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개, 돼지론

아이루다 2016. 7. 11. 09:01


며칠 전, 우리나라에서 고위직 교육 공무원 중 한 명이 술자리에서 좀 황당한 말을 한 모양이다. 지난 주말이 그 이야기로 꽤나 시끄러웠다.

 

아마도 영화 속 대사를 인용한 듯 한데, 아무튼 그 사람은 우리나라에서 사는 사람을 1%의 지배층과 99%의 피지배층으로 신분화 시켜서 나누는 것이 훨씬 더 낫다는 판단을 하고 있나 보다.

 

이 사람이 어떤 말을 했든지 상관없이, 어떤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온전히 그 사람의 자유이다. 단지 우리는 자신이 내뱉은 말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 특히 이 나라의 미래를 결정하는, 교육에 관련된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더 그 책임이 무겁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르겠지만, 씁쓸하다. 그러면서도 개인적으로 이 사람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단지 1%와 99%를 나누는 기준이 그 공무원이 말한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믿는다. 현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인류는 호모 사피엔스의 후손으로써, 완벽히 동일한 조상을 가지고 있다. 물론 지금 시점에서 보면 백인, 흑인, 황인 등으로 외모가 많이 달라 보이고, 그 안에서도 수 많은 다른 종류의 민족이 존재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그리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혈액형만 같다면, 서로 피를 나눠줄 수도 있다. 어떤 조건이 충족되면, 장기도 주고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오직 인간끼리만 가능하다.

 

이런 상황이니, 우리가 인간을 동일한 개체로 믿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이것은 관념적이다. 또는 의지적이다. 솔직히 표현하면, 우리는 인간이 평등할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인간이 평등해야 한다고 믿는다.

 

또한 현대 기술 문명이 발전하면서 인간은 많이 편해졌다. 모든 것이 편해졌다. 자동차도 있고, 비행기도 있고, 냉장고도 있고, 세탁기도 있다. 각종 편의 시절이 넘쳐나고, 좋은 가전제품들이 줄을 서 있다. 손으로 들고 다닐 수 있는 작은 컴퓨터로 전화도 걸고, 게임도 하고, 뉴스도 볼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자신의 시간과 노동력을 팔아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전혀 이상한 것은 아니다. 사실 하고 싶어도 하기 힘드니까 말이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우리는 집을 지키는 개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집을 지키는 개는 집을 지키는 노동을 하고 난 후, 집 주인으로부터 먹을 것을 제공 받는다. 주인과 놀아주는 개도 마찬가지다. 주인과 잘 놀아주고 나면 먹을 것을 제공 받는다.

 

냉정히 말하면 집을 지키는 개는 경찰과 다름이 없다. 주인과 놀아주는 개는 연예인과 다를 바 없다. 근본적으로 무엇이 다를까?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다를까? 자신이 번 돈을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이 다를까?

 

그나마 돼지는 개와 달라 보인다. 돼지는 그냥 먹다가 죽어서 고기를 제공한다. 우리는 다른 인간을 먹지 않기 때문에 돼지와 비슷한 인간은 없다. 하지만 명백한 목적이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을 하고 살아가고 있다. 즉, 우리는 누구나 명백한 목적이 있다. 사실 그것이 없는 사람이 문제가 된다. 직장에서도 역할이 정해져 있고, 집에서도 역할이 정해져 있다. 우리는 어디를 가든 목적이 있어야 한다. 어느 곳에서 목적이 없이 존재하게 되면, 그 순간 바로 불필요한 잉여가 되고 만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 자신이 목적에 잘 맞는 쓸모 있는 존재가 되고 싶어한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중요한 존재이고 싶어한다. 우리는 그래서 타고난 모든 능력을 다 이용해서 얼마나 유용한 존재인지를 증명하는데 삶의 모든 에너지를 쓴다.

 

이렇듯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바로 사회적으로 유용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증명될 때마다 우리는 자부심에 가득 찬다. 자신이 얼마나 중요하고 필요한 존재인지가 증명될 때마다 한껏 거들먹거리고 싶어한다. 겉으로는 겸손을 말하지만, 마음 속 한 구석에 뿌듯함이 가득하다.

 

조직의 일원으로, 가족의 일원으로, 친구의 일원으로, 마을의 일원으로,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소속된 단체의 일원으로써 가치를 인정받으면 그것을 그리도 좋아한다.

 

그러니 어느 단체의 대표가 되어 대장 노릇 하는 것이 얼마나 좋겠는가? 기능적 만족도도 높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도 많아지는데 말이다. 우리가 권력을 탐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런데 이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냉정히 말하면, 우리는 사실 도구화 된 것이다. 우리는 유용한 도구가 될 수록 스스로에 대한 가치를 느낀다. 우리는 오직 유용함으로만 판단되는 존재들이 되고만 것이다.

 

뭐, 이런 부분은 다르게 해석을 함으로써 어느 정도 넘어갈 수 있다. 자신은 어쩔 수 없이 유용한 도구가 된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유용해진 도구가 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유용함을 제공한 결과, 즉 돈을 벌어서 그것을 이용해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많은 것을 누릴 수 있으니, 유용함은 사실 자신의 일부분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소비하는 행복을 떠올려보자. 우리는 과연 얼마나 도구화에서 벗어났을까?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관객으로써 즐기지만, 결국 영화 관객이라는 또 다른 사람들의 돈벌이 목적이 되었다. 우리는 맛있는 것을 먹지만, 손님이라는 또 다른 사람의 돈벌이 목적이 되었다. 사실 우리는 그 어떤 일을 해도 돈벌이 목적일 수 밖에 없다. 요즘 시대에 돈벌이 목적이 아닌 행동을 찾기란 너무도 힘들다.

 

이렇게 돈벌이 목적이 되는 현상 자체도 바로 우리가 도구화 되고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우리는 돈을 버는 도구가 되어서 돈을 번 후, 돈을 벌게 해주는 도구가 되어서 돈을 쓴다. 이것이 현대인의 삶을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절차이다. 이것이 반복되는 것이 삶이며, 이것이 끝나면 죽음이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다. 돈벌이 도구로써, 돈벌이 대상으로써 우리는 가치가 있어진 것인가?

 

물론 가치는 있다. 돈벌이 도구로써 유용한 가치가 있고, 돈벌이 대상이 될 때는 더욱 더 가치가 있어지기 때문에 대접도 잘 받는다. 돈을 많이 쓸 수록 더욱 더 가치 있어 보인다.


우리는 정말로 이런 사람이 되길 바란다. 어디서나 인정받고, 대접받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유용한 존재이길 바란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우리가 어떤 고위 공직자의 개, 돼지 발언에 발끈 하는 이유는, 우리가 개, 돼지보다 훨씬 더 유용한 존재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거기엔 다른 이유가 있다. 우리는 분명히 개나 돼지하고는 다른, 특별히 의미있는 존재라고 믿고 싶어한다. 놀랍게도 우리는 자신이 기능성을 넘어 선, 어떤 존재적 가치를 가진 무엇이고 싶어한다.

 

그러면서도 정작 자신을 평생 동안 무의식 속에서 유용함에 집착한 채 살아간다. 이럴 경우라면, 개나 돼지에 비유되었다고 해서 화를 낼 필요가 있을까? 사실 개는 우리에게 아주 친숙하고 사랑스러운 동물이며, 돼지는 우리들에게 아주 좋은 먹거리가 되고 있다. 어떤 면에서 그 유용함은 인간 못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가치를 통해 스스로 충분히 만족하면서 살아갈 수 없는 것인가? 많은 돈을 벌고, 많은 돈을 쓰면서 살 수 있다고 해서 우리는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솔직히 여기엔 의문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집안에 있는 망치는 못을 박을 때만 가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망치가 가치 없는 것은 아니다. 가치가 있긴 하다. 단지, 망치가 스스로 못을 박는 것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주장할 때,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오직 기능성 가치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우리는 원래 본질적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기술 문명이 발달하기 이전엔 각자의 노동력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 기계가 대신하기 전의 사람이 가진 힘은 충분히 가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삽질을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삽질에 불과하다. 훨씬 쉽고 간편히 할 수 있는 대안이 생긴 모든 일들은 힘들게 하는 것은 모두 쓸데없는 일들이 되고 말았다.

 

기계가 없던 시절에 김장독을 묻기 위해서 삽으로 땅을 파는 일은 고되고 힘들었지만, 가치가 있었다. 겨울 내내 김치를 잘 보관하고, 맛있는 김치를 먹을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계가 대신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그런 행동은 쓸데없이 힘만 낭비하는 꼴이 되고 만다. 그러니 억지로 하면 힘들고 짜증만 난다. 더군다나 이제는 누구도 김장독 자체를 묻지 않는다. 김치 냉장고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아주 큰 결과물의 극히 일부만을 담당하면서 살아간다. 회사의 일도 그렇다. 우리는 분업화를 통해 극도의 효율을 누리지만, 그것으로 인해 부품화 되고 말았다. 그나마 전체를 담당하는 것은 아직도 가치가 있는 요리 등과 같은 집안일 뿐이다. 하지만 즉석요리가 발전할수록, 식당의 요리가 발전할수록, 배달 기술이 발달할수록 집에서 하는 요리의 가치는 점점 사라질 것이다.

 

앞으로 100년쯤 지난 미래에는, 어느 누구도 집안에서 요리를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열심히 잘 만들어도, 근처 가게에서 파는 요리가 훨씬 다양하고, 맛있고, 영양가 있고, 간편하다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이미 예정된 수순이다.

 

누군가 이것을 거부하고 힘들게 집에서 요리를 해봐야, 맛도 별로 없고, 별로 특별하지 않는 투박한 음식이 될 것이다. 사람들도 그것의 가치에 대해 조금은 인정해주겠지만, 딱히 그러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 사람도 요리 하는 것을 그만 둘 것이다.

 

물론 우리는 편해질 것이다. 우리는 힘들게 요리를 하지 않고, 설거지를 할 필요도 없고,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지 않아도 될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진정으로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이것에 대한 판단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확실한 것 하나는, 미래로 갈수록 우리는 더욱 더 기능적 존재가 될 것이란 점과 우리가 그 자체로 가치나 의미를 지닐 수 있는 확률은 점점 더 낮아질 것이란 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따로 자신만의 가치를 증명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다. 물론 그것을 원하는 사람에 한해서지만 말이다.

 

결국 우리는 에베레스트 산과 같은 높은 곳에 오르고, 프로 운동 선수 수준으로 힘들게 운동을 하고, 고도의 집중을 통해 뭔가를 만들고, 자신이 좋아는 취미에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쌓고, 남들이 잘 하지 않는 것을 하면서 뭔가 다른 존재가 되길 바라는 것을 하려고 할 것이다.

 

기능성을 높여서 돈을 번 후, 이런 일을 하는데 다 쓰려고 할 것이다. 돈을 버는 목적 자체를 바로 자신만이 추구하는 가치에 모든 것을 쏟아 붓는 것으로 정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지 못하면, 따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이미 지금도 이 현상은 꾸준히 증가되고 있다. 요즘 시대는 정말로 자기 증명의 시대이다.

 

하지만 원래 자기 증명은 그리 힘든 것만은 아니었다. 예전엔 삽으로 김장독만 파도 그 가치가 증명되었다. 밭에서 난 채소를 다듬어서 맛있는 요리만 해도 그 가치가 증명되었다. 과거의 인간의 행동은 바로 가치 증명과 연결되었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가치들을 모두 뺏겼다.

 

아이를 키우는 것도 각자의 집이 아니라 유치원이나 어린이 집이 된다. 물론 아직까지는 그 가치가 남아 있다. 하지만 이 역시도 언제 바뀔지 모른다.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을 최대한 집안에 두려고 하지 않는다. 끝없이 학원을 보내려고 애쓴다. 더욱 더 기능성이 강화된 아이를 만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

 

이제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도시락을 싸줄 필요도 없어졌다. 학교에서 급식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좋은 것이라고 한다. 좋은 것이긴 하다. 그런데 우리가 잃은 것을 아무 것도 없을까? 어머니가 싸주신 도시락은 그저 한끼 밥이었던 것일까?

 

아이들 역시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기능 수준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스스로를 수치화 시킨다. 그것을 스펙이라고 말하고, 그 스펙을 채우기 위해서 10대와 20대의 거의 모든 시간을 소비한다. 그리고 운 좋게 좋은 직장에 들어가면, 그 안에서 자신의 유용성을 증명하려고 노력하면서 수십 년을 보낸다. 그것조차도 운이 좋아야 그럴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실 이 문제에 대해서 그리 심각하게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가치 증명을 하기 위해서 일을 하는 시간 이외의 시간을 소모하고 있기 때문이다. 각종 취미 생활이나, 소비하고 있는 많은 문화 컨텐츠들이 바로 그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진짜 해결책이 아니다. 이것은 그저 스스로를 위로하는 행위일 뿐이다. 왜냐하면 이 문제의 진짜 원인은 따로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인간의 개, 돼지론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때, 1%로 99%를 나누는 기준이 달라야 한다는 말을 했었다. 이제 그 기준에 대해서 말해보겠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그것을 나눠야 할까?

 

답은 쉽다. 그것은 바로 '자각'이다. 좀 더 거창하게 말하면, 존재에 대한 스스로의 자각이다.

 

우리들 대다수는 평생을 무의식 속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질 생각도, 기회도, 의지도 없다. 그리고 사회에서 요구하는 기능의 역할을 잘하면 그것을 충분히 만족하고 살다 죽는다. 하지만 누구도 예외 없이 죽음을 앞에 두면 큰 두려움을 느낀다.

 

왜냐하면 죽음을 알지만, 죽음은 늘 남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죽음을 자신의 것을 생각해 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기에, 죽음이 찾아오면 새삼스럽게 놀라게 된다. 끔찍하게 두려워하게 된다.

 

우리가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죽음에 대해서 단 한번도 의식적으로 바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죽음을 늘 남의 일처럼 바라봤다. 아무리 많은 장례식장을 갔어도, 그곳은 남을 위해서 절이나 추모를 하는 자리이지, 자신이 절을 받거나 추모를 받는 자리가 아니었다.

 

우리는 살아 생전에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죽음은 단지 지식에 불과했다. 즉, 우리는 알기만 한 것이다. 우리가 죽음을 알기만 한 이유는, 단 한번도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던져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누구인지조차 단 한번도 생각을 안 했는데, 자신이 죽는 것은 더욱 더 생각할 수 없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이다. 살아 있는 동안, 생각의 주체가 존재하는 자신에 대해조차 아무런 자각이 없는데, 생각의 주체가 사라진 죽음 후에 자신에 대한 자각은 결코 있을 수 없다.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서 스스로에 대한 존재적 질문을 던질 생각을 해보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자신을 끝없는 무의식 속으로 밀어 넣으려고 애쓴다. 가끔 불안하고 두렵고 외롭다는 생각이 들지만, 머리 속을 순식간에 비워주는 수 많은 재미 요소들이 주변에 널려 있다. 그래서 그것들에 집중하는 순간, 잠시라도 생겼던 미세한 틈은 금세 사라진다.

 

그런데 이것은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니다. 사실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살아가는 동안 자신의 삶에 대한 자각을 경험한다. 이것을 비율로 나눈다면 1:99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1도 아닐 것이다. 0.1:99.9 나 0.01:99.99 가 될지도 모른다.

 

대중에 대한 개, 돼지론을 주장한 그 공무원 역시, 그 자신이 완전히 무의식적이다. 그가 무의식적이란 증거는 그의 생각 자체로 충분이 드러난다. 그가 주장한 것은 한번이라도 무의식 상태에서 깨어났다면, 결코 입 밖으로 나올 수 없는 말이다.

 

왜냐하면 의식적으로 자각을 한 순간, 머리 속을 가득 채운 자신의 문제점에 대해서 너무 큰 부끄러움을 느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개가 집을 지키고, 재롱을 떨어서 밥을 얻어 먹는 것을 자각하면, 개는 자신의 자유와 먹을 것을 바꾼 것에 대해서 스스로 분노를 느낄 수 밖에 없다. 심지어 짝짓기도 못하고, 중성화 수술을 당하는 수모를 당하면서도 먹을 것에 굴복해서 모든 것을 팔아 먹은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겠는가?

 

자신에 대한 자각은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과 우리들 전체의 문제를 인식하게 만든다. 그러니 입에서 대중의 개, 돼지론이 나올 수 없다. 사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우리는 불쌍한 존재라는 생각만 확신이 든다.

 

슬프게도 우리는 존재 자체로 존재의 가치가 없어지고 있다. 우리는 점점 기능화 되고 있다. 더군다나 그것도 소모품으로 전락하고 있다. 우리는 언제든 교체 가능한 유용한 부품이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유용할수록, 잘 교체가 되지 않을수록 자신이 가치 있어진다고 믿고 있다.

 

물론 우리는 점점 편해질 것이다. 우리는 점점 더 부자의 집에서 살아가는 개와 같은 처지가 될 수 있다. 더 넓은 집에서 살고, 더 맛있는 먹이를 먹을 것이며, 집을 지킬 필요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오직 재롱만 떨면 생존하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목엔 언제나 개 줄이 묶여 있을 것이다.

 

우리는 점점 자유를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기게 될 것이다. 우리는 편안함과 안전을 얻었지만, 그로 인해서 자유를 뺏기고 말았다. 우리는 세계의 많은 곳을 갈 수 있게 되었지만, 우리는 어두워지면 집밖에 나서기조차 두려워졌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은 직립보행, 언어능력, 뛰어난 지능, 도구를 쓰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런 분야에서 그저 동물들보다 조금 많이 정교해졌을 뿐이다.

 

우리가 동물과 차이가 나는 유일한 것은 바로 존재적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통해 스스로를 자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만 오직 동물들과 다르다. 그렇다면 존재적 질문을 던지지 않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존재로 정의해야 할까?

 

냉정히 말하면, 바로 머리가 좋은 인간 형상을 하고, 인간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교육을 받은, 아주 유용하고 기능성이 뛰어난 동물이다. 그리고 99%의 인간 그룹에 속하게 될 것이다.


심지어 신을 믿고, 신을 통해서 자신의 특별함을 증명받은 사람들조차도 무의식적으로 살아간다. 즉, 신이 자신을 만들었다는 사실만 믿을 뿐, 자신이 누군지에 대한 질문을 던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신이 우리를 만들었으니,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신의 뜻이 무엇인지조차 궁금해 하지 않는다. 그저 복을 받고 죽어서 천국에 가면 된다고 믿는다.

  

어떤 삶을 살지는 누가 강요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오직 스스로 결정할 문제이다. 사실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조차도 앞에서 한 인간에 대한 보편적 정의로부터 그리 다를 것이 없다. 단지 아주 미세한 자각을 통해서 존재론적 질문을 해야 한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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