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이야기들

내가 믿는 종교

아이루다 2016. 6. 18. 06:55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 우주는 꽤나 오래되었고, 꽤나 크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상상도 잘 안 간다. 이제 아직도 50년도 못 채운 삶인데, 어떻게 억년 단위를 상상할 것이며, 기껏해야 평생 지구 위에서 살다 갈 삶인데, 어찌 억 광년 단위의 거리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아무튼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참으로 오래되고 넓다.

 

그런데 이 우주는 왜 존재하게 되었을까? 종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전지전능한 신의 의지로 만들어진 것일까? 아니면 정말로 우연하게 큰 폭발이 일어나서 만들어진 것일까?

 

아니, 사실 이것들은 단지 우주의 기원에 대한 설명일 뿐이다. 그래서 우주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있지는 못하다. 신이 우주를 만들었든 우주가 저 혼자 만들어졌든 아니면 우주 자체는 무한하게 존재해왔든 간에 상관없이, 이 우주는 왜 존재하고 있을까?

 

그나마 신이 우주를 만들었다면 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것을 알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신을 만날 기회가 없으니, 물어볼 수가 없다. 설마 심심해서 만든 것은 아니겠지.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든다.

 

어떤 원인으로 우주가 만들어졌든지 상관없이, 이 우주는 크게 두 가지 입장이어야 한다.

 

하나는 이 우주는 그 어떤 이유도 목적도 없다는 것이다.

둘째는 이 우주는 우리가 모르는 어떤 이유로 인해 만들어졌고, 그 목적도 명확하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단지 현재 인간의 지적 능력으로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

 

이 둘 중 어느 것이 맞는지는 알 방법은 없다.

 

내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만들어졌고, 어떤 목적도 없다면 나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의 입장에서 슬픈 일이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 겪는 모든 일들과, 내가 추구하는 모든 가치가 사실상 무의미하다는 점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도 그것들에 집착한 채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마치 그것을 하지 못하면 뭔가 문제가 생길 것 같아서 불안한데, 행복하지 못할까 봐 걱정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살아가는데..

 

이것이 모두 아무런 의미 없는 행동이라고 한다면, 사실 허무하지 않기도 쉽지 않다. 그럼에도 위로는 할 수 있다. 삶의 의미는 부여하기 나름이기 때문이다. 딱히 절대적 의미가 없더라도, 딱히 이유나 목적이 없더라도 주어진 삶을 만족스럽게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 자체는 그리 나쁘지 않아 보인다.

 

단지 추구하는 모든 가치나 삶의 의미가 실제로는 무의미함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에 가끔 겪어야 하는 허무한 순간들을 잘 견뎌내야 한다. 어렵지만,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반대로 이 우주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우리는 각자의 삶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를 뿐, 분명히 어떤 목적을 향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바로 존재의 영속성이다. 우리가 만약 단발적 삶으로 마감이 된다면, 그것은 목적이 될 수 없다만약 내 존재가 단발성으로 끝난다면이 우주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어떤 목적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나에게는 해당되지 못하기 때문이다그 목적이 이뤄졌을 때, 나는 존재하지 않으니, 나에게만큼은 이 우주가 무의미하다.

 

그러니 죽어서 천국에 가서 영생을 하든, 끝없이 환생을 하든 뭔가 하긴 해야 한다.

 

이 우주가 만들어진 목적이 이뤄지는 순간 ''반드시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 가능성이 있을까?

 

물론 종교에서는 그렇다고 말을 한다. 하지만 사실 일반 종교를 믿는 분들이, 그 교리의 근거로 말하는 경전들은 그다지 신뢰 있지는 못하다. 물론 도덕적으로는 괜찮다. 그렇지만 진리가 될 가능성은 그리 높지 못하다.

 

그리고 천국이 존재하는 것과 환생을 하는 것 중에서, 개인적으로는 환생이 좀 더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그 이유는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존재 때문이다. 물론 직접적으로 경험한 것은 아니라서 확신을 할 수도 없고, 설령 직접 경험했다고 해도 그것이 진실이라고 확증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꽤나 신뢰 있는 증거들이 많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환생을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지금은 환생의 진실을 밝히는 수준을 벗어나, 왜 우리가 환생을 하는지에 대한 목적을 알아내야 할 때라는 말이 통용되고 있다고 한다.

 

, 환생은 확실한 현상이고, 이제는 왜 우리가 환생을 통해 다시 이 세상에 돌아와야 하느냐를 알아내야 한다는 뜻이다. 이 말이 바로 우리 인간의 존재 이유와 목적을 설명해줄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다. 또한 이 우주의 원대한 계획에 대해서도 조금이라도 알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환생에 대해서 거의 아무런 생각이 없는 우리들조차도 흔히 '전생' 이란 말을 자주 쓴다. 전생에 나라를 구했다는 둥, 전생에 개였다는 둥 하는 말들을 한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정서에 환생의 개념이 녹아 들어 있어서 그런 듯 하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불교의 영향이 큰 것 같다.

 

이것은 꽤나 흥미로운 생각인데, 왜냐하면 인간이 환생을 할 수 있다면, 분명히 나의 전생도 존재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지난 생애에 어떤 존재였을까? 또 그 전생은 무엇이었을까? 나도 개였던 적이 있었을까? 내가 이번 생에서 고양이를 좋아하는 이유는, 내가 한 때 고양이어서 그런 것일까?


지금 내 옆에 있는 나의 아내는 과연 전생엔 나와 무슨 관계였을까?


그리고 나는 이번 생에서 무엇을 계획하고 온 것일까?


가끔 이런 궁금증이 생긴다. 나는 모르지만, 내가 태어나기 전 내가 세운 계획은 무엇일까? 정말로 내가 목적이 있었다면 분명히 한 생애마다 뭔가 중간 목표들을 세웠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한 생애, 한 생애가 지나가면서 나는 최종 목적을 향해 나가고 있을 것이다. 물론 모든 것은 가정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모르겠다. 아마도 죽을 때나 되어서 그것을 알게 될 것인가? 아니면 죽은 후, 기억이 돌아와서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었는지를 평가할 것인가? 그리고 다음 생애를 계획할까?

 

물론 이 모든 것은 머리 속에서만 일어나는 상상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것을 부정할 수도 긍정할 수도 없다. 말 그대로 알 수 없다.

 

생각해보면, 아는 것도 재미가 없을 듯 하다. 그저 하루 하루 꾸준히 살다가 보면, 나도 모르게 이 생애에 이루고자 한 목적을 달성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내가 선택했다고 믿는 그 많은 것들은 사실 선택이 아닌 필수적 단계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외모도 그렇고 지적 수준, 이렇게 글을 쓰는 행위, 아이를 낳지 않고 살겠다는 결심, 지금의 아내와 살게 된 이유, 시골에 집을 짓는 행위, 자신으로부터 조금이라도 자유로워지려고 애쓰는 행위들 등등.

 

가끔은 이것들이 나의 선택이라고 생각되면서 마음 속으로 우쭐함을 느끼지만, 만약 당연히 이뤄져야 할 필수적인 것들이라고 한다면, 이 우쭐함은 한없이 부끄러운 짓이다. 사실 부끄럽기도 하다.

 

이 이야기는 비록 완전히 상상이긴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전체적으로 그다지 비 논리적이지는 않다. 나름대로 앞뒤도 맞는다. 그래서 상상을 계속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어느 정도 가능성을 믿고 사는 것도 그다지 나쁜 것 같지 않다. 이것은 사실상 종교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엔 그저 개인의 믿음만이 중요하다.

 

일반 종교에 비해서 좋은 점은 어떤 형식도 필요 없다는 것과 일부로 도덕적으로 살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더해서 모든 사고가 개방된다. 선과 악의 개념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자유로워진다.

 

보통의 종교는 편을 가른다. 혹은 삶의 경계선을 만든다. 자유가 사라지고 개인은 다양한 방법으로 억압된다. 그러니 자신이 원래 그런지, 아니면 그렇게 주입된 것인지조차 구분이 힘들다.

 

하지만 이 종교는 그것이 없다. 모든 것이 허용된다. 모두 개인의 자유이며 선택이다그리고 실제로 선택이 아니다. 단지 이미 계획한 것들이 실행되는 것이다. 그것이 불운이든 행운이든 계획의 일부이다.

 

물론 실패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다음 기회가 있기 때문에 그리 조급해 할 필요가 없다. 실망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 무엇보다도 이 우주의 최종 목표를 향해 같이 가고 있기 때문에, 전혀 불안해 할 필요도 없다.

 

가장 좋은 점은 이 종교가 아주 말도 안 되는 소리이며, 온전히 개인의 상상 속 세상이라고 해도 별 상관이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 종교는 아무런 근거가 없기 때문에 나 스스로도 제대로 믿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지 바라만 볼 뿐, 온전히 빠져들지는 못한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런 나의 태도 또한 종교의 일부일 수 있다. 이번 생애는 이 종교를 제대로 믿지 못하고 사는 것 자체도 조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이 얼마나 편한가? 모든 것이 다 허용된다는 것이 말이다. 심지어 이 우주가 완벽하게 무의미하다는 것조차 받아들일 수 있을 형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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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산책 중에서 많이 늙은 분들을 본다. 미래의 어느 날 아마도 나 역시 분명히 그들의 모습이 될 것이다. 그것도 운이 좋아야 말이다. 그 전에 죽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그렇게 오래 살았다고 해서 지금의 나와 그때의 나는 다를까? 현재로써는 전혀 그럴 것 같지 않다.

 

나는 그저 더 힘이 없고, 더 아프고, 덜 활기찰 것이다. 머리는 점점 둔해지고 생체 활동도 매우 느릴 것이다. 그때의 나도 지금처럼 먹고 자고 싸기를 반복할 것이다. 내가 바뀔 수 있는 것은 늙는다는 것 이외에 단 하나도 생각나질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번 생애가 있고 다음 생애가 있는 것이 그냥 말도 안 되는 상상 같다. 나는 이번 생애에 뭔가 바뀐 것이 거의 없다. 물론 조금 바뀌긴 했다. 30대 후반을 계기로 개인적으로는 조금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근본적으로 나는 태어난 이후 바뀐 것이 거의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는 말일까?

 

이것은 가끔 나를 답답하게 한다. 변화에 대한 욕구는 많은데 변화할 방법이 없다. 아니, 방법도 아는데 변화되질 않는다.

 

아직은 때가 되지 않을 것일까? 나의 인생의 후반부에는 뭔가 의미 있는 변화가 있을 수 있을까? 궁금하기도 하니 오래 살아보긴 해야겠다. 그것이 허용된다면 말이다.

 

어느 토요일 아침에 문득 이런 글을 써본다.

 

오늘은 와우 영화를 보러 갈 생각이다. 이것도 계획 중 하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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