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똑똑한 사람들은 사실 똑똑하지 않다

아이루다 2016. 7. 23. 10:38

 

외모, 힘, 운동 능력, 지능 등등 인간 사회에서 대표적으로 인정 받는 능력들이 있다. 이 중에서 요즘 시대에 가장 인정받는 능력을 하나 꼽는다면, 과연 어떤 능력이 일등을 차지할까?

 

물론 다들 중요하긴 할 것이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능력은 바로 지능이다. 지능은 인간과 인간이 아닌 존재를 구분하는 기준으로도 쓰일 만큼 중요하기도 하고, 사람과 사람의 수준을 나누는 목적으로도 무척 중요하게 사용된다.

 

사람들은 누구나 똑똑한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지금 이 순간 똑똑하지 못한 사람들 중에서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꽤나 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똑똑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똑똑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똑똑한 사람들이 세상을 어떤 식으로 보는지, 매일 접하는 지식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는지 짐작조차 못한다. 그러니 지적 능력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아예 상상조차 못한다.

 

이것은 돈이 없는 사람들은 돈이 정말로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이해하기 힘든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이 보기에, 부자들이 돈 쓰는 것을 보면 그냥 낭비 같기도 하고, 왜 저런 곳에 돈을 쓰는지 이해가 가지 않기도 한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은 돈이 그렇게 많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매일 매 순간 돈을 아껴야 하는 사람이 돈을 아낀다는 개념 자체를 모르는 사람들의 행동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이것은 똑똑하지 않은 사람이 똑똑한 사람을 이해하는 과정과 거의 비슷하다.

 

반면에 똑똑한 사람들은 안다. 똑똑한 사람들은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지, 그리고 똑똑하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세상을 이상하게 보고 있는지를 지식적으로는 안다. 자신이 똑똑하지 않은 것을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똑똑하기에 책을 많이 읽었을 것이고 따라서 예상은 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대충 알 뿐이다.

 

그래서 똑똑한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있다. 단지 우리의 똑똑함은 칼로 자르듯 나눌 수 없기 때문에 그 벽이 명확히 느껴지는 것이 아닐 뿐이다. 그리고 이 두 그룹은 서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원래 사람이 타인을 이해하는 방법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하는 편인데, 서로 상대 입장이 되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이다.

 

아무튼 똑똑함 자체에 대한 가치는 똑똑하지 않는 사람들보다 똑똑한 사람들에게서 더 크게 느껴지게 된다. 똑똑한 사람들은 스스로 경험을 했기 때문에, 똑똑한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똑똑한 사람들은 사람이 얼마나 똑똑한지를 알아보는 방법을 개발했다. 그것이 바로 지능 지수, 즉 아이큐라고 불리는 수치이다.

 

이런 전체적인 흐름을 정리하면, 요즘 시대엔 확실하게 아이큐가 높은 사람이 똑똑한 사람으로 평가되며 또한 능력 있는 사람으로 평가된다. 사실 실제로도 그렇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런 생각이 든다. 과연 똑똑함이 그렇게 중요한 능력일까?

 

잘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의 목적은 똑똑함이 아니다. 우리는 오직 행복하기 위해서 산다. 똑똑함은 단지 행복을 위해 꽤나 중요한 수단일 뿐이다.

 

사실 똑똑하면 행복할 가능성은 무척 높아진다. 하지만 이것이 늘 그랬던 것은 아니다. 과거 구석기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똑똑함보다는 힘이 훨씬 더 중요한 능력이었을 것이다.

 

과거 조선 시대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어떤 신분을 타고 났는지가 훨씬 중요한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혹은 어떤 마을에서 태어나 어떻게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행복 기준점만 본다면, 당시 사람들은 똑똑함은 고사하고 심지어 글자를 몰라도 행복하게 살 수 있었다.

 

똑똑함이 행복을 가는 지름길이 된 것은 인류 역사상 꽤나 최근에 일어난 현상이다. 사회 시스템이 발달하면서 누구나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됨에 따라서 그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과거엔 똑똑함보다 타고난 신분이 훨씬 더 삶에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 분명하다.

 

과거엔 어땠든지 상관없이, 지금 시대는 똑똑함은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가장 좋은 도구이다. 그리고 높은 권력을 잡기에도 훨씬 유리한다. 명예를 얻기도 쉽다. 더해서 좋은 짝을 만나기도 좋다.

 

그래서 똑똑함은 결국 매우 중요한 능력이며,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보다 더 중요한 능력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황당한 뉴스를 볼 때가 있다. 꽤나 좋은 교육을 받고, 남들이 쉽게 가지 못하는 대학을 졸업하고, 국가 고시를 봐서 꽤나 높은 지위에 올라간 사람들이, 정말로 엉뚱한 소리를 하거나 혹은 도대체 왜 저런 짓을 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할 행위를 하는 것을 본다. 그것도 꽤나 자주 그렇다.

 

정치인만 그런 것이 아니다. SNS 상에서도 넘쳐 난다. 똑똑함의 능력을 통해 지식과 논리력을 무장을 했는데, 하는 말은 헛소리거나 혹은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는 한없이 어리석은 소리들을 한다.

 

아주 똑똑한 사람들 조차도 엉뚱하거나 이상한 종교에 빠지기도 하고, 터무니 없고 말도 안 되는 이론에 현혹되어서 평생 그것을 연구하기도 한다. 심지어 엉뚱한 망상에 사로 잡혀서 끔찍한 학살을 저지르기도 한다. 도대체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왜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할까?

 

물론 기본적으로 똑똑함과 인성이 비례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긴 하지만, 똑똑한 사람들이 왜 저런 앞뒤 분간도 못하고, 저런 행동이나 저런 말을 하는지가 잘 이해가 안 간다.

 

그런데 사실 답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똑똑한 사람들은 자신의 똑똑함으로 인해서, 살아오면서 별로 틀려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원래 인간은 자신의 어떤 생각이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은 꽤나 싫어한다. 우리는 지기 싫어하기 때문에, 또한 자신이 잘나고 싶어하기 때문에, 어떤 갈등이나 대립이 일어났을 때 틀린 쪽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이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논리와 논리, 지식과 지식이 맞붙는 자리에서는 지고 싶지 않아도 질 수 밖에 없다. 상대에게 지식으로도 딸리고, 논리력도 딸리게 되면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는가? 답이 없다.

 

하지만 우리가 이것을 싫어하는 것과는 달리 이 경험이 늘 나쁜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틀렸다는 경험은 우리를 조심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틀릴 수 있다는 걱정 때문에 뭔가를 설명하거나, 뭔가를 주장할 때 늘 틀릴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생각하고 행동하게 된다.

 

그렇지만 조심스러워지기 까지는 꽤나 반복적인 경험이 있어야 한다. 꽤나 굴욕적인 경험을 몇 차례 반복해야 조금 나아지는 형편이다. 똑똑하지 못한 사람은 이런 경험을 많이 하게 된다. 그래서 눈치를 보거나, 자기 의견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의견을 말하는 문제점도 나타나게 된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끝없이 보는 시험도 그런 경험 중 하나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시험 문제를 모두 맞추지 못한다. 즉, 우리는 시험을 통해서도 자신의 부족함을 경험한다. 그나마 1등은 덜하겠지만, 등수가 낮아질수록 그런 현상은 심해진다. 그렇게 자신감을 잃어간다.

 

이 상황은, 똑똑한 사람일수록 그런 경험을 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어진다. 즉, 사람이 똑똑하면 똑똑할수록 자신이 틀린 경험을 하기 힘들고, 그로 인해서 언제 어디서든 자신이 틀렸다는 가정을 하기 힘들다는 점을 알아 낼 수 있다.

 

자, 그렇다면 이것이 어떤 문제를 야기하게 될까?

 

사람은 살아가면서 어떤 식으로든 가치 판단 기회를 맞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서 사회에 일어나고 있는 수 많은 각자의 입장이나 갈등, 편견, 정의, 가치 등에 대한 자신만의 고유한 입장을 갖게 된다.

 

예를 들어서 정치적 견해도 그럴 수 있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입장도 그렇다. 장애인에 대한 처우나 여자가 받는 불평등에 대한 견해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떤 입장에서 어떤 경로로 정해졌든지 상관없이, 우리는 보통 한 번 입장을 정하면 평생 그것을 지키려고 한다.

 

이것을 좋게 말해서 일관성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실 이 일관적 이려는 태도가 가장 치명적 문제이다.

 

우리는 흔히 일관성이 있는 존재를 선호한다. 왜냐하면 매일 입장이 달라지는 사람과는 관계를 맺기도 힘들고, 공감도 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어제는 같이 욕을 했는데, 오늘은 왜 욕을 하냐고 따지면 대책이 없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만나면 특이하다고 생각하고 관계를 이어가지 않는다.

 

그래서 다들 일관성 있고 싶어한다. 일관성은 관계의 기본 중 기본이다.

 

이 현상은 두 가지를 만들어 낸다.

 

첫 번째는 바로 주변 사람들이 대부분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들만으로 구성된다는 점이다. 당사자가 똑똑하면 똑똑할수록 주변 사람들은 보통 추종자에 불과해진다. 즉, 무리 중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의 의견이 주변에 끝없이 영향을 미치는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두 번째는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 사람이 낸 의견을 반대하는 의견은 반드시 존재하고 있다. 그러니 똑똑한 사람도 자신이 주장하는 바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늘 공부를 해야 한다. 하지만 이 공부의 목적은 매우 명확하다. 오직 자신의 의견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옳다고 말해주는 지식만을 골라서 찾아서 본다. 즉, 쉽게 말하면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그러면서도 정작 본인은 자신이 이미 편협 된 지식의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설령 우연히 자신의 의견과 반대가 되는 지식을 보게 되면, 어떻게든 그 단점을 찾아서 공격하고 비웃음으로써 마무리 해버리고 만다.

 

그런데 이것을 누가 잘할까? 멍청한 사람이 잘할까? 아니면 똑똑한 사람이 잘할까? 당연히 똑똑할수록 잘하게 된다. 즉, 똑똑하면 똑똑할수록 점점 더 자신과 대립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지식 편견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이미 그렇게 되어 버렸다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똑똑하기 때문에 자신이 잘못되었을 수 있다는 가정을 거의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함정 수준이 아니다. 이것은 사실 인간을 정말로 비참하게 만드는 것 중 하나이다. 평생을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만 보면서 살다가 죽는 삶이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불쌍한 존재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자신이 우물에 빠졌다는 사실 조차도 모른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다른 밖에 있는 개구리를 비웃으면서 살아간다.

 

똑똑한 사람들이 이런 어리석은 생각과 행동을 하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는 충분히 똑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지적 수준은 단지 지구 수준에서 최고일 뿐이다. 우리는 1등이란 사실에 너무 도취되어서 자신의 지적 능력의 부족함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이 넓은 우주 어딘가는 쥐의 아이큐가 200이 넘는 행성이 있을 수 있다. 개의 아이큐가 300이고 거기에 사는 지적 존재의 아이큐는 백만이 될 수도 있다. 사실 우리는 그것을 상상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구 상에서 1등을 똑똑하다는 점과, 인간들 사이에서 조금 더 똑똑하다는 이유로 자신에 대해 무한대의 확신을 갖는다. 그리고는 자신이 잘못될 수 있음을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다. 완벽한 무의식이다.

 

이 문제로 인해서 우리는 남은 잘 보고, 잘 분석하고, 잘 이해하고, 잘 파악하고, 단점과 장점을 알아내는 반면, 자신에 대해서는 전혀 그런 지적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남에 대해서는 하루도 안되어서 모든 분석을 다 해낼 수 있는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는 평생 동안 그것의 1%제대로 알아내지 못한다.

 

즉, 자신에 대한 무지가 이 모든 문제를 만들어 낸다. 그러니 똑똑한 사람들은 사실 똑똑하지 않다. 그들은 오직 지식적으로만 뛰어날 뿐이다.

 

사실 지능지수라고 알려진 아이큐는 인간의 능력을 측정하는 방법으로 매우 부적합하다. 정말로 인간의 능력을 측정하려면, 무엇보다도 '통찰력'에 대한 측정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통찰력이야 말로 인간의 가장 위대한 지적 능력이다. 그것의 후보로써 암기력, 공감각 능력, 연상 능력 등은 사실 전혀 기준점으로 작용할 근거가 없다. 인간의 지적 능력을 측정하고 싶다면, 오직 통찰력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통찰력을 측정해 낼 방법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도 우리 스스로가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알 방법이 없다.

 

앞에서 말했던 똑똑한 사람들의 실수는 모두 통찰력 부족으로 인해 일어난 현상이다. 자신의 삶을, 인간을, 자연을, 이 우주를 이해하는 힘은 지식이 아니다. 오직 통찰력으로만 가능하다.

 

사실 통찰력은, 그것이 딱히 무엇이다 라고 정의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조차도 스스로 통찰력이 있는가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 그저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이렇듯이 명확하지 않고 개념화 되기 힘든 대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수치화 시킬 수 없는 것일 것이다. 즉, 통찰력은 중요하지만, 어떤 사람에게 통찰력이 있다, 없다를 판단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렇지만 특별한 어떤 사람들의 말을 듣다가 보면, 그 사람이 통찰력이 있음을 어느 정도 판단할 수는 있다.

 

아무튼 통찰력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똑똑함은 그저 수 많은 다른 중요한 능력들 중 하나일 뿐이다. 물론 주요 항목에 들 수는 있지만, 딱 거기까지이다.

 

인간에 대한 이해, 감정적 판단 능력, 공감 능력, 지적 능력, 자신에 대한 이해, 무의식에 대한 각성, 끝없는 자기 성찰, 다양한 가치에 대한 감응, 삶의 무거움에 대한 깊은 시선, 끝없는 사유, 칼날에 선 듯한 삶 등이 바로 통찰력을 갖기 위한 기본적 조건일 것이다.

 

여기에서 지적 능력을 담당하는 부분은 사실 매우 적다. 물론 책을 많이 보는 것은 중요하다. 다른 사람들이 생각을 알기 위해서, 자신의 편견을 깨기 위해서 중요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책을 지식을 쌓는 도구로써만 이용한다.

 

책을 쓴 사람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 지적 능력이 필요한데, 그저 지식을 잘 기억하는 용도로만 사용하는 것이다. 이럴 경우, 많은 책은 오히려 독이 된다. 다독이 오만하고 자기 주관적인 사람이 되는데 일조될 뿐이다.

 

이렇게 쌓은 지식은 나중에 누군가 갈등이 생기고, 의견 충돌이 생기면 아주 유용하게 써먹는다. 우리는 사실 그런 장면을 자주 본다. 소위 똑똑한 사람들은 끝없이 다른 유명한 사람들의 말을 인용한다. 그렇게 유명한 사람들이 말한 것이니, 믿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똑똑한 사람들이 하는 가장 어리석은 짓이다. 자기 머리 속에서 나온 생각이 아니고, 남의 머리 속에서 나온 것을 가지고 자기 생각인 냥 떠들어 댄다. 그것을 근거로 자신의 옳음을 주장하기에 바쁘다.

 

하지만 누군가가 한 말은 그 상황에서만 유효한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도, 내 앞에서 칼을 들고 나와 나의 가족을 위협하는 강도 앞에서는 절대로 통하면 안 된다. 그때도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면서 자신의 가족 중 하나를 찌른 강도에게 나머지 가족을 내 놓을 것인가?

 

진리는 오직 고정되지 않기에 진리가 될 수 있다. 또한 진리는 설명될 수 없기에 진리인 것이다. 똑똑한 사람들이 하는 큰 실수가 이것이다. 자신이 어떤 경로를 통해 얻은 지식과 어떤 우연한 사건을 통해 경험한 것을 너무 단단히 고정한다.

 

그렇게 아집을 만들고 독선적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그것을 신념이라고 부르고 일관성이라고 치장한다. 그러니 결국 그들은 똑똑한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들은 그저 많은 기억력을 가진 사람일 뿐이다. 그래도 결국엔 컴퓨터만은 못하지만 말이다.

 

진짜로 똑똑한 사람은 자신이 틀릴 수 있음을 아는 사람이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견해는 어떤 것이든 막론하고 편견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끝없이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런 자각을 가진 사람만이 오직 통찰력을 가질 수 있다.

 

문제는 똑똑한 사람들은 이미 자신의 똑똑함에 도취되어서 이런 이야기를 들어도 자신이 듣고 싶은 데로만 듣는다. 즉, 자신은 그 정도의 통찰력이 충분히 있다고 믿는다.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옳다고 말해주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들으면서 스스로를 한없이 착각한다.

 

멍청한 사람은 이해를 못해서 변하지 못한다. 그리고 똑똑한 사람은 이해하고 싶은 것만을 골라서 이해하기에 변하지 못한다. 사실상 돈은 많이 벌겠지만, 그 둘의 어리석음은 같다.

 

물론 똑똑한 사람은 자신의 똑똑함으로 인해서 이것을 평생 이해하기도, 인정하기도 힘들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