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인간관계로부터의 자유

아이루다 2016. 6. 30. 15:38

 

인간은 지적 존재이다. 전 우주적 관점에서는 아닐지 모르지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지구 상에서만큼은 확실하게 지적으로 우월하다. 타고난 두뇌 용량과 그것을 제대로 이용할 수 있게 한 교육이 우리를 지적 존재로 만들어 준다.

 

이런 지적 능력 덕분에 인간은 다른 생명체들이 갖지 못한 아주 특별한 능력을 하나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이다.

 

우리는 실제로 어떤 것을 하기도 전에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 우리는 심지어 자신이 죽는다는 것도 이미 확실하게 예측하고 있다. 단지 그때가 언제인지만 모를 뿐이다.

 

이 능력이 왜 그렇게 특별한 능력이라고 하는지 의아할지도 모르겠다. 어떤 면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미래를 제대로 예측할 수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정말로 그랬다면 우리는 그 어떤 것도 해낼 수 없다. 우리는 늘 단 하루만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원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지식과 경험 그리고 아주 복잡한 두뇌 활동을 통해 나온 결과이다. 그래서 지식과 경험과 이것을 총괄해서 생각할 수 있는 복합적 사고 능력 중 하나만 부족해도 결코 제대로 해낼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이 지구상에서는 오직 인간만이 이것을 해내는 것이 가능하다.

 

미래를 예측하고 계획을 세울 수 있다면, 이제 남은 것은 시간과 노력만 필요할 뿐이다.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위대한 일들은 보통 천재들이 미래를 예측하고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이 시간과 노력을 쏟아서 최종 결과를 만들어 낸다.

 

이런 원리로 인간은 자신의 평생 동안 일수도 있으며 혹은 수백 년에 걸친 시간 동안을 진행해야 이룰 수 있는 계획도 세울 수도 있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과 같은 문명을 만들 수 있는 힘의 원천이다. 이것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토굴에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 능력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이 능력은 단지 인간이 문명을 이루는데 필요한 것만이 아니다. 사실 이 능력은 우리가 매일 일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훨씬 자주, 훨씬 중요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것을 조금 과장해서 표현한다면, 이것은 우리의 삶 그 자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즉, 우리는 매일 예측을 하고, 그것을 위해 계획을 하고, 그것을 실현해 내기 위해서 시간과 노력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저녁거리를 장만하기 위해서 시장을 볼 계획을 짤 때를 생각해봐도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그 중에서 우리가 매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데도 있어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정말로 필수적인 능력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타인들과 다양한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우리는 각각의 관계마다 모두 다른 입장을 취한다. 부모와의 관계, 형제들과의 관계, 친구들과의 관계, 지인들과의 관계 등이 모두 다르다. 그리고 그 안에서도 조차 아버지와의 관계, 어머니와의 관계, 여 동생과의 관계, 형과의 관계 등등으로 일일이 세분화 된다.

 

사실 우리는 한 명당 각자 서로 다른 형태의 관계를 맺는다. 즉, 모든 관계는 일대 일이며 유일하다. 똑같은 관계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나 많은 관계 속에서 암묵적으로 각각의 관계를 조금씩 다르게 정의할 수 있는 원리는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미래에 대한 예측, 다른 말로 하면 '기대치'의 원리이다.

 

미래를 예상하고 계획하는 능력과 기대치가 도대체 무슨 관계일까 의문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미래를 예측하는 것 자체가 자신의 이득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예상 그 자체가 바로 이득에 대한 기대치라는 것을 만들어 낸다.

 

물론 기대치라는 단어 자체가 긍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부정적인 결과가 기대가 될 때는 잘 맞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그때는 그저 기대라는 말 대신 걱정이란 말을 사용하면 된다.

 

엄밀히 말해서 기대와 걱정은 사실상 같은 의미이다. 단지 그 기대하는 결과가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로만 차이 난다. 그래서 기대 반 걱정 반이란 말이 있다. 즉, 어떤 일의 긍정적인 결과를 원하는 마음은 기대이고, 부정적인 결과를 피하고 싶은 마음이 걱정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식으로 기대나 걱정을 통해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정의할까?

 

우리는 보통 한 사람하고만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수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 관계는 마치 거미줄처럼 얽히고 설켜서 한 없이 복잡해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이렇게 복잡한 관계 속에서 행복해지기도 하고 불행해지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관계를 잘 맺고 적절하게 처신하는 사람들은 행복한 결과를 얻지만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그 관계망 속에 갇혀서 꼼짝도 못하는 경우도 생기는 것이다.

 

즉, 관계가 늘 행복의 결과만을 만들어 낼 수만은 없다. 관계는 불행의 원인이 되는 경우도 많다. 이것이 관계의 양쪽 면이다. 관계를 통해 행복한 결과가 예측된다면 기대를, 관계를 통해 불행이 예상된다면 걱정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흐름은 참 단순하고 이해하기도 쉽다.

 

우리는 수 많은 관계 속에서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가능성이 높은 사람에 대해서 기대치를 높이고, 반대로 불행하게 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은 기대치를 낮춘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자신도 모르게 매일 하는 일이다.

 

기대치가 높은 사람은 점점 친해지고 소중해지며, 반대로 기대치가 낮은 사람은 점점 멀어지고 무관심한 대상이거나 심지어는 기대치가 아예 없고 걱정이 들기 시작하면 바로 경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서, 각자의 부모는 그 어떤 관계보다도 기대치가 높은 대상이다. 즉, 보통의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있어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대상이다. 형제는 그 다음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친구, 지인, 사업관계 등등으로 점점 기대치는 낮아진다.

 

사실 신뢰라는 말 자체가 바로 기대치에 부흥하는 정도를 의미한다. 100을 기대했다면 200을 해주는 것이 부모이다. 하지 못해서 못해줄 망정, 하기 싫어서 안 해주는 부모는 별로 없다. 그리고 만약 그랬다면 그 부모의 자식에게 부모와의 관계는 남들보다도 못하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그런 관계는 결국 끊어진다.

 

이제 이 기대치란 말에 대해서 다시 잘 생각해보자. 도대체 우리는 관계 속에서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이미 말했듯이 당연히 행복이다. 우리는 모든 관계에서 행복을 기대한다. 그리고 불행할 것 같으면 걱정을 한다. 그리고 방금 쓰인 행복이란 말은 사실 이득의 다른 말이다. 즉,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이득을 얻을 수 있다면, 우리는 관계를 소중한 것으로 인식한다. 물론 이때 이득은 반드시 돈과 같은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즐거움이나 만족감과 같은 감정들도 모두 포함된다.

 

부모 자식간에도 이득을 따진다는 말이 냉정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도, 형제와의 관계도, 친구와의 관계도 모두 각자 자신에게 유리하고 이득이 되는 것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에 유지된다. 그 어떤 관계도 지속적으로 손해를 보는 관계는 유지되지 못한다. 천륜이라고 알려진 부모와 자식도 마찬가지다.

 

물론 예외가 있다. 그것은 관계가 오직 기대치로만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그것을 경계한다. 그래서 우리는 도덕적 의무와 책임감이란 것을 정해 두었다. 즉, 반드시 이득이 되지 않더라도 끊어지지 않아야 하는 관계가 생겨났다. 보통은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의무와 책임감으로 인해서 부모나 자식과의 불행한 관계를 참아낸다.

 

여기까지 기대치에 대한 설명은 일반적 수준이다. 하지만 인간이 인간에 대해 품은 기대치는 사실 좀 많이 터무니 없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스스로 불행을 만들어서 힘들게 살기도 하고 행복에 대한 불필요한 기대치로 인해서 결국 불행해지기도 한다.

 

사람의 눈을 너무 의식해서 겪는 불행은 스스로 만든 것에 대한 흔한 예이다. 우리는 자신을 아는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지 끝없이 신경 쓴다.

 

타인의 눈을 너무 의식하는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타인들이 시선에 과도한 기대치나 혹은 과도한 걱정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심지어 자신이 전혀 모르는 사람의 시선도 신경 쓴다.

 

우리는 길을 갈 때도 끝없이 우연히 만나게 되는 사람들의 시선도 의식한다. 알지도 못하고, 아무런 연관도 없는, 조금 지나면 전혀 기억하지도 못할 사람에게조차 그렇다. 도대체 왜 그럴까?

 

 그 이유는 바로 자신을 좋게 봐주길 기대하거나 자신을 무시하지 않나 걱정이 되어서 그렇다. 즉, 이 역시도 기대치나 걱정의 일종인 셈이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로 쓸데없는 생각이다. 사실 우리는 상대를 전혀 몰라서 아무런 기대도 없고 걱정도 안 될 경우라면, 그 사람에게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는다. 우리는 오직 자신에게 이득이 되거나 손해가 될 가능성이 있는 경우에만 상대에게 관심을 갖는다.

 

원래 우리가 모르는 사람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런데 그 이유는 우리가 그들을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과 아무런 이득과 손해의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득이나 손해와 관련이 있다면, 잘 알지도 못하고 단 한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갖는다. 그것이 바로 주식을 하는 사람들이 알지도 못하는 미국의 FRB 의장에게 관심을 갖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그들과 이득과 손해에 대한 기대치가 있어서 그렇다는 것을 유추해 낼 수 있다. 즉,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조차도 아주 잠시라도 관계를 맺는다. 사실 관계라고 하기도 그렇지만, 사실 길에서 우연히 운명의 상대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될지도 모르니 어떤 면에서는 기대치가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가 보통 다른 사람의 신경을 쓰는 주된 이유는 보통 행복에 대한 기대치가 아니다. 자신을 비난할까 봐, 자신에게 잘못되었다고 할까 봐 하는, 사실상 불행함에 대한 걱정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

 

아무튼 길에서 우연히 지나친 사람에게 이득을 얻거나 혹은 손해를 입을 가능성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거의 로또 1등 당첨 수준의 걱정이다. 그런데도 그것에 끝없이 신경을 쓴다.

 

또한 반대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도대체 우리는 길을 가다가 만나게 되는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이득이나 손해를 줄 의사가 있는가? 당연히 없다. 우리는 그들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러니 우리가 매일 만나는 그들 역시도 당연히 없을 것이 분명하다. 즉, 우리가 남들에게 관심이 없듯이 남들도 역시 우리에게 거의 관심이 없다. 그러니 이것을 계속 신경 쓰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이득을 주거나 손해를 입힐 능력도 안되면서 그것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로또를 사지도 않고 당첨되길 바라는 것이다.

 

또 다른 문제점 중 하나는 바로  '관심병'이다. 사실 관심병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병이다. 기본적으로 모든 인간은 자신을 알아주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 병이 생겨나고, 이것은 우리가 자신을 특별한 존재 이길 바라기에 심화된다.

 

우리가 특별하고 싶어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가 평범하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가 이미 충분히 특별하면 거꾸로 평범하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특별한 존재였던 슈퍼맨은 사랑을 얻기 위해서 인간이 되는 것을 선택했다.

 

슬프지만 우리는 평범하기에 특별하고 싶어한다. 그것은 타인의 관심을 받고 싶은 욕구를 만들어 낸다. 그러다가 남들에게 터무니 없는 기대치를 품기도 한다.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조차도 말이다. 이것이 극대화 된 사람을 바로 '관심병' 에 걸렸다고 한다.

 

그래서 시선을 끌기 위해서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거나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이 정도가 되면 정상 범주를 벗어난 정신병이다.

 

평범하면 평범할수록 특별함에 대한 욕구가 심하다. 즉, 관심병에 걸린 사람들의 특징은 바로 스스로 너무도 평범해서 도대체 현실의 자신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수준까지 떨어진 사람들이다.

 

이런 식으로 관계 속에서 작용하는 기대치와 걱정은 다양한 형태의 문제점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 기대치를 기반으로 한 관계가 가진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바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는 일일 것이다. 사실 우리가 관계 속에서 행복을 추구하면서도 관계를 벗어나고 싶어하는 이유가 바로 이 상처 때문이다.

 

우리가 당하는 관계 속의 상처는 그 어떤 상처보다도 깊고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상처는 기본적으로 누군가에게 자신의 입장에서 합당한 기대를 품었다가 기대대로 되지 않아서 실망하게 되면 얻는다. 즉, 상처는 기대치를 기반으로 한 관계라는 행위 자체가 가진, 반드시 나타나는 부작용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어떤 식으로든 선의를 베푼다. 그리고 그 선의가 마치 아무런 의도가 없다는 듯 말하고 행동한다. 하지만 이것은 거짓말이다. 자신조차도 속는 거짓말이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너 이러려고 나한테 잘한 거야?" 라고 묻으면, 그 사람은 "아니야. 그것이 아니라 나는.." 이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우리가 그 사람에게 뭔가 실망을 주면 그 사람 입에서 바로 이런 질문이 튀어 나온다.

 

"내가 지금까지 너에게 해준 것이 얼마인데.." 라고 한다.

 

이 입장은 서로 완전히 반대되지만, 이상하게도 이 두 입장은 우리들에게 모두 익숙하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남에게 선의를 베풀 때 자신도 모르게 가지고 있는 본심이다. 우리는 누구나 모두 막연한 기대치를 가지고 선의를 베푼다. 물론 재수가 없다면 무시당할 수도 있고, 운이 좋다면 예상보다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만약 무시를 당한다면 그 사람과의 관계는 '좋은 관계'에게 '경계해야 할 관계'로 바뀐다. 반대로 예상보다 더 많은 것을 얻으면 '좋은 관계'에게 '정말로 좋고, 더 잘해줘야 할 관계'로 바뀐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율배반적인 태도를 보인다. 결코 순수하지 않은 의도를 가지고 관계를 맺으면서도 그것이 순수한 것이라고 스스로도 속고 남을 속이기도 한다.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 인간은 결코 순수하지 못하다. 우리는 굶으면 죽는다.


리가 순수해 보이는 이유는, 멍청하거나 충분히 배가 불러서일 뿐이다.

 

지금까지 언급한 세 가지 문제점, 타인의 시선을 너무 심하게 의식하는 것, 다른 이의 관심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것, 관계 속에서 상처를 입는 것, 이 세 개 이외에도 더 많은 문제들이 있다. 기대는 행복감을 만들어 내는 일등 공신이면서도 불행을 만드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반드시 이득과 손해를 따지게 되고, 이로 인해서 이뤄질 기대와 이뤄지지 않을까 봐 걱정을 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겪는 많은 일들의 시작점이다.

 

그러니 이런 생각도 해볼 수 있다. 만약 그 어떤 것을 하더라도 아무런 기대 없이 하고, 어떤 일이 일어나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관계 속에서 온전히 평화로워지지 않을까?

 

그리고 관계 속에서 아무런 집착도 없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로움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많은 것들로부터 한 발 물러나서 근본적인 문제점들을 치유하면서 평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우리 인간이 가진 매우 근본적인 문제 중 하나인 '피해의식' 또한 바로 기대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자신이 누려야 한다고 믿는 권리를 정하고,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한다. 엄마는 우리들의 저녁 밥을 해줘야 하는 것 등도 바로 그런 예가 된다.

 

이렇게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누릴 권리의 당위성을 갖는 것 자체가 바로 확실하게 받을 수 있는 기대치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누군가의 자식이기에, 누구에게 뭔가 해줬기에, 자신의 친구가 얻은 행운을 봤기에, 자신과 비슷한 성적을 보였던 동창의 성공을 들었기에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얻어야 하는 행운들을 아주 당연한 것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이것이 예상처럼 만족스럽지 못할 때 피해의식이 만들어진다. 더 나은 대접을 받고, 더 나은 위치에 있고,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넓은 집에서 살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피해를 입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엄마가 바쁜 일이 있어서 저녁을 해 놓지 못했다면 일단 성질을 낸다.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스스로 그 어떤 근거가 없어도 그렇다. 그냥 엄마니까 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엄마가 저녁을 해놓지 않으면, 우리는 부모가 자신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는 피해의식을 가진다.

 

이런 식으로 피해의식은 기대치의 불만족으로 인해 발생한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개가 우리를 무는 것을 잘못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개는 인간을 물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로 옳은 말일까? 우리보다 더 뛰어난 외계인이 와서 우리를 막 죽일 때 우리가 그들에게 대항하는 것은 잘못된 행동일까?

 

아닐 것이다. 이것은 오직 우리 스스로 정한 당위성일 뿐이다. 우리는 사실 그 어떤 당위성도 가질 수 없다. 그럼에도 있다면, 엄청난 착각이며 오만이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관계를 맺지 않을 방법이 없다. 사실 맺어야 하기도 한다. 하지만 관계 속에서 행복하기 보다는 불행하기 더 쉽다면, 이젠 좀 다른 관점에서 관계를 바라 볼 필요가 있다.

 

자신이 관계에 너무 종속적으로 되었고, 그것도 불행하기까지 하다면,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 변화는 어떻게 이뤄져야 할까? 우리는 어떻게 종속적 관계에서 벗어나고 불행하기 보다는 행복할 수 있을까?

 

답은 쉽다. 관계 속에서 가진 기대치를 낮추는 것이다. 우리가 관계 속에서 종속적으로 되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관계를 맺는 상대들에게 어떤 기대치를 가졌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란 예상으로 인해서 상대가 자신을 함부로 대하거나, 이용해 먹어도 참고 견디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포기하면 된다. 그러면 훨씬 행복해진다. 물론 회사와 같은 단체처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쉽지 않다. 하지만 주변에 딱히 만나고 싶지도 않는데도 불구하고 만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것을 적용해 볼 필요가 있다.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을 왜 만나려고 하는가?

 

더해서 불행하기 때문에만 기대치를 낮추는 것이 아니다. 관계 속에서 기대치를 낮추는 것은 좀 더 자유로운 삶을 보장하기도 하고, 더해서 다른 사람의 선한 행위가 훨씬 더 가치 있어지는 효과도 생겨난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기대치 보다 더 이득을 얻게 되면 우리는 많이 행복해진다. 그리고 상대도 훨씬 더 소중해진다. 즉, 관계 속에서 얻는 다양한 형태의 행복이 훨씬 나아진다는 뜻이다.

 

그러면 상대도 좋아한다. 큰 도움도 아닌데, 진심으로 고마워하게 되면 상대 역시도 기분이 많이 좋아진다. 그리고 자신이 상대를 위해 선한 행동을 할 때 훨씬 덜한 기대를 가지고 할 수 있기도 하다. 결국 착각이긴 하지만, 그래도 훨씬 진실되다.

 

그러니 상대에 대한 기대치가 낮으면 낮을수록 더 좋다. 어렵지만 같은 조건이라면 좀 더 행복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아진다. 더해서 상처 입을 일도 줄어든다. 그리고 자유로워지기도 한다.

 

어떤 누구에게 기대치를 갖고 있는 한, 우리는 언제나 그 기대치 대상에게 종속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약하냐 강하냐의 차이일 뿐이다.

 

거의 불가능하겠지만, 극단적으로 가정해서 자신의 생명 자체에 대한 기대치마저 버릴 수 있다면, 과연 우리에게 자유를 빼앗고 삶을 두렵게 하는 것이 무엇일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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