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정말로 무엇을 위해 사는가?

아이루다 2016. 7. 25. 08:22

 

사람들은 각자 자신만의 사는 이유가 있다. 아니, 이유라고 말하기는 좀 그렇고, 사는 목적이라고 해야 좀 더 맞을 것 같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은 각자 자신만의 사는 목적이 있다.

 

사람들의 사는 목적은 참으로 다양하다.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 출세하기 위해서, 여행을 다니기 위해서,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서, 보람찬 일을 하기 위해서, 인류를 크게 발전시킬 연구를 하기 위해서,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서, 전통 문화를 계승하기 위해서, 멋진 몸을 만들기 위해서, 진정한 사랑을 하기 위해서, 책을 읽기 위해서, 세상을 정의롭게 만들기 위해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꿈을 이루기 위해서 산다.

 

이 목적을 모두 나열하려면 책 한 권을 써도 부족할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혹은 공통의 어떤 목적으로 가진 채 그것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마다 이 목표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그냥 자신의 목적을 향해 가면 끝인데, 자꾸 자신의 목적이 뭔가 더 의미가 있다고 말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의 목적은 틀렸다고 말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바로 자신의 삶이 좀 더 가치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다. 즉,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목적을 위해서 살아가고는 있지만, 그 목적이 남들의 목적보다는 좀 더 가치 있다는 평가를 받고 싶어한다.

 

이것은 참으로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단 한차례의 삶을 사는 동안, 적어도 그 삶이 무의미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목적이 가진 가치를 확인하거나 혹은 증명 받기 위해서 끝없이 다른 사람과 의견을 교류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갈등도 일어나고, 다툼도 일어나고 같은 목적을 추구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느끼는 깊은

공감도 경험할 수 있다. 

 

또한 사람들마다 자신의 목적에 대한 확신이나 혹은 가치와 만족감은 모두 다른 편인데, 어떤 사람은 그것에 거의 관심이 없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그것에 목숨을 걸기도 한다.

 

즉, 어떤 사람은 하고는 싶어하지만, 할 수 없다면 금세 포기할 수 있는 반면, 어떤 사람은 어떠한 경우에도 물러설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이면서, 목에 칼이 들어와도 뜻을 굽힐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보통 믿음이나 신념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태도를 보인다.

 

이 두 가지 태도는 꽤나 큰 차이가 난다. 그러면 이제 이런 의문이 생긴다. 그것은 바로 우리는 왜 그렇게 많은 다양한 목적이 있으며, 왜 그렇게 다른 태도를 보이게 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다.

 

도대체 왜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을까?

 

뭐, 인간이 워낙 다양하니까 라고 답을 한다면, 그것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도 온전한 답은 아니다.


우리가 이렇게나 다양한 형태로 살아가고 있는 이유는, 우리는 모두 행복하길 바라기 때문이다.

 

답을 적어 놓고 보니, 좀 웃기다는 생각이 든다. 행복하고 살고 싶어하기에 그렇게 다양한 목적이 존재하고, 그렇게 다른 태도를 보인다는 말인가?

 

사실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이 답변은 반쯤 맞고 반쯤 틀렸다.

 

일단 우리가 그렇게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사는 것은, 우리가 행복 하려고 살기 때문인 것은 맞다. 각자마다 다른 행복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렇게나 다양한 것이다.

 

누군가는 에베레스트 산에 올라야 행복하고, 누군가는 여름 날 맛있는 팥빙수를 먹어야 행복하다. 이 두 사람이 느끼는 행복감엔 차이가 없다. 단지 그 행복이 유지되는 시간과, 다른 사람들의 평가만 다를 뿐이다.

 

그리고 이 차이점으로 인해 아주 흔하고 자주 일어나는 착각이 생겨난다. 이것이 바로 반쯤 틀렸다고 말한 부분에 해당된다. 분명히 사람마다 다른 태도를 보이는 차이는 모두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으로 인해 발생하긴 하는데, 그 시작은 아주 엉뚱한 곳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바로 놀랍게도 사람들은 자신이 행복하기 위해서 산다는 사실을 잊어 먹어서 그렇다. 즉, 사람들은 각자가 살아가는 삶의 목적의 의미에 너무 깊게 빠져서, 자신이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추구하는 목적을 위해 산다고 심한 착각을 한다.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 산다는 것은 우리들 대부분이 알고 있다. 그런데 인간 중 한 명인, 자신이 행복하기 위해서 산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생각보다 적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많은 사람들은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서 산다는 말 자체를 매우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런 착각이 일어나는 이유는 단순하다. 자신의 현재 목적,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이 너무 대단해서 도대체 그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행복을 위한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뭔가 좀 더 그럴듯한 이유나 혹은 좀 더 깊은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믿고 싶어한다.

 

그 목표가 달성하기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욱 그런 생각은 강해진다.

 

더운 날 맛있는 팥빙수를 먹는 행위는 행복하니까 한다. 이것은 누구에게 물어봐도 비슷한 답이 나온다. 하지만 힘든 에베레스트 산을 등정하는 사람에게 왜 그 산에 오르냐고 물었을 때, 행복하기 위해서 한다는 답이 나오긴 힘들다. 왜냐하면 사실 산에 오르는 것이 힘들어서 불행해 보이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만약 산에 오르는 이유가 행복하기 위해서라고 답을 할 경우, 그러면 그냥 팥빙수나 먹으면 되지 왜 그렇게 힘들게 목숨을 걸고 산에 오르는지를 되물음 당할 수 있다. 그러니 힘든 목표를 추구할수록 자신의 목적이 행복이 아닌, 다른 것이 되고 싶어한다.

 

하지만 앞에서 열거한 수 많은 삶의 목적의 공통 목표는 오직 행복일 뿐이다. 돈을 버는 것도, 출세를 하는 것도, 아이를 키우는 것도, 인류를 위해 위대한 발명을 하는 것도, 신념을 지키는 것도, 꿈을 이루는 것도 모두 그렇다. 우리는 행복하지 않은 일은 하지 못한다.

 

우리는 원래 그런 존재이다.

 

그래서 사실 이런 착각은 매우 놀라운 것이다. 그리고 이 착각이 이 세상의 모든 갈등의 시작점이 되기도 한다.

 

각자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살고 있음을 아는 세상이라면, 각자 행복하면 끝이다. 그것이 가치있을 필요도 없고, 남들에게 인정받을 필요도 없다. 행복은 스스로 느끼는 경험이다. 머리 속에서 행복하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저 온몸으로 느껴지는 감각이다. 오직 실체적인 경험이다.

 

그래서 자신이 행복한지 안 한지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남들에게 말할 필요도 없다. 그것이 가치 있다고 자랑할 필요도 없다. 행복하면 스스로 느끼게 되고, 거기에서 끝난다.

 

그럼에도 우리가 남들에게 자신의 행복에 대해서 자꾸 말하는 이유는, 그만큼 행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족하기 때문에 자꾸 그것을 채우려고 한다. 덜 행복하니까 더 행복해지려고 하는 것이다. 에베레스트 산을 오르는 동안 행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갔다 와서는 글을 쓰거나, 강연을 하거나, 책을 내야 한다.

 

그리고 이런 행위가 바로 행복의 순위를 매기려고 하는 것으로 발전한다. 순위를 매겨서 더 낫다는 평가를 받으면 뭔가 뿌듯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끝없이 그런 짓을 한다. 하지만 이 행위는 더 행복하고 싶기에, 남의 행복과 자신의 행복을 자꾸 비교하려고 하는 짓일 뿐이다.


우리는 이렇게 자신이 행복이 더 낫다고 평가 받고 싶어한다. 그것을 위해서 틈만 나면 남이 추구하는 행복을 무시하려고 한다. 이것이 우리가 매일 겪는 갈등의 대부분이다.

 

행복의 가치에 대한 순위 경쟁, 이것은 우리 사회가 가진 매우 치명적인 문제이다.

 

그리고 행복 순위 경쟁을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 행복이 더 가치 있어야 하고, 남들에게 인정도 받아야 한다. 이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군다나 그 자신은 지속적으로 다른 사람의 행복을 평가하게 된다.

 

그리고 이 경쟁에 너무 빠져들면, 자신이 원래 행복하기 위해서 했다는 사실마저 잊어 먹고는, 자신이 추구하는 목적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얼마나 의미 있는지를 증명하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학교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의 모습과 유사하다. 원래 공부를 하고 시험을 보는 목적은 자신이 사회로 나가기 위한 기초 지식을 습득하고, 그것이 얼마나 잘 진행되고 있는지를 평가하는 것이다. 하지만 경쟁에 익숙해진 아이들은 남들보다 더 나은 성적을 받기 위해서 공부를 하고 시험을 보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사실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웃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공부를 하고 시험을 보는 것이 당연히 경쟁에서 이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냐고 되묻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다. 이 말은 우리가 그 만큼이나 원래 목적을 잊어버린 것이란 뜻도 된다.

 

행복에 대한 경쟁도 비슷하게 작용한다. 서로 더 행복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각자의 목적이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는 평가를 받고 싶어만 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행복을 무시하고, 다른 사람의 행복이 무의미하다고 말하고, 자신의 행복이 더 낫다고 평가하고, 자신의 행복이 훨씬 의미 있다고 주장하게 된다. 이것이 서로 충돌하면, 결국 갈등이 일어나고 다툼이 일어나게 된다.

 

그래서 배고픈 소크라테스와 배부른 돼지를 비교하게 된다. 사실 진짜로 배가 고파 봐야 이런 소리를 못한다. 아니, 배가 고파서 죽는 한이 있어도 그것을 놓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자신의 목적에 심하게 빠져들어 있으면, 그런 생각을 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아니 모든 생명체에게 있어서 목숨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물론 목숨보다 더 큰 가치가 있다고 믿어지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사실은 목숨을 잃는 불행보다 더 불행한 것이라고 판단한 것에 불과하다. 믿음을 잃는 것, 신념을 꺾는 것, 소중한 것을 잃어야 하는 것 등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이럴 때 죽음보다 더 심한 불행을 경험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모든 목표의 유일한 공통은 행복뿐이다.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결코 변하지 않는 진실이다.

 

그리고 이 말을 절대로 관념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 동안 관념적으로, 피상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그런 착각이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삶의 목적이 행복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하지만 진정으로 그렇다. 각자 자신이 오늘 무슨 일을 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오직 본인의 행복을 위해서라는 것은 확실하다. 혹은 본인이 덜 불행하기 하기 위해서 하는 일일 것이다.

 

가족을 위해서 일하는 가장은 없다. 그 사람은 오직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일한다. 그런데 그 결과가 가족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뿐이다. 인류를 위해서 연구하는 학자는 없다. 그 역시도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연구할 뿐이다. 단지 그 결과가 인류에 도움이 되는 것뿐이다.

 

국가를 위해 열심히 운동하는 선수도 없다. 그는 오직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연습할 뿐이다. 그리고 그가 좋은 성적을 받으면 그것이 국가에 도움이 될 뿐이다. 사실 그것도 매우 추상적이긴 하지만 말이다.

 

가장 순수한 형태의 애정인,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을 수도 있지만, 그 역시도 부모의 행복을 위해서 할 뿐이다. 자식이 죽는 것을 보는 것이 죽는 것보다도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결정을 하는 것이다.

 

정말로 소중한 것은 자신의 목숨보다도 더 소중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단지 그렇게 소중한 것은 온전히 그 사람에게만 유효하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자식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으라고 부탁할 수는 없다.

 

인간의 삶을 정의하자면, 각자의 행복을 추구하고, 그 속에서 다툼이 일어나서 중재를 하며, 행복을 얻은 후에는 그것을 가지고 각자 더 낫다고 평가해달라고 주장하는 과정이 모두이다.

 

인간의 삶은 행복으로 시작해서, 행복으로 끝난다. 행복이 완전히 끝나는 시점을 우리는 죽음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평생 행복을 추구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행복이야말로 죽음으로부터 멀어지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죽음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멀어졌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행복을 느낀다.

 

돈을 벌면 더 오래 살 수 있다. 권력을 쥐면 더 오래 살 수 있다. 우리는 평생 더 오래 살기 위해서 노력하다가 결국 죽는다. 우리가 행복으로부터 단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 살지 않는다는 말을 하려면, 언제 죽어도 좋다고 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죽음을 받아들였다고 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살아있는 생명체에게는 너무 버거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