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가치의 소멸과 집착 - 3

아이루다 2016. 7. 15. 09:00


유교에 관한 대표적 철학자는 바로 공자님이다. 그리고 공자는 인간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인'이 학습을 통해 끝없이 발전하면, 사회적으로 정해진 어떤 기준점에 합당한 성인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그것을 보여주는 증거로 '예'를 말했다.


즉, 공자는 인과 예로써 인간을 설명했던 것이다.


불교의 대표적 철학자는 당연히 부처님이다. 그리고 부처 역시도 스스로 공부하여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단지 공자와의 차이점은, 그 기준점은 오직 자기 자신이라고 한 것만 차이가 난다.


그런데 이 단 하나의 차이로 인해서 이 두 사람간의 차이는 극명하게 벌어지고 만다.


공자의 주장에는 기준선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기준선은 바로 사회적으로 이미 정의된 - 사실 누가 그것을 정했는지를 모르지만 - 아무튼 이미 정해진 목표가 있다. 즉, 마치 자격시험처럼 그것은 한 사람의 인간이 제대로 되었는지를 판단하는 근거가 된다.


문제는, 그 기준점을 정한 그 자체이며, 그로 인해서 다수의 실패자가 나오게 된다는 점이다. 또한 기준점 자체도 마음대로이다. 그것을 정해주는 절대적 존재가 없기 때문에, 사회의 구조에 따라, 시대에 따라, 사람들의 가치관에 따라 수시로 변하게 된다.


나쁜 것은 아니지만, 모든 기준점은 그 기준에 합당하지 못한 존재들에게 결국 폭력이 될 수 있다. 평균 키가 존재하면, 평균 키보다 작은 사람들은 열등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처음부터 평균 키라는 것이 없었다면, 아무런 문제가 아닌데, 자꾸 평균을 만든다. 그러니 그 평균치를 기준으로 사람들을 평가하는 행위가 일어난다. 이것이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이 된다.


그런데 사실 공자의 기준치는 평균도 아니다. 그것은 아주 높은 수준의 기준점이다. 공자의 기준점으로 사람들을 평가하면, 1%도 채 합당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공자의 기준으로 보면 우리는 모두 실패자이다.


그리고 이것은 지배자들에게 좋은 도구가 된다. 백성들의 기준점을 정하고, 신하의 기준점을 정하고, 그것이 무엇이든 기준점을 정해서 자신의 통치를 합리화하고 법의 가치를 인정하도록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왕 자신도 기준점이 존재하긴 한다. 하지만 왕은 왕이니, 그 기준점을 통과했는지를 평가할 사람은 스스로 밖에 없다. 혹은 후세의 역사학자들의 몫일 뿐이다.


공자의 철학은 가치 기준점에 대한 평가이기도 하다. 즉, 인간의 삶에 대한 가치는 그 기준점을 통과했느냐 여부로 결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준점이 바로 인간의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온다.


단순히 생각해도 지금 현재의 상황과 그리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우리는 문명의 발달로 인해서 스스로 어떤 가치를 만들어 내는 것이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그래서 우리는 외부에서 정해준 가치 중 하나를 선택한 후, 그것을 과도하게 집착하고 있다. 그래서 좌절하고 갈등한다.


반면에 부처의 입장은 어떨까?


부처 역시도 가치 추구라는 입장은 동일하다. 그리고 그 달성 기준점은 공자에 비해서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높다. 사실 공자가 말하는 군자가 되기 위한 조건은 부처가 말하는 깨달은 자가 되기 위한 조건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것이 폭력이 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그 평가 기준이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있기 때문이다.


즉, 누구나 자신의 성공 여부를 평가하는 것은 외부적 기준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느끼고 경험하는 것을 통해서 결정한다. 그러니 그것을 통과하든 못하든 오직 개인적 문제이다.


그로 인해서 누군가에게 비난을 받거나, 질책을 받거나, 채찍질 받는 경우는 없다. 또한 남에게 그것을 강요하거나 주장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오직 자신만의 영역이다.


이 두 사람의 관점은 기준점의 위치가 외부냐 내부냐에 따라 이렇게 완전히 달라진다.


이 두 사람이 주장하는 철학 중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것을 고려해 봐야 할까?


답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지금까지 우리는 가치에 대한 기준점을 외부에서 정했기에 이 모양이 되었다. 그러니 당연히 부처의 입장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이해하고 받아들어야 할 해결책이다. 즉, 우리는 이제 가치를 추구하되, 그 가치의 기준점을 남으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스스로 정해야 한다.


하지만 사실 말이 쉽지,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대다수의 가치는 외부에서 동조를 해줌으로써 증명된다. 즉, 남들이 모두 아니라고 하면, 있던 가치도 사라져버리고 만다. 아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견디지 못하고 버리고 만다.


그리고는 남들이 가치 있다고 말하는 것을 잘 해내려고 노력하면서 산다. 하지만 이미 말했듯이 이것은 이미 실패한 전략이다. 남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따라 하는 것은 집착과 경쟁과 갈등을 만들어 낼 뿐이다.

우리는 지금 자신만의 고유한 가치가 필요하다.


사실 지금도 존재하는 것이 있다. 분명하게 있다. 각 가정에서 키우고 있는 아이들이 바로 그 증거이다. 아이들은 각자 고유한 가치가 있다. 그것은 외부에서 온 것이 아니다. 오직 그 가정에서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유일하고 결코 부품화되지 않은 전체적인 가치이다.


그것을 무리하게 외부에 자꾸 자랑하고 공유하려는 태도가 문제일 뿐, 그 자체는 충분히 고유하고 개별적이다. 사실 문제가 하나 더 있긴 하다. 그것은 바로 아이를 키울 때, 사회적으로 공인된 가치를 추구하라고 강요하는 태도이다. 중요한 문제이지만, 글의 범위를 넘어서니 넘어가도록 한다.


그렇다면 아이와 같은 고유한 가치는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계속 아이를 낳는 것은 답이 아닐 것이다. 뭔가 다른 방법론이 필요하다.


방법은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끝없는 생각과 행동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자각'을 해야 한다.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가치 기준을 외부에서 찾도록 교육받았다. 우리가 학교를 다닐 때부터 배우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도덕 교육이 바로 그것의 결정체이다.

 

우리는 모두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도록 사회적으로 이미 정해진 기준점을 지켜야 할 존재가 되었다. 물론 그것도 잘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도 넘쳐나지만, 그들 역시도 그것을 지켜야 한다는 점은 안다. 단지 자신의 이득을 추구하기 때문에 잘 지키지 못할 뿐이다.


이것이 아주 강력하게 우리를 옥죄고 있다. 우리는 잘 못 느끼지만, 우리가 양심의 소리라고 말하는 거 자체가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 양심의 소리는 우리의 본질이 말하는 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오직 우리가 오랫동안 교육 받아 온 일종의 세뇌된 마음이 내는 소리이다.


이것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우리는 다른 관점에서 이 기준점을 바라봐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개인적으로 사회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수단이며, 우리 전체가 망하지 않고 잘 살 수 있는 방법론이다. 그것은 정의도 아니고 선도 아니다. 그저 수 많은 방법론 중 오랜 시간 동안 다듬어지고 다듬어진 보편적 기준점이다.


그러니 우리가 그것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단지 벗어나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벗어날 방법도 모를 뿐이며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뿐이다. 그래서 오랜 시간 노력을 해야 한다.


생각을 하고, 또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하고, 또 행동을 해야 한다. 마치 초등학교 시절부터 수 많은 시간 동안 교육되었듯이 또 다시 자신을 다시 교육해야 한다. 단지 이 순간의 교육은 누구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다. 오직 혼자만의 힘으로 해내야 한다.


물론 좋은 교과서들은 존재한다. 부처님의 말씀이 있고, 수 많은 철학자들이나 사상가들의 주장이 존재한다. 심리학 책도 있고, 과학 서적도 있다.


우리가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지식을 쌓기 위해서 책을 읽지만, 진짜로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물론 지식은 아직도 충분히 그 자체로 가치가 있기에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은 맞다.


하지만 미래의 어떤 날엔 그런 지식조차도 가치가 없어질지도 모른다. 우리 머리 속에 컴퓨터가 이식되고, 수 많은 지식을 실시간으로 찾아 볼 수 있는 날이 온다면, 과연 지식이 과거처럼 온전히 가치가 있을까?


쉬운 예로 지금 그렇게나 중요하게 다뤄지는 외국어 능력은 20년만 지나도 그 자체가 무의미하게 될지도 모른다. 실시간 번역기는 언제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다.


실제로 미래의 인간들에게 남은 유일한 가치는 바로 '창의력' 밖에 없을 것이다. 사실 지금 역시도 인간의 가장 위대한 능력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그 창의력 조차도 그 기준점을 남이 아닌, 나에게 맞출 때 생겨난다. 왜냐하면 고유한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고유함은 외부의 기준이 아닌, 스스로에게서만 생겨난다.


그러니 스스로 정한 가치 기준점을 찾기 위해서 수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이것이 이 노력은 우리가 잃어버린 가치를 되찾는 유일한 방법이다. 문제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점과 지속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어렵기도 하다.


사실 어느 지점에 가서는 포기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적어도 다수가 정한 기준점은 벗어나서 좀 더 덜 조건적인 가치들을 추구하면서 사는 형태로 마무리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도 나름대로 괜찮다. 무엇이든 스스로 결정된 것이라면 다 좋다. 설령 남의 기준에 맞춘 것이라고 해도, 그 자체가 스스로 결정한 것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오직 문제는 남들이 결정해준 것들을 무의식적으로 추종하는 삶이다.


남의 결정은 나의 행복이 아니다. 남의 결정은 남의 행복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자각'을 해야 한다. 스스로 깨어나지 못하면, 평생을 무의식 속에서 남들이 시키는 데로 살다가 죽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인간 사이의 그 어떤 행위도 누군가의 이득이 아닌 경우는 없다. 사람을 죽이는 행위조차도 살인자에겐 이득이 되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수많은 행위들 중에서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것을 선이나 정의라고 믿는다. 외국과 우리나라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나라가 정의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적군에게는 적군이 정의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이득에 대한 입장 차이일 뿐이다. 그렇다면 남들이 말하는 가치 기준은 과연 누구의 이득을 기준으로 하고 있는 것일까? 구체적인 답은 모르지만 적어도 나의 이득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단지 그것이 나와 잘 맞을 때만 다행인 것이다.


운동을 하는 것이 가치 있다고 했을 때, 달리기를 해서 건강해지면 다행인 셈이다. 하지만 관절염을 앓고 있는데 달리기를 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그것은 스스로를 망치는 행위이다. 하지만 사회는 사회 구성원의 건강함을 위해서, 아니 좀 더 냉정히 말하면 의료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 달리기를 추천할 수 밖에 없다.


나의 행복은 오직 나만이 결정할 수 있다. 그러니 나의 가치 기준은 오직 나만 정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의 통과 여부도 오직 나만이 판단 할 수 있다.


이것이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좀 편하고자 했을 뿐인데, 자신도 모르게 일과 노동으부터의 가치를 뺏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갑자기 불편하게 살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좀 더 나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더해서 너무 편리함만 추구하는 것을 스스로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모든 편리함은 가치를 상실시키는데 일등공신이다.


예를 들어서 어느 육아 전문 단체에서 어떤 아이든 아주 훌륭하게 잘 키워준다면, 아이를 키워야 하는 부모 입장에서는 거기에 맡기는 것이 단연코 편하겠지만, 그럴 경우 결코 원래 가질 수 있었던 아이의 가치를 동일하게 유지할 수는 없다. 원래 힘들지만, 고생하고, 노력하고, 울고, 사랑하면서 키워야 가치가 생기는 것이다.


그나마  아직까지는 이 세상에 남은 가치들이 있으니, 소중히 다뤄야 할 것이다. 물론 그것들이 유지 가능한 시간도 그리 오래 남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우리는 지금 너무 빨리 발전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 정신적 발달은 기술의 발달에 비해서 너무도 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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