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가치의 소멸과 집착 - 1

아이루다 2016. 7. 15. 08:50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삶이 가진 가치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 개인별로 추구하는 가치 자체가 워낙 다양하고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서로들 너무 달라서 그렇지, 아무런 가치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맞다.

 

그 누가 '넌 쓸모 없는 존재야' 라든가 '너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라는 등의 말을 들을 때, 그것을 웃어 넘길 수 있겠는가? 그것이 농담이 아니라면, 그 말을 듣는 순간 화가 나거나, 실망스럽거나, 좌절하거나, 굴욕감을 느끼거나, 서글픔이 밀려올 수 밖에 없다. 설령 농담이라고 해도 기분이 나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인간의 가치에 대한 욕구는 매우 근원적 욕구 중 하나라서,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떤 식으로든 가치를 추구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어떤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고 느끼는 순간, 자신의 삶에 대한 만족을 얻게 된다. 이런 식으로 얻은 가치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행복해지는 것이다.

 

즉, 가치에 대한 욕구는 행복에 대한 욕구인 셈이다. 그러니 당연히 근원적 욕구이다. 더군다나 가치는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조건 중 하나이다.

 

그 두 개는 각각 가치를 통한 행복 성취와 즐거움을 통한 행복 성취이다.

 

이것에 따라서 사람들 역시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가치 추구의 삶을 통해서 행복한 사람, 다른 하나는 복잡한 조건 없이, 그저 재미있고 즐거우면 행복한 사람들이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젊은이에 비해서 노인이, 여자에 비해서 남자가 좀 더 가치 추구적인 삶을 원한다. 그러니 딱 봐도 눈에 보인다. 노인에 비해서는 젊은이가, 남자에 비해서는 여자가 좀 더 행복하게 산다. 즉, 가치 추구의 삶이 재미와 즐거움을 추구하는 삶에 비해서 더 행복하다는 그 어떤 보장은 없다. 물론 두 개의 입장이 각자 행복을 얻는 과정을 보면 왜 그럴 수 밖에 없는지 쉽게 이해가 간다.

 

가치 추구의 행복은 기본적으로 자기와 싸우고, 힘들고 고된 과정을 거쳐서 뭔가를 이룩해냄으로써 행복해지고, 즐겁고 재미를 통한 행복은 그저 그 자체를 경험함으로써 행복해진다.

 

이렇게만 보면 후자의 행복이 훨씬 나아 보이긴 한다. 하지만 문제는 있다. 그것은 바로 재미와 즐거움을 추구하는 행복은 반드시 조건이 필요하다. 즉, 재미와 즐거움만을 추구할 수 있는 경제적 조건, 신체적 조건, 환경적 조건, 사회적 조건 등이 필수적이다.

 

풍족한 경제적, 아프지 않은 몸, 주변에 특별한 문제가 없는 환경, 다른 사람들의 삶에 상관하지 않고 사는 태도 등이 바로 그것인 셈이다.

 

사실 이 두 입장은 서로 너무 달라 보여서, 서로 진정한 행복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결국 차이는 없다. 그저 각자 장단점만이 존재할 뿐이다. 가치 추구의 행복은 힘들지만 조건에 덜 영향을 받고, 재미와 즐거움의 행복은 쉽게 얻지만 조건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과거에서 현대 사회로 발전되어 올수록 사람들은 가치 추구의 행복보다는 재미와 즐거움을 추구하는 쪽으로 점점 변하고 있다. 그로 그럴 것이 재미와 즐거움만을 추구해도 되는 조건이 점점 쉽게 갖춰지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과거보다 더 잘살고, 더 편하고, 더 건강하게 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는 경향도 있다. 왜냐하면 가치를 추구할 방법 자체가 사리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과거에 비해서 가치를 추구하고 싶어도 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가치 추구의 행복을 원하는 사람들은 매우 큰 곤란함에 빠졌다.

 

이런 중대한 변화 속에서 우리들 각자가 과연 어떤 식으로 이 변화를 대처하고 있는지를 주의 깊게 바라볼 수 있다면,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가 직면하고 있는, 정말로 중요한 흐름 하나를 통찰해 낼 수 있다.

 

지금부터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원래 과거 20세기 이전의 시대엔 가치 추구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먹고 살기 위해서 각자가 해낸 일이 바로 가치화 되었다.

 

사냥을 했다면, 사냥해서 잡은 동물이 가치였으며, 사냥을 할 때 쓴 총 자체도 가치가 있었다. 그러니 좋은 총을 만드는 능력은 매우 중요한 가치 중 하나였다. 사냥할 때 필요한 빠른 발과, 동물의 발자국을 추적하는 것도 아주 중요했다. 강한 근육의 힘도 아주 중요한 가치였다.

 

총이 아닌 활을 쏘던 시대는 훨씬 더 했다. 명궁이 있었고, 명검이 있었다. 당시엔 많은 노력을 해서 만든 좋은 활이나, 아주 잘 제련된 멋진 검은 그대로 가치가 생겼다. 왜냐하면 그런 활과 검이 현재처럼 어딘가 전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현실 속에서 써야 했기 때문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 시대에는 악기를 만드는 것이나, 책상을 만들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연주를 하거나, 도자기를 만드는 것도 모두 가치가 있었다. 설령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고 해도 인간의 노력과 시간이 투자된 그 모든 것은 각자 고유했으며 가치 있는 일이었다.

 

이후 인간은 끝없이 기술을 발전 시켰다. 기술뿐만이 아니라 생산 방식 자체도 발전시켰다. 그리고 20세기 초반 우리는 드디어 대량 생산 체제를 완성시켰다. 더해서 모든 것을 전문화 된 생산 방식으로 바꾸었다. 즉, 우리는 이제 돈으로 모든 것을 살 수 있다. 반드시 스스로 만들어야 할 것은 이제는 아무것도 없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것은 만 개의 부품을 가지고 자동차를 만드는 두 가지 방식이다.

 

첫 번째 경우는, 한 사람당 각자 만 개의 부품을 가지고 차 하나씩을 완성해내는 방식이다. 만 명의 사람이 각자 자리에서 만 개의 차를 동시에 만드는 방식이다.

 

두 번째 경우는, 지금 대다수의 공장에서 채택하고 있는 방식인, 컨테이너 벨트로 연결된 생산 라인에서 만 명이 각자에게 할당된 부품을 들고 있다가 자기 앞에 도착한 자동차에 해당 부품만 장착하는 방식이다.

 

이 두 방식은 각각 개별 생산 방식과 협업 생산 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각각 어떤 장점을 단점을 가지고 있을까?

 

사실 생산성만 따지면, 협업 방식은 개별 방식을 훨씬 뛰어 넘는다.

 

일단 오류 가능성부터 보자. 개별 방식에서 만 명은 모두가 같은 수준의 조립 능력이 없다. 그러니 당연히 잘못 조립된 차가 나올 가능성은 매우 높다. 더군다나 각자가 일정 수준급의 조립 능력을 갖추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러다가 한 명이라도 죽거나 정년 퇴직이라도 하면, 그 자리를 신입이 채우면서 오류 가능성은 무척 높아지게 된다.

 

그리고 공간을 살펴보자. 한 명이 만 개의 부품을 다루기 위해서는 아주 넓은 자리가 필요하다. 좁은 공간에서 하려면 부품이 제 멋대로 뒤섞여서 해당 부품을 찾는 데만 한참 시간이 걸린다. 그러니 당연히 조립 속도는 현저하게 늦어진다. 그러니 공장 크기가 커져야 하고, 전체적으로 속도도 느리다.

 

제품의 일관성도 문제가 된다. 사람마다 모두 다른 수준의 완성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 차를 만들면 아주 잘 만들어진 차로 나올 가능성도 있지만, 겨우 품질 검사를 턱걸이 할 수준의 제품도 다수 나올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상황이니 제품 검수도 모두 각자 다 해야 한다. 각자 만든 것이기에 전수 조사를 하는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오류를 많이 낸 사람은 무조건 바꾸는 수 밖에 없다. 그러면 또 다시 신입을 교육해야 한다.

 

생산된 자동차에 어떤 문제점들이 드러나면, 그것을 전체 모두 검사해 봐야 한다. 혹은 생산된 자동차마다 누가 조립을 했는지를 기록해둬야 한다.

 

협업의 방식은 이런 문제점들을 일거에 다 해결한다. 자기 부품에만 익숙해지면 되기 때문에 전문 기술자가 되는데 까지 걸리는 시간이 아주 짧다. 그리고 제품도 늘 일정한 수준으로 만들어진다. 그리고 자기 부품만 관리하면 되기 때문에, 부품을 찾는 시간도 적게 들고 공간 자체도 적게 차지한다.

 

제품 검수도 임의의 몇 개만 하면 된다. 하루에서 수 백대의 차가 만들어지겠지만, 모두 도장으로 찍은 듯 붕어빵처럼 똑같다. 그러니 전수 조사를 할 필요가 없다.

 

이런 차이로 인해서 생산성이 심하게 차이가 난다면, 어떤 사업주가 자신의 공장을 협업의 방식으로 하지 않겠는가?

 

사실 소비자도 이득이다. 생산성이 높아지니 당연히 가격이 싸진다. 좋은 제품을 싸게 살 수 있다는, 말 그대로 최고의 소비가 가능해진 것이다. 더해서 제품의 일관성이 보장되니까 같은 제품을 살 때 뽑기 운 같은 것을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협업의 방식은 이렇게나 좋은 점들만 존재하는 것일까? 과연 아무런 단점은 없을까?

 

당연히 있다. 그리고 이 단점이 바로 가치에 대한 부분이다.

 

각자 만든 차는, 그 품질이 둘쑥날쑥함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고유한 가치가 만들어 진다. 말 그대로 홍길동씨가 조립한 차는 차에 '홍길동 만듦' 이라고 새겨도 될 정도이다. 그리고 만약 홍길동씨가 유명한 명장으로 알려졌다면, 이 사람이 만들었다는 이유로 웃돈이라도 얹어서 살려고 할 것이다.

 

반면에 자기가 담당하는 부품만 장착하면 되는 사람은, 차 전체를 조립하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차에 대한 자부심은 가질 수 없다. 자신은 자동차의 전체 중 1/10,000 만 감당했기 때문이다. 1과 0.0001의 차이는 크다.

 

즉, 부품만 조립하는 사람은 어느새 그 자신이 부품처럼 되어 버리고 만다. 그러니 일을 할 때, 그 일에 대한 가치를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다. 일과 노동은 그저 돈을 버는 수단으로 전락한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직장은 돈벌이 수단으로만 한정짓고 자아 실현은 별도의 방법을 찾는다.


그리고 직장이 돈벌이 수단으로써만 정의되면서, 돈만 벌면 되므로, 돈을 벌 수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릴 필요가 없다는 논리가 통용되게 된다. 더해서 최종 결과물에 대한 가치를 못느끼는 것은 그것에 대한 책임감 역시 못 느낀다는 것으로 확장된다. 이것이 요즘 직장에서 나타나는 많은 도덕적 해이를 일으키고 있다.

 

반면에 혼자서 차를 조립하는 사람은 그 차의 가치를 온전히 다 느낀다. 충분히 잘 만들었다면, 그 결과물에 대해서 남다른 자부심과 가치를 느낄 수 있다. 더군다나 다른 사람들에게 명장이란 평가를 받을 수 있다면, 그것만큼 가치를 느끼는 것도 드물 것이다. 물론 책임감도 많이 느낄 수 밖에 없다. 결과물이 자신의 얼굴이 된다.

 

하지만 이 방식은 느리고 일관성이 없다. 마치 공장에서 만들어진 접시와 직접 도자기를 만드는 곳에서 만들어 온 투박한 접시를 비교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더 선호하고 있을까? 재미있게도 우리는 핸드 메이드 제품, 즉 개별 방식으로 만들어진 제품이 더 값어치 있다고 믿는다.

 

결국 산업 기술이 발전하면서 우리가 얻은 것은 싸고 좋은 제품이고, 잃은 것은 가치이다. 하지만 우리가 가치를 버리려고 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저 우연히 일어난 부작용 중 하나이다. 최대한 움직이지 않고 편하게 살려고 하다 보니 살이 찌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우리는 의도하지 않게 삶의 가치를 뺏겨버리고 말았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모든 종류의 제품들은 언제든 교체 가능하다. 단지 돈만 필요할 뿐이다. 그러니 컨테이너 벨트이든 어디든 상관없이 일을 해서 돈만 벌면 된다.

 

하지만 우리가 잃어버린 가치는 도대체 어떻게 채워 넣어야 할까? 그러니 현대인들이 가치를 찾기 위해서 헤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당연한 일이 아닐까?


[다음 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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