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사회

생태계

아이루다 2016. 3. 4. 09:35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생태계란 말을 자주 듣고 살았다. 그리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생태계에 대한 이미지는 보통 피라미드 형태이다. 그 피라미드 그림에서는 보통 태양, 식물, 초식동물, 육식동물 순으로 밑에서부터 위로 이어지곤 한다.

 

생태계 피라미드 그림은 단순하지만 명확하다.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박테리아의 양은 지구에 존재하는 총 나무의 중량을 넘는다. 즉, 하부에 위치한 존재일수록 그 전체 크기가 엄청나게 클 수 있다는 뜻이다.

 

인간은 이 피라미드 구조에서 최 상위 계층에 존재한다. 물론 인간도 육식동물에 속할 수는 있지만, 사실 인간은 그 이상이다. 우리는 사실상 지구의 생태계를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이다.

 

물론 지구상의 박테리아 총 중량은 인간의 총 중량을 가볍게 뛰어 넘을 것이다. 그래서 사실 그래서 그들은 실제적인 주인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 인간은 명목상으로는 확실하게 주인이다. 적어도 우리 인간은 지구 상의 거의 모든 땅을 소유하고 있긴 하다.

 

원래 생태계는 삶과 죽음이 매일 반복되는 전쟁터와 같은 세상이다. 누군가의 죽음은 누군가의 삶이 된다. 우리 인간 역시도 매일 수 많은 식물을 죽이고, 동물을 죽여서 먹고 산다. 우리뿐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들이 그렇게 살아간다. 식물들도 땅 속에서 영양분을 얻기 위해서는 다른 존재의 사체가 썩어서 비료가 되어 주어야 한다.

 

즉, 이 지구의 생태계는 매일 삶과 죽음이 교차하고 있는 세상이다. 그런 면에서 인간의 세상은 상대적으로 매우 온화하다. 인간은 병에 걸려서 죽고, 사고가 나서 죽고, 늙어서 죽고, 스스로 목숨을 끊지만, 다른 존재에게 죽음을 당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물론 큰 전쟁이 나면 대규모 인명 살상이 일어나긴 하지만, 그때는 조금 특별한 상황이다. 일반적으로 안정된 사회에서 다른 존재에 의해서 죽음을 당하는 일은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 사회는 마치 생태계의 기본 원리를 좀 벗어난 듯 보인다. 즉, 우리는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세상에서는 살고 있지는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뭔가 다른 존재일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아니다'

 

물론 분명히 우리는 직접적으로 삶과 죽음을 경계 삼아서 살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우리는 간접적으로 그 경계를 넘나든다. 우리가 매일 다른 이들과 경쟁을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내가 돈을 벌면, 남의 돈이 이동해 온 것이다. 그 돈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손해인 것이다. 물론 그 사람은 정당하게 지불을 했을 것이지만, 아무튼 돈 자체만 보면 손해가 맞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직접 생명을 걸고 경쟁하는 것은 아니지만, 매일 간접적으로 생명과 연관된 것들을 목표로 해서 아주 심각한 경쟁을 하고 있다. 우리는 감옥에 가지 않아야 하기에, 가능하면 범죄를 저지르지 않긴 하지만, 사실 거의 살인죄에 맞먹는 행위까지도 서슴지 않고 한다. 단지 그것이 직접적인 살인이 아닐 뿐이다.

 

기본적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차이는 사실 인간과 인간이 아닌 존재와의 차이에 비해서 훨씬 적어야 한다. 즉, 사람과 사람의 차이는 사람과 개의 차이에 비해서 비교도 안될 정도로 미비하다는 뜻이다. 이 말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동의를 얻을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정말로 그럴까? 우리는 우리가 믿는 대로 인간과 개의 차이를 인간과 인간의 차이에 비해서 훨씬 큰 것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을까? 우리의 무의식적인 믿음처럼 과연 그럴까?

 

그러기 위해서는 좀 더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보통 인간의 몸에서 태어나 인간의 모습을 하고 사는 존재는 어떤 식으로든 인간으로 대접을 받게 되어 있다. 그 모습이 반쪽이든, 벙어리이든, 눈이 멀었든, 두뇌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든 간에 모두 인간이라고 믿어진다. 그리고 그들을 죽이는 것은 공통적으로 살인죄로써 처벌을 받게 된다.

 

이것은 많은 국가들의 공식적인 입장이며, 많은 사람들의 공식적인 입장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자신이 어떤 상태에 놓였든지 간에 상관없이, 자신은 인간임을 철저하게 믿게 된다. 자신의 다리가 잘렸든, 자신이 벙어리가 되든, 눈이 멀든, 두뇌를 다쳐서 바보가 되었든지 간에 말이다. 그래서 누군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면, 그를 처벌하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 믿음은 결코 잘못된 것이 없다. 왜냐하면 이미 말했듯, 국가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충분히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과연 정말로 그럴까? 우리는 우리가 믿는 만큼 자신이 아닌 타인의 존재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할까?

 

인간 중에서 머리가 아주 좋은 사람은 보통 아이큐가 150이 훌쩍 넘는다. 인간 중에서 머리가 아주 나쁜 사람은 아이큐가 70도 채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둘의 차이는 80이 넘는다. 일반적으로 동물들 중에서 코끼리나 돌고래는 아이큐가 80 정도 된다고 알려져 있다.

 

인간은 지능적인 측면에서만큼은 확실히 동물에 앞서 있다고 믿어진다. 우리가 동물과 우리를 구분하고, 인간 고유의 가치를 주장하는데 있어서 지능은 매우 중요한 항목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인간과 인간의 차이가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넘어선다.

 

사실 누군가는 자신의 아이큐가 120은 되니, 자신은 이 경우와 상관없다고 믿을 것이다. 그런데 머리가 아주 좋은 인간은 아이큐가 180이 넘는 경우도 있다. 그럼 그 사람과 차이는 60이다. 그리고 아이큐가 120인 사람과 돌고래의 차이는 40에 불과하다. 특별하지만, 이 경우만 보면 이 사람은 돌고래와 더 유사하다.

 

물론 인간을 아이큐만 가지고 판단할 수 없다. 그럼 가지고 있는 돈을 가지고 따져보자. 며칠 전 세계 제일의 부자인 빌 게이츠의 총 재산이 90조에 이른다는 발표가 있었다. 그리고 아마 인간들 중에서 하위 50%의 평균 재산은 1억도 안될 것이다.

 

개의 재산을 만원이라고 해보자. 개를 죽이면 고기 값은 그 정도는 나올 것이다. 그러면 90조와 1억 그리고 만원의 차이는 어떤가?

 

우리는 개에 가까울까? 아니면 빌 게이츠에 가까울까?

 

자신이 재산이 한 5억쯤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럼 누구에 가까울까?

 

그럼 이제 아이큐나 돈과 같은 속물적 가치 말고 좀 인간적인 가치를 가지고 생각해보자. 예술적 능력이나 용기 그리고 선함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우리는 예술적 천재들에 비해서 어떨까? 음악에 관해서 우리는 고양이에 가까울까? 아니면 베토벤이나 모차르트에 가까울까?

 

우리는 신념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내놓을 수 있는 용기 있는 존재와 가까울까? 아니면 겁이 나면 짖으면서 도망치는 개에 가까울까?

 

우리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줄 수 있는 선한 존재에 가까울까? 아니면 자신의 먹이를 노리는 개가 있으면 언제든지 이빨을 드러내고 공격하려고 하는 개에 가까울까?

 

냉정히 생각해보자. 우리는 같은 인간이 가진 최대 가치를 기준으로 보면, 인간에 가까운 존재일까? 아니면 동물에 가까운 존재일까?

 

물론 아주 특별한 존재를 기준으로 우리들 자신을 판단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래서 평균이 중요하긴 하다. 그런데 이 평균에는 아주 큰 문제가 있다.

 

인류를 발전시킨 것은 인류 전체가 아니다. 거기에 소수의 천재들이 길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리고 다수의 사람들은 그 길을 다듬었다. 물론 다듬는 사람의 역할도 중요하다. 하지만 처음부터 길을 낼 수 없었다면 우리는 아예 길을 다듬을 수도 없었다. 소수의 천재가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동굴에서 살아갈 것이었다.

 

사실 모든 분야가 다 그렇다. 소수의 탁월할 존재들이 각 분야의 길을 뚫어낸다. 그리고 나머지는 그것을 지지한다. 이것이 평균이 가진 함정이다. 사실 평균에 속한 존재들은 가장 많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을 명백하게 한계가 있다. 그래서 우리 인류가 이룩해낸 전체를 놓고 보면, 모두 소수의 천재들이 해낸 일이지, 결코 다수의 평균에 속한 사람들이 해낸 일이 아니다.

 

즉, 인간을 규정하는 모든 것은 바로 평균이 아닌, 소수의 상위 층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다.

 

이제 생태계적인 관점에서 보자.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냉혹한 경쟁의 세계에 대해서 말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생태계는 바로 돈이다. 우리는 돈을 통해서 삶과 죽음을 교차 시킨다.

 

그렇다면 생태계를 표현한 그림을 돈을 통해서 다시 그려보자.



위의 그림에서 좌측 그림은 조금 잘못되었을 수도 있지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생태계 그림이다. 그리고 우측 그림은 그것을 좀 더 현실적으로 그려낸 그림이다.

 

좌측 그림에서 인간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우측 그림으로 바뀌면서 아주 크게 바뀌었다. 사실 이보다 더 크게 바뀌어야 정상이지만, 글자 크기의 한계로 인해서 이 정도로 맞춘 것이다.

 

2014년도 발표된 통계 자료에 의하면, 세계 상위권 부자 85명이 가진 부의 총량이 인간 하위권 35억명이 가진 부의 총량과 맞먹는다.

 

오른쪽 그림에서 나온 '하위 층 인간' 에 속한 사람들의 숫자는 엄청나지만, 그들이 가진 돈은 정말로 적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실 그들은 인간에 가깝기 보다는 동물에 더 가깝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은 돈 많은 집에서 키우는 애완견보다도 못한 삶을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직 생태계란 관점에서만 보면 실제로 생태계는 오른쪽 그림으로 표현되어야 맞는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생태계 그림을 아직까지도 왼쪽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커다란 착각이 우리들의 문제를 심화시키고 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을 동등한 가치가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투표권 한 장만 있다면, 자신은 이 사회에서 왼쪽 그림에 속해 있는 인간임을 믿는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오른쪽 그림에 속해 있으며, 그것도 하위 층에 속해 있을 가능성이 50%이다. 왜냐하면 이 생태계를 우리나라 내부로만 그려 놓고 보아도 전혀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역시도 상위 층 부자들이 가진 부의 총량은 나머지 하위 층이 가진 부의 총량에 비해서 엄청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나 하위 층에 속할 가능성이 50%일수 밖에 없다.

 

사실 이것은 큰 문제이다. 원래 인간은 왼쪽 그림의 존재여야 한다고 믿어지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 그리고 일단 형식적으로도 그렇게 처리된다. 그래서 사회 공적인 영역은 모두 평등하게 서비스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우리 사회의 사법적 불균형 문제는 이미 심각해진 상태이다. 우리는 이런 문제를 볼 때마다 사회 정의를 말하고 분노하지만, 사실 오른쪽 그림의 사회라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는 개를 죽이면 재물 손괴죄로 처벌을 받는다. 살견죄라는 말은 없다. 그 주인이 개를 얼마나 사랑하느냐에 상관없이 개는 그저 재산의 일부이다.

 

오른쪽 그림의 사회라면 하위 층 사람들은 사실상 개와 그리 다를 바 없는 취급을 받게 된다. 그러니 그들에게 벌어진 상위 층 범죄는 영화 ‘베테랑’ 속의 그것이 된다. 물론 영화 속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처절하게 응징이 되었다.

 

사실 우리가 믿고 싶어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사회 정의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그래서 또한 영화로 찍힌 것이다. 현실 속에서 상위 층의 범죄는 언제나 축소된다. 이것을 좀 과하게 표현하면, 우리가 닭과 돼지를 잡아 먹는 것은 범죄가 아닌 것과 같다.

 

이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니 이 사회가 이렇게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즉, 그야말로 자연의 법칙인 셈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문제는 각자의 능력의 문제라고 여기고, 사람을 죽였는데 적법한 처벌을 받느냐 마느냐의 문제에만 집착한다. 여기에서 적법한 처벌을 받으면 사실 그것이 더 큰 문제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닭을 먹은 죄로 처벌 받는 것과 같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는 인간 불평등 사상은 결코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생태계 그림은 원래 우리가 알던 왼쪽 그림으로 돌아가야 한다. 즉, 인간과 인간 사이의 차이가 줄어들어야 그것이 가능해진다는 뜻이다.

 

인간과 인간의 차이가 인간과 동물과의 차이보다 더 커졌을 때, 하위 인간들에 대한 상위 인간의 태도는, 인간이 개를 대할 때와 다를 바가 없어지게 된다.

 

물론 우리 인간들 중에서는 개를 귀여워하고 예뻐 해주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반대로 개만 보면 때리고 괴롭히는 사람들도 많다.

 

인간이 인간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을 좋아해서 큰 이유 없이 선의를 베풀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면서 즐거움을 얻는다. 이것은 인간 고유의 특징이다.

 

그런데 이것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만약 개라면 강한 몸과 위협적으로 보이는 이빨을 가져야 할 것이다. 즉, 스스로 지킬 수 있어야 다른 존재에게 무시당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생태계의 진리이다.

 

그러니 오른쪽 그림에서 하위 층에 속한 사람들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다. 그런 대접을 받지 않도록 자신을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비록 돈은 없더라도 보편적으로 주어진 자신의 권리를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된다. 즉, 실상은 그렇지 않더라도, 모든 인간은 동등하다는 이상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자신이 왼쪽 그림에 속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미 자신은 충분히 인간다운 대접을 받고 있다고 믿고 있다.

 

이 무지한 무의식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한, 그들은 그렇게 살아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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