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확대해석에 숨겨진 본질 - 3

아이루다 2016. 8. 11. 10:30


[2편에서 계속]


문제는 이런 과정으로 인해서 나타나는 두 가지 문제점이다.


하나는 자신이 이룬 것을 자신 자체와 동일시 했기에, 그것을 잃었을 때 자신이 붕괴된다는 점이다. 돈을 동일시 했다면 돈이 없어졌을 때 무너진다. 지위를 동일시 했다면 지위를 잃었을 때 자신이 붕괴된다. 우리는 별 시답지 않은 것들도 모두 자신과 동일시 하기 때문에 보통 사람이라고 해도 이것을 피할 수 없다.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잘났다고 느끼는 모든 것, 소위 말해서 자신의 장점이라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이 마찬가지 과정을 겪는다.


남들보다 입맛이 뛰어나서 요리사가 된 사람은 요리를 잘하는 것과 자신을 동일시 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자신을 평가한다. 하지만 그러다가 미각을 잃을 경우, 원래는 직업을 잃은 불운만 감당하면 되는데, 추가로 자신 자체가 붕괴되는 경험까지 하게 된다. 그리고 자부심이 컸다면 컸을 수록 더욱 더 후자의 고통이 훨씬 심하게 느껴진다. 좀 힘들어도 직업은 바꾸면 되지만, 무너진 자아는 요리사를 자살하게 만들 수도 있다.


다른 경우로, 자신보다 더 뛰어나 미각을 가진 사람을 만나게 되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다. 그 요리사는 금세 초라해진다. 미각의 능력을 자신과 동일시 하지 않았다면, 그것을 확대 해석해서 자신이 잘난 증거로 쓰지 않았다면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주 크게 부각되고 만다. 물론 그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는 자신에 대한 평가가 높았으니 좋았겠지만,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되면, 그 행복은 높아진 만큼 많이 추락을 하게 된다.


자신이 친구들보다 조금 더 일찍 출세를 했다고 믿는 사람은, 어느 날 자신보다 더 빠르게 출세한 사람을 보는 순간 질투심에 사로 잡혀서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출세한 자신을 확대 해석해서 자신과 동일시 여겼기 때문이다. 그냥 그 출세가 그저 운이 좋아서 그랬거나 혹은 돈을 조금 더 벌 수 있는 기회로만 해석했다면 넘어갈 문제가 아주 크게 번진 것이다.


남편을 확대 해석해서 자신과 동일시 여긴 아내는, 자신보다 더 나은 남편과 사는 여자를 보게 되면 질투심을 감출 수 없게 된다. 노래를 잘하는 것을 확대해서 자신의 잘남과 동일시 여긴 사람은 자신보다 더 노래를 잘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참을 수 없는 질투를 느끼게 된다.


자신에게 중요하면 할수록 그것을 잃거나 혹은 비교 당해서 지게 되면 그 여파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커지고 만다.


두 번째 문제는 자신이 이룬 성과를 자신과 동일시 여기게 되면서, 자신보다 낮은 성과를 낸 사람을 자연스럽게 무시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자신보다 탁월하게 높은 성과를 낸 사람을 찬양하고 숭배하는 모습도 보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잘난 사람을 칭찬하면서 영웅화 시킬 때, 자신이 마치 그럴 만큼 여유가 있고 상대를 인정할 줄 안다고 착각할지 모르지만, 그 이면엔 자신보다 못난 사람들을 언제든 무시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뿐이다.


즉, 누군가를 영웅으로 여길 수 있는 사람은, 누군가를 깔아 뭉갤 수 있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래서 윗사람에게 아부를 잘하는 사람은 자신의 밑의 사람을 매우 무시한다. 이것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이 두 가지 문제점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거의 대부분의 불행의 원천이 된다. 가진 것을 잃었을 때 느낄 수 있는 절망과 자신보다 잘난 존재를 만났을 때 느끼는 참지 못할 질투심과 다른 사람을 숭배해서 따라 하거나 혹은 자신도 모르게 남을 무시하는 태도 그 자체 말이다.


우리는 매일 이것으로 인해서 자신을 평가하고, 기분이 나쁘고, 남의 뒷담화를 하고, 남의 성과를 줄이려고 하고, 자신의 성과를 부풀리려고 한다. 그리고 더해서 자신이 동일시 여긴 그 모든 것을 잃을까 봐 매일같이 불안해 한다. 그것을 잃으면 자신도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권력에, 돈에, 성적에, 지위에, 아내에, 남편에, 자식에, 취미에, 장점에 목숨을 건다. 이것을 쉬운 말로 '욕망' 이라고 한다. 즉, 우리의 모든 욕망이 바로 이것으로 인해 일어난다.


자신이 가진 어떤 것을 확대해석 한 후, 그 결과를 자신과 동일시 여기려는 그 모든 노력이 바로 욕망이라고 칭해지는 것들이다. 그래서 배가 고프면 그냥 배가 부르게 밥만 먹으면 되는데, 비싼 밥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자신이 피해를 입었다고 느낀다. 즉, 정말로 불행함을 가져오는 가장 무서운 녀석인 피해의식이 등장하고 만다.


거기엔 왜 우리가 그것을 누려야 하는지에 대한 그 어떤 당위성도 없다. 그저 비싼 밥을 먹는 것을 자신과 동일시 여기는 확대 해석만이 있었을 뿐이다.


이것은 행복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고통의 원천이 될 가능성이 훨씬 높다. 왜냐하면 우리의 평가에 대한 희망은 늘 세계 1위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죽을 때까지 유지해야 한다. 이것이 얼마나 힘든 일일까?


그나마 조선 시대엔 동네 1등만 해도 되었다. 서로 교류가 적어서 동네 1등만 해도 충분히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요즘은 말 그대로 글로벌 시대다. 그래서 평생 보지도 못한 사람들과 경쟁해야 한다. 그러니 얼마나 1등을 하기가 어렵겠는가? 


현대인들이 행복하기 힘든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너무도 많은 사람들을 알고, 그래서 너무도 많은 사람들과 경쟁해야 한다. 한 반에 학생수가 너무 많은 것이다. 그래서 1등하기가 너무 힘들다. 그러니 우리는 이제 좀 다른 접근을 해야 한다.


이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쉬운 방법이 떠오르질 않는다.


그럼에도 해결책의 실마리는 있다. 그것은 바로 확대해석을 줄이는 것이다. 사실 동일시 여기는 문제는 거의 해결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확대해석은 막을 수 있다.


확대해석만 막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평가를 막을 수 있다. 이미 말했듯이 평가는 경쟁의 산물이다. 순위를 결정하는 일이다. 하지만 원칙적으로 우리가 시험을 본 결과는 자신의 현재 상태를 인식하라는 의미지, 순위를 통해 자신을 정의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까지 성적을 확대 해석해서 자신에 대한 절대적인 평가 기준으로 삼았다. 졸업한 대학교의 간판, 다니고 있는 직장, 연봉, 집의 평수, 자동차의 브랜드, 자신이 다녀 온 여행지, 취미 생활, 지금까지 이뤄낸 성과 등등 그 모든 것이 확대 해석된 후, 그런 것을 소유하고, 그런 것을 이뤄낸 자신에 대한 평가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가장 먼저 이 고리를 끊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무엇인가를 이뤘다면, 그것은 그저 운이 좋은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을 했어도, 그 노력 자체가 이미 타고난 성향이다. 뼈를 깎는 노력을 했따고 해도 실제로 우리가 한 것은 없다.


손가락이 짧게 태어난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피아노를 잘 칠 수가 없다. 키가 150cm 도 안 되는 사람은 농구 선수를 하기 힘들다. 머리가 나쁜 사람이 물리학 공부를 할 수는 없다.


노력해도 소용없다. 노력하는 능력을 갖기 위해서 노력할 수도 없다. 그러니 확대해석 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 우리가 이뤄낸 그 무엇도 우리들 자신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다. 그저 운이 조금 좋았을 뿐이다.


확대해석을 하지 않을 수 있다면, 이후 모든 것이 순조로워진다.


자신이 이뤄낸 성과에 대해서 딱히 겸손 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 자연스럽게 겸손해진다. 자신보다 더 뛰어난 사람을 만나게 되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자신이 그렇듯 그 사람 역시도 그저 운이 좀 더 좋았을 뿐이다. 자신이 이룬 것이 무너져도 상관이 없다. 아쉽긴 하지만, 우리 자신이 무너진 것이 아니다.


어떤 시인이 쓴 시를 국어 시간에 해석하는 짓을 멈춰야 한다. 그 해석은 그 시를 쓴 시인조차도 이해하지 못할 지경이다. 그냥 아침에 그런 기분이 들어서 쓴 시를 삶에 대한 깊은 연민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시를 해석하지 않으면 그 시는 그때서야 진면목을 드러낸다.


불필요한 욕망도 사라진다. 자꾸 뭔가를 갖거나 이뤄서 자신에 대한 평가를 높이려고 애쓰면서 살 필요가 없다. 더군다나 우리가 집착하는 욕망들은 우리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어디에서 중요하다고 들었던 것들이다. 그것이 우리들 자신의 행복과 일치할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


그래서 진정한 자신만의 행복을 찾을 수 있다. 남들 눈치 보지 않고,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갈 수도 있다. 설령 그것이 실패하더라도 그것이 실패한 것이지, 우리들 자신이 실패한 것이 아니다. 실제로 우리가 실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우리가 실패했다면, 그것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동일시해서 확대 해석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그것과 자신을 하나로 묶었기 때문에 우리가 실패된다. 처음부터 묶지 않았다면 그것만 실패하고 자신이 실패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어떤 일을 해내는데 있어서 제대로 하느냐 못하느냐를 자신과 동일시 여기면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 그저 그 일이 실패했을 뿐이데, 그것 자체를 자신으로 간주하기에 당연히 그것의 성공은 자신이 성공이 되고, 그것의 실패는 자신의 실패가 되고 만다.


물론 운이 좋아서 성공했다면 큰 행복을 얻겠지만, 실패한다면 얼마나 큰 불행을 겪어야 할 것인가? 성공과 실패는 오직 운에 따랐는데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도전하길 원한다. 개개인이 도전하는 사회일수록 발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전하는 것이 행복한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그들이 도전하면 된다.


문제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욕망이 밀어대는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도전을 하는 모습이다. 그로 인해서 그 자신도 파괴되고 주변에도 큰 독을 뿌리게 된다. 그 한 사람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그들 문제만이 아니다. 우리들 역시도 모두 그것을 긍정적으로 봐주고 있다. 그래서 모두 한 손을 거들고 있는 형국이다.


서로가 서로의 욕망을 자극하고, 서로가 서로를 끝없이 평가한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우리는 끝없이 자신을 더 낫게 평가하려는 행위를 하게 된다. 그리고 남을 깎아 내린다.


도대체 이 시점에서 말 그대로 "뭐시 중할까?"


행복하게 살고 있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그 어떤 확대해석도 멈춰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만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다면, 각자의 삶은 새로운 전기를 맞을 수 있을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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