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사회

현실 이야기

아이루다 2014. 11. 3. 08:56

 
행복하거나 혹은 정의롭거나.
 
아마도 사람들이 그냥 쉽게 시간 때우기 용도가 아닌, 무엇인가를 느끼기 위해 보는 영화나 드라마라면 보통 그것들의 주제 범위는 몇 가지로 한정되어 있다.
 
그리고 그 중에 다수를 차지하는 것이 바로 행복하거나 정의롭거나 이다.
 
우리는 타인의 행복을 보면서 행복을 느끼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의지적이고 착한 주인공이 갖은 역경을 모두 이겨내면서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향해 나가 결국 꿈을 이루어내는 이야기나, 혹은 불의에 굴복하지 않는 영웅적인 인물이 세상의 모든 편견과 관습과 싸우며 자신의 삶보다는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삶의 모습은, 보는 관객이나 시청자에게 깊은 감동을 주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두 주제는 진지하게 다뤄지긴 하지만, 뭔가 좀 영역이 다르다. 그것은 바로 하나는 인간의 행복을 다루고 하나는 인간의 정의로움을 다루기에, 행복보다는 씁쓸한 현실을 다루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비극도 많이 등장한다.
 
물론 행복을 다루는 영화나 드라마 역시도 그 안에 슬픔이 보통 존재한다. 우리가 표현하는 감동이란 단어는 슬픔과 기쁨을 동시에 느낄 때 가장 강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나리오 작가들은 이것을 놓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감정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웃으면서 극장을 나서거나 혹은 묵직한 마음으로 극장을 나서게 된다. 둘은 완전히 다른 감정임에도 불구하고 우린 무엇인가 진지해져 있다.
 
그런데 이 주제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현실 세계의 상태와 꽤나 관련이 깊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의 문제가 좀 심각하다고 생각되면 정의를 말하는 작품들에 많은 나오고, 세상이 좀 더 살만해지면 행복해지는 이야기에 더 많이 나온다. 그리고 관객들 역시도 비슷한 성향을 보인다.
 
그러니까 그 사회의 건강함을 보려면 최근에 회자되는 영화들이나 드라마 주제들만 관찰해도 어느 정도 판별이 된다. 쉽게 말해서 요즘은 영화, 드라마뿐만 아니라 개그 프로에서 만화에 이르기까지 사회 부조리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냥 재미있어야 할 것들이 사회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아니, 원래는 늘 다루고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해서 금새 없어져야 할 것들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여기에 대해서 딱히 어떤 것을 판단하지는 않겠다. 그거야 모두 각자 받아들이고 이해 할 영역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한 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있다.
 
우리가 각종 영화와 드라마와 같은 창작물을 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대리만족 심리이다. 특히나 정의로움에 대한 이야기는 마치 홍길동전을 보는 것과 하나도 다름이 없다. 우린 늘 어디선가 영웅이 나타나 이 부조리한 세상을 응징해주길 바란다.
 
그러니 영웅들 이야기가 더 많이 회자될수록 세상은 그만큼 더 힘들다는 뜻이다.
 
우리가 충분히 행복하다면, 아마도 많은 이들은 정의로운 것을 다룬 영화보다 아름다운 사랑을 하는 영화를 더 선호하게 될 것이다. 우린 자신이 행복할 땐, 남들도 행복하고 그래서 세상이 아름답길 바란다. 이런 세상에서 창작자들은 사람들이 보고 싶어하는 것을 보여 주려고 한다. 즉, 이 세상이 아름답고 행복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일종의 집단 최면이지만, 확실한 효과를 가지고 있다.
 
비슷한 원리로, 경험이 부족하여 세상이 두려운 아이들은 아름답고 행복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어둡고 현실적인 이야기를 들으면 울음을 터뜨리게 된다. 그래서 만화나 애니메이션은 늘 화려하고, 아름답고, 행복하게 결말이 난다. 자신이 본 세상이 행복하다면 현실의 자신도 안전하고 행복할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그리 행복하지 않다면, 많은 이들이 왜 우리가 행복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 이유를 추적하면서 원인을 알게 되고, 이것을 타인들에게 전파한다. 그러다 보면 많은 이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고 그 중에서 영화나 드라마를 만들 의도를 가진 이들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것을 본 사람들은 깊은 공감과 함께 대리만족을 느낀다.
 
또한 사람들은 잘 만들어진 작품을 보면서 열광하기도 한다. 좋은 시나리오와 능력있는 연출자가 만난 극은 영화나 TV 속 드라마를 통해 사람들에게 크게 영감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작품은 일종의 추종자를 만들어 내는 현상도 가져 온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자각해야 할 우리 자신의 모습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무엇을 보길 원하는 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행복한 사람은 행복한 세상을 보길 바란다. 그들은 뒷골목의 더럽고 지저분하며 비위생적이고 굶주린 사람들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정의로움을 갈망하는 사람은 자신이 소비하는 많은 문화적 창작물을 통해 정의로움을 바라봄으로써 자신이 정의롭게 산다고 믿고 싶어한다. 하지만 이 역시도 다른 형태의 행복일 뿐이다.

 

그것은 자신이 정의롭게 살려고 애쓴다는 행복감이다. 남들에게 관심 없고 자신의 이득만 취하려고 하는 사람들과 달리 자신은 좀 더 넓은 범위의 이득에 관심을 가지고 공정하고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은 한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그 착각과 달리 현실 속 세상에서는 정말로 정직하고 공정하게 사는 것이 대단한 능력을 가진 자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설령 최고의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고 해도 사실상 힘들다. 이 세상은 온통 부정직함과 비 공정함이 가득한데 그곳에서 자기 혼자서 투명하고 깨끗한 삶을 살려고 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혼자서도 충분히 밥벌이가 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즉, 뛰어난 자기 능력을 가진 자만이 그렇게 살 수 있다. 물론 능력이 안되어도 가능한 길도 있다. 그것은 바로 욕심을 버리고 정말로 많은 것을 버리고 혼자 사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타고나거나 대단한 결심을 하지 않는 이상은 힘들다.
 
그래서 현실 속 우리는 상황이 가능할 때만 정직하고 공정하다. 우리 인간이 원래 그렇다. 그런데 우린 다른 이들에겐 원칙적인 정의로움과 공정함을 기대하면서 그 자신은 상황이 되면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를 합리화 한다. 이런 과정은 놀랍도록 자연스럽다.
 
우리는 배가 부를 때 남을 것을 훔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정말로 배가 고프면 남의 것을 빼앗게 된다. 우리가 아무리 문명권에 오래 머물러도 절대로 없앨 수 없는 본능이다. 우리의 거의 대부분은 절대로 생존을 양보할 수 없다. 

 
현실적으로 현재 정의로움과 공정함에 대해 말하는 이들은 일단 그런 말과 행동을 해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사람들이다. 즉, 자신이 먹고 살 수 있는 기반이 충분하며 그런 말을 해도 생계에 큰 영향이 미치지 않는 사람들이다. 또한 사회적으로도 그런 역할을 맡아야 할 의무도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교수, 작가, 평론가, 언론인, 예술가들이다. 자신의 개인 능력으로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으며, 정도만 지나치지 않는다면 사회의 양심을 지키는 역할로 원래 그런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평범하게 회사를 다니는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 정직함과 공정함은 진급할 기회를 뺏기고 가족의 생계를 위협받게 만드는 성향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먹고 사는 일은 빼놓고 정직하고 공정하다. 설령 거대 기업의 회장이라고 해도 말 한마디 잘못 했다가는 자신이 경영하는 기업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세상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에게 사회 문제, 정치 문제는 심각한 토론 주제이기도 하지만, 오늘 하루를 살게 해주는 지적 유희가 되기도 한다. 즉, 많은 이들이 사회 문제에 대한 의견을 주고 받으면서 스트레스를 풀고 그 덕분에 작은 행복을 느낀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덕담을 건내며 스스로를 뭔가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고 믿는다.
 
물론 먹고 사는 일이 걸리면 거기에서 멈추지만 말이다.
 
요즘과 같이 SNS가 발달된 사회에서 이런 이들이 만들어 내는 수 많은 정의로움에 대한 결의와 그리고 부조리에 대한 분노의 글은 넘쳐난다. 하지만 그런 글을 생산해내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와 같이 모두 그것이 자신이 하면 기분이 좋기 때문에 한다.
 
물론 그것이라도 하니 다행이다 싶다. 하지만 우리는 딱 거기에 머무른다. 그리고 자신의 생계나 가족의 미래가 달린 문제가 되면 급히 멈춘다. 그럼에도 우리들 대부분은 자신의 남다른 생각과 역할을 느끼면서 그렇지 못한 일명 '어리석은 다른 국민' 을 한없이 나무란다.

 

또한 우리 사회는 정의로움과 공정함을 실제로 실천하는 조직의 비리를 고발하는 제보자를 용서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런 사람이 다른 조직에서 나오면 박수를 보내지만,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나와 그 조직이 심각한 조사를 받아 임금이 줄거나 심지어 그 조직 자체가 망할 경우에는 박수를 보내지 않는다.

 

그 후 일이라도 잘 풀려서 다른 직장에서 일을 할 수 있다면 그나마 유지되겠지만, 그때 삶이 꼬여서 생계에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면, 이젠 생각이 바뀌어서 그 제보자를 평생 욕하고 살게 된다.
 
나는, 당신은, 우리는 그렇지 않을 것 같은가?
 
우리는 모두 자신이 있는 위치에서 감당할 만큼만 정의롭고 공정할 뿐이다.
 
폐지를 주어 파는 노인에게 사회의 정의는 정말로 '개 풀 뜯어 먹는 소리' 일 뿐이다. 가장 사회의 밑바닥에서 자신에 대한 사회의 의무를 주장해야 할 당사자들에게는 그 소리는 웃기는 소리란 뜻이다. 이런 분들에게 민주주의의 정의와 공정한 사회에 소속된 구성원으로써 의무는 백날 떠들어 봐야 박스 한 장의 가치도 없다.

 

그렇지만 자칭 정의롭고 공정하게 살려고 하는 이들은 이런 노인들의 무관심과 어리석음을 끝없이 비난한다.
 
어떤 큰 문제가 앞으로 닥쳐올 가능성이 높아질 때, 이것을 경고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런데 그 문제가 실제로 닥쳤을 때 '내가 그럴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냐고' 큰 소리 치는 사람보다는, 조용히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 시스템이 이렇게 점점 망가지면 분명히 언젠간 무너질 될 것이다. 인간이 가진 탐욕은 늘 그렇게 흥망성쇠를 반복하게 해왔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이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이 역사의 일부이며 반드시 가야 할 길이기도 하다.
 
냉정히 말하면 우리가 망하든 말든, 인간 전체가 멸종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자신의 유전자를 미래에 전달하려 애쓰고, 자신이 속한 인류라는 종이 영속하길 바라는 것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터무니 없는 욕망이란 말인가?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하는데 그 말은 정답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보수는 끝없이 부패하고 있고, 진보는 끝없이 분열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미래의 희망은 거의 없다. 지금 미래를 걱정하고 떠드는 많은 진보는 그저 자신이 좀 더 잘나고 싶고, 자신의 양심을 좀 더 편하게 하고 싶은 것이다. 자칭 보수들은 미래에 대한 걱정이야 자기 한 몸만 잘 건사하면 된다고 믿으니 더 이상 언급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희망은 있다. 그것은 바로 이런 잘못된 것들은 반드시 무너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무너짐은 힘든 고통을 수반하겠지만, 결국 그 고통을 통해서 우리가 잃은 것을 찾게 될 것이다.
 
우리가 부러워하는 서유럽의 가치관은 모두 피를 통해 얻어낸 것이다. 결코 그들이 잘나서 얻은 것이 아니라 힘든 과거의 고통을 통해 얻은 것인 것이다.
 
우리도 그런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진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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