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정신적 상처에 대한 조금 다른 해석 - 1

아이루다 2016. 7. 29. 10:02


 

사람은 살아가면서 다양한 형태의 갈등을 겪는다. 그리고 그 와중에 상처를 받기도 한다.

 

이때 사람이 받는 상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실제 행동으로 인해 입게 되는 육체적 상처이고, 나머지 하나는 다른 사람의 말이나 태도 등을 통해 입게 되는 정신적 상처이다.

 

육체적인 상처는 인간뿐만이 아니라 모든 육체를 가진 존재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즉, 그래서 역사상 인간 사회의 초기부터 이것은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육체적 상처라는 것이 사실 폭력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랜 시간 동안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고, 지금은 꽤나 안정적으로 관리되고 있는 편이다. 뭐, 인간이 사는 모든 지역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반면에 정신적 상처는 최근에야 겨우 인정되고 있는 편이다. 그것은 명백히 눈에 보이는 상처도 아니고, 상처를 입었다고 해도 그것을 증명하기도 힘들기 때문에 그렇다. 이 상처는 이런 식으로 그리 큰 일이 아닌 것으로 평가되는 경향이 있어서, 육체적 상처에 비해서 훨씬 방관되어 있다.

 

우리는 누군가 감기에 걸리면 쉬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아프다는 말을 하면, 정신력을 강하게 해야 한다고 말 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신적 상처가 육체적 상처에 비해서 덜한 것은 아니다. 사실 어떤 경우엔 정신적 상처가 사람을 더 크게 망가뜨릴 수도 있다. 그래서 이 문제는 앞으로 인간 사회가 풀어야 할 아주 힘든 숙제가 될 것이다.

 

이것이 힘든 이유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육체는 거의 비슷해서 상처의 심각성을 표준화 시킬 수 있는 반면, 인간의 정신은 너무도 다양해서 얼만큼의 상처를 입었는지 표준화 시키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팔이 부러진 것과 같은 육체적 상처는 모든 사람에게 비슷하지만, '병신'이란 말을 들었을 때 누군가는 죽을 정도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반면, 어떤 누군가는 웃을 수도 있다.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현재 자신이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그 말에 대한 반응이 달라질 것이다. 아주 행복한 날엔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말이, 우울하고 짜증나는 날엔 살인 충동을 느끼게 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이런 식으로 정신적 상처를 입었는지 여부와 그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를 결정하기가 매우 힘들다. 그러니 객관적으로 판단하기는 더욱 더 힘들다.

 

사실 요즘은 아주 재수가 없거나 혹은 큰 사건에 휘말리지만 않는다면, 육체적으로 상처를 입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해봐야 위협 수준이거나 혹은 실제로 상처를 입었다고 해도 법적 판단을 통해서 치료비도 받고 상대에게 복수를 할 수도 있다. 그러니 '맞은 사람이 이긴 것이다' 라는 말도 있다.


그래서 요즘 우리가 어떤 상처를 입었다고 하면, 그것은 육체적일 가능성보다는 정신적일 가능성이 높다고도 할 수 있다. 즉, 요즘 시대를 사는 우리는 정신적 상처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다.

 

그럼에도 정신적 상처는 육체적 상처에 비해서 대처가 많이 부족하다. 기껏해야 녹음이나 주변 사람들 증언을 통해서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상황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자칫하면 시간 낭비, 돈 낭비만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이 말이나 태도 등으로 인해 입게 되는 상처는 도대체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까? 모든 것을 녹화해 놔야 할까?

 

뭐, 미래의 어떤 시대엔 그것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요즘 차량에 부착된 블랙 박스처럼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이 늘 녹화되고 있는 세상이 열릴지도 모른다. 그때는 좀 나아질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이것은 사생활 문제와도 관련되기 때문에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녹화 되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나지는 않는다. 그것이 정말로 정신적 상처가 되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서 뭔가 좀 더 나은 해결책이 필요하다. 즉, 좀 더 근원적이고 원론적인 관점에서 해결책이 있어야 한다.

 

지금부터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기를 시작해보자.

 

대부분의 정신적인 상처는 어떤 사람들의 말이나 태도 혹은 동작 등으로 일어난다. 더해서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으로도 일어날 수 있다. 실제로 그 어떤 것이든 가능하다. 변태 남자가 자신의 몸의 일부를 여자에게 보여주는 것도 심각한 폭력이 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사실 인간의 모든 것이 바로 폭력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자신이 아닌, 남에게 어떤 식으로든 의사를 표출하는 것 자체가 모두 폭력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정신적 폭력은 하는 사람의 의도와 상관이 없다. 그것은 받는 사람에게 상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무리 좋은 의도로 말을 해도 듣는 사람은 기분이 나쁠 수 있다.


인간이 외부를 향해 하는 모든 것을 묶어서 '표현'이란 단어를 적용시켜보자.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왜 표현을 할까?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바로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이다. 장사꾼이 '이 옷은 원가 이하로 파는 것이에요' 라는 표현을 쓸 때, 그것이 진실이나 거짓이냐 상관없이, 결국 장사꾼의 말은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하는 말이다.

 

장사꾼만이 아니다. 우리도 앞에서 길을 막은 사람에게 손으로 비켜달라는 표현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것을 자신의 권리를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원칙적으로는 결국 자신의 이득을 위한 것이다. 아니 손해를 입지 않으려는 목적이라고 해도 괜찮을 듯 하다. 그리고 손해를 입지 않는 것도 일종의 이득이다.

 

두 번째는 자기 자랑을 하기 위해서이다. 여행을 가서 사진을 찍은 후,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표현이 흔한 자랑의 예가 된다. 동창회 모임에 나가서 최근 시험을 잘 본 자신의 아이에 대해 얘가 너무 공부만 한다고 걱정하면서 말하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이런 자기 자랑에 대한 표현은 사실 너무도 많아서, 아마도 우리 인간이 하는 표현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앞의 예처럼 자랑을 하기 위한 많은 표현은 사실 좀 숨겨지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누구나 자랑을 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자랑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어른이 되어 가면서 매우 조심스럽거나 교묘하게 자기 자랑을 하는 능력을 배우게 된다.

 

세 번째는 자기 만족을 위해서 표현을 한다. 이것도 크게 보자면 자기 자랑에 해당되긴 하는데, 자랑에 비해서는 훨씬 수동적인 태도이다. 그리고 그 근거가 어느 정도 있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더 낫다.

 

예술을 하거나, 자신이 아는 지식을 남들에게 설명을 하는 모습이 자기 만족의 흔한 예이다. 사실 이 글도 자기 자랑과 자기 만족 상이에 걸쳐 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그것이 없다면, 이 글이 쓰여질 이유가 없다. 이 상황이 조금 더 전문적이 되면, 책을 쓰는 것으로 나타나고, 그렇게 될 경우 자기 만족과 이득을 동시에 추구하는 상황도 된다.

 

그러니 누가 책을 쓰고 싶지 않겠는가? 그럴만한 지식도 부족하고 써봐야 남들이 읽을 것 같지도 않으니 시도조차 못할 뿐이다.

 

아이를 가르치는 선생님은 경우도 이득 추구와 자기 만족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무료로 누군가를 가르치는 봉사 활동을 하는 사람인 경우라면 자기 만족만 추구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인간의 모든 표현은 자기 이득, 자기 자랑, 자기 만족 세가지 구성 요소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사실 이것 말고 무엇이 더 있겠는가?


우리는 조언을 할 때도, 잡담을 나눌 때도, 심각한 주제를 말 할 때도, 나라의 미래를 걱정할 때도, 글을 쓸 때도, 그림을 그릴 때도, 연주를 할 때도 결코 이 세 가지 목적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아무리 고귀한 목적이든, 아무리 정의로운 목적이든, 아무리 그럴싸한 목적이든, 인간이 하는 모든 표현은 오직 이 세 가지 목적을 얻기 위해서만 행해진다.

 

하지만 이후 우리는 심각한 실수를 하나 저지른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는 표현에 세 가지 목적 이외에 뭔가 추가적인 것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것이 큰 문제를 일으킨다. 그것은 바로 명분, 대의, 도덕, 선과 악, 정의와 불의, 옳고 그름 등등,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듣게 되는 많은 좋은 것들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결국 모든 갈등의 원인이 되고 만다.

 

우리는 원래 표현에 전혀 없었던 그 어떤 것을 얹는다. 그런데 흥미롭게 그렇게 하는 이유 또한 원래 세 가지 목적을 위하고 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명분과 대의를 표명하며, 정의를 부르짖는 이유 역시도 그저 자신의 표현을 더 잘 들어주어서 자신이 원래 의도했던 세가지, 즉 이득, 자랑, 만족을 최대한 얻고자 한 것뿐이다.

 

원래 목적은 단지 그 세 가지 뿐이지만, 뭔가 다른 것이 있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상대를 착각하게 만들고 자신도 착각하는 것 뿐이다. 대의와 명분을 주장하고, 옳다고 주장하면서 사람들의 의견을 모으지만, 결국 그 자신의 세 가지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

 

원래 그것이 가치 있고, 정의로우며, 중요하다고 여길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잘 들어준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세 가지 목적이 달성될 가능성은 한껏 높아지게 된다.

 

지금까지 표현에 깔린 본질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이제는 표현에 대한 추가적으로 특징 한 가지를 더 생각해야 한다.

 

인간이 하는 모든 표현은 자신에게 하는 것이 아닌, 타인을 대상으로 이뤄진다. 즉, 우리가 하는 모든 표현은 다른 이들에게 해석이 될 때 유일하게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말이간 하지만, 이 말이 가진 의미는 생각보다 매우 중요하다.

 

육체적 상처는 내가 해석하냐 않느냐는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누군가 나를 야구 방망이로 때리면 내 몸은 망가진다. 몽둥이로 맞으면 아프고 뼈가 부러진다 라는 해석을 할 필요가 없다. 그냥 아프고 뼈가 부러진다.

 

하지만 다양한 표현으로부터 생겨나는 정신적 상처는, 그 시작점이 표현이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그 표현을 내가 해석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사실상 아무런 문제가 없을 수 있다는 가정을 할 수 있다.

 

영어권에서 쓰이는 욕 중에서 가운데 손가락만 올리는 욕이 있다. 우리나라에도 많이 알려져서, 그런 손가락 모양을 하면 사람들은 기분 나빠한다. 그런데 그 손가락 욕을 어린 아이들에게 하면 어떨까?

 

당연히 아이는 그것을 해석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냥 재미있게 웃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쓰는 많은 욕도 마찬가지다. 언어 능력이 부족한 아이들은 그것을 욕으로 알아 듣지 못한다. 성인이라고 해도 쓰는 언어가 다르면 아무리 욕을 해도 그것을 알아들을 방법이 없다.

 

그나마 성난 표정이나 과격한 행동을 통해 그 사람이 화가 났음을 짐작 정도 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표현에 대한 특징이 바로 우리가 정신적 상처에 대처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되어 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상대의 표현을 해석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정신적 상처를 입을 일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무의미한 말이고, 실현 불가능한 제안이다.

 

하지만 이것을 통해 또 다른 사고의 전환을 기대해 볼 수 있다. 이것은 현재 자신이 받고 있는 정신적 상처가 과연 오직 상대의 잘못으로만 비롯되고 있느냐에 대한 성찰을 할 수 있는 시작점이 되어 준다.

 

육체적 상처는 상대의 행동으로 인해 생겨나기 때문에, 성찰이 필요가 없다. 상대가 나를 죽이려고 한다면, 맞서 싸우든지 도망치든지 해야 한다. 여기에서 성찰을 하다간 죽을 뿐이다.

 

하지만 정신적 상처는 내가 죽고 사는 일이 아니다. 그것이 우리를 육체적 상처보다도 더 힘들게 하고, 고통 속으로 밀어 넣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을 결정하는 최종 권한은 상대가 아닌, 바로 우리들 자신에게 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자신이 정신적 상처를 받는지를 결정 하는 주체가 된다. 즉, 이것은 육체적 상처처럼 오직 상대에게만 종속적인 입장이 아니다. 최종 결정권은 남이 아닌 우리들 자신에게 있다.

 

이것을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흔히 우리는 자신이 상처를 입게 되면, 무조건 상대를 탓하려고 한다. 그것을 마치 육체적 상처처럼 대한다. 자신은 아무런 문제가 없고, 오직 상대만 문제라고 생각한다.

 

상대가 자신의 의견을 묵살하거나, 자신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하거나, 자신이 믿는 것과든 상반된 의견을 제시하거나, 자신을 무시하고 비웃거나, 욕을 하거나 하는 등등의 표현을 하면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는 상대로 인해서 기분이 나빠지는 순간, 그 모든 분노는 상대를 향한다. 거기엔 자신의 잘못은 하나도 없다. 오직 상대로 인해서 촉발된 것이라고 믿는다.

 

물론 실제로 그럴 수 있다. 가만히 있는데 누군가 갑자지 와서 막 욕을 하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이 순간에도 우리의 잘못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최종적으로 이것을 상처로 결정한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우리들 자신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칼로 찌르면 다들 다치지만, 같은 욕을 들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화를 내지는 않는다. 사실 이것은 참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당연하게도 최종 결정은 자신이 하기 때문이다.



[다음 편으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