할은 아주 미비하다. 거기엔 표정, 눈빛, 행동 등등 말 그대로 온 몸으로 표현이 된다. 그리고 그럴 때 비로소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전달 된다.

 

슬픔도 마찬가지다. 수없이 많은 슬픔을 표현한 어휘보다 한 방울의 눈물이 훨씬 더 깊은 공감을 일으킨다. 우리는 살면서 이것을 자주 경험한다. 행복하고 싶은 사람들이 책보다는 영화를 보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영화 속 행복이 훨씬 더 잘 전달된다. 그것은 대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배우의 표정을 통해서 전달된다.

 

표정 하나에, 눈빛 하나에, 한 방울의 눈물에, 환한 미소에서 그것이 전달된다. 그런데 이것을 자꾸 말과 글로 전달하려고 하니 문제가 생긴다.

 

우리는 질투를 느낀 후에도 비슷한 짓을 한다. 분명히 질투를 느껴서 기분이 나빠졌는데, 원래 질투를 표현하는 것은 꽤나 금기되어 있는 감정 표현 중 하나이다. 특히나 똑똑한 사람들은 이것을 표현하는 것 자체를 꺼려하며 더해서 스스로도 질투심을 느끼는 것 자체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질투심을 설명할 때 다른 것으로 변형한다. 즉, 비판 의식으로 바꿔 버린다. 이 과정은 글을 잘 쓸 수록,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많을수록 더욱 더 쉽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왜 화가 났는지를 그럴 듯 하게 설명할 수 있다. 상대의 잘못을 지적하고, 자신의 입장을 설명함으로써 아무리 어처구니 없는 짓을 했더라도 그것을 합리화 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사실 질투심을 포장하는 것은 화를 포장하는 것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쉽다. 화가 난 사람은 표정을 숨기기 힘들지만, 질투심을 느낀 사람은 약간의 연극만 하면 쉽게 숨겨진다. 그저 비판적이고 냉랭한 얼굴을 하면 된다.

 

그리고 한 가지만 알면 된다.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은 반드시 어떤 식으로든 단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그 단점을 공격하면 된다. 이 부분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알아서 된다.

 

너무 착한 사람이 질투심이 나면, 그 사람으로 인해서 보통 사람들조차 나쁜 사람으로 평가된다고 비판하면 된다. 사람이 너무 착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 된다. 너무 착하면 자신은 모르지만, 그 가족은 심하게 피해를 받을 수 밖에 없다고 말하면 된다.

 

복권이 당첨된 사람이 질투가 나면, 그렇게 쉽게 돈을 번 사람은 삶을 쉽게 망칠 수 있다고 걱정해주면 된다. 그리고 사행성 사업을 통해서 사람들을 현혹하는 정부의 문제점을 비판할 수도 있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를 가진 부모가 질투가 나면, 아이가 해외로 유학을 가면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걱정해주면 된다. 그리고 요즘 사람들은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문제점도 같이 비판할 수 있다.

 

화장을 잘해서 예쁜 사람이 질투가 나면, 화장이 피부에 미치는 안 좋은 영향에 대해서 말하면 되고, 얼굴이 예쁜 사람은 팔자가 사납다고 말하면 된다.

 

사실 마음만 먹는다면 그 무엇이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겠는가?

 

자신이 갖지 못해서 질투가 나는 것을 그렇게 공격하면 된다. 걱정하는 듯 비판하면 된다. 그 감독처럼 한국 영화계를 걱정하는 듯 비판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로 잘 통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느끼는 질투를 주변 사람들도 같이 느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니 한 사람이 그럴 듯 하게 이것을 포장하면 다들 알아서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더군다나 글을 써서 할 때는 이 과정이 훨씬 더 쉬워진다. 왜냐하면 말은 그나마 표정에서 조금이라도 드러나지만, 글에서는 감정을 완전히 감출 수 있기 때문이다. 추가로 말과는 다르게 여러 번 수정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대상에 대한 비판이 글로 쓰일 때는 그 시작점이 되는 감정은 완전히 감출 수 있다. 그것이 질투심이든 무엇이든 간에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주장해도 인간은 감정의 존재이다. 우리는 오직 감각을 통해 만들어진 감정만을 통해서 세상을 경험한다. 우리는 물론 옳다고 믿거나, 정의롭거나, 선하거나 하는 이성적 판단을 통해서 세상을 평가할 수는 있다. 하지만 평가는 나의 본질이 아니다. 이것은 그저 머리 속에서 일어난 생각의 결론이다.

 

우리는 생각으로 행복할 수 없다. 우리는 생각으로 불행할 수도 없다. 행복과 불행은 오직 감정으로만 느낄 수 있으며, 오직 경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그러니 남이 다녀 온 여행 사진을 보고 같이 행복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판단이다.

 

오늘도 세상에 대해서 비판을 하는 사람들이 넘쳐 날 것이다. 그 중에는 분명히 정왕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런 사람은 적다. 왜냐하면 그렇게 살면 왕따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비판은 그저 자신의 나쁜 감정, 즉 화가 나거나 질투심에 사로 잡혀서 시작된다. 그 감정을 합리화 하기 위해서 비판을 한다. 그래서 사실상 비판이 아닌, 비난으로 들리는 것이다.

 

비판과 비난의 차이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매일 듣는 비판은 대부분 비난이다. 사실 이 글에서 사용된 비판이란 단어들도 거의 비난의 의미로 쓰였다.

 

자신이 비판을 하고 있는지, 비난을 하고 있는지를 잘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만약 자신의 나쁜 감정을 합리화 하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비난이 될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