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사회

좋은 것, 나쁜 것

아이루다 2015. 2. 24. 17:49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 라는 제목을 가진 소설이 있었다. 여기에서 지킬 박사는 선의 상징으로, 하이드씨는 악의 상징으로써 동일 인물의 다른 인격을 표현했는데, 아마도 인간의 상반된 두 가지 면을 잘 그린 작품으로 알려져 있을 것이다.
 
또한 고대 중국에서는 인간의 본성을 성악설과 성선설로 설명하려고 했었다. 인간은 원래 악한 존재이니, 인과 예로써 교화를 시켜야 한다는 주장과, 인간은 원래 선한 존재라는 주장이었다.
 
사실 이 인간의 선한 면과 악한 면은 조금만 생각해봐도 그리 낯선 해석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그런 본성을 둘 모두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가 가진 본성은 이런 식으로 선과 악의 관점으로 반드시 나눠봐야 하는 것일까에 대한 생각이다.
 

사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바로, 우리가 선과 악을 규정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에 대한 의문 때문이다. 우리는 원래 남을 괴롭히기도 하고 남을 돕기도 하는 존재인데, 이런 행동 중에서 남을 돕는 것을 선한 것으로, 남을 괴롭히는 것을 악한 것으로 정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우리는 타고난 성향에 따라 남을 잘 돕기도 하고, 남을 잘 괴롭히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늘 그런 것은 아니다. 아무리 남을 잘 돕는 사람도, 자신의 목숨이 걸린 상황이 되면 상대를 괴롭게 하는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유괴를 당했다면, 도망치기 위해 유괴범을 칼로 찌른다든지 하는 행동을 말한다. 반대로 아무리 남을 괴롭히는 사람도 자신의 가족에게만큼은 잘한다.
 
그래서 우리들 모두는 이런 두 가지 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다. 그런데 왜 우리는 한쪽은 악한 것, 다른 하나는 선한 것으로 여길까?
 
사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단 하나의 목적으로 위해 이루어진다. 그것은 우리가 생존하는 것이다. 유괴범에게서 도망치기 위해서 칼로 찌르는 것은 나쁜 짓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남을 괴롭히는 사람 역시도 그것을 통해 어떤 이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 설령 그것이 단지 우월감 충족과 같은 정신적인 만족감이라고 해도 - 그런 행동을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하는 행위를 선과 악으로 나눈다. 도둑질은 나쁜 짓이고, 남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는 것은 좋은 행동이라고 한다. 하지만 도둑질도 먹고 살기 위해서 한다. 그리고 남을 돕는 사람들 역시도 미래에 어느 날 자신이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를 한다. 물론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도 남을 괴롭히면서 만족감을 얻는 사람처럼 자신이 선한 존재라고 여길 수 있는 정신적 만족감을 위해서 한다.
 
왜 우리는 이렇게 나누었을까? 우리는 왜 믿음, 신뢰, 정의, 사랑, 옳음, 용기, 희생 등은 좋은 것이라고 하고, 배신, 악, 틀림, 증오, 비겁, 미움 등은 나쁜 것이라고 할까?  이런 것들은 원래 그런 것일까?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래 전 우리의 조상들이 살던 시대로 되돌아가 봐야 한다. 동굴이나 움막을 짓고 살던 시대로 말이다. 그리고 하나만 더 가정해보자. 우리 조상들이 그랬을리는 없지만, 가장 처음엔 혼자 살았었다고 생각해보자. 그때 어떤 일이 있었을까?

 

혼자 산다는 것은, 당연하게 어느 누구와도 이득을 두고 다툼을 벌일 필요가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 이것은 선과 악에 대한 개념 자체가 필요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사실, 우리가 좋은 것이라고 알고 있는 것이나, 나쁜 것이라고 알고 있는 것 모두가, 다른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개념이다. 상대가 없다면 신뢰나 배신도 없고, 상대가 없다면 사랑이나 미움도 없다. 상대가 없다면 정의도 악도 없는 것이다. 그나마 혼자 있는데도 불구하고 선과 악을 구분하자면, 자신에게 이로우면 선, 해로우면 악이 되어야 한다.

 

그 후 우리의 조상은 좀 더 안전함을 위해 무리를 지어 살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 명이 두 명이 되는 순간엔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가 시작한다. 그것은 단지 숫자 하나가 더 느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이며, 우리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할 수 있는 환경이 형성된 것이다. 물론 초기의 우리 조상들의 무리 생활은 매우 소규모 단위였고, 거의 가족 단위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래서 그때도 역시 어느 정도 무리 전체에게 적용되는 규칙이란 것이 있었겠지만, 사실 그것은 매우 불규칙했고 상황에 따라 임의대로 적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냥 무리의 대표가 그때 그때 자신의 판단으로 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살던 우리의 조상들은 점점 더 뭉쳐서 사는 사회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서로의 이득을 추구하는 본능이 잦은 충돌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하지만 혼자를 벗어나 무리를 짓고, 그것이 점점 커질수록 자신에게 이로운 것은 선이고, 자신에게 불리한 것은 악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큰 문제를 갖게 된다. 이것은 당연하게도, 원래는 자신에게 이로우면 선이어야 하지만, 더이상 자신에게 이로운 것은 선으로만 여겨지지는 않게 된 것이다. 그것은 보통 다른 인간에게는 손해가 되는 경우가 되기 때문이다. 길가에 있는 흔한 사과를 따서 먹는 것은 자신에게는 이롭지만, 그 사과를 먹음으로써 다른 이들이 사과를 먹을 기회를 뺏을 수 있다.
 
거기에 더해서 사유재산 제도가 점차 정착되면서, 이득을 두고 서로 싸우는 행동은 점점 더 심해졌을 것이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살면서, 서로 각자 이득을 추구하게 되면 당연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어떤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공동으로 지켜야 할 규약, 즉 나중에 법이라고 불리는 것이 된다.
 
하지만 이런 규약이나 법은 사후 약방문 성격이 강했다. 즉, 문제가 터지고 나서 수습하는 용도이지, 그 일 자체가 만들어지지 않게 하는 역할은 하지 못한 것이다. 물론 강한 법 적용은 사회의 안정성을 좀 더 높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둑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범죄 자체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방법론이 필요했다, 그것은 바로 어떻게 하면 우리가 좀 더 잘 어울려 살 수 있는지에 고민이었는데, 여기에서 인간의 다양한 행동을 정의하기 시작한 것이다. 부모가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은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는 매우 좋은 것이다. 그래서 이런 행동은 선한 것으로 정의했다. 반대로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은 한쪽은 이득을 얻을 수 있지만, 다른 한쪽은 손해를 보기 때문에 싸움이 날 수 있어서, 악한 것으로 정의했다.
 
적이 쳐들어오면, 숨거나 도망치기 보다는 나서서 싸워야 하는 것이 낫기 때문에, 용기는 비겁함보다 좋은 것이 되었다. 남을 돕는 것은 남을 괴롭히는 것보다 더 사회를 유지시키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각각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정의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선과 악으로 나뉜 행동들은 지속적으로 다양한 경로의 교육을 통해서 인간들 전체에게 퍼졌다. 그 결과로 우리는 지금 좋은 것과 나쁜 것, 선과 악을 구분하게 된 것이다. 물론 중간에 다양한 일이 있었다. 철학과 종교가 이것을 좀 더 체계적으로 도덕이란 학문으로 만들었고, 뛰어난 사회 과학자들은 이것을 좀 더 이론화 시켰다. 그리고 우리는 현재 자본주의나 공산주의 혹은 교조주의나 민주주의 같은 서로 반대가 되는 사회 이론들을 갖게 되었다.
 
물론 이런 과정이 오기까지, 전제 군주주의 나 독재 혹은 전체주의와 같은 것들도 있었다. 하지만 인간의 문명이 발달하고, 다양한 형태의 지식 교류가 가능해지면서 우리는 점점 더 우리 전체를 위해 어떤 형태의 제도가 더 나은지를 구분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어느 정도는 선택이 가능하게 되었다.
 
결국 인간에게 있어서 선과 악은, 전체에 도움이 되면 선이며, 전체에 해가 되면 악이 된다. 이것은 우리가 무리를 지어 살지만, 그 안에서 서로 각자의 이득을 추구하기 때문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기도 했던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것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면, 현재도 우리는 초기 우리의 조상처럼 소수의 무리로써 살았을 것이다. 해야 하는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정확히 구분이 안 되고, 그것을 어긴 사람들에게 어떤 강한 응징이 가해지지 않았다면, 우리가 지금과 같은 국가나 사회를 이룩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우리와 비슷하게 무리를 지어 살지만, 전혀 다른 형태의 습성을 보여주는 생명체들이 있다. 그것은 바로 벌이나 개미와 같은 종인데, 그들은 모두 하나의 어미로부터 탄생한 후, 전체를 위해 무조건적인 희생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의 이런 모습은 사실 인간의 입장으로 보면 놀랍기 그지 없지만, 그들 역시도 같은 어미에서 나온 존재들을 위해서만 그럴 뿐이다. 만약 같은 종의 개미나 벌이라고 해도, 다른 어미에서 나온 개체들끼리는 서로 죽이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이런 원리로 정의된 선과 악이지만, 사리판단이 불가능한 어린 시절부터 끝없이 이것에 대해 주입을 받은 우리들은 이젠 그것을 절대적 의미로 해석한다. 즉, 우리는 이젠 선과 악을 양립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바라보고, 선은 지키고 악은 응징을 해야 한다고 믿고 사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인간 사회 발달 역사 속에서 선과 앆이 어떤 식으로 정의되었는지를 이해하면, 우리가 이룬 사회를 위해 정의된 선과 악은 이렇게 절대적인 관점으로 바라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란 점을 알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오랜 인간의 지혜이다. 이것이 없었다면, 현재 인간이 이룬 문명도 없었을 것이다. 단지, 지금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그토록 신념을 가지고 믿어 의심치 않는 정의, 옳음, 상식 등의 개념은 필수적인 것이지 절대적인 것이 아니란 뜻이다.
 
그리고 당연히 이런 절대적 시점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을 수 밖에 없다. 자신은 옳고 남은 그르다는 태도를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선과 악에 대한 잠재적으로 갈등을 가지고 있을 수 밖에 없다. 서로에게 선과 악은 모두 다르게 정의되기 때문이다. 원래 우리 스스로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것이 충돌이 날 때, 자신이 선 자리에서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다.
 
사실 여기에서 물러서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할 일이기도 하다. 적국이 쳐들어왔을 때, 나도 옳고 너도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래서 그때는 그냥 싸워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것은 정의를 실현하거나 옳은 것을 추종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가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기 목숨이 귀한 사람들은 그것만으로는 잘 싸우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린 자꾸 다른 가치를 만들어서 싸울 것을 주문한다. 그것이 애국심이며 희생 정신이다. 그리고 그런 용기를 낸 후 희생된 사람들은 귀한 대접을 해서 미래의 세대를 위한 교훈으로 삼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좋은 것이다. 국가간에 전쟁이 나면, 그 나라에 속한 국민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싸워야 한다. 단, 국가가 아닌 자신을 위해 싸워야 한다. 여기에서 국가를 위해 싸운다고 마음 먹는 순간, 우리는 광신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선이라고 아는 모든 가치는 필요성을 가졌을 뿐이다. 사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살면 그 자신도 행복하고 같이 사는 이웃도 행복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가치들을 신념화 시키는 순간 광기가 드러난다. 개인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개미나 벌이 아니다.
 
그리고 광기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타협이란 있을 수 없으며, 양립은 절대로 안 되는 것이 된다. 악은 응징해야 하며, 선은 무조건 옳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쉽게 해결될 갈등이 서로의 입장 고수로 인해서 무한대로 어려워지게 된다. 길을 갈 때, 서로 같은 선상으로 마주 오게 되면,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비켜서서 지나가면 되는데, 오른쪽 통행이 절대적 진리라고 믿게 되면, 상대가 실수로 왼쪽으로 오는 순간 부딪혀 버리는 것이다.
 
또한 공리주의나 개인주의 기타 여러 가지 인간 사회 시스템을 정의하는 많은 이론들 역시 우리가 어떻게 하면 같이 잘 살 수 있는지를 목적으로 한 것들일 뿐이다. 이것은 선택 가능한 것이며, 더 효율적이거나 더 신뢰성 있는 것에 대한 판단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 속한 체제에 대해 의심 없는 신뢰를 보낸다. 그래서 공산주의에 태어난 이들은 공산주의를 신봉하고, 자본주의에 태어난 이들은 자본주의를 신봉한다.
 
하지만 이 둘 모두 공통으로 자신이 잘 살기 위해서 살고 있을 뿐이다. 단지 어느 시스템을 가진 나라에서 태어났는지 만 우연히 결정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만약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이 한몸 헌신하겠다는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타고난 거짓말쟁이라고 보면 된다. 이것은 처음부터 말이 안 된다. 그나마 이것이 맞는 소리가 되려면, 개인의 이득이 국가의 이득으로 이어지는 경우일 뿐이다. 아니면 더 이상 이득을 추구할 필요가 없을만큼 충분히 가졌거나 말이다.
 
인간은 몇 천 년의 역사 속에서 문명을 발전시켜 오면서, 나름대로의 집단 지능 능력을 발휘했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일어난 수 많은 싸움과 전투 그리고 전쟁과 학살을 경험하면서 그것을 하나 하나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더 잘 살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계기로 삼았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갈등을 최대한 일으키지 않는 방법과 전쟁을 최대한 억제할 수 있는 원리를 피와 눈물로써 익혔다. 그리고 그 결과가 현재까지의 상태이다. 지금은 거의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정보의 공유를 통해 우리는 좀 더 우리를 더 안전하게 다 같이 살 수 있도록 만들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정의한 선과 악이 우리가 믿고 싶은 것처럼 그런 가치는 아니란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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