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관계의 두 가지 목적

아이루다 2016. 9. 30. 07:06

 

사람들은 다양한 형태로 인간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사람마다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의 숫자도 제 각각이다. 관계는 사람마다 그 형태도, 가치도, 의미도, 목적도, 맺고 있는 숫자도 모두 다르다.

 

그래도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관계가 행복한 삶을 위한 최고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우리는 관계를 통해서 어떤 이득을 주고 받을 있으며 더해서 관계 맺기를 통해서 자신의 안전함과 즐거움을 보장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관계를 통해서 이득을 주고 받는 것은 조금 계산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반면에 관계를 통해서 자신의 안전함과 즐거움을 보장 받을 수 있는 것은 상대적으로 인간적인 것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두 목적은 서로 달라 보이지만, 사실 행복이라는 공통의 목적을 달성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우리는 이득을 얻을 때도 행복하고, 안전함을 보장받거나 즐거울 때도 행복하다.

 

이런 관계의 두 가지 면은 각자 행복을 얻기 위한 목적이지만, 사람마다 각자 선호도는 다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주로 이득을 목적으로 하고, 어떤 사람들은 주로 즐거움을 목적으로 한다. 물론 이것이 칼로 자르듯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각자의 성향에 따라서 주변 관계는 다른 형태로 구성이 된다.

 

주로 이득을 목적으로 하는 이들은 자신이 관계를 맺는 사람들을 기본적으로 이득 대상으로 본다. 직접적으로 돈을 받을 수 있거나, 각종 선물을 받거나,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 받을 수 있거나,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도 있다. 또한 의사나 변호사와 같이 자신이 필요한 사람을 소개 받을 수도 있고, 취직 자리를 알아보는데 도움이 되기도 하고, 자신이 잘 못하는 일을 대신 부탁할 수도 있다.

 

물론 이런 이득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남다른 관계성을 맺어 놓는 것이 좋다. 아니면 다른 어떤 이득을 상대에게 지불함으로써 적절한 거래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안전함과 즐거움을 목적으로 하는 이들도 역시나 이득을 목적으로 하는 이들과 같은 것을 주고 받을 수 있지만, 이들의 목적은 좀 더 직접적인 행복으로 치중되어 있다. 즉, 현재의 어려움이나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 사람을 만나기 보다는 지금 이 순간 사람들과 만나서 교류를 함으로써 행복해지는 것을 원한다.

 

이것은 사교 모임이라고 할 수 있으며, 각종 동창회, 동호인, 취미 카페, 친목 모임 형태로 나타난다. 물론 친구와 만나 술 한잔 하는 것도 여기에 속한다. 가족과의 식사나 영화보기도 마찬가지다. 이런 행위들은 직접적으로 어떤 이득을 가져 오지는 않지만, 아니 사실 돈을 써야 해서 금전적으로는 행복하지만, 행복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모임의 성격도 꽤나 순수한 편이다.

 

이 중에서 어느 쪽을 선호하느냐는 거의 선천적이다. 혹은 어린 시절이나 나이를 먹고 세상을 살다가 보니 어느 한 쪽으로 변해가는 경우도 꽤나 된다. 특히나 나이를 먹어갈수록 관계가 이득 중심으로 흘러가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혹은 거꾸로 너무 이득 중심으로만 맺어지는 관계에 질려서 다시 순수한 관계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람들은 보통 이 두 가지 성향을 동시에 추구한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 조금 극단적인 유형의 사람들이 있다. 즉, 극단적인 이득을 추구하거나 극단적인 순수함을 추구하는 경우가 있다.

 

극단적 이득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사람을 판단할 때 자신이 오직 그로부터 어떤 이득을 얻을 수 있을지 만을 기준으로 한다. 사람의 가치가 여러 가지 매력 요소들, 즉 인품, 외모, 성격, 재주, 똑똑함 등으로 판단되지 않고 오직 자신에게 이득을 줄 수 있느냐 만을 가지고 판단한다.

 

그것도 당장 가능하다면 현재만을 가지고 판단한다. 물론 미래 가능성이 크다면 그것도 고려한다. 그러다가 그 사람이 그 가치를 잃으면 미련 없이 떠난다. 그것을 원활하게 잘 하기 위해서 상대가 현재 가지고 있는 가치, 즉 주로 얼마나 돈을 버는데 도움이 될 수 있겠느냐 에 따라서 사람을 분류하고 서열화 시킨다.

 

그래서 결국은 이런 사람들은 강한 사람들에게는 잘하고 약한 사람들은 무시한다. 강한 사람은 이용하고 약한 사람은 쓸모가 없으니 신경 쓰지 않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는 이기적인 것이라고 비난하지만, 사실 이들은 우리 모두가 원하고 있는 관계를 통한 이득 추구를 극단적으로 한 것일 뿐이다.

 

그리고 대체로 여기에 속한 사람들은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 사람이 평생 이득을 추구하면 이득을 얻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물론 실패도 한다. 그럼에도 일반 사람들에 비해서 성공의 가능성은 높다.

 

그 무엇보다도 어떤 사람과 사귈 경우 이득이 될지 손해가 될지를 감별하는 능력이 탁월하게 발달되어 있기 때문에 적어도 손해는 보지 않고 산다. 또한 침몰하는 배에서 머뭇거리지 않는다. 즉, 상대가 망하면 미련 없이 떠난다. 얼마나 친했는지는 아무런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그러니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당장은 좋아 보인다. 하지만 조금 문제가 있다. 이들이 이렇게 된 것에는 뭔가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관계를 이득과 손해의 관점에서만 보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비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관계에서 오는 행복 중에서 남은 중요한 하나를 포기해버렸기 때문이다. 즉, 관계의 행복을 반쪽 짜리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더군다나 그 포기한 부분은 행복을 얻는 방법으로는 이득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일까? 이것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가장 흔한 경우는 극단적 경쟁주의 사회에서 자란 탓에 그렇다. 자라오는 동안 경쟁에서 이기는 행복만을 경험해서 남들보다 더 많이 갖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만이 유일한 행복이라고 느낀다. 사실 이들은 원래 그렇게 까지 극단적인 사람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극심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살다가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변해 버린 것이다.

 

두 번째 경우는 타고난 정신적 문제가 있는 경우이다. 소시오 패스라고도 하는데, 타고난 성향으로 인해서 그 어떤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 사람이다. 이 경우는 생각보다 많은데 전체 인구 중 4%, 즉 100명 당 4명 꼴로 나타난다고 한다.

 

이들은 성공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다. 함께 공유하는 경험이나 공감 등은 아무런 즐거움이 되질 못한다. 남을 밟고 올라 설 때만 오직 행복을 느낀다. 그래서 이들 중에서는 크게 성공하는 사람도 꽤나 된다. 우리는 가끔 유명한 소시오 패스에 대한 기사를 본다. 단지 그들이 소시오 패스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 그래서 일반인 기준의 양심으로 그들을 평가하는 어리석은 짓을 한다.

 

그리고 자신이 소시오 패스인지 모르는 사람들도 꽤나 된다. 그들은 보통 자신을 똑똑하고 유능하며 뭔가 이뤄가는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여긴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이 성공해서 방송에 나오는 것을 자주 본다.

 

세 번째 경우는 극단적 신뢰 부족이다. 이런 유형은 어린 시절에 어떤 나쁜 기억으로 인해 자신을 제외한 그 누구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된 경우이다. 그래서 이들은 결혼을 해서 부부가 되어서도 각자 돈을 별도로 관리하려고 한다. 심지어 자신의 아이에게 조차도 돈을 쓰는 것을 아까워하기도 한다.

 

이들은 인생은 결국 혼자 사는 것이라고 믿으며, 부모도 믿지 않는다. 이들은 아무도 믿지 못하기에 그 누구와도 교감하거나 공감하지를 못한다. 그것은 그 사람의 보호막 역할도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굳게 잠긴 문이 되기도 한다.

 

이 세 가지 경우 중에서 두 번째인 소시오 패스를 제외한 첫 번째와 세 번째 경우는 비록 경제적으로는 성공을 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행복하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 얻은 이득이 그대로 행복으로 환산되기 위해서는 결국 또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 이득은 단지 행복 가능성만을 높인 것에 불과하다.

 

사실 좋은 사람들과 술이나 음식을 먹으면서 편하고 안락하고 즐거운 대화의 시간만큼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도 없다. 우리가 관계 속에서 얻는 행복은 바로 이런 것이다. 물론 돈이 있어야 술도 사고 음식도 사고 만날 장소에 돈을 지불할 수도 있다. 그래서 돈이 필요하기 한데 이것은 극장의 안락한 좌석에 불과하다. 우리가 실제로 감동을 받는 것은 영화이지 좌석이 아니다.

 

그럼에도 돈이 많으면 행복해 보이긴 하다. 돈만 많으면 일단 그런 일을 하는데 있어서 막힘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이 할 사람이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래서 이것은 제대로 따져봐야 한다. 사실 본인도 그 사실을 모른다. 이득을 얻을 때마다 행복함을 느끼기 때문에 그것이 행복의 전부인 줄 안다. 하지만 돈은 벌 때도 행복하지만, 쓸 때가 훨씬 더 행복하다.

 

사람들은 돈을 벌기 어렵고 쓰긴 쉽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 잘 생각해보면 돈은 벌기보다는 만족스럽게 쓰기가 더 힘들다. 우리는 매일 그것을 위해서 온갖 자기 합리화를 하고 있다.

 

자기가 산 제품을 자기가 광고한다. 자기가 다녀 온 식당을 자신이 소개한다. 자기가 다녀온 나라를 자신이 홍보한다. 모두 돈을 제대로 썼다고 믿고 싶어서 그렇다. 그러나 우리가 제대도 따져보면, 사실 돈을 제대로 썼다고 느끼는 순간은 그리 많지 않다.

 

이렇게 극단적 이득을 추구하는 사람과는 반대로 극단적인 순수성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자신이 맺는 모든 관계에서 절대로 이득과 손해와 같은 것을 따져서는 안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아는 사람들과 만남에 있어서 돈 계산을 본인이 다 하거나 단지 친구라는 이유로 해서는 안 되는 사실상 부정적 청탁까지도 거침없이 들어주기도 한다.

 

이것은 가끔 의리나 충성이라는 말로 잘못 해석되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이것이 우리 사회의 공정성을 말아 먹는 아주 큰 원인이 되고 있다.

 

이들은 또 왜 이렇게 되었을까?

 

첫 번째 경우는 어린 시절부터 사회로부터 주입 받은 어떤 가치 기준에 완전히 사로 잡혀서 그렇다. 우리가 어릴 때 읽은 위인전, 어려서 본 정의가 승리하는 만화 등등, 사회적으로 적응된 인간을 키우기 위한 과정 속에서 너무 그것에 빠져든 것이다. 마치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의 모습이라고 할까?

 

두 번째 경우는 타고난 경우이다. 즉,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 그 안에서 이뤄지는 다양한 형태의 거래에 대해 영 잼병인 사람이 있다. 즉, 어떤 면에서 나이를 먹고도 순수성이 유지가 되는 사람이다. 이득과 손해에 대한 계산 능력이 떨어져서 결국엔 어쩔 수 없이 순수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세 번째는 삶의 여유를 얻은 사람들이다. 이들도 한 때는 관계에서 오는 이득과 손해에 민감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삶에 너무 지쳐서 뭔가 다른 돌파구를 찾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나이를 어느 정도 먹은 후 주변을 정리하고 시골에 가서 살기도 하고, 뭔가 관계 이외의 행복을 추구하면서 살아가기도 한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은 순수함이 남아 있는 관계만 유지하려고 한다.

 

이 세 가지 경우 중에서 문제가 될만한 것은 바로 첫 번째 경우이다. 나머지 두 가지 경우는 사실 어느 정도 운만 따른다면 행복한 삶을 위한 아주 중요한 조건이 될 수 있다.

 

자신은 사실 순수하지 않은데, 순수한 관계만을 맺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 괴리감이 평생 그를 지배하게 된다. 즉, 친구를 만나서 돈을 쓸 때마다 돈이 아까운데 돈을 써야 한다. 그렇게 믿기 때문이다.

 

물론 안 아까운 날도 있다. 최근 운 좋게 크게 돈을 벌었으면 한 동안 안 아깝다. 하지만 돈이 줄어들면 아깝다고 느낀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상황에 따라서 계속 변해가는 마음으로 인해 자신이 상처를 입는다. 어떨 때는 마음에 들고 어떨 때는 자신이 너무 계산적인 사람이 아닌가 하는 자책감이 든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이다. 그렇지 않고 그 순수함을 유지하고 싶다면 원래 그렇게 태어나야 한다. 두 번째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그 방법이 유일하다. 하지만 타고난 계산 능력 부족은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영역이다. 계산 능력은 가지고 싶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버리고 싶다고 해서 버려질 수도 없다.

 

그나마 세 번째 유형처럼 많은 쓴 경험을 하고 스스로 많은 노력을 통해서 관계의 순수성을 의도적으로 추구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많은 시간을 자기 성찰에 써야 한다. 즉, 먹고 살기에도 빠듯한 보통 사람들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길이다.

 

그러니 자신이 추구하는 순수함이나 자신이 배격하는 계산적인 면이나 모두 인간의 기본 성향임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자신의 처지에 맞게 처신을 하고 다니는 것이 훨씬 더 낫다. 인정하면 편하다.

 

더군다나 극단적인 순수성을 추구하다가 보니 해서는 안될 짓을 하기도 한다. 이것은 정말로 조심해야 한다. 그것은 순수한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것이다. 어리석음과 순수함은 한 끗 차이이다.

 

그래서 사람이 관계의 순수성을 유지하는 형태는 세 번째 유형이 제일 좋다. 알고도 안 하는 것 말이다. 그래야 자제가 된다. 그래야 적절한 판단이 된다. 그래야 멈춰 설 때를 알게 된다.

 

삶은 짧지만 긴 과정이다. 우리는 그 안에서 각자 자신만의 관계를 만들어 간다. 그리고 거기엔 각자만의 판단 기준이 있고, 각자만의 추구하는 방향이 있다.

 

이것은 크게 이득과 즐거움으로 나뉘지만, 사실 어떤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단지 즐거움은 즉시 행복으로 바뀌지만, 이득이 행복을 바뀌려면 또 다시 관계가 필요함을 이해해야 한다.

 

인간은 혼자서는 행복할 수 없다. 아무리 좋은 제품을 사고 좋은 곳을 여행해도 그것을 같이 해주거나 공감해주고 부러워하는 사람이 없다면 행복을 얻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 가능하다면 관계의 순수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행복한 삶을 사는데 좀 더 유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