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사회

지키고 싶은 마음

아이루다 2016. 6. 10. 07:58


 

어떤 이유로 인해서 한 부부가 이혼을 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엔 이제 여섯 살 먹은 어린 아이가 한 명 있었다. 아이는 부모의 이혼으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엄마와 살게 되었고, 아빠는 한 달에 한번 정도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부부는 비록 갈등으로 인해 이혼을 했지만, 아이는 끔찍이 사랑했기 때문이다.

 

한달 만에 아이를 만난 아빠는 아이에게 다가오는 생일 선물로 무엇을 갖고 싶은지 말해보라고 했다.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말이다.

 

그러자 아이는 잠시 망설인 끝에, '아빠와 엄마가 함께 사는 집' 이 가지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아빠는 한참 동안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아빠의 얼굴엔 난감함, 답답함, 후회 등의 복잡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이에 대한 미안함으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런데 아이는 왜 아빠와 엄마가 함께 사는 집을 원했을까? 다른 멋진 선물도 많았을 텐데 말이다. 최신 로봇이나, 멋진 자전거, 어린이 용 자동차 등등 사실 아빠는 돈으로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해줬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가 그런 선물을 원한 것은 부모를 사랑해서 그럴까? 아니면 부모가 소중해서 그럴까? 아니면 가족이 다같이 함께 사는 것이 좋아서 그럴까?

 

이 설명들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답은 아니다. 아이가 그런 선물을 바란 진정한 이유는 바로 예전에 부모와 함께 살 때가 자신이 가장 행복했었기 때문이다. 즉, 아이는 예전처럼 행복해지고 싶기 때문에 그런 소원을 말한 것이다.

 

비록 아이는 그럴 능력이 없지만, 아이는 정말로 가정을 지키고 싶어했다. 그런데 그것이 가정이 소중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가장 행복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부모 역시도 마찬가지다. 부모도 가정이 소중하지만, 자신의 행복이 더 중요하기에 이혼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들 역시도 자신의 행복을 선택했다.

 

물론 그들도 가능하다면 최대한 가정을 지키고 싶어했을 것이다. 그것이 자신을 불행하게 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이들 가족들처럼 우리 역시도 살아가면서 지키고 싶은 것들 하나쯤 있기 마련이다. 사람은 가장 기본적으로는 자신을 지키고 싶어한다. 그리고 이것 이외에도 많은 종류가 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보면, 지키고 싶은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삶의 의지가 강하고, 능동적이며, 행복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살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 행복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방금 한 설명은 뭔가 문제가 있다. 즉, 원인과 결과가 뒤바뀌었다. 이것을 바로 잡으면 이렇게 표현이 가능하다.

 

우리는 소중한 것이 있고, 이것을 지키고 싶어해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오직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을 소중히 여길 뿐이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고 싶어하게 된다. 원래 행복하지 않은 것은 소중하지 않다. 우리는 행복하지 않으면 가장 소중한 자신 목숨조차도 버린다.

 

그럼에도 우리는 곧잘 이것을 뒤집어서 생각하곤 한다. 즉,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고 믿는다.

 

결혼을 한 사람은 기본적으로 가정을 소중하게 여기고 지켜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행복해서가 아니라, 가정은 원래 소중한 것이고, 지켜야 하는 것이기에 그렇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산다. 설령 그것이 자신을 불행하게 하더라도 감당해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아빠는 돈을 버는 의무를 다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엄마는 살림을 하는 의무를 다하면 된다고 믿는다. 서로 그 역할이 바뀔 수도 있지만, 아무튼 기본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다 보니, 맞벌이를 해도 집안 일은 여자가 혼자 하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남자 혼자 돈을 벌다가 회사를 그만두면, 여자는 남자를 들볶기만 한다. 어서 취직을 하라고 말이다. 여자는 자신이 취직을 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남자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행복한 삶보다 소중한 것을 지켜 하는 의무를 우선적으로 생각하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만약 모든 부부들이 가족의 행복을 가장 우선시 하게 되면, 대화 내용이 달라지고, 문제의 해결책도 달라지게 된다. 남녀의 역할이 바뀌는 것도 쉽고, 서로 힘들 때 든든한 우군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다시 행복해질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되질 못한다. 대부분은 불행해지거나 혹은 가정이 깨질 수 있다.

 

만약 불행하다면 그것을 견뎌내면서 자신이 희생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희생이 값지다고 여긴다. 이런 식으로 희생에 대해서 가치를 부여한다. 물론 결론이 좋으면 좋다. 가족 구성원들이 그 희생에 고마워하고 그것을 알아주면 좋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가 되면, 그 희생은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런 식으로 생각할까? 자신이 행복하기에 가정이 소중하게 여기고 가장 중요하게 지켜야 할 가치로 여기지 못하고, 가정이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행복은커녕 심지어 불행해도 그것을 참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될까?

 

이런 앞뒤가 서로 뒤바뀐 흐름은 주로 외부로부터 주입된 생각으로 통해 강제적으로 생성된다. 즉, 우리는 끝없이 사회로부터 이런 식으로 생각하도록 강요되고 있는 형편이다. 우리는 자신이 속한 사회 속에서 무엇이 소중한 것이어야 하는지를 지시 받는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 지시에 노출되어서 결국 세뇌가 되어 버린다.

 

만약 어떤 사람이 가정을 꾸렸지만 결국 불행했을 때 처음부터 사회로부터 강요 받은 가정을 지켜야 하는 의무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진정한 행복한 삶을 추구했다면 어땠을까?

 

물론 모든 사람이 책임과 의무를 버리고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것도 문제이다.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도 문제이지만, 사실 자신이 무엇을 통해서 행복할지조차 정확히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서 좀 더 깊은 생각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에도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어떤 식으로든 문제가 있는 생각을 주입 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 중에서 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애국심일 것이다.

 

애국심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 애국심의 가치에 대해 끝없이 듣는다.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에 대한 이야기와 그분들의 가치, 나라를 빛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들도 듣는다. 그리고 그때마다 마음 속 한 구석에 뭔가 끓어 오르는 기분을 느낀다.

 

우리는 국가가 소중하기에 지켜야 한다고 교육된다. 그런데 이것이 교유적으로 가능할까?

 

앞의 설명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이것이 말도 안 되는 것이란 것을 알 것이다. 국가는 가정과 비슷하다. 아니 훨씬 덜 중요하다. 우리는 나라가 망하게 생겼다면, 가정을 뒤로한 채 국가를 위해 나서지만, 그것은 국가가 더 소중해서가 아니라, 그 행동이 좀 더 근원적인 안정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조차도 그리 많지 않다. 우리나라의 과거를 보면, 일제시대에 독립 운동을 한 분과 그렇지 않은 분들의 비율은 아주 크게 차이가 난다. 즉, 대다수는 그저 가정과 자신을 지키는 것으로 끝났다는 말이다.

 

우리가 국가를 사랑하고 지켜야 하는 이유는, 자신이 행복하기 때문이다. 오직 행복한 사람만이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게 된다.

 

그러니 국민 전체가 행복하면 행복할수록 자연스럽게 애국심은 높아지게 된다. 그런데 각자의 행복은 전혀 나아지지 않은 상태에서 애국심을 강요하게 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겠는가? 당연히 반발심이나 왜곡된 애국주의자를 만들 뿐이다.

 

사람들 중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누구일까?

 

뭐 여러 가지 답은 있겠지만, 보통 사람들일 경우라면 아마도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일 것이다. 즉, 가진 것이 없어서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사람이 될 것이다.

 

버릴 것이라곤 자신의 목숨밖에 없는 사람과 많은 돈과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가졌고, 지켜야 할 뭔가가 많은 사람이 다투게 되면, 당연히 후자가 피하려고 하게 된다. 싸워봐야 이득도 없으며, 혹시 질 경우엔 잃을 것이 훨씬 많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다.

 

이 두 사람이 나라의 전쟁이 나게 되면 어떻게 행동할까?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은 그냥 도망가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숨어 있으면 그만이다. 나라가 지든 이기든 상관이 없다. 설령 나라가 지더라도 자신처럼 불행해진 사람이 더욱 더 늘어 날 것이기에 심지어 기분이 좋을 수도 있다.

 

우리가 전쟁이 나면 총을 들고 전쟁터로 나가는 이유는, 나라를 사랑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자신이 가진 것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들이 있고, 그것이 소중하기 때문에 지키기 위해서 용기를 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애국심의 본질이다. 물론 정상적인 사람이라는 조건이 붙어야 하지만 아무튼 행복할수록, 가진 것이 많을수록 우리는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목숨도 내놓을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런 식으로 사회로부터 교육될까? 그냥 모두 행복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데, 왜 이렇게 억지로 가정의 가치, 국가의 가치, 공공의 가치 등을 주입할까?

 

이 질문의 답도 쉽다. 우리가 다 같이 행복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가혹한 경쟁 사회에서는 특히나 더 그렇다. 그러니 그런 가치들을 주입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이 말은 이렇게 해석이 된다.

 

사회적 가치들이 강하게 강조되면 될수록 그 사회의 행복 수준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이다.

 

국가와 사회는 기본적으로 개개인의 행복보다는 전체의 조화를 우선시 한다. 이것은 당연하다. 조직에서 개개인도 중요하지만, 조직 자체가 와해되면 개인은 의미가 없어진다. 회사가 망하면 직원 전체가 불행해진다.

 

또한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라서 각자가 행복을 마음껏 추구하게 되면, 전체적으로 엄청난 갈등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또 다른 불행의 씨앗이 된다. 그러다 보니 사회는 그 무엇보다도 조화로움을 우선시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사회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도덕의 가치를 그 무엇보다도 우선시 하여서 법의 집행, 정의 구현 등을 실현하여 강제적으로 조화롭게 만들려고 한다. 이것은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근본적으로 도덕의 가치가 개인의 행복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다.

 

개인의 행복은 그 무엇보다도 우선적 가치를 가져야 한다. 단지 그렇기만 해서는 사회적으로 많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조절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이것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인위적으로 조절된 것들은 결국 문제를 만들어 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자신도 모르게 사회로부터 세뇌된 사람들은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행복' 에 대해서는 그리 고민하지 않고 자라게 된다.

 

정작 가장 중요한 행복에 대해서는 많이 생각하지 않고 사회에서 강요한 주요 덕목들, 책임, 의무, 가정, 나라, 헌신, 희생, 용기 등의 가치에만 매몰되어 버려서 개인의 행복 따위는 사회적 가치에 비해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게 되는 사람들 조차도 나타나게 된다. 이들이 왜곡된 애국주의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우리는 어려서 위인전을 읽으면서, 사회의 미래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을 기리면서, 법과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서 들으면서 끝없이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물론 이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은 자기 성찰 속에서 재해석되어야 한다. 외부에서 강제로 주입된 것들은 사실상 세뇌이다. 이것은 형식만 남는다.

 

그래서 소중하기에 지켜야 한다고 믿게 된다. 행복하기 때문에 그것을 지켜야 하는데, 행복하기에 소중한 것인데, 행복한 것과는 상관없이 가정이 소중하고, 나라가 소중하니 지켜야 한다고 믿는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기만 한다. 실제로 행동을 할 때는 자신도 모르게 행복을 기준으로 한다. 그것이 우리들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세뇌가 되어도 행동은 다르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쪽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없다. 설령 있다고 해도 그것조차도 행복이다.

 

그런데 자신은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을 평가할 때는 사회에서 주입 받은 그대로를 대입한다. 그 사람의 행복 여부와 상관없이 아이를 위해서라도 왜 가정을 지키려고 하지 않나 라고 생각하거나, 왜 애국심을 갖지 않나 라고 생각한다. 왜 저들은 저리도 불만만 가득할까 라고 의문을 가진다. 비난을 한다.

 

하지만 그들이 그러는 이유는 단순하다. 단지 불행해서 그렇다. 반대로 우리가 그렇지 않을 수 있는 것은, 행복해서 그렇다.

 

인간은 지금껏 얼마나 더 안전하게 살 수 있는가에 대해서 끝없이 노력해왔다. 그리고 지금 현대 사회가 지금까지는 가장 발전된 형태이다. 우리는 과거에 비해서 훨씬 안전해졌다. 자연 재해, 질병, 각종 포식자들로부터 어느 정도까지는 자유로워졌다. 우리의 평균 수명은 비약적으로 늘었으며, 삶의 편의성도 많이 좋아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이것은 단지 방법론이다. 즉, 우리가 안전해지고 편해졌다고 해서 행복해진 것은 아니란 뜻이다.

 

행복에는 명확한 답이 없다. 그것은 그저 평생 동안 생각하고 고민해야 할 대상이다. 그만큼 어렵고 제대로 알기가 힘들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다 아는 듯 굴지만, 사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다. 우리가 아는 것이라고는 어디선가 들었던 지식과, 살아오면서 주입 받은 세뇌 교육뿐일 수도 있다.

 

이것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우리는 좀 더 자신의 진실한 모습으로 다가가야 한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그것이 소중해지고 지키고 싶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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