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사회

신뢰의 가치

아이루다 2015. 11. 29. 12:16

 
누군가 혹은 어떤 것을 믿는 것을 신뢰라고 한다.
 
원리상 믿음이 강할 수록 신뢰도는 높고, 높은 신뢰도는 우리들 각자에게 꽤나 좋다. 그리고 신뢰에 대한 이해와 가치는 보통 이 정도 수준에 머무른다. 

 

하지만 이것은 좀 이상하다. 왜냐하면 신뢰는 원래 그것보다도 훨씬 중요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신뢰는 그 어떤 가치보다 중요해야 한다. 우리들 각자가 신뢰에 대해서 어떤 관념을 가지고 있는지 상관없이 그렇다. 사실 어떤 면에서 보면, 우리가 신뢰의 가치를, 원래 신뢰가 가진 진정한 가치에 비해서 훨씬 낮게 평가하는 것은 정말로 이상한 증상이다.
 
우리는 도둑이 자주 출몰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집에 더 단단한 자물쇠를 다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우리는 왜 도둑이 많이 출몰하게 되었을 지에 대해서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신뢰가 가진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게 된 이유다.
 
사실 신뢰는 우리가 삶 속에서 최고의 것으로 인정하는, 사랑보다도 더 근본적이면서 의미 있는 가치이다. 왜냐하면 사랑조차도 신뢰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사랑 없는 신뢰는 가능하지만 신뢰 없는 사랑은 존재할 수 없다.
 
기독교 경전인 성경을 보면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이 사랑이라' 라는 아주 좋은 말이 있지만, 이 말은 틀렸다. 아니 여기에서 믿음이 신뢰의 의미가 아닌, 신에 대한 믿음이라면 틀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믿음이 다른 사람들이나 어떤 대상에 대한 신뢰라면 완전히 틀렸다.
 
우리 인간은 관계 속에서 평생을 살아간다. 도대체 우리 인간들에게 있어서 관계가 아닌 것은 어떤 것이 있을지 상상하는 것만큼 힘든 것도 없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가족 관계로부터 시작해서 지인들과의 관계, 사회적 관계, 범 지구적 관계까지 넓어진다. 또한 우리는 인간이 아닌, 동물과의 관계로도 확장된다. 그것은 식물이나 무생물인 자연 그 자체로도 넓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그 모든 관계의 필수적 기반이 바로 신뢰이다. 우리는 모든 것보다 우선적으로 믿을 수 있어야 관계를 맺는다. 개는 충성도가 높기에 인기가 많은 관계 맺기 대상이다. 도둑들 조차도 처음 보는 사람과는 거래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가 모든 것의 기반에 신뢰를 두는 이유는, 바로 생명 보존의 본능이다. 우리는 누구도 등에서 칼을 꽂을 수 있는 사람을 주변에 두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 누구도 언제라도 자신을 물 수 있는 개에게 먹이를 주려고 하지 않는다.
 
오직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인간의 영역을 초월한 성인들뿐일 것이다. 그래서 그 분들에게는 사랑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예수님이나 부처님과 같은 분들은 사랑과 자비를 말씀하셨다.
 
하지만 일반 사람들인 우리들에게는 신뢰가 무엇보다도 중요해야 맞다. 신뢰가 없어진 사랑이란 존재할 수 없다. 부모 자식간이라도 믿음이 사라지면, 그 집안은 더 이상 가족이 아니다. 신뢰가 무너진 부부는 더 이상 부부가 아니다. 반복된 거짓말로 인해 상처받은 연인은 반드시 깨지게 되어 있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신뢰를 지키지 못한 친구는 조용히 명단에서 삭제가 된다. 우리가 관계를 맺는 시작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사람을 신뢰할 수 있느냐의 여부이다.
 
하지만 신뢰는 너무도 기본적인 것이라서 마치 공기와 같은 취급을 받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공기는 너무도 필수적인 조건이지만, 너무 기본적이라서 이것에 대해 잘 언급하지 않는다.
 
우리는 약속 장소를 잡을 때, 그곳에 공기가 충분히 있는지를 확인하지 않는다. 그리고 연인들은 서로 사랑하는 지만 묻지, 서로 신뢰하는지 여부를 묻지 않는다. 만약 연인들이 서로 신뢰를 확인해야 하는 순간이 왔다면 이미 둘 사이엔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잘 인식하지 못하지만 신뢰는 정말로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정치적 성향에 따라 좌파나 우파로 그 사람을 분류한다. 그리고 좌파는 혁신이나 자유, 분배 등에 관심이 많다고 하고 우파는 안정과 질서, 성장 등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피상적인 결과일 뿐이다. 사실 좌파와 우파를 가르는 단 한 가지 이유는 바로 다른 사람들에게 가진 기본적인 신뢰도의 차이만이 존재할 뿐이다.
 
좌파는 기본적으로 타인에 대한 신뢰가 높다. 그래서 누군가를 믿을 수 있으니 나눔에 있어서 거리낌이 없다. 또한 문을 잠그는 것만이 답이 아니라고 믿는다. 담을 높게 세우고 강력한 자물쇠로 문을 보호하는 것은 결코 안전함에 대한 답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최고의 해결책은 모두를 배부르게 만들면 된다고 믿는다.
 
배부른 호랑이는 사람을 공격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파는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신뢰도가 낮다. 그래서 누구든 믿을 수 없으니, 나눔에 대한 기대치가 낮다. 먹을 것을 나눠주면 다음엔 더 큰 것을 원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안전함을 위해서 담을 높게 세우고 강력한 자물쇠를 달아 둔다. 당연히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총도 선호한다.
 
호랑이를 안전하게 둘 수 있는 법은 튼튼한 창살 속에 가두는 것이라고 믿는다.
 
좌파와 우파는 단지 남을 잘 믿는 사람과 잘 믿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일 뿐이다. 여기에다가 여러 가지 특징을 덧붙이지만, 근본적인 차이는 오직 그것 뿐이다.
 
그리고 이것이 오해되고 왜곡되면 극좌파와 극우파가 나타난다. 그런데 이들은 그냥 이상한 사람들일 뿐이다. 자신의 욕망을 좌파나 우파에 강제로 가져다 붙인 것 뿐이다.
 
극좌의 대표적인 형태인 공산주의는 인간의 기본적 성향마저 무시한 절대적 신뢰를 기반으로 한 이상향이다. 반대로 극우의 대표적 형태인 인종차별은 단지 외모가 다르다는 이유로 믿지 못하는 낮은 신뢰의 대표적 모습이다.
 
모든 사회는 그 사회에 깔린 신뢰의 정도에 따라 그 성격이 정해진다. 그리고 신뢰도가 높을수록 그 사회를 구성하는 이들의 행복도가 높아진다.
 
서로를 믿을 수 있는 사회는 안전함이 높아진다. 꼭 문을 잠글 필요가 없다. 과거 이 땅에 살았던 우리 조상들의 삶이 그랬다. 그들에게는 자물쇠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다 아는 사람들이었으니, 조심할 필요가 없었다.
 
아이들이 어딜 나가서 놀든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동네 사람들 모두가 그 아이들의 부모였다. 그래서 아이들이 나쁜 짓을 하기도 힘들었다. 따로 교육하지 않아도, 아이들의 인성은 알아서 생겨났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는 신뢰가 무너진 사회가 가진 모든 문제를 다 보여주고 있다.
 
신뢰가 무너진 사회가 가진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안전하지 못함에 대해 끝없이 느껴야 하는 두려움이다.
 
우리는 서로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 끝없이 두려움에 휩싸여서 살고 있으며, 그 만큼 안전함에 대한 강한 욕구를 느낀다. 그리고 아주 불필요할 정도로 걱정을 하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우리는 많은 거래에서 당연하게도 계약서라는 것을 쓴다. 사실 계약서는 신뢰가 부족함에 대한 상징이다. 과거에 우리는 이런 것을 잘 쓰지 않았다. 친구에게 돈을 빌려줄 때 차용증을 쓰는 일도 별로 없었다. 하지만 자꾸 빌려간 돈을 떼먹는 사람들이 생겨나자, 이젠 차용증을 쓰지 않는 사람은 바보가 되었다.
 
이 말은 계약서를 쓰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사실은 생각보다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집문서도 그렇다. 모두 믿을 수 있다면 그 집이 내 집이라는 증명서가 왜 필요할까?
 
신뢰가 부족한 사회는 자꾸 뭔가 비용이 늘어난다. 모든 거래를 할 때마다 필요한 서류가 한가득이 된다. 사람들은 이 서류들을 준비하면서 짜증을 내지만, 왜 이렇게 서류가 많아졌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 사회를 구성하는 우리 모두가 만들어 낸 결과물일 뿐이다.
 
우리는 더 튼튼한 열쇠를 찾지, 왜 우리가 이렇게 더 튼튼한 열쇠를 찾아야 하는지를 고민하지 않는다. 우리는 더 많은 CCTV를 달고, 안전을 위해서 경비를 고용하려고만 하지, 왜 우리가 그런 감시 카메라를 달고, 경비원을 고용해야 하는지를 고민하지 않는다.
 
신뢰가 부족해서 두려움이 만연한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오직 담을 높이고 더 강한 대문을 만들 뿐이다.
 
그런데 더 슬픈 일은 이 증상은 단지 물리적인 현상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신뢰를 잃은 우리는 지금 심리적으로도 더 높은 벽을 만들고 다른 사람이 들어올 수 있는 문을 더 굳게 닫고 있다. 우리는 점점 가족 이외엔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늘고 있다. 사람과 사람 관계에서 큰 의미가 있었던 가치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의심받고 있다.
 
우리는 그래서 점점 더 고립되고 있다. 그리고 고립된 공간엔 오직 핏줄로 이어진 관계만이 가치로 남아 있다.
 
하지만 원래 우리는 이런 삶을 원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점점 더 외로워지고 점점 더 불안해지고 있지만, 모두가 점점 더 신뢰를 잃고 있기 때문에 나 혼자 담을 허물고 문을 없앨 수가 없다.
 
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서로가 높게 짓은 담을 허물고 나와서 편안하게 지내는 것을 알면서도 그 누구도 먼저 그것을 시도하려고 하지 못한다. 설령 그것을 시도한 사람들은 세상의 쓴 맛을 제대로 보고는 상처입고 숨어 버린다.
 
그리고 다른 이들은 그들의 실패하는 모습을 보면서 오늘도 더 높은 담을 쌓기 위해서 노력하고, 서로에게 더 높은 벽을 쌓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또한 자신이 쌓은 높은 벽을 자랑하기도 한다.
 
그래서 담은 높아지고 문은 단단해졌지만, 피할 수 없는 한 가지 문제가 남는다. 그것은 바로 외로움이다. 고립은 안전하지만 우리를 심심하고 외롭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전자기기를 통해 서로에게 연락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서로 만나지 않아도 되니 안전하다. 그리고 이동할 때 경비도 안 들고 시간과 장소에 영향을 받지 않으니 금상첨화가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가 서로 손을 잡고 어깨를 부대끼던 그 시절은 재현이 불가능하다. 스마트폰은 아무리 노력해도 시각과 청각만을 만족시킬 뿐이다. 우리를 진짜로 안정감 있게 해주는 촉각을 느끼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원래 서로 안아주고, 보듬어주고, 어깨를 두드려주면서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슬퍼하는 이들의 등 짝을 한대 쳐주고, 우리는 손바닥을 마주치며 눈빛을 교환해야 한다.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눈빛 하나와 동작 하나만으로 그 사람이 느끼는 모든 것이 하나도 빠짐없이 전달되어 온다.
 
그런데 아무리 빠른 네트워크 속도와 아무리 뛰어난 성능을 가진 컴퓨터도 이것을 전달해주기란 불가능하다.
 
우리는 그래서 이젠 미각과 후각에 매달린다. 음식은 신뢰를 할 대상이 아니다. 음식은 그냥 맛보면 된다. 그리고 우리를 행복하게도 해준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시각, 청각, 후각, 미각의 네 감각을 만족시켰다.
 
하지만 이 네 가지 감각은 모두 즐거움과 관련된 감각들이다. 우리가 느끼는 본질적 안전함은 바로 촉각으로부터 온다. 모든 감각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 아이는 오직 어머니 품에서만 잠을 잔다.
 
우리는 그것을 흉내 내어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부드러운 담요를 덮고 그 상황을 재현하려고 한다. 이것이 좋긴 하다. 하지만 온전히 재현은 안 된다.
 
우리 몸은 아직도 어린 시절의 엄마 품 속의 행복을 기억하고 있다.
 
우리는 요즘도 매일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 그래서 남을 잘 믿지 않는 사람일수록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들로 떠받들어진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그들을 닮아 가려고 애를 쓴다. 우리는 가능하다면 계약서를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우리는 사기꾼을 잘 구분하고 속지 않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왜 이런 사회에 살아가야 하는지를 스스로 되묻지 않는다. 우리는 너무도 오랜 시간 동안 서로 믿을 수 없는 사회에 속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생각조차 하려고 하지 않는다.
 
얼마 전 급한 환자를 싣고 병원으로 이송되고 있던 앰블런스를 막아서는 차량이 한 대 있었다. 그는 경광등을 켜고 급하게 달리고 있던 앰블런스를 막고는 당당하게 이렇게 말했다. 과거에 자신이 가짜로 경광등을 켜고 달리는 앰블런스를 적발한 적이 있다고 말이다. 그는 자칭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사람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어처구니 없는 행동에 분개하지만,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역시도 원래는 앰블런스가 경광등을 켜고 달려오면 길을 비켜줬을 사람이었을 것이다. 단지 그는 몇 번의 경험으로 인해 앰블런스에 대한 신뢰를 잃은 것이다.
 
물론 그가 잘했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이 사건은 우리 사회가 잃은 신뢰가 과연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총기를 자율화 하지 않았기에 집에 총을 사두지는 않는다. 하지만 미국 사회는 그렇지 못하다. 그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총을 구입해둔다. 하지만 그 총은 언제든 우리 자신을 향할 수 있음을 생각하지 못한다.
 
우리 사회는 요즘 국산으로 만들었다는 그 모든 제품들에 대한 믿음이 없다. 우리는 이제 어딜 가서도 원산지에 대한 믿음도 없고, 어떤 제품의 가격에 대한 신뢰도 잃었다. 우리나라의 기업에 대한 신뢰도는 낮기로 유명하다. 우리 사회는 사람간의 신뢰, 기업 신뢰 모두가 바닥권이다.
 
우리는 이제 비싼 것만 믿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제 사기꾼들은 비싸게 사기를 친다.
 
신뢰를 잃은 사회일수록 자신이 아는 사람과만 거래를 하려고 한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 만났던 일단 관계를 맺으면 그들만 신뢰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사회는 점점 개인이 가진 능력이 아닌 관계 중심으로 흘러간다. 사원을 뽑거나 어떤 일을 맡길 때도 가장 우선시 되는 것이 능력이 아닌, 아는 사람이냐를 따진다.
 
하지만 그럴수록 사회는 공정성을 잃어간다. 그리고 공정성을 잃은 사회는 당연히 신뢰도가 하락한다. 그러자 이제 다양한 수저들이 순서를 지어서 이어진다. 그래서 금수저부터 흙수저까지 줄을 선다. 그리고 흙수저들은 금수저들의 세상에서 불만을 토로하지만, 이것이 모두 신뢰가 사라져서 나타난 문제임을 모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진 생각은 거기까지 미치지 못한다.
 
신뢰를 잃은 사회는 '지인' 이 최고의 가치가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특별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 다양한 모임에 참석을 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정말로 많은 모임이 존재한다. 그것은 동창회, 동문회, 부녀회, 운동 모임, 등산 모임 등등으로 나타난다. 사실 세 명만 모여도 모임의 이름이 정해지고 회비를 모은다.
 
그리고 이 수많은 모임은, 모임을 참가하는 사람들의 숫자와 모은 회비를 이용해 힘을 휘두른다. 그러니 더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고 더 많은 돈이 중요해진다. 하지만 사람이 많이 모일수록, 더 큰 돈이 운영될수록 모든 것이 썩는다.
 
이 모든 것이 신뢰의 부재가 가져 온 문제들이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신뢰가 부족해진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이미 이런 세상이니, 그 안에서 최대한 많은 모임에 참석하고, 최대한 자신의 안정과 이득을 얻어야 한다고 믿을 뿐이다.
 
더욱 슬픈 것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속해서 사는 사회는 신뢰의 임계지점을 넘어섰다. 이젠 그 어디에서 신뢰가 존재하지 못한다.
 
하지만 어떤 노력을 해도 우리는 점점 불안해지고 더 외롭고 그래서 결국 불행해질 것이다.
 
우리 각자의 목표는 그 안에서 최대한 덜 불행해지는 것일 것이다. 나만 당하지 않으면 된다고 믿고 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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