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죽음 후의 『나』

아이루다 2016. 8. 5. 08:37

 

이 세상의 많은 종교들은 죽음 후의 삶에 대한 나름대로의 이론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 명확한 사후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종교는 아마도 기독교일 것이다. 천주교와 개신교를 모두 포함한 기독교 말이다.

 

기독교에서는 사후 세계 모델로써 천국과 지옥이란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신의 뜻대로 선하게 살았던 사람은 천국에 가고, 신의 뜻에 반하여 나쁜 짓을 한 사람은 지옥에 간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 다른 종교인 불교는 이것과는 좀 다르다. 물론 불교는 기본적으로 죽음 후 세상에 대해서 윤회설을 기반으로 하고 있긴 하다. 그런데 사실 이 윤회설조차도 불교 내에서는 아주 다양한 의견이 있다.

 

그것은 바로 불교의 교종인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 즉 무아론과 연기설을 통해 존재 자체가 가진 그 어떤 고정불변한 유일성을 부정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무아론과 윤회설에 관해서는 불교 내의 너무도 많은 서로 다른 입장이 있으니, 잘 알지도 못하는 입장에서 이것에 대해 무엇이 옳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단지 사람들에게 알려진 바로는 카르마, 즉 업을 지니고 있는 끝없이 반복된 생이 결국 깨달음을 통해 끝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 부분은 불교 교리라고 보기 보다는, 인도의 고대 종교로부터 따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힌두교 교리일 수 있다는 뜻이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이슬람교 역시도 사후 세계에 대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이슬람교를 잘 몰라도 충분히 유추 가능한데, 이슬람교는 원래 기독교와 구약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대교도 같은 입장일 것이라고 판단된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럴 것이다.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만 합쳐도 아마 전 세계 종교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들 이외의 종교들 역시도 사후 세계에 대한 나름대로 타당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예상 가능하다.

 

무엇보다도 종교라면 그럴 수 밖에 없기도 하다. 왜냐하면 죽음이야 말로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무지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원래 인간은 자신이 잘 알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대상을 보면 두려움을 느낀다. 이 세상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아는 어른들조차도 낯선 곳에 가면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과학적 사실이 많이 알려지지 않은 시절엔 번개가 치거나, 월식이 일어나거나, 심지어 여자가 생리를 하는 것도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일단 모르면 무서운 것이다. 우리가 밤에 유독 더 많은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도 그것이다. 어둠은 우리가 정보를 취득하는데 있어서 가장 강력한 도구인 눈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 그래서 우리는 정보 부족으로 인해서 두려움을 느낀다.

 

원래 죽음은 정보 부족을 떠나서 그 자체로도 충분히 두렵다. 인간이 늙고 병들어서 죽어가는 것은 결코 쉽게 받아드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종교는 이 부분에 대한 해답을 준다. 종교가 사람들에게 믿어지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사후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 준다는 점이다. 그러니 이 부분에서 서로의 필요가 아주 잘 맞는다.

 

신도들은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길 원하고, 종교에서는 죽음의 공포를 느낄 필요가 없다고 설명해준다. 그로 인해서 종교는 인간이 죽음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유지가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하나가 있다. 이것은 불교의 무아론과 윤회론의 충돌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데, 무엇인가가 죽은 후, 윤회를 하든, 천국에 가든, 아니면 다른 동식물에 깃들든 간에 상관없이, 그 주체가 과연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부분이다.

 

사실 기독교 입장에서 보면, 이 답은 쉽다. 현재의 내가 천국이나 지옥에 있는 나이다. 즉, 영혼의 개념을 도입해서, 지금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바로 내 자신이 바로 천국이나 지옥에 가는 존재가 된다.

 

그래서 이런 상상을 할 수도 있다. 지금의 삶에서 가족을 이뤘다가 먼저 죽어서 헤어진 소중한 사람들과 천국에서 다시 만나서 영원히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런데 문제가 좀 있다.

 

어떤 사람이 두 번 결혼을 했는데, 두 번 모두 행복한 삶을 살았다면, 그 사람은 천국에 가서 두 명의 배우자와 함께 살아야 할까?

 

물론 이것은 그나마 별 것이 아니다. 정작 더 심각한 문제는, 감각 주체로써의 자신의 연속성이다. 어려운 말 같지만, 단순히 표현하면, 현재의 행복을 느끼는 자신이 천국에 가서도 그런 행복을 동일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물론 쉽게 상상되긴 한다. 우리가 현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들이 반복되면 되니까 말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행복은 유감스럽게도 바로 불행, 즉 고통이 있기에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맛있는 것을 먹을 때 행복한 이유는, 그 음식이 맛있는 이유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배가 고프기 때문이다. 아무리 맛있는 것도 배가 터질듯한 상황에서는 행복하게 먹을 수 없다. 너무 배가 부르면 우리는 다시 고통 속에 놓이게 된다. 주 중에 일을 했기 때문에 주말이 행복한 것도 같은 원리다.

 

즉, 이런 식으로 모든 종류의 행복은 원래 부족함으로부터 생겨난다. 그런데 부족함은 당연히 고통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죽기 때문에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존재인 우리가 죽어서 천국에 가서 영생을 살 게 되었을 때, 과연 고통이 없이 그 행복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물론 해결책은 있다.

 

그것은 바로 현생에 있었던 우리들 자신이 천국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변하는 것이다. 즉, 현재의 나는 사라지고 어떤 식으로든 정화된 다른 존재로 변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감각의 방식도, 현생의 기억도, 그리고 우리가 현생에서 겪는 모든 경험과 추억도 사라져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존재가 남아 있는 한, 우리는 고통에 기반한 행복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상 '내' 가 없어지는 과정이다. 나의 연속성이 깨진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물론 이것은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방법이 없다. 단지 확실한 것 중 하나는, 그렇게 되었다면, 그 모습이 어떤 모습이든 간에 현재의 나와는 다른 존재일 수 밖에 없다.

 

우리는 경험과 기억을 통해 그 고유성이 정의되는데, 그 생성 방식이 변경되었기 때문에, 기존의 경험과 기억은 더 이상 의미있는 정보가 될 수 없다. 이것은 마치 구형 비디오 테이프를 최신 DVD 플레이에서는 재생 시킬 수 없는 것과 같다.

 

결국 현생에서 우리를 행복하게 해줬던 그 많은 것들은 더 이상 죽음 후의 존재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현생에서 맺은 인연도 모두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지금과는 뭔가 다른 어떤 존재가 되어야만 영생 속에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못한 경우엔, 우리는 지루하고 권태로운 영생의 늪에 빠지게 될 것이 분명하다.

 

사실 이런 문제로 인해서 불교의 무아론이 의미가 있다. '인식 주체로써의 고정불멸의 나'는 없다는 불교의 입장은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다.

 

하지만 불교 역시도 윤회설을 도입하게 되면 충돌이 생긴다. 도대체 내가 없다면, 누가 윤회를 할 수 있을까? 만약 카르마가 있어야 한다면 그 주체는 누구인가에 대한 문제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누군가 니르바나, 즉 깨달음을 얻었다면 그 깨달음의 주체는 누구인가에 대한 문제점이다.

 

아마도 이 세상에는 사후 세계에 존재할 그 어떤 존재에 대해서 아주 명백히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죽음이 비밀을 완전히 파해지지 못하는 한 그럴 것이다.

 

그러니 사후 세계에 대해서는 좀 더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해 보인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든 종교를 믿고 있기 때문에, 자신만의 사후 세계를 상상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현생에서 천국에 가기 위해서 노력하기도 하고, 현생에서 선업을 쌓기 위해서 노력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가게 될 사후 세계가 과연 어떤 문제점을 가지고 있을지에 대해서는 잘 생각하지 않는 편이다.

 

조금만 생각해도 이것에 대한 문제는 쉽게 드러난다. 우리는 지옥은 쉽게 그려내지만, 천국은 쉽게 그려내질 못하기 때문이다.

 

고통은 단순하다. 불로 태우면 된다. 죽지 않는 존재가 영원히 타면서 끝없는 고통을 느끼게 되면 지옥이 금세 상상이 된다.

 

그런데 천국은 어떻게 그려내야 할까? 내가 그대로 존재한다면, 현재의 세상에서 내가 느끼는 그 모든 종류의 감정을 또 다시 느껴야 할 텐데,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현생에서 행복의 감정도 느끼지만, 불행의 감정도 많이 느낀다. 그래서 질투하고, 분노하고, 짜증나고, 우울해 한다. 이런 나쁜 감정을 천국에서 계속 느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반드시 현재의 내가 사라져야 한다. 현생에서 어떤 것을 감정적으로 느꼈던 내가 사라져야 한다. 그런데 내가 사라진 천국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리가 죽음을 정말로 두려워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자신의 사라짐으로 인해서 그런데 말이다.

 

그러니 이 둘은 서로 상충된다.

 

어떤 이들은 죽음은 완전히 끝이라고도 한다. 보통 물질주의자들이 그런 말을 한다. 이 말도 일리가 있다. 우리는 사실 영혼도 없고, 윤회를 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저 잘 조합된 물질로 인해서 전기 신호가 발생하고 있는 유기적 기계일지도 모른다.

 

아직까지는 죽음에 대해서 우리 인류가 밝혀 낸 것은 너무 적다. 살아서 경험하는 것에 대해서 알아낸 것에 비하면 정말로 적다. 물론 소수의 사람들은 각자 경험을 통해서 죽음을 증언하기도 한다.

 

임사 체험이나 전생 체험들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하지만 이들의 말을 믿기엔 아직은 많이 부족하다. 그나마 전생 체험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많은 연구가 이뤄지고 있는 듯 하다. 그러니 앞으로 꽤나 많은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좀 더 많은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작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죽음에 대한 대면이다. 죽음은 우리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인 태어남과 죽음 중 하나이다. 더군다나 태어남의 순간은 우리가 전혀 인지할 수 없다. 우리가 인지 가능한 사건은 오직 죽음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살고 싶고, 죽음을 두려워하기에 죽음 자체를 생각하는 것을 꺼려한다.

 

그래서 평소에도 죽음은 늘 남의 것으로만 여긴다. 가끔 장례식장을 가긴 하지만, 늘 손님으로만 존재하고 있다고 믿는다. 자신도 언젠가는 장례식장의 주인공이 될 것이란 것을 좀처럼 상상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은 냉정히 말해서 외면이다. 그리고 모든 종류의 외면은 문제를 더 크게 만든다.

 

자신의 죽음과 대면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없다. 단지 우리는 자신의 죽음을 바라봄으로써 자신의 삶에 대한 좀 더 다른 입장을 고려해볼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마치 영원한 삶을 살 것처럼 끝없는 욕망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생 써도 다 못쓸 돈을 원하고, 남에게 상처를 주거나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내일 당장 죽는다면 절대로 하지 않을 일을 거리낌 없이 한다.

 

우리가 죽음과 대면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물론 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겠지만, 모든 것이 없던 것으로 변하는 죽음은 우리 앞에 반드시 존재하고 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진실이다.

 

여기에서 사후 세계가 어떨지, 자신이 천국을 갈지 못 갈지, 정말로 윤회가 일어날지 않을지를 고민하기 보다는, 지금의 삶 자체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해야 한다.

 

죽음에 대한 사유가 가져 오는 가장 좋은 점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바라봄으로써 삶이 가진 가장 중요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때 적어도 죽음이 우리가 살아서 느끼는 모든 의미와 행복을 가져다 주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