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확대해석에 숨겨진 본질 - 1

아이루다 2016. 8. 11. 10:21


 

우리는 가끔 자신에 대한 평가를 해야 할 때가 있다. 그리고 그 평가는 어떤 경우엔 하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타의적으로 이뤄지고, 또 다른 경우엔 자신도 모르게 자발적으로 하기도 한다.

 

보통 어린 시절엔 주로 타의적으로 평가가 이뤄진다. 학교를 다녀야 하고, 학교를 다니면 반드시 시험을 봐야 하기 때문이다.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보통 시험을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성적이 객관적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살다보면 우리가 그것을 싫어하든 않든 상관없이 타의적으로 평가되어야 하는 것들이 있다. 그런데 슬프게도 타의적으로 이뤄진 평가가 우리 삶에 끼치는 영향은 매우 크다. 시험을 통과해서 어딘가 원하는 대학이나 직장에 취직을 하는 것도 그렇고, 면접을 보는 것도 그렇고, 직장 내에서 업무 능력 평가를 받는 것도 그렇다.

 

결혼을 하기 위해서 짝을 찾는 과정도 일종의 타의적 평가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고, 상대가 우리를 평가한 후, 사랑하거나 결혼하기에 적절한 대상임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과정은 시험과는 달리 감정이 알아서 해주니 따로 노력할 필요는 없다. 그 얘기는 다른 말로 노력해도 소용없다는 뜻도 된다.

 

이것말고 우리가 하는 자발적 평가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단순히 생각하면 사실 거의 안 하는 듯 느껴진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생각한 결론이다. 사실 우리는 정말로 많은 자발적 평가를 한다. 실제적으로 말하면, 타의적 평가 기회에 비해서 자의적 평가 기회는 비교도 안될 만큼 많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평가이란 것은 일종의 객관화된 태도를 통해 어떤 대상을 향해 행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통해서 내려지는 타의적 평가는 기본적으로 객관적으로 이뤄진다. 그 평가가 누가 봐도 적절하게 내려졌다고 인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를 평가하면서도,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 과정이 평가라는 인식 자체를 못한다. 즉, 매 순간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평가 대상과 평가자가 동일 인물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것에 대한 아주 흔한 예는 아침마다 거울을 볼 때이다. 우리는 아침에 집을 나서기 전에 얼굴을 보거나 머리를 다듬기 위해서 거울을 본다. 이때 우리는 매일 보는 익숙한 얼굴을 보면서 스스로를 단정하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때마다 우리는 자신의 외모를 매번 평가하고 있다.

 

그래서 어느 날엔 자신의 얼굴이 마음에 들기도 하고, 어느 날엔 별로 같다는 생각도 한다. 그렇지만 스스로는 이것을 평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너무 익숙하고, 너무 당연한 과정이라서 아예 일상화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보다 조금 더 의식적인 평가라면, 본격적으로 자신이 가진 것들을 남들과 비교할 때이다. 그 대상은 사람이 되기도 하고, 어떤 입장이기도 하고, 자신이 소유한 것이기도 하고, 자신의 능력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자신의 남편, 아내, 아이, 부모 등을 다른 사람의 그것들과 비교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좋은 상황인지, 자신이 얼마나 나쁜 상황인지를 평가한다.

 

자신의 직장의 이름, 거기에서 자신이 맡은 직위, 회사에서 인정받는 정도, 사내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지, 누군가 회사 내의 유력한 상급자와 얼마나 친하게 지내고 있는지 등등을 통해서도 자신을 평가한다.

 

자신이 졸업한 학교 이름, 자신이 현재까지 벌어들인 수입, 자신이 소유한 집이나 차의 가격, 자신이 살아오면서 쌓은 다양한 경험, 자신이 할 줄 아는 일들, 여권에 찍힌 스탬프 등등도 자신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능력, 즉 지적 능력, 외모, 신체적 능력, 노래를 잘하는 능력, 그림 그리기, 글 쓰기, 만화 그리는 능력 등등 이 세상에서 인정 받을 수 있는 다양한 능력들을 대상으로 스스로를 평가한다.

 

사실 평가란 말 자체가 가진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학교를 다닐 때 시험을 본 후 평가를 당하는 것도 결국엔 누군가와 비교를 통해 일어나는 일이다. 즉, 비교할 대상이 없다면, 평가는 내려질 수 없다. 모든 평가는 결국 최소 2명 이상의 사람이 존재할 때 실행될 수 있으며, 의미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타의적이든 자의적이든 내려지는 평가는 바로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는 과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비교는 우리를 행복하게도 해주고 불행하게 만들기도 한다. 사실 현대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경험하는 행복과 불행 중에서 이 판단을 근거로 해서 만들어지는 것들이 꽤나 많다.

 

우리가 시험을 보는 이유는 원래 자신의 학업 성취도를 평가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을 위해서 성적 순위라는 보조적 자료가 필요했다. 혼자서는 그것을 평가하기 힘드니, 단체 내의 순위를 통해서 참고하는 것이다. 물론 요즘은 이 목적은 완전히 변했다. 지금은 순위가 훨씬 더 중요한 목표이다.

 

아무튼 우리가 평가를 하는 과정은 자신의 현재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서이다. 즉, 현재의 자신이 가진 것들이나,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들이 과연 주변 사람들에 비해서 얼마나 나은지, 모자란 지, 낫다면 무엇이 얼만큼 나은지, 모자라다면 무엇이 얼만큼 모자란 지 알려고 하는 행위이다.

 

왜 이런 짓을 할까?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자신이 현실을 파악해서 미래의 행복 가능성을 점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엇이 부족한지 알아서 목표로 삼기 위해서이다. 그래야 미래의 행복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평가를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행복 가능성에 대한 욕구 때문이다. 행복하고 싶으니 평가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이것은 오직 가능성의 문제란 점이다. 즉, 평가는 가능성을 판단하는 행위이지 결코 그 행복 자체가 아니다.

 

자신의 통장에 든 모든 돈 액수를 다 더해서 자신의 재산이 얼마인지 계산한 후, 남들과 비교해서 자신이 높은 편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면 기분이 좋아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순간 그 돈을 쓴 것은 아니다. 그리고 행복은 돈을 쓰는 순간에 실제로 발생하는 것이지, 그 돈을 세고 있을 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그것은 그저 미래 행복 가능성에 대한 기대치에 불과하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그 기대치에 많은 가치를 두고 살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런 평가, 정확히 말하면 좋은 평가가 내려질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그래서 끝없이 평가를 하려고 한다. 그것이 비록 실제 행복이 아니라, 행복 가능성이라고 해도 행복하고 싶기 때문에 끝없이 평가를 한다.

 

그리고 평가에는 또 한가지 중요한 목적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얼마나 잘났는지를 판단하는 과정이란 점이다. 그리고 잘났다는 평가를 받거나 스스로 내릴 수 있을수록 더욱 더 만족스럽다. 이것은 다시 행복으로 변한다.

 

더 중요한 점은 이것은 미래 행복이 아니란 점이다. 자신이 잘났음을 아는 것은 그 순간 내려지는 행복이다. 더군다나 엄청난 행복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행복감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그것을 얻을 수도 있지만, 그것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은 바로 자신이 얼마나 못낫는지를 판단하는 과정이 될 수도 있다.

 

아무튼 행복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우리가 매일 평가를 하지 않는 것도 이상할 지경이다. 우리는 행복하고 싶기 때문에 스스로도 인식 못하는 상황에서 자신에 대해 매일 매 순간 평가를 한다.

 

아침에 거울을 볼 때마다 자신의 외모에 대해서 평가한다. 집에서 나와 거리를 걸을 때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옷차림이나 몸매와 상대를 평가한다. 들고 있는 가방이나 몸을 꾸민 장신구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회사에서의 입지, 친구들에 비해서 얼마나 빨리 성공을 했는지, 얼마나 많은 연봉을 받고 있는지, 아는 친구들 중에서 얼마나 유력한 지위를 가진 이들이 있는지 등등을 두고도 평가한다.

 

그리고 이때 우리가 꼭 지키려고 하는 규칙 중 하나는 바로 자신이 스스로 내린 평가도 나름대로 객관적 근거를 가지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내리는 평가가 나름대로 근거가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좋은 평가가 그리도 행복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마냥 좋은 평가를 내릴 수가 없다.

 

잘못 그랬다가는 나르시시즘에 빠졌거나 혹은 분수를 모르는 사람이란 평가를 받고는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경험으로 안다. 그래서 초등학생 정도의 아이들은 자신의 실제보다 훨씬 더 높게 평가하지만, 한 30대쯤 되면 현실적으로 자신을 평가하게 된다.

 

그런데 스스로 내리는 객관적 판단에는 과연 어떤 것들이 작용하게 될까? 우리는 분명히 자신을 판단하는데 있어서도 객관적이고 싶어하지만, 어떤 식으로 그 근거들을 모으게 될까? 사실 답은 쉽다. 그것은 보통 우연히 듣게 되는 다른 사람들의 칭찬이나 비난을 통해 얻어진다.

 

오늘 옷이 잘 어울린다든지, 오늘 평소보다 다르게 더 예뻐 보인다든지, 오늘 한 일을 참 깔끔하게 잘했다든지 하는 칭찬을 들으면 그때마다 자신에 대한 평가는 위쪽으로 상승한다. 물론 늘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이 과정은 평생 동안 진행되며, 위쪽으로 더 많이 상승한 사람들은 주로 자신감 있고, 자존감이 강하며, 행복하게 사는 반면, 아래쪽으로 떨어진 사람들은 소극적이며, 주눅들어 있고, 불행하게 살게 된다.

 

물론 이때 평가의 근거는 반드시 외부에서 오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나이를 먹을수록 다른 사람을 직접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자신에게 그리 유리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것을 자제한다.

 

물론 우리는 그것을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라고 좋게 포장했지만, 사실 그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어떤 상처를 주면 그만큼의 손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남을 대 놓고 평가하는 것이, 특히 나쁘게 평가하는 것이 매우 어리석은 짓임을 알기에 그렇게 한다.

 

그래서 비판보다는 칭찬을 훨씬 더 많이 한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외부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일이 별로 없다. 그러니 우리가 스스로 내리는 평가는 모두 왜곡되어 있다. 이것은 마치 매일 엄마로부터 외모 평가를 받는 것과 같다. 우리들 모두는 집에서는 훈남, 훈녀이다.

 

하지만 가끔 우리에게 정신이 번뜩 들게 해주는 순간들이 있다. 우리를 잘 모르거나, 혹은 주의 깊지 못하거나, 남의 문제라면 기어코 입으로 꺼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말을 들을 때마다 기분이 나쁘다고 느끼지만, 쉽게 무시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더 기분이 나쁘다.

 

말 그대로 늙어 보인다는 말을 듣거나 처음으로 아저씨란 말을 듣고 충격 받은 일이 일어날 때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이때는 자신에 대한 평가가 급격히 하락할 수도 있다. 그래서 기분이 몹시 상한다.

 

매일이 이런 식이다. 자신에 대한 평가가 높아지면 기분 좋고 행복하며, 자신에 대한 평가가 낮아지면 기분이 상하고 불행하다. 우리가 매일 겪는 일이다.


[2편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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