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정신적 상처에 대한 조금 다른 해석 - 2

아이루다 2016. 7. 29. 10:03

 

[앞편에서 계속]

 

그렇다면 사람들이 표현을 하는 이유가 이득, 자랑, 만족이란 사실과 각자가 상처를 입는 것에 대한 최종 결정을 우리들 자신이 한다는 것을 조합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사람들은 이득을 얻거나, 자랑을 하거나, 자기 만족을 위해서 표현을 한다. 그러니 상대가 하는 모든 기분 나쁜 표현, 즉 욕을 하거나, 무시를 하거나, 어이없는 행동을 하는 것도 모두 이 세 가지 중 하나에 포함될 뿐이다.

 

그리고 이 세 가지를 한 마디로 묶으면, 바로 행복이 된다. 즉,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표현을 하는 이유가 바로 그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이다. 즉, 남을 괴롭히는 것이 행복하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을 많이 속인다. 그래서 마치 그 표현을 이치에 맞아서, 이성적이라서, 형평성에 맞다고 믿기 때문에, 상식적인 것이라고 생각해서 한다. 그리고 이것보다 더 나가면 정의를 위해서, 전체를 위해서, 옳으니까, 선의 목적으로 한다고 상대를 속이려고도 자신도 속는다.

 

행복이란 말은 참 좋은 말이지만, 냉정히 말하면 모든 행복은 각자의 이득 추구일 뿐이다. 단지 우리는 자신의 이득이 타인에게 이득이 되는 경우를 좋게 말할 뿐이다.

 

상대의 이득이 자신에게 이득이 되면 그것을 이타적이라고 부르고, 상대의 이득이 자신에게 손해가 되면 그것을 이기적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상대의 입장에서만 보면 이 둘의 차이는 전혀 없다. 오직 이득 추구일 뿐이다. 그것을 어떤 행위라고 해석하는 것은 우리들 입장이다.

 

이렇듯 우리가 표현을 하는 유일한 이유는, 각자의 이득을 위해서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각자의 입장에서 칭찬을 하거나 그것을 비난한다. 즉, 우리는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이득 추구에 대한 판단을 스스로 최종 결정한다.

 

결국 누군가 자신의 이득을 추구했는데, 그것으로 인해서 결국 우리가 상처를 받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 자신도 결국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모든 표현을 하고 있다. 상대도 그럴 뿐이다.

 

우리는 상대가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한 표현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려고 한다. 지식과 논리를 이용해서 그것을 뒤집으려고 한다. 설득하려고 애쓴다. 빈틈을 발견하면 너무 좋아하면서 집요하게 공격한다.

 

우리는 권투 경기를 보다가, 상대가 우연히 입은 상처만을 골라서 공격하는 선수를 비겁하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들 자신은 상대가 우연히 한 실수를 결코 그냥 넘기지 않는다. 치밀하고 집요하게 공격한다.

 

이 태도는 단 하나만을 의미할 뿐이다. 우리의 이득을 위해서 상대에게 자신의 이득을 포기하라는 뜻이다. 상대에게 손해를 입어야 한다고 설득하는 것이다.이 말이 통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만약 내가 확실하게 옳고 상대가 확실하게 틀렸다면, 이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렇게 옳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알고 있다. 표현에 있어서 옳고 그름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이것은 결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님을 말이다. 단지 나의 이득과 상대의 이득의 충돌이다. 그러니 설득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우리는 다수의 힘을 모아서 겨우 상대를 포기시킬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이 바로 법이다. 법은 어떤 사건에 대한 정의로움을 결정하는 주체가 아니다. 그냥 어떤 입장에 더 많은 사람들이 손을 들었느냐에 대한 문제이다.

  

이렇게 상대가 과도하게 이득을 추구하는 경우라고 해도, 그것이 옳고 그름의 이유도, 선과 악의 이유도 아닌 오직 상대의 이득만을 위해서 하는 것임을 이해하게 된다면, 사실 처음부터 그것을 아예 해석하지 않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아니, 해석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런 면에서 정신적 상처는 육체적 상처와는 완전히 다르게 접근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래된 관행에 의해서 상대의 표현을 자꾸 옳고 그름의 입장에서 보려고 한다. 상대가 우리에게 어떤 표현을 하면, 그것이 마치 상대가 그것을 옳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만의 옳음으로 그것에 대항한다.

 

그러니 이득과 이득의 충돌이 아닌, 옳음과 옳음이 충돌한다. 선과 선이 충돌한다.

 

물론 상대도 자신이 옳다고 믿고 있음이 틀림이 없다. 우리는 뭔가를 주장할 때, 당연히 자신이 옳아서 그런 말을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라. 그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주장을 하는 이유는, 그저 그것이 자신에게 이득이 되거나 행복하기 때문에 그럴 뿐이다. 그 외에 무엇이 더 있을 수 있겠는가?

 

그 어떤 이론도, 그 어떤 근거도, 그 어떤 논리도 모두 마찬가지다. 우리는 오직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그것들을 이용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통하는가의 여부를 가지고 '대의' 혹은 '명분' 이라고 칭한다. 이 세상 그 누가 그것을 원하지 않겠는가?

 

대의와 명분이 통할수록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늘어나는데 말이다. 즉, 자신의 이득을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늘어나는데 말이다. 그래서 이득을 얻을 가능성이 높아지는데 말이다.

 

물론 상대가 터무니 없는 이득을 추구할 때, 우리는 상처를 받는다. 그리고 그것이 옳지 않음을 증명하려고 애쓴다. 그럴 필요가 없다. 상대가 극도의 이득을 추구하는 것은 생명체로써 당연한 행위이다. 그러니 그것이 틀렸다고 하면 안 된다.

 

배가 고파서 먹는 것을 틀렸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살려고 하는 짓인데, 옳고 그름이 어디 있겠는가?

 

그것을 옳고 그름으로 보기 때문에 모든 상처가 생겨난다. 그것을 그냥 이득과 이득의 충돌로 보면 모든 것이 단순해지고 명료해진다. 본질을 볼 수 있다면 그렇다.

 

우리는 상처 입을 때마다 우리가 옳고 싶어한다. 화가 나고, 우울하고, 짜증이 나니까 그렇다. 적어도 옳아야 그것이 정당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자꾸 다른 사람들에게 말이나 글로 표현을 한다.

 

따지고 보면 이 행위도 상대와 다를 바가 없다. 상처 입은 본인도 그저 손해를 입지 않으려고 자꾸 옳고 그름으로 그것을 바라보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단지 이득을 얻지 못하거나, 손해를 입어서 그렇게 화가 나는 것뿐이다. 물론 거기엔 보편적인 수준의 부당함에 대한 근거는 있을 것이다. 누가 들어도 그럴 법한 그런 것 말이다.

 

그렇다면 그런 근거를 통해서 여론을 형성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개인의 힘이 약하면 다수의 힘을 빌려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옳은 것이 아니다. 즉, 또 다른 형태의 이득과 이득의 충돌이 일어난다. 물론 사람들은 정의감에 불타서 도와주긴 할 것이다. 착각이지만 말이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옳지 못하다. 아니, 옳고 그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원래 상처를 입지 않는 가장 좋은 태도는 해석하지 않는 것이다. 불가능하긴 하지만, 상대가 어떤 의도로 어떤 표현을 하건 아무런 해석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상처도 입지 않을 수 있다.

 

사실 이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자신이 화가 나는 순간마다 이것에 대해서 상기할 수 있다면, 확연히 화가 나지 않음을 경험할 수 있다.

 

상대가 옳아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우기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자기 착각일 뿐이다. 그 사람은 그저 이득을 추구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그 행위가 손해가 된다고 느끼면 적극적으로 막든지 아니면 그냥 손해를 감수하면 된다.

 

그리고 어떤 결정을 했든지 상관없이 기분 나빠질 필요가 없다. 우리가 틀린 것이 아니다. 설령 손해를 봤다고 해도 우리는 그저 손해를 본 것뿐이다. 그것도 감당할 만 하니 감당한 손해이다.

 

쉽지 않겠지만, 점점 갈등이 심화되어 가는 사회 속에서 우리들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태도가 될 것이다.

 

우리가 상처를 입는 이유는, 각자 이득을 추구하는 경쟁터에서 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때는 이기려고 노력하든지, 그것을 승복하든지 해야 한다.

 

괜히 억지로 옳고 그름의 논리로 끌고 가다간 자기 함정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처음부터 근거가 없었던 것이었기 때문에 그렇다.

 

논리적인 사람일수록 자승자박에 놓이게 된다. 그 사람이 한 모든 논리적 언어는 모두 그 사람의 표현을 공격하는데 쓰일 수 있다.

 

우리는 흔히 표현의 자유를 말하지만, 도대체 어디까지가 표현이 자유인지 알 방법이 없다.

 

누군가 동성애를 극단적으로 비판하는 글을 쓴 것을 읽고는, 왜 각자의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느냐 라고 비난을 할 때, 그 말은 고스란히 자신에게도 적용이 될 수 밖에 없다. 왜 그 자신은 처음에 동성애를 비판을 한 그 사람의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 있을까?


그때 고작 대는 핑계라고는, 원래 글을 쓴 사람이 처음부터 그 말을 안 썼으면 자신도 아무 말 안 했을 것이란 것 뿐이다. 사실 이 핑계이외에 어떤 이유를 댈 수 있겠는가? 아니면 인류 보편적 관점에서 옳고, 그 사람은 틀렸기 때문이라는 소리를 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왜 자신이 옳은지를 장황하게 설명할 것이다.


그럼에도 글을 잘 쓰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어서 결국 자기 만족을 얻거나 재수가 좋다면 책을 써 내서 돈을 벌 수도 있다. 자랑, 만족, 이득 모두 손에 쥘 수 있다. 얼마나 좋은가? 그리고 이 글도 거기에서 단 한 발국도 벗어날 수 없다. 물론 자랑과 이득은 못 얻겠지만 말이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하는 모든 표현은 이것이 전부이다. 그래서 모두 동일하게 이런 문제를 안고 있다. 아예 처음부터 잘못 해석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이득을 위해 표현을 하면서 자꾸 그것에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그래서 이 모든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을수록 점점 더 이득을 얻을 가능성이 높아지기에 그런 착각을 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너무 오랫동안 그런 짓을 해와서 이젠 그것이 착각으로도 안 느껴진다. 아예 처음부터 인식조차 못한다. 자신이 이득이 아닌, 정의로움을 위해서 표현을 하고 있다고 믿고 산다.

 

표현의 자유는 사실 말 장난이다. 이것은 단지 누구나 마음껏 이기적일 수 있다는 말의 다른 말이다.

 

이 말이 맞다. 우리의 이기심은 무한한 자유를 가지고 있다. 단지 그 이기심이 너무 과해서 남들에게 집단적으로 비판을 받을 수 있다면, 물리적 제약까지도 일어날 수 있다. 즉, 감방에 갈 수도 있다는 뜻이다. 심지어 사형을 당할 수도 있다.

 

우리는 누구나 이득을 마음껏 추구할 수 있다. 단지 책임을 져야 한다.

 

표현의 자유도 마찬가지다. 모든 자유로움은 책임을 동반한다. 그러니 거기에서 옳고 그름을 따질 필요가 없다. 각자 마음껏 이득을 추구하되, 잘못되면 책임져야 한다. 거기에서 내가 정의이다 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의미한 행동이다. 물론 자기 만족은 될 것이다. 표현의 세 가지 목적 중 하나인 그것 말이다.

 

정말로 옳은 표현을 하고 싶다면, 단  한 가지를 할 수 있다. 그것은 완전히 입을 막고, 그 어떤 표현을 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만이 유일한 옳은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