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이반 일리치의 죽음

아이루다 2016. 8. 3. 08:52


위대한 문호로 알려진 톨스토이가 쓴 작품 중에서 『이반 일리치의 죽음』 이란 제목을 가진 책이 있다. 대략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회적으로 꽤나 성공한 사람 중 하나인, 이반 일리치는 자신이 배우고 교육받은 대로 양심껏 그리고 예의 있고 명랑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그가 어느 날 불치의 병에 걸린다. 그리고 견디기 힘든 고통과 죽음의 공포 앞에 놓이게 된다.

 

그런데 그가 병에 걸리자, 주변 사람들은 사실상 그를 피하려고 한다. 원래 이반 일리치가 있던 세상, 즉 밝고, 명랑하며, 행복이 가득한 세상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그처럼 아프고 불행한 존재는 없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반 일리치도 아프기 전까지는 그들과 똑같았다.

 

이반 일리치는 죽음이 가까워옴에 따라 심각한 공포를 느낀다. 그리고 공포가 심각해질수록 그는 자신과는 달리 아직도 즐겁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 강한 질투심을 느낀다.

 

이때 그나마 그를 위로해주는 이는 그를 성심 성의껏 돌봐주는 사람은 집사인 게라심밖에 없었다. 늘 명랑하고 평온한 게라심은 한결같이 그를 대했다.

 

다른 사람들의 명랑함은 그에게 모욕감을 주었지만, 게라심의 명랑함은 그에게 평온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는 고통스럽게 살던 어느 날 영혼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 보고, 삶을 회의하게 만드는 소리였다.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사유에 빠진 이반 일리치는 결국 자산이 살았던 삶의 무의미성을 인정하고 난 후 모든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사라짐을 느낀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평온한 얼굴로 죽는다.

 

예전에 읽은 기억도 나긴 하는데, 오래되어서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위에 적힌 줄거리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다룬 두 권의 책 중 하나인, 『들길의 사상가, 하이데거』 라는 책에서 설명된 줄거리이다. 이 책은 박찬국이란 분이 썼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대해 적어 놓은 다른 책이 한 권 더 있다. 그 책의 제목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 이다. 아툴 가완디 라는 분이 쓴 책의 한국어 번역 본이다.

 

두 책은 모두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긴 하지만, 사실 상 두 책이 바라보는 방향이 서로 완전히 다르다.

 

첫 번째 책의 분류는 철학 책이다. 20세기 실존주의 사상가로 잘 알려진 하이데거에 대한 책이다. 그리고 두 번째 책은 노년의 삶의 존엄성, 어떻게 죽음을 향해 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조금 다른 시선을 알려주는 책이다. 오직 치료에만 목적을 둔 현대 의학이 자성해야 할 주제를 다룬 내용을 담고 있다.

 

그래서 이 둘은 서로 각기 다른 관점에서 이반 일리치라는 인물이 맞게 되는 죽음을 설명하고 있다.

 

일단 『어떻게 죽을 것인가』 에서는 주로 게라심의 역할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즉, 이반 일리치는 죽음을 앞둔 환자, 즉 수 많은 질병에 걸린 노인이 되고, 게라심은 그를 관리하는 요양사나 혹은 도우미 정도 될 것이다.

 

이반 일리치의 집사인 게라심은 성심 성의껏 그를 돌본다. 그것은 직업적 동기도 아니고, 돈을 벌기 위해서도 아니고, 딱히 이반 일리치를 소중히 여겨서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모든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기에, 그 자신도 언젠가는 이반 일리치와 같은 처지가 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즉,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죽은 필멸의 존재이며, 그런 면에서 게라심은 자신이 죽어가는 누군가를 돌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반면에 『들길의 사상가, 하이데거』 에서는 이반 일리치 자체를 다룬다. 물론 게라심의 역할도 소개되기는 하지만, 상대적으로 미비하다. 여기에서는 죽음을 앞둔 이반 일리치가 영혼의 목소리를 듣고 난 후,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고 평온하고 아름답게 죽을 수 있었다는 점을 중점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의 평생 철학인, 존재와 시간이 가진 의미와 맞닿아 있다.

 

어떤 면에서 이 두 관점은 너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 에서는 인간 수준의 관점이고, 『들길의 사상가, 하이데거』에서는 사실상 인간을 초월한 수준의 관점으로 보여진다.

 

물론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나름대로 훌륭한 책이다. 현대 의료 행위가, 특히나 노인에 대한 의료행위가 노인을 위한 목적이 아니고, 그들의 가족이나 의료진의 목적에 맞춰지고 있음을 지적하는 내용이니 말이다.

 

사실 냉정히 말하면, 요즘 많은 곳에서 운영되고 있는 요양원은 노인을 위한 시설이 아니다. 요양원은 가족을 위한 시설이며, 그것을 운영하는 사람의 돈벌이 수단이다. 이 둘의 필요성이 만나는 지점에 요양원이 만들어지고 운영된다.

 

그러니 여기는 정작 당사자인 노인에 대한 어떤 배려도 없다. 노인들은 그저 죽을 때까지 잘 관리되어야 할 대상으로만 존재하게 된다. 그러니 많은 노인들이 요양원에 들어가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곳은 그들에게 사실상 감옥이고, 관이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의문이 든다. 사실 사람들이 요양원에 들어가는 수준까지 갈 때면, 혼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였을 때이다. 그래서 누군가 거의 하루 종일 그들을 돌봐야 할 상황이 되면, 그때는 어쩔 수 없이 요양원에 보내야 한다.

 

집에서 어떤 커다란 의료적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고, 누군가 하루 종일 그들의 곁에서 수발을 드는 것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러니 결국 요양원으로 보내는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들은 요양원에 들어가길 정말로 싫어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왜 스스로 죽지 못할까? 아니, 이것은 그들의 문제만이 아니다. 바로 우리들의 문제이다.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요양원에 들어간 삶이 감옥과 같다면, 나올 방법이 오직 죽어서 밖에 없다면, 그 전에 스스로 자신의 삶을 마감할 수는 없을까? 스스로 목숨을 거두는 것조차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서 그럴까? 아니면 자신이 믿는 종교적 교리에 따라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를 할 수 없어서 그럴까?

 

딱히 이유는 모르겠다. 물론 종교적인 이유가 있다면, 그 부분은 충분히 이해할 만 하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설명된 한 할머니는 혼자서 화장실을 가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말해준다. 사실 늙어서 오줌을 못 가리고, 더군다나 똥까지 가리지 못할 상황이 되었다면, 인간으로써 존엄성은 도대체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물론 누군가는 그렇게 해서라도 더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겠지만, 사실 자신에 대한 어느 정도의 주체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을 용납하기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을 딱히 막을 방법이 없다. 우리는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늙기 때문이다. 노년의 아름다움은 스스로 혼자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지만 유효하다.

 

이 상황에서 다시 『들길의 사상가, 하이데거』를 바라보자.

 

이 책에서는 우리가 사는 삶 자체에 회의를 던지고 있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좀 더 나가면 우리가 행복이라고 믿고 있었던, 아프기 전의 이반 일리치가 삶이라고 믿었던 명랑함과 양심적 삶이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까 에 대해서 보다 더 깊은 사유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다른 이들에게 인정 받으며, 재미있고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던 이반 일리치는 불치의 병에 걸림과 동시에 사회적으로 완전히 매장이 되고 만다.

 

이런 변화는 우리들에게도 언제든 닥칠 수 있는 현실이다. 우리가 불치의 병에 걸리게 되면 많은 이들은 병원에 찾아와서 우리를 병문안 하겠지만,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서 점점 찾아오는 이들은 줄어들 것이고, 결국엔 잊혀지고 말 것이다.

 

심지어 가족조차도 우리를 잊어가게 될 것이다. 가족들은 점점 지쳐가서 점점 더 자주 짜증을 낼 것이다. 오랜 병수발을 버텨낼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우리들에겐 보통 게라심이란 존재가 없다.

 

이때 그 동안 수십 년을 어떻게 살았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젊은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 어떤 권력을 쥐고 있었는지, 얼마나 돈이 많았는지, 얼마나 명예로운 사람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빠져나올 수 없는 불행함에 놓이는 순간, 우리는 재빠르게 사회로부터 잊혀지고 만다. 그리고 죽음 후에 장례식 기간 동안 많은 관심을 받다가 금세 완전히 잊혀진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저 신기루 같은 것일까?

 

이반 일리치는 운 좋게도 영혼의 목소리를 듣고 난 후 그것을 깨닫게 된다. 자신이 평생 추구했던 삶이 사실은 모두 가짜라는 것을 말이다. 그것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한 삶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은 자신이 원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정해준 것들이었다.

 

그는 성공해야 했기에 공부를 해서 검사가 되었고, 검사는 공평하게 법을 집행해야 하기에 뇌물을 받거나 혹은 특정한 누군가의 편을 들지도 않았다. 그는 양심에 소리에 따라 살았으며, 밝게 살아야 직장이나 사교 모임에서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명랑한 삶도 살았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에서 그가 원한 것은 없었다.

 

그는 그것을 죽는 그 순간 깨닫고는 자신의 삶에 대한 무의미성을 인식한다.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게 됨에 따라서 죽음을 받아들이고, 오랫동안 자신을 지배했던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리고는 편안하고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한다.

 

그가 마지막에 느낀 것은 바로 살아있는 이들에 대한 가여움이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이반 일리치가 살았던 삶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반복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삶을 참회하면서 아내에게도 용서를 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가 된다.

 

사실 이반 일리치의 살았던 삶은 요즘 우리들도 무척 원하는 삶이었다. 성공한 검사로써 돈도 많이 벌고, 사회적으로 명예를 가지고 있으며, 가정을 이루고, 존경 받으면서 사는 삶, 누가 그런 삶을 원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데 그런 그가 죽음 앞에서 자신의 삶의 가치를 완전히 부정한다. 자신이 완전히 거짓된 삶을 살았음을 자각한다. 그리고 그는 그 자각을 통해서 자신의 진정한 삶을 이해한다.

 

아마도 그가 기적처럼 다시 살아났다면, 그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는 검사라는 직업을 그만 둘 것이고,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찾고 그것을 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 '어떻게 죽을 것인가' 를 고민해야 할까? 아니면 이반 일리치의 자각에 대해서 생각해야 할까?

 

이것은 딱히 답을 낼 수 없지만,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문제는 어떤 면에서 매우 국소적인 문제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즉, 그것은 중요하진 하지만, 결국엔 본질적 문제는 아니란 뜻이다. 왜냐하면 어떻게 죽든 간에 우리는 결국 죽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책에서도 그런 문구가 나온다. 죽지 않을 수는 없지만, 어떻게 죽을 수 있을지는 선택할 수 있다고 말이다. 즉, 죽음이 그 자체가 주는 의미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를 읽다가 보면, 인체가 늙어감에 따라 어떤 변화를 겪는지에 대한 참으로 자세한 설명이 나온다. 그러니 그 글을 읽다가 보면, 정말로 오래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 밖에 안 든다. 사실 오래 산다는 것은 결코 축복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이 아닌 존재로 변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이 책을 보면 그런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든다.

 

그런데 우리는 좀 더 큰 그림을 봐야 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도대체 나는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나는 왜 살아야 할까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다.

 

이것은 누구도 답을 대신 내줄 수 없다. 우리 사회는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지에 대한 수 많은 답을 만들어서 가르쳐주지만, 어느 누구도 '나는 누구이고, 왜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답을 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찾는 것이 바로 이반 일리치가 죽음 직전에 들었던 '영혼의 목소리'를 듣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것을 통해서 삶을 늙음으로 가는 과정이 아닌, 무엇인가 더 다른 어떤 것임을 자각할 수 있는 과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삶과 죽음의 경계가 단지 단절만은 아님을 알게 될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죽음이 무엇이 그리 큰 일일까? 그래서 육체적으로 너무 노쇠한 시기가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아무런 거리낌없이 죽음을 선택할 수 있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이것을 모른다고 해도 죽음은 그리 두려움만은 아니다. 우리는 죽음으로써 비로소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은 우리가 살아서 누린 모든 가치의 본질적 배경이다. 또한 우리가 살아서 누린 모든 행복의 원천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죽음이 있기에 비로소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주된 관심은 늙고 병들었을 때 과연 자신만의 게라심이 있을까에 머무를 것이다. 그럴수만 있어도 충분히 만족스럽다고 느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