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삶의 에너지 - Me before you

아이루다 2016. 9. 13. 10:12

 

며칠 전 우연히 'Me before you' 라는 제목을 가진 영화 한 편을 봤다. 왕좌의 게임에서 용엄마로 나왔던 여배우가 나와서 반가운 마음도 들었다.

 

이 영화의 제목을 한글로 해석하는 것이 애매해서 구글 검색을 해보니, 대체적인 사람들의 의견은 '당신을 만나기 전의 나' 정도였다. 영화 내용도 그런 부분이 있는 셈이니 어느 정도 합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는 하반신 마비, 아니 어깨 아래로 거의 모두 마비되고 손가락만 까딱할 줄 아는 한 청년과 밝고 명랑하며 현실에 만족하면서 살면서 독특한 패션을 즐기는 한 아가씨와의 만남으로 시작한다.

 

제법 부자인 남자의 집안은 청년의 돌보미라고 했지만 사실상 말동무 수준의 사람을 필요로 했고, 방금 직장에서 짤려 돈이 궁했던 주인공 여자는 다급한 마음으로 그 집에 취직을 한다.

 

사고 전 잘생기고, 똑똑하고, 뛰어난 운동 신경을 가졌던 남자는, 화려하고 에너지 넘치는 삶을 살았다. 그는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인생을 사랑했지만, 교통사고로 인해서 그 모든 것을 잃고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우울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서로에게 어떤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서서히 사랑에 빠진다.

 

여자는 원래 조그만 마을에서 소소한 행복을 추구하면서 평범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남자를 만난 후로 많은 것이 변하게 된다. 그녀는 평생 처음으로 자막 영화를 보기도 하고, 클래식 연주회를 가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이 그런 것들을 참 좋아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다.

 

서민의 문화에서 귀족의 문화를 경험한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코미디 영화나 보던 그녀가 뭔가 의미가 담긴 영화를 보기 시작하면서 변화가 시작된다. 그리고 남자는 그의 마지막 6개월 동안 그녀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그녀가 가진 가능성을 알아본다.

 

남자 역시도 변한다. 그는 사고 후 우울하고 시니컬하게 변했던 성격이 제법 밝아진다. 즉, 이 둘 모두가 서로를 만난 후에 변한 것이다. 남자는 우울하고 절망적 상황에서 적어도 살만한 수준까지로 바뀌고, 여자는 평범한 시골 여자에서 미래의 꿈을 가진 당찬 여성으로 변해간다. 여자의 변화는 영화 끝까지 진행 중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제목이 그런 듯 하다. 서로가 서로를 통해 변했으니까 말이다. 영화 내내 '당신을 만나기 전에 저는 아무 것도 아니었어요' 라고 말하는 듯 하다.

 

이 영화의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그런 소설을 읽을 것 같지는 않으니, 아마도 개인적으로는 영화가 이 작품을 이해하는 정보의 전부일 듯 하다.

 

아무튼 영화 속에서는 남자보다 여자의 변화가 훨씬 더 크게 느껴진다. 자신의 잠재적 가능성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던 한 여자가, 남자를 만나 후 변해가는 과정은 비록 영화 속에서는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감이 있었지만, 놀랍고 미소를 짓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왜 변할 수 있었을까? 다른 어떤 여자들은 같은 기회를 갖더라도 왜 변하지 못할까? 갑자기 이것이 궁금해진다.

 

사실 이 답은 한 마디로 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에너지' 이다. 우리는 흔히 이 표현을 쓰긴 하지만, 사실 에너지란 말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저 에너지 넘치는 사람, 에너지가 부족한 사람 정도로만 표현한다.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은 적극적인 사람이고 에너지가 부족한 사람은 소극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정도의 이해로는 부족해 보인다. 영화 속의 여 주인공의 모습은 적극적이냐 소극적이냐 정도의 차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내부에서 발생되는 공기로 가득 차서 탱탱한 풍선과 외부에서 끝없이 공기를 불어 넣어주지만, 사실은 구멍이 뚫린 풍선의 차이와 같았다.

 

여자는 새로운 경험 속에서 가끔 겁을 내긴 했지만, 금세 그것을 행복과 환희로 바꿀 수 있었다. 도전을 겁내지만, 할 때는 그 누구보다도 그것을 즐겼다.

 

거기엔 그 어떤 '선입견' 이 없었다. 거기엔 그 어떤 판단이나 가치 부여가 없었다. 거기엔 스스로 정의한 그 어떤 의미도 없었다. 영화를 보고 우는 자신, 클래식을 즐기는 자신, 스킨 스쿠버를 하는 자신을 어떤 이미지로 만들지 않았다. 거기엔 그저 자신이 느끼고 경험하는 것을 통해 느낄 수 있는 행복만이 존재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적극적이거나 능동적인 것과 다르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욕망에 사로잡힐 때 충분히 적극적이고 능동적일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에 제법 많다. 그 욕망이 무엇인지에 따라 서로 다르게 나타날 뿐이다. 돈의 욕망에 사로잡히면 돈을 버는 일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다. 자전거를 타는 욕망에 사로 잡히면 자전거를 타는 것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다.

 

이것은 딱히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사실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그것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깊은 절망감을 느끼고 우울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남자 주인공이 가진 근본적 문제였다. 남자는 사고가 나기 전 그 누구보다도 빛나던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는 사고가 난 후 모든 것을 잃고 스스로 안락사를 선택한다. 만약 그가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았던 적극성과 능동성을 가졌다면, 그는 사고 후에도 힘들지만 밝게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파리에서 커피를 마시며 베이글을 먹던 장면을 회상하며, 그런 자신을 바라보던 주변 여자들의 시선을 회상한다. 이것이 그가 가진 한계점이다.

 

하지만 여자에게는 그것이 없다. 나중에 어떻게 변할지 모르지만, 그녀는 욕망이 없다. 그녀에게는 그저 하고 싶은 일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비슷하지만 다르다. 가장 큰 차이가 바로 그것을 하지 못해도 절망하거나 우울해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이면, 그것을 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10배로 늘면 그 10배로 늘어난 것을 즐기고, 10배로 줄면 그 10배로 줄은 것을 즐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행복이다.

 

사실 우리는 이것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늘리는 것에 매우 조심해야 한다. 10평짜리 집에서 50평으로 늘어난 집으로 이사 갈 때 단지 40평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다. 삶 자체가 늘어난다. 우리의 욕망과 당연함과 권리가 늘어난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다시는 10평짜리로 돌아갈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돌아가는 일이 생긴다면 평생 우울하고 절망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주인공 남자의 삶처럼 말이다.

 

남자는 사고 후 자신을 부정한다. 그것은 자신이 아니라고 말한다. 남자는 사고 후의 자신을 감당할 없다고 하면서 자신을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여자를 두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그리고 남자는 여자를 통해 자신의 마지막 자존심을 세운다. 그녀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돈을 남기고, 그녀에게 파리의 카페로 가서 커피를 마시고 베이글을 먹으라고 주문한다. 남자의 마지막 편지가 그 내용이었다.

 

물론 남자의 삶은 힘들었을 것이다. 고통스럽고 언제 죽을지 모를 일이었다. 또한 남자는 여자가 자신으로 인해 묶이는 것이 싫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여자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 그의 삶이었다. 결코 죽음이 아니었다.

 

영화는 그것을 그럴듯 하게 포장하는 듯 하지만, 사실 남자는 도망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사고 전 삶은 사실상 신기루였던 것이다. 사고 한 번에 모두 무너질 잘못 쌓인 탑인 것이었다.

 

그것은 모든 조건이 유지되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그 중 몸이 고장 나니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말았다. 만약 그가 그런 운동 신경이 없었거나, 그런 외모가 없었거나, 그런 지적 능력이 없었다면, 그의 그 빛나는 삶은 아예 존재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사실 그는 사고 후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그때야 비로소 진정한 사랑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의 현재 모습을 부정하면서 도망쳐버리고 만다.

 

반면에 여자의 행복은 남자와는 차원이 다르다. 여자는 자신이 어떤 모습이든 간에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다.

 

이 두 사람의 차이가 바로 궁극적으로 두 사람이 가진 '에너지' 의 차이가 될 것이다. 적극적이나 소극적이냐, 능동적이냐 수동적이냐의 차이가 아니라 바로 가지고 있던 에너지 종류의 차이인 것이다.

 

우리는 적극성, 능동성, 꿈, 노력, 집중 등에 많은 가치를 두고 그것이 삶을 제대로 살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고 교육 받아왔다. 그리고 그것을 갖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이 없으면 뭔가 삶의 중요한 무엇인가가 빠져 있다고 믿고 싶어한다.

 

하지만 사실 그런 것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저 행복하면 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 속 여주인공은 파리로 가서 패션 공부를 하든 아니면 원래 자기 집에서 살면서 식당에서 일하든 상관없을 것이다. 물론 그녀는 파리를 가는 것이 더 나았기 때문에 간 것이다. 행복한 곳에서 또 다른 행복한 곳으로 이동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보통 행복하지 않은 곳에서 행복한 곳으로 옮기려고 한다. 대부분이 자신의 현재 자리가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파랑새 이야기를 알고 있다. 파랑새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집에 있다는 동화 속 이야기 말이다.

 

우리가 있는 자리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조건들이 구비되어야 할까?

 

그것은 마음에 드는 직장, 괜찮은 수입, 건강한 몸, 좋은 배우자, 잘 크고 있는 아이들, 잘 준비된 노후, 좋은 지인들, 큰 사건 없이 주변의 관계된 사람들 등등 일 것이다.

 

이 정도면 많은 사람들이 꿈에도 그리는 조건일 수도 있다. 이것을 다 갖춘 사람들은 거의 없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것이면 완전히 만족하면서 살아갈까? 아니다. 이것은 결코 끝이 아니다.

 

황사도 없어야 하고, 지진도 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먹는 것은 맛도 있으면서 건강해야 할 것이다. 가끔 여행도 다닐 수 있어야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인기도 있어야 할 것이다. 삶이 지루하지 않아야 할 것이고, 가끔 운도 따라야 할 것이다. 어떤 일을 하면 복잡한 일이 없이 잘 풀려야 할 것이고, 신경 쓰이는 일이 최대한 일어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직장에서는 덜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고, 사실 힘들다면 언제든 그만 둘 수 있을 정도의 경제력을 이미 가지고 있으면 더 좋을 것이다. 무엇인가를 먹거나 살 때 돈 걱정이 없이 할 수 있으면 더 낫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것이 끝일까? 아니다. 우리는 도대체 만족하기가 힘들다. 이것들이 다 이뤄진다면 이젠 본격적으로 권태로움을 얻게 될 것이다. 걱정이 없으니 권태가 오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위기에 닥칠 때 생기가 넘친다. 즉, 활력이 생긴다. 이것이 바로 에너지이다.

 

그래서 이 행복 흐름은 이 중에서 중요 조건 하나가 빠지면 바로 무너지고 만다. 경제적으로 망하든가, 극복하기 힘든 병에 걸렸다든가, 배우자가 바람을 피운 다든가, 아이에게 큰 일이 생기면 끝나버리고 만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위기가 닥치면 걱정이 한 가득 이지만, 에너지는 생겨나지 않는다. 희망이 없으니 우울해지고 절망감만 생긴다. 그래서 최종 결론은 자살이 되고 만다.

 

우리가 가진 에너지가 걱정과 욕망을 통해 채워졌을 경우에 가지고 있는 명확한 한계점이다. 우리는 조금 성질의 에너지를 가져야 한다.

 

그것이 바로 영화 속 여주인공이 가진 에너지이다. 진정한 의미의 에너지인 것이다. 그것은 욕망으로 인해 생겨난 에너지도 아니고, 걱정으로 인해 만들어진 에너지도 아니다. 그것은 타고난 순수한 에너지이다.

 

이것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조건은 바로 그 모든 종류의 선입견이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을 판단하고, 무엇을 결정하고, 무엇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그 모든 행위가 바로 에너지의 순수성을 파괴하는 일이 되고 만다.


그리고 이럴 수 있을 때 우리는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우리가 누군가를 판단하고 평가하지 않으면, 우리 역시도 남의 평가나 판단에 신경쓰지 않을 수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평가에 신경쓰는 유일한 이유는 바로 우리가 언제나 다른 사람을 평가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그렇게 하니, 남들도 그럴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에너지가 넘치는 시기를 경험한다. 그것은 바로 어린 아이 시절이다. 우리가 어릴 때 에너지가 넘치는 이유는, 바로 세상을 잘 몰라서 그렇다. 세상을 모르니 선입견도 없고 뭔가 불필요하게 의미나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어린 아이 시절엔 비싼 인형이 중요하지 않다. 자기가 흥미를 느끼고 재미를 느끼는 인형이 중요하다. 영화 속에서 여 주인공은 노랗고 검은 줄무늬 양말을 선물 받고는 너무도 기뻐서 진짜로 방방 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어린 시절에 가졌던 순수한 에너지이다. 거기엔 가격이나 브랜드나 누가 어떤 의미로 줬느냐가 중요하지 않다. 그저 그 양말이 중요하다.

 

그렇지만 어른이 된 우리들은 이제 놀랄 만큼 선입견과 가치 판단에 사로잡혀 살아간다. 선물을 받으면 그것의 가격을 궁금해 하고, 어떤 브랜드인지 살펴본다. 또한 어떤 의도로 자신에게 그 선물을 줬는지 판단하려고 애쓴다. 그 선물이 마음에 들고 안들고는 가격과 브랜드 그리고 의도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는 경험해보기도 전에 이미 결정하고 있고, 무엇을 가치 있다고 판단하고, 무엇을 무가치 한 것이라고 판단한다. 그리고 자신은 가치 있다고 판단되는 것에 매달린다. 그리고 타인의 가치가 마음에 안 들면 왜 그렇게 사는지 의아해 한다. 아니 비판하거나 비난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진 순수한 에너지가 사라진 모습이다. 자꾸 뭔가 이상한 것들을 더한다. 그래서 가지고 있던 순수한 에너지가 추가된 불순물로 오염이 되고 만다. 이것은 오염 수준이 아니라 아예 변질되어 버린 것이다. 우리는 이런 변질된 에너지, 아니 이제는 에너지라 부를 수 없는 것으로 힘을 내려고 한다.

 

그러다가 그것을 채운 조건 하나라도 사라지는 날에는 삶이 절망으로 가득 차고 만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숙명일까?

 

물론 이미 늦었다. 우리들 대부분은 이미 늦었다. 우리는 다시는 그런 에너지를 가질 수 없다. 우리는 다시는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 그렇게 살면 손해만 잔뜩 볼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살면 미래엔 고생할 것이 뻔하다고 믿는다. 그렇게 살면 삶을 망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기회가 생기면 최대한 욕망을 끌어 올리고 그것을 채워야 한다고 믿는다. 왜 그래야 하는지 아무런 성찰도 없이, 누군가 그래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간다.

 

자신을 유지해주는 조건들을 하나라도 잃지 않으려고 살아간다. 그 조건이 사라진 후 자신의 삶이 망가질까 봐 평생 두려워하면서 살아간다. 자신의 삶이 가장 조건의 가장 좋은 시기에 고정되어 버리길 바란다. 자신의 삶이 영원히 안정적으로 유지되길 희망한다.

 

하지만 우리의 바램과 달리 우리는 매일 늙어간다. 우리는 매일 위험에 노출된다. 우리는 결코 그 조건을 영원히 지킬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점점 불행해지고 만다.

 

세상이 변하는데 스스로 고정되니 결국 도태되고 만다. 그리고 도태된 사람들끼리 모여서 과거 자신의 전성기를 이야기하면서 대리 만족을 얻는다. 모든 것이 지나간 전성기로 고정된다. 변화는 나쁜 것이 되고 만다.

 

끝없이 변하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으려고 최대한 애를 쓰니 그것 자체가 스트레스가 된다. 이것은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것과 같다. 머리를 염색하고, 보톡스를 맞고, 성형 수술을 하고, 비아그라를 먹어서 과거의 영광을 유지해 보려고 애쓴다. 하지만 한계는 명확하다.

 

이런 식으로 자연스럽다는 말 자체를 역행하면서 죽을 때까지 발버둥치다가 결국 남자 주인공처럼 죽어간다. 단지 그의 6개월이 60년으로 늘어난 것 뿐이다. 그런데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남자 주인공을 불쌍하다고 여긴다. 자신은 그보다 10배 이상 더 오래 살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는 정녕 아무런 해결책이 없는 것일까?

 

혹시라도 생각이 있다면, 답은 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고, 지금이라도 마음 속을 가득 채운 욕망을 비워야 할 것이다. 당연한 것들을 당연하지 않다고 여겨야 할 것이고, 권리라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권리가 아님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태어나서 사는 것 자체에도 그 어떤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권리는 인간들끼리 정한 것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조차 이 우주에게 허락 받은 것은 아니다.

 

이렇게 살아오면서 자신의 에너지에 무의식적으로 우겨 넣었던 많은 불순물들을 제거하고는 자신을 순수한 에너지를 회복해야 할 것이다. 지금부터 삶이 그렇게 진행될 수 있다면, 우리는 삶의 변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변해갈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행복 조건으로부터 조금씩 자유로워 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최종적으로 생명 그 자체의 조건을 없앨 수 있다면, 언제라도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